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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9 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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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 논설위원장
곽재원 논설위원장 kjwon54@gmail.com
  • - 아주경제 수석논설위원
    - 가천대 교수
    - 前 중앙일보 경제연구소 소장
  • [곽재원의 Now&Future] 이대통령, 중도실용주의를 '한국형 제3의 길 2.0'으로 구체화 할때  

    영국 정치권에는 요즘 하나의 흥미로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당의 차세대 지도자로 꼽히는 웨스 스트리팅 전 보건장관이 파이낸셜타임스(6월13일자)에 기고한 '진보적 자본주의(Progressive Capitalism)'가 그 출발점이다. 그의 주장은 의외로 단순하다. "부를 나누기 전에 먼저 부를 만들어야 한다." 진보정치가 성장보다 분배를 우선하는 시대는 끝나고 있으며, 이제는 기업과 시장을 혁신의 파트너로 삼아 새로운 성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성과는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진보적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이 글이 영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단순히 경제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AI 혁명과 저성장 시대를 맞아 진보정치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는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선언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 한국 역시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한국이 처한 현실은 영국과 다르다. 영국의 고민이 성장의 부족이라면, 한국의 고민은 성장의 분리다. 최근 한국 경제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와 조선, 방산, AI 산업은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와 수주를 이어가고 있다. 첨단기업들의 실적은 개선되고 주식시장도 강세를 이어간다. 국가 전체로 보면 성장의 동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청년들은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지방은 인구 감소와 산업 공동화를 걱정한다. 노인 빈곤은 여전히 심각한 사회문제로 남아 있다. 건설과 내수경제는 장기 침체의 부담을 안고 있다. 같은 나라 안에 서로 다른 두 개의 경제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른바 'K자형 경제'다. K의 위쪽에는 AI와 반도체, 첨단 제조업, 방산, 금융시장이 있다. 아래쪽에는 청년, 지방, 자영업, 노인, 침체된 내수가 있다. 한국의 과제는 성장 자체가 아니라 이 두 경제를 어떻게 연결할 것 인가에 있다. 이 점에서 영국 노동당의 진보적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그러나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다. 한국은 영국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적 전환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최근 정부가 보여주는 정책 방향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대통령 취임 이후 주요 연설과 공개 발언의 핵심 키워드를 정리해 보았다. AI, 성장, 민생, 혁신, 국민, 통합, 실용, 미래와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물론 워드 클라우드만으로 통치철학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 드러난 방향은 이념보다 문제 해결을 앞세우는 '중도 실용주의'라는 하나의 축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과제가 남는다. 중도 실용주의는 훌륭한 통치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태도만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통치의 태도는 국가철학으로 발전해야 하고, 국가철학은 경제모델로 구체화되어야 하며, 경제 모델은 다시 국민이 체감하는 정책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한국형 제3의 길 2.0'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생겨난다. 1990년대 토니 블레어가 제시했던 제3의 길은 시장경제와 복지국가를 화해시키려는 시도였다. 당시 영국의 과제는 신자유주의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AI 시대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AI는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인 동시에 자본과 데이터, 알고리즘의 가치를 폭발적으로 키우는 기술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국가는 단순히 성장과 분배를 조정하는 수준을 넘어 AI가 만들어내는 생산성을 어떻게 사회 전체의 기회로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한국형 제3의 길 2.0'은 영국과 다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핵심은 '생산성 공유국가(Productivity Sharing State)'다. 이는 부를 단순히 재분배하는 국가가 아니다. AI가 만들어내는 생산성 자체를 국민 모두가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국가다. AI 제조혁신이 중소기업으로 확산되고, AI 의료가 지방의 의료격차를 줄이며, AI 교육이 지역의 교육기회를 넓히고, AI 행정이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국가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것보다 성장의 원천을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역균형발전 역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지역은 더 이상 지원의 대상만이 아니다. AI 생산성을 실증하고 확산시키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광주·전남 통합이나 AI 실증지역 구상은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때 비로소 국가전략으로 연결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역에 예산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 새로운 생산성을 창출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야 K자형 경제의 두 갈래가 다시 하나의 성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 AI 시대의 정치는 성장과 분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정치가 아니다. 성장을 통해 포용을 가능하게 하고, 포용을 통해 성장을 지속시키는 선순환을 만드는 정치다. 그것이 영국이 말하는 진보적 자본주의를 넘어 한국이 만들어야 할 새로운 국가모델일 것이다. 20세기 영국의 제3의 길은 시장경제와 복지국가를 화해시키려 했다. 21세기 한국이 직면한 과제는 조금 다르다. AI 혁명은 성장의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으며, 한국은 성장의 부족이 아니라 성장의 분리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 서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이념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운영체제다. 중도 실용주의는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적인 통치철학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AI 시대에 걸맞은 국가 비전으로 발전해야 한다. '한국형 제3의 길 2.0'은 바로 그 비전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 영국이 진보적 자본주의를 통해 저성장의 해법을 찾고 있다면, 한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AI가 만들어내는 생산성을 국민 모두의 기회로 연결하는 생산성 공유국가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AI 시대 '한국형 제3의 길 2.0'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그 길이 열린다면 중도 실용주의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AI 시대 한국의 새로운 국가 운영 철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이대통령,  중도실용주의를 한국형 제3의 길 2.0으로 구체화 할때    
  • [곽재원의 Now&Future] 김용범 어록으로 읽는 이재명노믹스의 철학과 리스크 

    정권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예산서를 읽는 것이다. 그러나 예산서는 결과물이다. 그보다 먼저 읽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그 정권의 경제사령탑이 사용하는 언어다. 언어는 철학을 담고, 철학은 정책을 낳는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1년 동안 경제정책의 언어를 가장 많이 생산한 인물은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었다. 정책실장은 장관도 아니고 선출직 정치인도 아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의 경제철학을 정책으로 번역하는 자리다. 시장은 그의 발언을 통해 정부의 의도를 읽고, 기업은 그의 말 속에서 미래의 정책 방향을 가늠한다. 지난 1년 동안 김용범 실장의 발언은 적지 않은 화제를 낳았다. 어떤 발언은 미래비전으로 평가받았고, 어떤 발언은 시장과 국민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그의 어록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재명 정부 경제정책의 철학과 리스크가 함께 보인다. 김용범 어록을 관통하는 공통된 문제의식은 비교적 명확하다. "성장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하며, 그 성과는 국민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이 명제는 많은 국민에게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동시에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우려를 안겨준다. 지난 1년 동안 논란이 된 세 가지 대표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첫 번째는 AI 국민배당금 논란이다. 김 실장은 AI 산업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초과이익과 초과세수를 국민 전체와 공유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았다. 그의 문제의식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AI는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앞으로 전기나 인터넷처럼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가 될 가능성이 높다. 국가가 대규모 재정을 투입해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전력망을 확충하며 인재를 육성한다면 그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자는 논리다. 찬성론자들은 이를 21세기형 사회계약으로 평가한다. 미국 알래스카주의 석유배당금, 노르웨이의 국부펀드처럼 AI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부를 미래세대와 국민 모두의 자산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AI 시대에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지만 소득과 자산은 일부 기업과 일부 계층에 집중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분배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유시장경제론자들은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들은 혁신의 핵심은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라고 본다. 성공했을 때 이익을 사회가 나누자고 한다면 실패했을 때 손실도 사회가 함께 부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기업의 성공을 국가가 일정 부분 회수하는 방식은 결국 투자 유인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AI 국민배당금은 혁신의 과실 공유라기보다 사실상의 준(準)횡재세 또는 국가개입 확대의 신호로 비친다. 두 번째 논란은 ‘3고는 성공의 비용’ 발언이다. 김 실장은 경제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 현상을 일정 부분 성공의 비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거시경제 관점에서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아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자금 수요가 증가하고 물가 압력이 생길 수 있다. 투자와 소비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금리도 상승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 들은 메시지는 달랐다. 당시 많은 가계는 주택담보대출 이자와 생활물가 상승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부가 말하는 거시경제적 낙관론과 국민이 체감하는 현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감이 존재했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정부가 경제를 설계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에 빠질 위험을 경고했다. 시장은 수많은 개인의 선택이 만들어내는 자생적 질서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성공의 비용’이라는 표현은 국민의 고통을 지나치게 추상화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경제는 숫자로 설명할 수 있지만 국민은 체감으로 판단한다. 성장률이 올라가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으면 국민은 성장을 실감하지 못한다. 이 논란은 정책의 방향보다 정책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준 사례다. 여기서 우리는 170여 년 전 산업혁명기의 영국으로 잠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찰스 디킨스는 소설 『힘든 시절』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묘사한다. 교사는 소녀 시시에게 ‘5천만 파운드를 가진 나라’를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그러자 시시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는다. "누가 그 돈을 가지고 있는지, 내 몫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면 그 나라가 부유한지 알 수 없어요." 산업혁명으로 세계 최강국이 되어가던 영국 사회를 향한 통렬한 질문이었다. 놀랍게도 이 장면은 오늘날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부는 성장률과 수출, 주가와 AI 투자 규모를 말한다. GDP는 증가하고 국가 경쟁력 순위도 올라간다. 정부는 AI 3대 강국을 이야기하고, 기업들은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첨단 반도체 투자를 발표한다. 그러나 국민은 다른 숫자를 본다. 마트 물가를 보고, 전세금을 계산하고, 대출이자를 걱정하며, 자녀의 취업 가능성을 생각한다. 정부가 보는 경제와 국민이 사는 경제 사이에 간극이 커질 때 ‘호경기’라는 발표는 오히려 냉소의 대상이 된다. 숫자로 측정되는 번영과 삶으로 체감되는 번영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AI 국민배당금 논란도, 3고는 성공의 비용 논란도 결국은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 성장의 과실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디킨스의 시시가 던진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국가가 부유해졌다는 사실만으로 국민이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은 GDP에 투표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투표한다. 세 번째는 최근 가장 큰 관심을 모은 보유세와 거래세 논쟁이다. 김 실장은 거래세를 낮추고 보유세를 정상화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경제학 교과서 관점에서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거래세는 시장 유동성을 위축시키고 자산 이동을 어렵게 만든다. 반면 보유세는 상대적으로 경제 왜곡 효과가 적다는 것이 주류 경제학의 설명이다. 실제로 많은 OECD 국가들이 거래세보다 보유세 중심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교과서보다 복잡하다. 한국 국민의 자산 대부분은 부동산에 묶여 있다. 특히 은퇴세대에게 주택은 단순한 투자자산이 아니라 노후생활의 안전판이다. 자유시장경제론자들은 이미 취득 과정에서 세금을 냈고 자산 형성 과정에서도 다양한 세금을 부담했는데 보유 자체에 추가적인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이중과세적 성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진보경제학자들은 토지와 주택은 공급이 제한된 공공적 성격의 자산인 만큼 적정 수준의 보유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결국 이 논쟁은 세금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의 역할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이다. 국가가 자산 증가의 과실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AI 국민배당금, 3고 논란, 보유세 논쟁이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철학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국가는 성장의 촉진자일 뿐 아니라 성장의 결과를 조정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지난 1년 동안 김용범 어록이 반복적으로 보여준 핵심 메시지다. 이 철학은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국가 역할을 모색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시장의 자율성과 기업의 투자 의욕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안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2년 차에 접어들었다. 여기서 대통령에게 한 가지 제언을 드리고 싶다. 이제 정부의 목표를 ‘AI 3대 강국’에서 ‘AI 생산성 강국’으로 한 단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AI 3대 강국은 기술력과 산업 규모 중심의 목표다. GPU를 얼마나 확보했는지,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건설했는지, AI 기업의 시가총액이 얼마나 되는지를 중시한다. 그러나 국민이 체감하는 국력은 그것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AI 생산성 강국은 AI가 실제 국민경제 곳곳에 스며들어 생산성을 높이는 나라를 의미한다. 제조업의 생산성이 올라가고, 병원의 진료 효율이 향상되며, 농업과 물류가 혁신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자가 AI를 활용해 수익을 높이는 나라다. 다시 말해 AI 강국은 기술을 많이 보유한 나라이고, AI 생산성 강국은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하는 나라다. 지금 세계는 AI 기술 경쟁에서 AI 활용 경쟁으로 넘어가고 있다. 미국이 AI를 만들고 중국이 AI를 확산시키고 있다면 한국은 AI를 활용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국가 모델을 만들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지원금이 아니라 DX(디지털 전환), AX(AI 전환), RX(로봇 전환)를 전 산업에 확산시키는 것이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 병원, 학교, 농어촌, 지방정부까지 AI 활용 능력을 갖추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생산성 혁명이다. 국민배당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소득의 증가이고, 보유세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자산 형성 기회의 확대이며, 성공의 비용보다 중요한 것은 성공의 체감이다. 경제정책은 결국 신뢰의 문제다. 김용범 실장의 지난 1년은 국가가 시장보다 조금 더 앞에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실험이었다. 앞으로의 1년은 시장과 국민이 그 비전에 얼마나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AI 시대의 승자는 가장 많은 기술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가장 많은 국민이 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나라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야말로 현 정부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AI 생산성 강국의 모습일 것이다. <표> 김용범 어록 일지 2025년 7월 “잠재성장률 추세 반전” — 성장국가 선언 2025년 8월 "AI 3대 강국" — 국가 AI 비전 제시 2025년 10월 "국익 중심 통상" — 경제안보형 통상전략 2026년 1월 "피크 코리아를 넘자" — 성장 낙관론 2026년 5월 "AI 국민배당금 검토" — 성장 과실 공유 논쟁 2026년 5월 "3고는 성공의 비용" — 거시경제와 민생 체감 충돌 2026년 6월 20일 "거래세 인하, 보유세 정상화" — 자산세 철학 논쟁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김용범 어록으로 읽는 이재명노믹스의 철학과 리스크 
  • [곽재원의 Now&Future] 환호와 항의 사이…국민은 미래를 묻고 있다

    요즘 서울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광장이 존재한다. 하나는 정치의 광장이다. 지방선거 과정에서 일부 지역의 투표용지 부족 논란을 계기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가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열흘 넘게 계속되고 있다. 사안에 대한 사실관계와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지 않은 청년들이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축제의 광장이다. 당초 큰 기대를 받지 못했던 월드컵 축구대회가 뜻밖의 열기를 불러일으키면서 서울시청 앞 광장은 다시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한국 대표팀의 선전이 이어지자 전국 곳곳에서 응원전이 펼쳐졌고, 사람들은 오랜만에 거리에서 함께 환호했다. 2002년 월드컵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겉으로 보면 두 광장은 완전히 다르다. 한쪽은 항의와 요구의 공간이고 다른 한쪽은 환호와 축제의 공간이다. 하나는 정치이고 하나는 스포츠다. 하나는 불만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두 광장은 의외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괜찮은가.” 정치의 광장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를 묻는다. 축제의 광장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여전히 함께 꿈꿀 수 있는 공동체인지를 확인한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두 광장 모두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려면 바로 이 두 개의 광장 심리를 읽어야 한다. 적절한 비유로 압력솥을 생각해 본다. 뚜껑 아래에서는 저출산과 고령화, 청년실업, 높은 주택가격, 국가적 규모의 가계부채, 세대갈등, 지역격차,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일자리 불안, 자산격차 확대 등 압력이 계속 쌓이고 있다. 하나하나도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들인데 이들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사회 내부에 긴장을 높이고 있다. 그런데 압력솥 바깥에서 보이는 숫자는 오히려 좋아 보인다. 수출은 증가하고 무역수지는 흑자를 기록한다. 증시는 상승하고 코스피는 새로운 고점을 향해 움직인다.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발표한다. 정부와 언론은 각종 경제지표의 개선을 이야기한다. 문제는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이 그 숫자들과 다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기 시작한다. “나라는 잘된다는데 왜 내 삶은 불안하지?” 거시경제와 체감경제의 간극이 드러나고 있음을 상징하는 구절이다. 국가 전체의 평균은 좋아지고 있는데 국민 개개인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현상이다. 최근 서울에서 동시에 나타난 두 개의 광장은 어쩌면 바로 이 압력솥 안에 쌓여가는 사회적 에너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분출되는 장면인지도 모른다. 청년들은 취업과 주거를 걱정한다. 중산층은 자녀 교육비와 노후를 걱정한다. 자영업자는 매출 감소와 부채를 걱정한다. 지방은 인구 감소와 산업 공동화를 걱정한다. 국가 전체의 숫자는 좋아지고 있는데 개인의 체감은 나아지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성장과 분배의 괴리, 자산시장과 실물경제의 괴리, 거시경제와 미시경제의 괴리로 설명한다. 이를 국민의 언어로 번역한 게 바로 ‘나라는 좋아진다는데 왜 내 삶은 불안한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어떤 정부도 성공하기 어렵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많은 국가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경제성장은 지속되는데 사회적 불만은 오히려 커지는 현상이다. 평균값은 상승하는데 시민들의 체감은 정반대로 움직이는 경우다. 지금 한국이 이러한 전환점에 서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전형적인 K자 구조를 보이고 있다. AI, 반도체, 금융, 수출 대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반면 자영업, 지방경제, 청년층, 일부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같은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경제가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다. 따라서 최근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을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나 스포츠 이벤트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강조하건대 정권 집회는 단순히 투표용지 문제만이 아니다. 청년세대가 느끼는 정치적 소외감과 미래 불안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월드컵 응원 역시 단순한 축구 열풍만이 아니다. 공동체적 자부심과 희망을 확인하려는 사회적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두 광장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래라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숫자의 경제에서 체감의 경제로 시선을 옮기는 일이다. 성장률도 중요하다. 수출도 중요하다. 주가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민이 체감하는 일자리, 소득, 주거, 교육, 지역경제, 사회적 이동성,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함께 개선되지 않으면 경제성장의 성과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바로 여기서 출범 2년 차를 맞은 이재명 정부의 과제가 등장한다. 이재명 정부는 이제 집권 첫해를 지나 두 번째 해로 들어가고 있다. 지난 1년이 방향을 설정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결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시기다. 정치적으로 보면 앞으로 약 2년은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드문 시간대다. 한국 정치에서 이런 시기는 흔치 않다. 선거가 다가오면 모든 정부는 단기 성과와 정치적 계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구조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존재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혁의 내용만큼이나 개혁을 추진할 체계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수많은 국가전략을 발표했다. AI 3대 강국, 첨단산업 육성, 저출산 대응, 지역균형발전, 우주항공 강국, 에너지 전환 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과제가 없다. 문제는 전략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략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AI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과제이고, 제조혁신은 산업통상부의 과제이며, 인재양성은 교육부의 과제이고, 지역발전은 국토교통부의 과제라는 식의 부처별 접근으로는 국가적 전환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오늘날의 도전은 하나의 부처가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침 국무총리 교체와 새로운 내각 구성이 논의되는 지금은 국정운영 체계를 재설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필자는 새 총리를 중심으로 한 ‘국가전환전략회의’ 설치를 제안하고 싶다. 이 회의는 단순한 부처 협의체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 생산능력과 국민 체감경제를 동시에 다루는 최고 수준의 전략조정기구가 되어야 한다. AI, 첨단제조업, 에너지, 금융, 인재, 지역균형발전, 저출산 대응을 하나의 국가전환 프로젝트로 묶어 관리해야 한다. 청년 일자리 문제는 교육개혁과 연결되어 있고, 교육개혁은 AI 산업전략과 연결되어 있으며, AI 산업전략은 전력과 에너지 정책으로 이어진다. 지역소멸 문제는 산업입지 정책과 연결되고, 산업입지 정책은 교통·주거·인재정책과 연결된다. 오늘날 국가가 직면한 문제는 서로 얽혀 있으며 개별 부처 단위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한국이 필요한 것은 개별 정책의 추가가 아니라 국가 전체를 하나의 지도 위에 올려놓고 바라볼 수 있는 통합 사령탑이다. 앞으로 2년은 선거가 없는 정치적 골든타임이다. 이 시간을 단순한 관리의 시간으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모델을 설계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정부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청년이다. 청년들은 한국의 미래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불안을 안고 있는 세대다. 일자리와 주거, 결혼과 출산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청년정책은 더 이상 복지정책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AI 시대의 교육, 창업, 기술훈련, 사회적 이동성을 포괄하는 국가전략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 과제는 AI와 산업전환이다. 우리는 AI를 단순한 디지털 기술로 보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AI는 전력망, 데이터센터, 반도체, 소프트웨어, 제조업, 국방, 교육, 의료를 모두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 인프라다. 과거 고속도로와 철도가 산업화를 이끌었다면 앞으로는 AI 인프라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할 것이다. 세 번째 과제는 사회적 신뢰 회복이다. 경제는 결국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 선거에 대한 신뢰, 정부에 대한 신뢰, 시장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경제지표가 좋아져도 국민은 불안해진다. 최근 두 개의 광장이 보여주는 것도 결국 신뢰의 문제다. 국민들은 정치의 광장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존중받기를 원한다. 축제의 광장에서는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원한다. 결국 국가 운영도 마찬가지다. 국민은 정부가 성장률 몇 퍼센트를 달성했는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안정되었는지는 기억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통계가 아니다. 더 많은 확신이다. 두 개의 광장이 보내는 신호는 단순하지 않다. 국민은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확신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 2년 차의 과제는 경제지표를 조금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국민이 다시 미래를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새 총리 체제와 함께 국가전환전략회의와 같은 강력한 통합 거버넌스를 구축해 AI 대전환, 산업혁신, 청년미래, 지역재생을 하나의 국가 프로젝트로 묶어낼 수 있다면 지금의 2년은 단순한 임기 중반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새로운 10년을 여는 출발점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숫자의 경제를 체감의 경제로 바꾸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금 대한민국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이며, 이재명 정부 2년 차의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환호와 항의 사이…국민은 미래를 묻고 있다
  • [곽재원의 Now&Future] 젠슨 황의 17일이 보여준 AI 세계지도

    지난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세계 기술업계의 시선은 대만과 한국에 집중됐다. 표면적으로는 대만에서 열린 COMPUTEX 2026과 엔비디아의 각종 신제품 발표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조금 더 큰 시각에서 보면 진짜 뉴스는 전시회가 아니었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의 이동 경로였다. 그는 5월 23일 대만에 도착해 6월 4일까지 약 13일간 머문 뒤 곧바로 한국으로 이동했다. 이후 한국에서 주요 기업 총수들과 연쇄 회동을 가진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모두 합치면 약 17일에 걸친 아시아 순방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글로벌 기업 CEO의 통상적인 해외 출장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 17일이 AI 시대 세계 경제의 새로운 지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산업혁명 시대에는 철도가 산업지도를 결정했다. 20세기에는 석유가 세계 경제의 혈액이었다. 그래서 호르무즈 해협과 말라카 해협 같은 전략적 요충지가 국제정치의 중심에 섰다. 그렇다면 AI 시대에는 무엇이 세계 경제의 새로운 혈관 역할을 할까. 답은 AI 공급망이다. 젠슨 황의 17일은 바로 그 AI 공급망을 따라 움직인 여정이었다. 그의 첫 번째 목적지는 대만이었다. 대만은 인구 2300만 명의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AI 산업에서는 사실상 세계 최대의 전략 요충지다. 엔비디아는 세계 최고의 AI 반도체 설계 기업이지만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지는 않는다. 최신 GPU 대부분은 TSMC가 제조한다. AI 서버는 폭스콘, 콴타컴퓨터, 위스트론 등 대만 기업들이 생산한다. 오늘날 AI 산업의 심장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지만, 그 심장이 실제로 뛰게 만드는 제조 역량은 대만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젠슨 황은 COMPUTEX 기조연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급망 경영진들과의 회동에 사용했다. 그는 TSMC의 웨이저자 CEO를 비롯해 폭스콘, 콴타컴퓨터, 에이서, 에이수스, MSI, 기가바이트 등 주요 기업들을 잇따라 만났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과거 세계 자동차산업의 중심에는 디트로이트가 있었다. 세계 금융산업의 중심에는 뉴욕이 있었다. 오늘날 AI 산업의 제조 중심에는 대만이 있다. 실제로 젠슨 황은 이번 방문에서 대만을 ‘AI 혁명의 진앙지’라고 표현했다. 그의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현재 세계가 사용하는 첨단 AI 반도체의 상당 부분은 대만을 거친다. 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서버 역시 대부분 대만 공급망을 통과한다. 생성형 AI 경쟁, AI 에이전트 경쟁, 피지컬 AI 경쟁의 출발점 역시 결국 대만의 생산능력이다. 이 때문에 최근 수년간 대만해협 문제가 세계 경제의 핵심 이슈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흔히 미중 패권경쟁의 문제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계 산업 공급망의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대만의 반도체 생산이 멈춘다면 미국도, 유럽도, 일본도, 한국도 동시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만은 이제 지정학적 의미의 해협을 넘어 경제안보적 의미의 'AI 대만해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대만 방문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젠슨 황의 메시지였다. 그는 GPU를 이야기하기보다 AI Factory를 이야기했다. 그는 AI를 단순한 소프트웨어 혁신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혁명 인프라라고 규정했다. 전기와 철도가 산업혁명기의 핵심 인프라였다면, 앞으로는 AI 데이터센터와 AI 팩토리가 새로운 국가 인프라가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엔비디아의 정체성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엔비디아는 반도체 기업이었다. 오늘날 엔비디아는 AI 산업체제 전체를 설계하는 기업이 되고 있다. 반도체, 데이터센터, 전력, 냉각시스템, 네트워크, 로봇, 자율주행, 디지털트윈을 하나의 거대한 산업 생태계로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만 일정을 마친 젠슨 황은 곧바로 한국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 방문을 단순한 고객사 관리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AI 공급망 관점에서 보면 한국 방문은 대만 방문 못지않게 중요했다. 만약 대만이 AI의 생산기지라면 한국은 AI의 기억장치 역할을 담당하는 나라다. 오늘날 AI 반도체 경쟁의 핵심은 HBM이다. GPU가 AI의 두뇌라면 HBM은 기억력이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도 기억력이 부족하면 성능을 발휘할 수 없다. 현재 AI 산업에서 HBM은 사실상 전략물자 수준의 중요성을 갖는다. 엔비디아가 세계 AI 시장을 주도하는 배경에도 한국 메모리 산업의 역할이 존재한다. 그래서 젠슨 황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경영진을 만났다. 차세대 HBM4와 HBM5, AI 데이터센터, 첨단 패키징, 차세대 메모리 기술이 주요 의제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번 한국 방문이 의미 있는 이유는 반도체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현대자동차, LG, 네이버 등 다양한 산업의 기업들과도 접촉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 엔비디아가 한국을 찾았을 때 관심사는 주로 반도체 공급망이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자동차, 제조업, 로봇, AI 서비스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이는 AI 산업의 무게중심이 생성형 AI에서 피지컬 AI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AI의 다음 전장은 채팅창 안이 아니다. 공장이다. 자동차다.물류창고다.발전소다. 항만이다. 로봇이다. 현실 세계 전체가 AI의 새로운 시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분야에서 한국은 독보적인 강점을 갖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강국이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조선, 철강, 전자산업, 로봇산업이 동시에 존재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AI가 현실 세계로 들어갈수록 한국 제조업의 전략적 가치는 오히려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젠슨 황이 한국에서 본 것은 단순한 고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AI가 현실 세계와 결합할 수 있는 거대한 실험장을 본 것이다. 필자는 이번 17일의 여정을 보며 하나의 삼각형을 떠올렸다. 미국-대만-한국으로 이어지는 AI 황금삼각형이다. 미국은 설계를 담당한다.대만은 생산을 담당한다. 한국은 메모리와 산업 응용을 담당한다. 오늘날 세계 AI 산업은 사실상 이 삼각축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중국도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고 유럽도 AI 주권을 강조하고 있으며 중동 역시 AI 강국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 AI 산업의 핵심 공급망은 미국·대만·한국이라는 삼각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AI를 더 이상 IT 산업의 한 분야로 보아서는 안 된다. AI는 이제 국가 기간산업이다. 도로와 철도, 공항과 항만이 국가 인프라였던 것처럼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GPU와 AI 네트워크도 국가 인프라가 되고 있다. 둘째, 메모리 강국에서 AI 산업 강국으로 진화해야 한다. HBM 공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 플랫폼, AI 서비스, AI 에이전트, 피지컬 AI 영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 셋째, 제조 AI와 피지컬 AI를 국가전략으로 추진해야 한다. 한국은 제조업이라는 강력한 기반을 이미 갖고 있다. 이 강점을 AI와 결합할 수 있다면 세계에서 가장 먼저 'AI 제조강국'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있다. 넷째, AI 공급망 관점에서 대만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대만은 생산의 허브이고 한국은 메모리와 산업 응용의 허브다. 양국은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운명공동체이기도 하다. 21세기 산업경쟁력의 상당 부분은 AI 공급망 협력 수준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젠슨 황의 17일은 단순한 기업인의 해외 출장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AI 시대의 새로운 실크로드를 보여준 여정이었다. 20세기 세계지도가 석유와 해상교역로를 중심으로 그려졌다면, 21세기 AI 시대의 세계지도는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전력과 AI 공급망을 중심으로 다시 그려지고 있다. 그 지도 위에서 대만은 생산의 관문이고 한국은 메모리와 제조혁신의 거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지도 속의 한 지점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지도를 함께 설계하는 국가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젠슨 황의 17일은 한국에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향후 5년, 어쩌면 향후 10년 한국 산업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젠슨 황의 17일이 보여준 AI 세계지도
  • [곽재원의 Now&Future] 젠슨 황 방한을 보는 눈… 격변하는 AI 반도체 생태계

    미국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4일부터 한국을 방문한다. 세계 주식시장과 반도체 산업을 리드하는 AI 칩 기업의 수장이 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를 외교적 이벤트나 투자 테마로만 보겠지만, 결코 그렇게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젠슨 황의 방한은 단순한 방문 사건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이 메모리 업계에 가져온 구조적 변화를 기술경제적 시각과 국가전략 차원에서 다시 점검해야 하는 신호다. 한국은 지금 매우 불편하지만 중요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세계 산업의 최전선에서는 이미 ‘얼마나 벌었는가’보다 ‘번 돈을 얼마나 과감하게 미래에 재투자하는가’가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기업 실적이 좋아졌다 하여 분배 논쟁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 노동의 정당한 몫을 논의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AI 시대의 산업경쟁은 그보다 훨씬 냉혹하다. 지금은 나눌 몫을 따지기 전에 다음 세대를 지탱할 기술과 생태계를 먼저 세워야 하는 시기다.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미국 빅테크다. 일본경제신문이 2026년 5월 31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아마존, 메타 등 미국 빅테크 4사의 2026년 1~3월 분기 영업현금흐름 합계는 1,507억 달러였고, 투자지출 합계는 1,886억 달러였다. 투자지출이 본업에서 번 돈을 379억 달러나 웃돌았다. 2020년 이후 줄곧 본업 수익이 투자보다 많았던 구도가 처음으로 뒤집힌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투자가 일시적 과열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외한 아마존, 알파벳, 메타 3개사는 모두 투자지출이 완연히 본업 수익을 넘어섰다. 아마존이 가장 큰 투자 적자를 기록했고, 알파벳과 메타가 그 뒤를 이었다. AI용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라우드 인프라에 돈을 쏟아붓는 흐름은 이미 IT 산업이 지식집약형을 넘어 설비집약형 산업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는 누가 더 똑똑한 소프트웨어를 갖고 있느냐 못지않게 누가 더 빨리 더 큰 인프라를 깔고 더 오래 버틸 수 있느냐가 승패를 가를 것이다. 이 대목은 한국이 특히 깊이 새겨야 한다. 국내에서는 대기업 실적이 좋아지면 곧장 이익배분과 갈등의 언어가 앞서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삼성전자를 둘러싼 노사 논란도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의 실적을 누구에게 얼마나 나눌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질문은 “이 돈으로 무엇을 먼저 만들어야 한국 산업이 살아남는가”다. 글로벌 선도기업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지출 확대가 아니라, 다음 표준을 선점하기 위해 오늘의 현금을 내일의 생산능력으로 바꾸는 전략이다. 젠슨 황이 한국을 찾은 이유는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독점기업이 아니라 GPU와 HBM, 패키징, 데이터센터 인프라가 함께 움직이는 AI 생태계의 수장이다. 그가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단순히 일부 대기업을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HBM과 첨단 패키징, 기판, 소재, 장비, 테스트, 전력, 냉각, 인재까지 아우르는 생태계를 얼마나 잘 갖췄는지 직접 확인하려는 움직임으로 읽혀야 한다. AI 시대의 메모리 경쟁은 칩 하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체 생태계의 능력에 달려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기업이지만 AI 시대의 경쟁은 단순히 칩을 잘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HBM, 첨단 패키징, 기판, 소재, 장비, 테스트, 전력, 냉각, 고객 공동개발까지 연결되는 생태계를 얼마나 촘촘하게 구축하느냐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즉, 반도체는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체계의 문제다. 한두 기업이 잘 버틴다고 산업 전체가 강해지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개별 기업의 선전보다 산업생태계의 재무장이다. 대기업, 중견기업, 벤처, 스타트업, 연구소, 대학, 지역 인프라를 하나로 묶는 새로운 협력체가 절실하다. 가칭 ‘반도체국가전략혁신협의체’ 같은 조직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협의체는 단순한 자문기구가 아니라 한국 반도체 밸류체인 전체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자원을 집중하는 실행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HBM과 첨단 패키징을 중심으로 어떤 기술을 선점할지, 어떤 소부장 병목을 먼저 풀지, 어떤 인재를 어디에 배치할지, 무엇을 국내에서 내재화하고 무엇을 협력할지에 대한 집단적 판단이 필요하다. 이 협의체의 첫째 임무는 기술 로드맵을 하나로 묶는 일이다. HBM, 차세대 패키징, 유리기판, CPO, 고성능 스토리지, AI 메모리 등 핵심 분야에서 한국이 어떤 기술을 선점할지 정리해야 한다. 둘째는 자원 집중이다. 정부가 예산과 세제와 인력을 지원하되, 대기업이 투자하고, 중견·중소·벤처가 핵심 기술을 공급하며, 스타트업이 새로운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셋째는 병목 해결이다. 소재, 장비, 기판, 테스트, 후공정, 패키징의 어느 한 곳에서 막힘이 생기면 협의체가 공동 대응해야 한다. 이 구조는 단순히 돈을 더 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핵심은 돈의 총량보다 돈이 흐르는 방식이다. 정부의 2026년 전략기술 투자 8.6조 원, 여러 부처가 참여하는 국가전략기술 체계는 이미 출발했다. 그러나 이 자금이 분산되면 효과는 약해진다. 반도체국가전략협의체는 이러한 공적 재원을 민간의 대규모 투자와 연결하고, 파일럿 라인, 신뢰성 인증, 양산, 수출까지 이어지는 길을 만드는 장치여야 한다. 후공정과 기판 기업의 역할도 더 중요해지고 있다. 대덕전자 같은 기업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부품 공급이 아니라, AI 반도체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 기술이다. HBM이 아무리 좋아도 이를 지탱하는 기판과 패키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체 시스템 성능은 완성되지 않는다. 이제 후공정은 뒤에서 받치는 산업이 아니다. 반도체 경쟁의 전면이다. 그래서 생산현장에서 무엇이 병목인지, 어떤 장비와 소재가 부족한지, 어떤 인재가 가장 절실한지를 현장에서 직접 들어야 한다. 현장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 정책도 이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기업별 지원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술개발부터 파일럿 라인, 신뢰성 인증, 양산, 수출까지 이어지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대기업이 투자하면 중견·중소·벤처가 함께 성장하고, 스타트업이 새 기술을 내면 이를 테스트하고 양산으로 연결할 통로가 있어야 한다. 지역별로는 패키징, 소재, 장비, 테스트, 인재양성 기능을 분산 배치해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산업정책이다. 공장 하나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지금 한국이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또 있다. 성장투자는 비용이 아니라 생존조건이라는 사실이다. 미국 빅테크가 영업현금흐름보다 더 많은 돈을 AI 인프라에 쏟아붓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 투자하지 않으면 다음 시장의 규칙을 남이 정하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AI 시대에 표준은 곧 권력이다. 표준을 먼저 잡는 자가 공급망을 통제하고, 공급망을 통제하는 자가 산업의 이익을 가져간다. 한국이 이 구조를 외면한 채 단기 성과만을 붙잡고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기술과 시장 모두에서 밀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적 분배 논쟁이 아니라 전략적 재투자다.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고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산업이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성장 기반을 복원하는 일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이 있다면 그것은 더 많이 나누기 전에 먼저 더 큰 미래를 만드는 데 쓰여야 한다. HBM, 첨단 패키징, 소부장, 인재, 지역 생태계에 재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현재의 호황이 구조적 경쟁력으로 바뀐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한국은 지금 이익을 나누는 데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벌어들인 돈보다 더 큰 돈을 미래에 걸고 산업을 다시 세울 것인가. 세계 빅테크는 이미 후자를 선택했다. 미국은 AI 인프라에 돈을 쏟아붓고 있고, 그 돈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미래 시장의 입장권이다. 한국이 이 신호를 읽지 못하면 메모리 강국이라는 말은 과거형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성장을 방어할 때가 아니라, 성장을 재장전할 때다. 반도체국가전략혁신협의체는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조직은 대기업과 중견·중소·벤처·스타트업을 한데 묶고, 연구기관과 대학,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를 연결해 한국 반도체의 다음 10년을 설계하는 전략 플랫폼이어야 한다. 기술 표준, 투자 우선순위, 인재양성, 공급망 안정, 지역 클러스터, 수출전략까지 함께 논의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산된 경쟁이 아니라, 집단적 재무장이다. 젠슨 황의 방한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한국이 AI 반도체 생태계를 얼마나 잘 갖췄는지, 그리고 그 생태계를 어떻게 다시 재무장할 것인가를 세계가 지켜보는 순간이다. 한국 산업은 지금 선택해야 한다. 분산된 논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생태계를 재무장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로 방향을 틀 것인가. 이 선택이 한국의 다음 10년을 결정할 것이다. <그림> 젠슨 황이 제시한 ‘5층 케이크(Five-layer cake) 론’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젠슨 황 방한을 보는 눈… 격변하는 AI 반도체 생태계
  • [곽재원의 Now&Future] 더욱 깊어지는 K자형 양극화의 골… 더욱 절실해진 이대통령의 민생 정치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때로는 거대한 착시를 만든다. 최근 발표되는 경제 지표들을 보면 한국 경제는 순항 중인 것처럼 보인다. 전 세계적인 AI(인공지능) 열풍으로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급등하는 소위 '멤플레이션(Memflation;메모리+인플레이션)' 덕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역대급 실적을 올리고 있고, 코스피 지수 역시 하방을 단단히 지켜내고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매크로(거시) 지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냉골이 도사리고 있다. 반도체가 뿜어내는 온기는 대기업과 일부 금융 계층에만 고이는 '국소적 과열'일 뿐이다. 정작 서민 경제의 핏줄인 골목상권과 중소기업, 창업기업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가 몰고 온 '호르무즈 인플레이션'이 고환율과 고물가라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서민의 밥상과 자영업자의 생존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매크로는 버티는데 마이크로(미시)는 무너지는, 이 기이한 양극화야말로 지금 한국 경제가 마주한 가장 심각한 딜레마이다. 사실 한국 경제는 이 두 가지 인플레이션이 양방향에서 잡아당기는 거대한 시소게임의 한복판에 서 있다. 우리는 전형적인 원유 수입국인 동시에 세계 메모리 공급을 주도하는 독특한 산업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 현상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한국 경제의 손익 방정식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먼저 호르무즈 인플레이션은 한국 경제의 연료 공급선을 마비시키는 파괴력을 지닌다. 원유 도입량의 상당 부분을 중동 해로에 의존하는 한국으로서는 해협 봉쇄가 장기화되어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돌파할 경우, 경상수지가 급격히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원화 가치 하락과 환율 급등을 부르고, 다시 수입 물가를 밀어 올리는 악순환을 낳는다. 화학, 철강, 자동차, 항공 등 원가 압박을 받는 전통 제조·서비스업의 마진이 급감하면서 내수 경기는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이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인을 방어하는 보루가 바로 멤플레이션이다. AI 대전환으로 촉발된 반도체 호황은 한국 경제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고대역폭 메모리(HBM)나 고용량 가전·서버용 제품에서처럼 독점적 지위를 가진 첨단 반도체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을 상대로 높은 가격 전가력을 갖는다. 유가 상승으로 유출되는 달러를 반도체 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가 일정 부분 상쇄(Buffer)해 주는 구조다. 이 때문에 주식 시장 역시 통째로 가라앉기보다는 반도체와 에너지 인프라 등 상단 주도주만 살아남고, 전통 제조·소비재 등 하단 소외주는 침체하는 극단적인 ‘K자형 차별화’가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매크로 차원의 상쇄 효과가 국민 개개인의 삶에는 아무런 안도감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위기의 징후들은 이미 구체적인 숫자로 증명되고 있다. 최근 미국 골드만삭스는 상업 재고와 국가 전략 비축량을 합친 전 세계 원유 재고량이 이달(5월) 말경 수요의 100일 분량을 밑돌 가능성이 크다는 경고를 내놓았다. 호르무즈 해협의 실질적 봉쇄로 공급 제약이 장기화되면서 재고 소진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각국 정부가 강제 정전과 재택근무 등 처절한 절약 움직임에 나섰지만, 시장의 대응은 늘 한발 뒤처지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반면 선박이 멈춰 선 바다 위와 달리 디지털 공간의 과열은 멈출 줄 모른다. 생성형 AI에 대한 폭발적인 성장 기대를 배경으로 반도체 메모리 부족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 뉴타닉스의 라지브 라마스와미 최고경영자(CEO)가 "이러한 메모리 공급 부족 현상이 적어도 1~2년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다. 물리적 자원의 고갈 속도만큼이나 디지털 자원의 독점 속도가 빨라지는 이 기이한 이중 인플레이션의 파고 속에서 대한민국 민생 경제의 체감 온도는 이미 영하권으로 떨어졌다. 더 큰 문제는 타이밍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 한복판에 서 있다. 지방선거가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표심을 의식한 선심성 공약들만 난무할 뿐 이 냉혹한 경제 딜레마를 풀기 위한 정교한 처방전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선거가 끝난 뒤에 찾아올 정국 주도권 싸움과 극심한 여야 대치라는 '선거 후유증'을 생각하면 민생을 위한 골든타임이 이대로 흘러가 버릴 것이라는 우려가 잦아들지 않는다. 이 사면초가의 정국에서 우리는 이재명 대통령의 '민생 정치력'을 주목한다. 선거의 승패나 진영의 논리를 넘어 지금 대통령이 보여줘야 할 정치력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벼랑 끝에 선 국민의 삶을 구해내는 '실용주의 리더십'이다. 대통령의 민생 정치력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 첫째, 멤플레이션의 결실을 민생의 온기로 강제 순환시키는 펌프질이 필요하다. 첨단 산업이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초과 이익이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으로만 고이지 않도록 중소 부품·장비 협력사를 위한 안심 기금 조성을 유도하고 세제 혜택으로 화답하는 정교한 상생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둘째, 호르무즈 인플레의 직격탄을 맞은 취약계층에 대한 '핀셋형 두터운 구제'에 행정력을 총동원해야 한다. 최근 정부가 '고유가 피해지원금'을 선별 지급하며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시작한 것은 올바른 방향타다. 이에 그치지 말고 유가 폭등으로 고통받는 중소 물류업체와 에너지 취약 소상공인들을 위한 전력 요금 보전 등 생활 밀착형 방파제를 더 촘촘히 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거 직후 예견되는 정치적 폭풍을 정면 돌파할 '조기 영수회담'의 결단이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야당 지도부를 초청해 오직 '민생 경제'만을 의제로 삼는 영수회담을 선제적으로 제안해야 한다. 정치적 공방은 국회에 맡기되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여야가 따로 없다는 선언과 함께 'AI 전환 지원법'이나 '국가 전력망 확충' 같은 미래 성장동력 법안의 대타협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억강부약'의 실천이자 정치의 본령이다.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가 형편없다면 그 정치는 실패한 것이다. 높은 국정 지지율이나 선거의 결과는 민생의 고통 앞에서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호르무즈라는 모래늪에 빠진 서민 경제를 구하고, 멤플레이션이라는 날개로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일은 결국 대통령의 절실한 민생 정치력에 달려 있다. 선거 뒤의 폭풍 속에서도 오직 국민의 삶만을 바라보며 실용의 깃발을 흔드는 유능한 리더십을 기대한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더욱 깊어지는 K자형 양극화의 골… 더욱 절실해진 이대통령의 민생 정치
  • [곽재원의 Now&Future] 7250억 달러 AI 인프라 전쟁… 한국은 노사내전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을 두고 ‘과도한 기대가 만든 거품’이라는 이른바 'AI 버블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실적과 투자 흐름을 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시장에서는 'AI 버블'보다 오히려 'AI 인플레'라는 말이 더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미국 주요 빅테크들은 올해 1분기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실적을 기록했고, 동시에 천문학적 규모의 AI 인프라 투자 계획을 공개했다. 메타 플랫폼즈는 올해 1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33% 증가한 563억 달러를 기록했고, 올해 자본지출(CAPEX) 계획도 기존 1150억~1350억 달러에서 최대 1450억 달러까지 상향 조정했다. 이 회사는 메모리 가격 상승과 데이터센터 비용 급증이 그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AI 데이터센터 투자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이 회사는 올해 AI 인프라 투자 규모가 약 19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면서 "올해 AI 처리능력을 80% 이상 확대하고 향후 2년 내 데이터센터 규모를 사실상 두 배로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단일 분기 투자액만 320억~400억 달러 수준에 이른다. 알파벳도 올해 투자 가이던스를 1800억~1900억 달러 수준으로 높였고, 구글 클라우드 부문 매출은 전년 대비 63% 급증했다. 시장에서는 미국 4대 빅테크의 올해 AI 관련 CAPEX 총액이 최대 725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기업 투자 규모가 아니다. AI 경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은 AI를 소프트웨어 혁신 정도로 이해하지만, 현실의 AI는 점점 거대한 산업 인프라 체제로 변하고 있다. 생성형 AI는 막대한 GPU와 초고속 메모리, 첨단 패키징, 데이터센터, 냉각시설, 광통신망,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난 전력을 필요로 한다. AI 산업은 이제 반도체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전력·건설·통신·자본시장 전체를 움직이는 새로운 산업혁명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최근 일본경제신문의 문제 제기는 매우 시의적절하다. 일본경제신문은 최근 사설을 통해 AI 인플레 현상 속에서 각종 부품과 장치, 인프라 비용이 급등하고 있으며, 기업들의 투자 부담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속가능한 투자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향후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과제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단순한 비용 문제를 넘어 AI 시대의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실제로 지금 AI 인플레는 반도체와 메모리 가격뿐 아니라 전력과 냉각설비, 변압기, 산업용 전선,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까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전기요금 인상 압력이 커지고 있고, 유틸리티 기업들과 발전기업들이 새로운 전략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AI 데이터센터 때문에 전력망 자체가 부족해지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6년까지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이 현재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전력 인프라는 이제 AI 시대의 핵심 병목이자 새로운 지정학적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테크노 중상주의, 기술이 국가 패권의 핵심이 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근 국제정치경제학계에서 거론되는 '테크노 중상주의(Techno-Mercantilism)' 개념이 중요해진다. 과거 중상주의 시대 국가들은 금과 은, 해상무역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 역량을 총동원했다. 오늘날의 테크노 중상주의는 반도체와 AI, 데이터, 전력망, 첨단 제조기술을 둘러싼 국가 경쟁 체제를 의미한다. 즉 이제 기술은 더 이상 단순한 시장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국가안보와 경제 패권, 지정학적 영향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 되었다.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재편과 중국 견제에 총력을 기울이고, 이에 맞서 중국이 국가 주도의 반도체 자립과 AI 산업 육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며, 중동 국가들조차 국부펀드를 앞세워 AI 데이터센터 경쟁에 뛰어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목할 점은 이 경쟁이 순수한 민간 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을 통해 반도체 제조에 수백억 달러의 보조금을 직접 투입하고 있고, 수출 통제와 동맹국 압박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려 한다. 중국은 '신형거국체제(新型擧国体制)'라는 이름 아래 국가가 AI와 반도체 분야 자원을 직접 배분하고 산업 로드맵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맞서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산업정책을 넘어, 국가 전체의 자원과 역량을 하나의 전략 목표에 결집하는 총력전 체제다. 산업혁명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 같은 패턴은 낯설지 않다. 19세기 철도 경쟁은 단순한 교통산업 경쟁이 아니라 철강·석탄·금융·군사력을 결합한 국가체제 경쟁이었다. 20세기 냉전기의 우주개발 경쟁 역시 과학기술 경쟁인 동시에 국가 산업동원체제의 총력전이었다. 지금 AI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움직임 역시 본질적으로는 국가 총력 산업체제 경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만 이번 경쟁은 한 가지 면에서 이전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속도가 전례 없이 빠르고, 기술의 파급 범위가 경제·군사·사회 전 영역에 걸쳐 있으며, 승자가 독식하는 구조적 특성이 더욱 강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딜레마, 최고의 자산을 가졌으나 체제 결집이 관건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우려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한국은 본디 AI 시대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진 나라다.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과 첨단 제조 역량, 우수한 디지털 인프라와 높은 교육 수준을 동시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시대 핵심 병목 자원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공급망의 중심에 서 있다. 이는 단순 제조업 강국을 넘어 AI 시대 전략 자원 공급국의 위치에 있다는 의미다. HBM은 AI 가속기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부품으로, 엔비디아의 최신 GPU는 모두 이 메모리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현재 HBM 시장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그리고 미국 마이크론이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최대 HBM 공급처로서 AI 붐의 직접적 수혜를 누리고 있으며, 삼성전자 역시 5세대 HBM(HBM3E) 공급을 본격화하면서 이 레이스에 다시 뛰어들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글로벌 AI 인프라 경쟁에서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강점을 국가 차원의 장기 전략 체제로 조직화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AI 국가 전략을 이끌던 핵심 리더십이 정치권으로 이동하고, 국가 차원의 전략 컨트롤타워가 흔들리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AI 경쟁은 단기 정권 차원의 이벤트가 아니라 최소 10년 이상 지속될 장기 산업전쟁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여전히 정권 교체와 정치 일정에 따라 산업 전략의 연속성이 흔들리는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초당적·초정권적 틀에서 AI 패권 전략을 추진하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전력 인프라 문제도 심각하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을 위한 전력 확보는 이미 미국에서도 국가적 과제가 되었지만,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향후 10년간 AI와 반도체 제조를 위한 전력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신규 발전 인프라 구축과 전력망 현대화가 얼마나 신속하게 이루어지느냐가 한국의 반도체·AI 경쟁력을 좌우하는 변수가 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에너지 정책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전략의 핵심 과제다. 삼성 노조 분쟁이 던지는 더 큰 질문 여기에 삼성전자를 둘러싼 노사 갈등 역시 단순한 기업 내부 문제로만 보기 어렵다. 물론 노동권과 노조 활동은 민주사회에서 존중받아야 할 기본 권리다. 그러나 현재 반도체와 AI 산업은 과거 제조업 시대와 전혀 다른 속도의 경쟁에 직면해 있다. AI 산업에서는 투자 속도와 의사결정 속도, 연구개발 집중도, 인재 확보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 자체와 직결된다. 삼성전자는 단순한 민간기업이 아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과 수출, 고용, 기술 생태계를 지탱하는 핵심 축이다. 한국 총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 안팎에 달하며, 그 중심에는 삼성전자가 있다. 따라서 삼성전자의 경쟁력 약화는 개별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체제 전체의 불안정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AI 시대의 반도체 경쟁은 분기 단위가 아닌 주 단위, 심지어 일 단위로 전개되는 측면이 있다. 엔비디아가 새 칩을 발표하면 몇 주 안에 이를 지원하는 메모리 규격이 업계 표준으로 굳어지고, 여기에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밀려날 수 있다. 이러한 속도전 속에서 조직 내부의 갈등과 의사결정 지연, 관료화가 심화된다면 초격차 경쟁에서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는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노사 양측이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역사적 맥락을 함께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면 노동자들의 일자리도, 임금 협상의 기반도 동시에 무너진다. 노사 간 대립이 산업 경쟁력의 발목을 잡는 악순환을 끊고,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새로운 협력 모델이 절실하다. 국가 시스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큰 문제는 한국 사회 전체가 아직 AI 시대의 본질적 변화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세계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각국은 AI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산업동원체제를 구축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는 반도체와 전력, 데이터센터, 인재, 교육, 규제, 금융, 외교전략까지 모두 연결된다. 다시 말해 AI 경쟁은 국가 시스템 경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연구개발 지원이나 스타트업 육성 차원을 넘어선 장기 국가 전략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초당적 산업정책, AI와 반도체·전력 인프라를 통합적으로 보는 전략적 시야, 민관 협력 체계의 복원, 인재 육성과 글로벌 인재 유치 전략 등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AI 분야의 핵심 인재 양성은 최소 10년 이상의 시계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대학 교육의 AI 전환, 이공계 인재의 처우 개선,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구축 등이 단편적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 국가 과제로 추진되어야 한다. 아울러 한국은 자국의 전략적 위치를 외교적 자산으로 더욱 적극 활용해야 한다. HBM과 같은 핵심 반도체 기술은 미·중 어느 쪽도 단기간에 한국을 대체하기 어려운 포지션을 제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의 반도체 동맹을 강화하면서도 과도한 기술 의존이나 공급망 종속을 피하는 균형 외교가 필요하다. 첨단 기술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는 시대일수록, 기술 외교와 산업 전략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제가 된다. AI 시대의 승자는 단순히 뛰어난 기술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산업 인프라와 국가 시스템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조직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전략 자산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을 하나의 국가적 산업체제로 결집할 수 있는가라는 중대한 시험대 위에 서 있다. AI는 더 이상 하나의 산업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산업 구조와 자본 흐름, 전력 체계, 노동 질서, 교육 시스템까지 모두 재편하는 새로운 문명 인프라다. 바로 이 점에서 오늘의 삼성 노조 분쟁 역시 단순한 노사 문제를 넘어 AI 시대 한국 산업체제의 방향성과 경쟁력을 가늠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 이 역사적 전환점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향후 10년, 20년 뒤의 국가 위상을 결정할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7250억 달러 AI 인프라 전쟁… 한국은 노사내전
  • [곽재원의 Now&Future] 초집적 기술 경쟁의 시대 … 삼성전자 노사갈등에 쏠린 세계의 시선

    세계 증시의 열기와 한국의 불안한 속살 요즘 글로벌 증시 뉴스를 보면 마치 축제 분위기다. 미국의 S&P 500 지수는 2022년 10월 바닥을 찍은 이후 불과 3년 반 만에 두 배로 뛰어올랐다. 미국의 저명한 시장 분석가 라이언 데트릭이 1950년부터 74년간의 강세장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주가가 바닥 대비 두 배가 되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3년 9개월이다. 지금 미국 증시는 그 역사적 평균보다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더욱이 강세장이 정점에 도달하기까지는 평균 6년 9개월이 걸린다는 통계를 감안하면, 아직도 상승 여력이 충분하다는 낙관론—이른바 '업사이드 크러시(Upside Crush)'—이 전 세계 투자자들의 심리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도 이 흐름에 탑승한 것처럼 보인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이 가파르게 회복되고, 개인 투자자들은 다시 '반도체 대장주'를 외치며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그런데 잠깐, 한 걸음 물러서서 냉정하게 따져보자. 과연 한국 경제의 내부 체력은 미국이나 일본처럼 탄탄한가? 화려한 지수와 실적이라는 외피 뒤에서, 세계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한국만의 '구조적 모순'이 똬리를 틀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상승은 '운'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 증시의 강세를 단순히 ‘돈이 많이 풀렸으니까’라고 설명하면 본질을 놓친다. 그 이면에는 'AX(AI 전환, AI Transformation)'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 앞에서 국가와 기업이 방향을 하나로 맞추고 단행한 과감한 거버넌스 개혁과 천문학적 인프라 투자가 자리한다. 엔비디아를 보자. 이 회사의 주가가 3년 새 수십 배로 뛴 것은 단순한 투기 수요 때문이 아니다. GPU 설계에서 소프트웨어 생태계(CUDA)까지 AI 산업 전반을 장악하는 전략을 수십 년에 걸쳐 집요하게 실행한 결과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에 수조 원을 투자하면서 클라우드와 AI를 융합하는 사업 모델을 재편했고, 구글은 자체 AI 칩(TPU) 개발과 제미나이 모델 고도화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이 기업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번 돈의 상당 부분을 다시 미래에 투자한다. 주주 배당이나 직원 임금 인상보다 기술 우위를 지키는 데 우선순위를 둔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의 '잃어버린 시간'에서 깨어난 일본은 정부 주도로 반도체 국산화 프로젝트(라피더스)를 추진하고, 해외 자본 유치를 위해 기업 지배구조를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이하 기업에 개선 계획을 요구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단행했고, 이것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신호탄이 됐다. 국가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기업이 그 방향을 따라 내부 체질을 바꾼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세계적 수준의 기업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기업들이 힘껏 날개를 펼치도록 국가가 환경을 조성해주고 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금 한국이 세계에 생중계하고 있는 장면은 정반대다. 번 돈을 미래에 쓸 것인가, 현재에 나눌 것인가 삼성전자는 2023년 반도체 부문에서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면서 재고가 쌓이고, 이익이 증발했다. 그러나 삼성은 이 어려운 시기에도 28조 원이 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R&D) 투자를 집행했다. 매출액 대비 10%를 훨씬 웃도는 이 투자는, 당장의 손익보다 기술 경쟁력을 유지하겠다는 절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적자 속에서도 미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생존형 투자'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삼성전자 노조가 최근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요구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단순한 임금 인상 요구를 넘어선다. 영업이익의 상당 비율을 성과급으로 고정하라는 요구, 휴가 체계 확대, 각종 복지 강화—이것들이 한데 묶여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 개별 항목만 보면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체 그림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제의 핵심은 '타이밍'과 '규모'다. 지금 이 순간, 전 세계 AI 경쟁은 문자 그대로 초단위로 진행되고 있다. 엔비디아는 새로운 칩 아키텍처를 설계하고, 인텔과 AMD가 추격을 가하며, TSMC는 2나노 이하 공정에서 기술 장벽을 높이고 있다. 삼성전자가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뒤처지고, 파운드리 사업에서 TSMC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잇따르는 상황이다. 이 국면에서 기업이 집중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자본을 아껴 첨단 설비에 투자하고, 최고 인재를 확보하며, 기술 격차를 좁히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삼성은 노조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사들이 1달러를 아껴 서버와 전력망에 투자할 때, 한국의 초규모 노조는 기업의 '미래 체력'을 헐어 '현재의 지갑'을 채우자고 압박하고 있다. 이 대비가 너무도 선명하다. 삼성, 진짜 괜찮은 건가?’ 글로벌 기관 투자자들, 즉 연기금과 헤지펀드와 자산운용사들은 한국 기업에 투자할 때 재무 지표만 보지 않는다. 그들은 기업의 거버넌스(지배구조)와 내부 리스크를 꼼꼼히 살핀다. 노사 관계의 안정성, 경영진의 의사결정 속도, 내부 갈등이 전략 실행에 미치는 영향—이런 것들이 투자 판단의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 관점에서 지금 삼성전자가 세계에 보내고 있는 신호는 우려스럽다. 최첨단 HBM을 설계하고 파운드리 2나노 공정을 다투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기업이 19세기적 계급 투쟁의 언어로 무장한 노조의 파업 위협과 대치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있다. 한 외국계 운용사 관계자의 말이 상징적이다. "삼성이 기술 면에서는 세계 톱이지만, 경영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노사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포지션을 재검토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 특히 삼성전자에 대한 비중을 줄이는 흐름이 지속되는 배경에는 이런 구조적 불안 요인이 자리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기업의 주가가 글로벌 동업종 대비 낮게 평가받는 현상—의 원인을 따질 때 노사 리스크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노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인가? 물론 아니다. 근로자의 권익 보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가치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권익 보호'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에 개입하고, 미래 투자 재원을 현재의 분배로 전환하도록 구조적으로 압박하며, 경영의 불확실성을 주기적으로 높이는 방식은 더 이상 '노동권'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기업 경쟁력의 지속 가능성' 문제이고, 나아가 국가 산업의 미래 문제다. AI 시대의 속도전과 한국의 내부 크러시 AI 산업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속도'다. 기술이 6개월~1년 단위로 세대 교체되고, 시장의 주도권이 순식간에 바뀐다. 2년 전까지만 해도 AI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의 HBM 경쟁력에 의문을 다는 목소리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를 굳히는 동안, 삼성은 품질 이슈와 공정 지연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투자 결정이 빨라야 하고, 내부 에너지가 기술 개발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삼성전자 경영진이 노조와의 협상에서 소모하는 시간과 자원이 결코 작지 않다. 파업이 실제로 발생하면 생산 차질은 물론, 고객사들의 신뢰가 흔들린다. 협상 과정에서 내부 정보가 외부로 유출될 위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내부 크러시(Internal Crush)'—외부의 경쟁 압력이 아니라 내부의 구조적 갈등이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현상—의 전형적인 징후다. 비교를 해보자.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는가. 젠슨 황엔비디아 CEO가 새 칩 아키텍처를 발표하기로 결정하면, 그 결정이 실행으로 이어지는 데 조직 내부의 저항이 거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픈AI와 파트너십을 맺고 수조 원을 집행하기로 했을 때, 그 결정을 되돌리거나 지연시키는 내부 압력은 없었다. 이 기업들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전략적 투자 결정'과 '내부 분배 갈등'이 서로 뒤엉켜 경영의 발목을 잡는 구도는 아니다. 한국의 구도는 다르다. 초집적 기술—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설계와 제조 역량—을 보유한 기업이, 그 기술을 지탱할 자본 축적을 구조적으로 방해받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마치 세계 최고의 스프린터가 발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는 형국이다. 분배인가, 성장인가 — 이분법을 넘어서 이 시점에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분명히 해두자. 이 글은 노동자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기업이 이익을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 가능한 성장 없이는 지속 가능한 분배도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져 수익성이 무너지면, 그 피해를 가장 먼저 받는 것은 누구인가? 주주들도, 경영진도 아니다.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이다. 협력업체들이다. 삼성 생태계에 기대어 살아가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다. 더 넓게 보면, 삼성의 경쟁력 약화는 한국의 수출과 세수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그 여파는 전 국민에게 돌아온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의 노사 갈등은 단순히 '사용자 대 노동자'의 대립이 아니다. '현재의 이익'과 '미래의 생존' 사이의 갈등이다. 그리고 이 갈등의 해법은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기업의 장기적 경쟁력을 보전하면서도 성과를 합리적으로 나누는 새로운 틀의 마련에 있다. 문제는 그 새로운 틀을 만들 주체가 기업과 노조만의 협상으로는 등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협상의 구조 자체가 단기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은 결국 정부로 넘어간다. 정부의 역할 — 중재자가 아닌 설계자로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노사 문제 접근 방식은 대체로 '중재자' 역할에 머물렀다. 갈등이 표면화되면 개입하고, 타협을 유도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물러서는 방식이다. 이 방식이 통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AI 시대, 초집적 기술 경쟁의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정부는 이제 '설계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노사 관계의 판 자체를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새로 설계하는 것이다. 첫째, 노동 유연성의 확대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기업이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려면 인력 운용의 유연성이 필수다. 지금처럼 인력 구조조정이 사실상 불가능한 환경에서는, 기업이 장기 투자를 꺼리게 된다. 채용을 줄이고 자동화와 해외 이전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내몰린다. 둘째, 전략 자산 보호 원칙의 명문화다. 국가 안보와 경제 핵심에 해당하는 기업의 경우, 집단행동으로 인한 생산 차질이 국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제도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노동권의 제한이 아니라, 국가 전략 자산 보호라는 또 다른 공익의 실현이다. 셋째, 성과 공유 모델의 혁신이다. 단기 임금 인상이나 성과급 고정이 아니라, 기업의 장기 성과와 연동되는 주식 기반 보상, 성과 공유 펀드 등 새로운 분배 모델을 정부가 적극 설계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도 기업의 장기 성공에 이해관계를 갖게 되고, '현재 분배 vs 미래 투자'의 갈등 구도가 완화된다. 넷째, 명확한 메시지다. 정부는 시장과 투자자, 그리고 국민에게 분명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한국은 기술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내부 구조를 과감히 바꿀 의지가 있다는 것을, 그것을 뒷받침할 법과 제도를 갖출 것이라는 것을. 이 메시지 하나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어떤 구체적 정책보다 강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진정한 '업사이드 크러시'를 위하여 라이언 데트릭의 74년치 데이터가 말하는 강세장의 조건은 단순하다. 탄탄한 이익 성장과 기술 혁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거버넌스의 신뢰. 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 강세장은 오래 지속된다. 한국에는 이미 세계가 부러워하는 기술이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역량, POSCO의 소재 기술, 현대차의 전동화 속도—이것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십 년의 투자와 인내, 수많은 엔지니어들의 헌신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 소중한 자산을 지키고 더 키우기 위해서는, 지금 내부를 갉아먹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 초집적 기술 기업이 구시대적 분배 논리에 발목 잡히는 기형적 구도를 방치하는 한, 한국의 '업사이드 크러시'는 신기루에 그칠 것이다. 삼성전자의 자화상이 눈물로 얼룩지기 전에, 기업과 노조와 정부 모두가 한 발씩 물러서서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오늘의 더 많은 나눔이 내일의 나눌 것 자체를 없애버릴 수 있다는 역설, 지금 한국 경제가 마주한 이 냉혹한 현실을 우리 모두가 직시해야 할 때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초집적 기술 경쟁의 시대 … 삼성전자 노사갈등에 쏠린 세계의 시선
  • [곽재원의 Now&Future] 이번 중동 전쟁이 주식투자자 에게 던진 몇 가지 교훈

    지정학적 리스크가 일상의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는 지금 우리는 주식 시장의 기묘한 강세를 목도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서로에게 ‘왜’,‘어떻게’, ‘어디로’ 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군사충돌로 야기된 중동의 전운은 과거라면 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었을 대형 악재였으나, 현재의 시장은 이를 냉소적으로 관조하거나 오히려 새로운 투자의 동력으로 삼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역설적 현상의 배후에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라나 포루하가 최근 분석한 '신지정학적 경제학'의 원리가 자리 잡고 있다. 포루하는 이번 이란-이스라엘 충돌을 통해 세계 경제가 직면한 중요한 교훈을 제시하며, 우리가 알던 기존의 시장 법칙이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경고한다. 포루하의 통찰과 작금의 한국 시장 상황을 결합하여 우리가 중동의 포화 속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투자자의 자세를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교훈은 효율성의 시대가 가고 안보와 신뢰가 자본의 흐름을 결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포루하에 따르면 과거 30년의 세계화가 '가장 싼 곳에서 생산하는 효율성'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신뢰할 수 있는 곳에서 생산하는 회복력'의 시대로 변모했다. 중동의 갈등은 글로벌 공급망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다. 이제 자본은 가장 저렴한 곳이 아니라 가장 믿을 수 있는 곳, 즉 지정학적으로 안전하며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동맹의 울타리 안으로 파고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 시장이 한국을 보는 눈은 다면적이다. 한국은 북한 리스크와 대중국 의존도라는 고질적인 위기 요인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미국 중심의 새로운 공급망(Friend-shoring)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반도체, 배터리, 방산 분야의 핵심 파트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한국의 가계 부채나 내수 부진 같은 단기적 거시경제 지표보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이 확보한 '대체 불가능한 전략적 가치'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있다. 특히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구축과 세제 혜택 등 강력한 지원책은 시장의 기대를 자극한다. 시장은 민간 부문의 위기보다 정부와 대기업이 주도하는 산업 정책이 만들어낼 미래 수익성에 베팅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경제가 어렵다'는 신호는 정부의 더 강력한 지원을 이끌어 낼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이어져 주가를 떠받치는 동력이 되고 있다. 투자자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주가가 강세를 보이는 것은 단순히 근거 없는 낙관론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위기를 계기로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고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기업과 국가에 자금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에너지 안보의 변화는 시장의 내성을 키운 결정적 요인이다. 포루하는 미국이 셰일 혁명을 통해 에너지 자립도를 높인 결과, 중동발 석유 쇼크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괴력이 1970년대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음을 강조한다. 이는 개인 투자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이 투자한 기업이나 국가가 외부의 지정학적 충격에 얼마나 견딜 수 있는 맷집, 즉 자급자족의 역량이나 대체 불가능한 기술적 해자(moat)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단순한 수익률보다 훨씬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안보가 경제의 최우선 순위가 된 시대에는 방위 산업과 에너지 자립 기술이 더 이상 특수 섹터가 아닌 포트폴리오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한국의 방위 산업(K-방산)과 원전 산업에는 엄청난 기회로 작용한다. 전쟁 위기가 고조될수록 한국 기업들의 수주 잔고가 늘어나는 기묘한 구조 속에서, 위기 요인이 특정 섹터에는 강력한 호재가 되어 전체 지수를 견인하는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전쟁이 가져오는 인플레이션의 속성을 재해석해야 한다. 포루하가 언급한 '그림자 인플레이션' (공식통계 등에 반영되지 않는 물가상승의 한 형태로 명목가격은 그대로 둔 채 상품용량을 줄이거나 서비스질을 낮추어 실질 구매력을 떨어뜨리는 현상) 과 공급망 병목 현상은 필연적으로 자원의 희소성을 부각시키며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현금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으며, 투자자들은 본능적으로 실물 자산의 성격을 지닌 주식으로 피신하게 된다. 특히 막대한 현금 보유력과 독점적 시장 지배력을 갖춘 거대 빅테크 기업들은 이제 단순한 경제적 주체를 넘어 일종의 안전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위기 속에서 주가가 오르는 현상은 공포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포를 헤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피처로서 우량 자산에 대한 수요가 폭주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결국 위기 속의 초강세는 저물가·저금리·평화로 대변되는 구질서의 붕괴 속에서 안보·공급망·국가주도 성장의 신질서 수혜주를 찾는 자본의 영리한 움직임이다. 시장은 한국 경제를 단순히 '위태로운 내수 경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재편되는 글로벌 질서 속의 핵심 요소로 평가하고 있기에 강한 매수세가 유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시적 흐름 뒤에 숨겨진 개인 투자자들의 위험한 자세에 대해서는 엄중한 경고가 필요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관측되는 것처럼 정부의 부양 의지만을 믿고 빚을 내어 시장에 뛰어드는 행태는 대단히 우려스럽다. 정책이 시장 심리를 일정 기간 지탱할 수는 있지만, 전쟁이라는 블랙 스완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파도를 끝까지 막아낼 수는 없다. 정부가 주가를 경제 성과의 핵심 지표로 삼고 있다는 믿음이 과도한 확증 편향으로 이어질 때 시장은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인다. 부동산 규제의 반사 이익으로 흘러들어온 유동성은 기업의 미래 가치를 보고 들어온 '똑똑한 돈'이라기보다 갈 곳을 잃은 '불안한 돈'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자금은 작은 충격에도 쥐떼처럼 한꺼번에 빠져나가며 시장 붕괴를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현명한 투자자라면 중동의 포화 속에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군중 심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들이 모두 대열에 합류할 때 소외되는 것에 대한 공포(FOMO)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나, 투자의 세계에서는 그 본능에 굴복하는 순간 파탄이 시작된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수'가 된 시대에는 언제든 시장이 급변할 수 있음을 상정하고 자산을 지리적으로, 그리고 자산군별로 분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국내 시장의 정책적 호재에만 매몰되지 말고,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을 쥐고 있는 우량 자산이나 금, 국채와 같은 안전 자산으로 포트폴리오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생존의 열쇠다. 둘째, 레버리지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상승장에서는 빚이 수익을 극대화하는 마법처럼 보이지만 하락장에서는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악마로 돌변한다. 전쟁은 불확실성의 극치다. 내일 아침 어떤 뉴스가 들려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변동성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자기 자본으로 투자하는 여유에서 나온다. 강제 청산의 공포 없이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 있는 투자자만이 결국 시장의 결실을 맛본다는 경험칙이 있다. 마지막으로 국가와 금융 당국의 역할을 매섭게 감시하고 요구해야 한다. 시장이 광기에 휩싸일 때 당국은 달콤한 구두선이 아니라 뼈아픈 경고를 날릴 수 있어야 한다. 가계 부채의 위험성과 시장 과열의 징후를 가감 없이 알리고 투명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국민들이 무모한 도박에 빠지지 않도록 파수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중동전쟁이 투자자에게 주는 최종적인 교훈은 명확하다. 지금은 수익률 극대화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라, 만약의 사태에 내 삶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안전 마진'을 확보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젊은 층과 서민들이 '역전의 기회'로 주식을 선택한 절박함은 이해하지만, 그 절박함이 눈을 가려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그 결과는 더욱 가혹할 수 있다. 모든 호황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다는 엄중한 진실이다. 지금의 주가 강세는 우리가 새로운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비용과 기대가 뒤섞인 복합적 결과물이다. 투자자들은 이 포화의 연기 속에서 기업의 본질적 가치와 지정학적 생존 능력을 분별하는 선구안을 길러야 한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신뢰할 수 있는 자산에 뿌리를 내리는 능력은 오직 투자자 본인의 냉철한 자세에 달려 있다. “위기는 기회의 얼굴을 하고 오지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리스크의 무게를 아는 자뿐이다”라는 시장의 유명한 금언이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이번 중동 전쟁이 주식투자자 에게 던진 몇 가지 교훈
  • [곽재원의 Now&Future] 유가 금리 환율 동시폭주 …'메조 경제'만이 해법이다

    국제정세를 분석해 국내외 경제를 전망하는 전문가들에게 지금은 가히 ‘최악의 시대’라 할 만하다. 40년 넘게 현장을 지켜온 필자에게도 최근의 변동성은 생소함을 넘어 공포스럽다. 밤사이 고뇌하며 써 내려간 분석 보고서가 다음 날 아침이면 곧장 오보로 변해버리는 광경이 일상이 되었다. 특히 중동 전쟁의 불길이 번진 지난 한 달여, 세계 경제는 우리의 상상력과 기존 경제학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4월 12~13일에는 미국·이란 협상 결렬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조치 여파로 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를 다시 넘겼다. 달러 강세, 금리인하 기대 후퇴, 신흥국 성장 둔화 우려도 동시에 커졌다. IMF·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까지 성장률 하향과 물가 상향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예전에는 국제정세와 경제변수가 대체로 순차적으로 움직였다. 전쟁이 나면 유가가 오르고, 그다음 물가가 오르고, 이후 중앙은행이 대응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유 현물시장, 환율, 금리, 재정, 안보 리스크가 동시에 상호작용한다. 실제로 최근에는 호르무즈 긴장으로 현물 원유 가격이 급등하는 동안 달러가 안전자산으로 강세를 보였고, 그 결과 시장은 연준의 금리인하 기대를 줄였다. 심지어 전통적 안전자산인 금값도 강달러와 고금리 전망 앞에서 약세를 보였다. 즉 ‘전쟁 → 유가 상승’이라는 단선적 공식만으로는 더 이상 설명이 되지 않는 국면이다. 혹자는 이를 ‘트럼프 복합위기’라는 정치적 수사로 일축하며 특정 인물의 돌출 행동 탓으로 돌리려 한다. 하지만 현상의 본질은 훨씬 깊고 구조적이다. 세계 경제의 혈액인 원유 시장, 주요국의 환율, 금리, 심지어 국가 재정의 건전성마저도 기존의 선형적 예측 모델을 비웃듯 제각각 요동치고 있다. 과거에는 어쩌다 한번 발생하던 극단적인 사건(블랙스완)들이 이제는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폴리크라이시스(복합위기)' 국면에 접어들었다. 금리, 환율, 재정 정책이 서로 시너지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한쪽의 구멍을 막으면 다른 쪽이 터지는 '두더지 잡기' 식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과 데이터 기술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정보의 과잉과 확증 편향을 낳으며, 시장의 변동성을 실시간으로 증폭시키는 '초가속의 시대'가 되었다. 전문가들이 데이터를 분석하는 속도보다 상황이 변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산업화 시대에 최적화된 도구들인 전통적 경제 지표(GDP, 물가상승률 등)는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 우선 ‘지능의 외주화’를 꼽을 수 있다. AI 에이전트와 자동화가 자본과 노동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지만, 국가의 재정 및 통제 시스템은 여전히 과거의 틀에 갇혀 있다. 주요국들의 재정 건전성이 임계치에 도달하면서, 정책 당국이 쓸 수 있는 카드가 사실상 고갈되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요즘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서조차 “(분석과 예측은) 안 하는 게 하는 것보다 덜 위험하다”는 자조 섞인 고백이 흘러나온다. 장기 전략은커녕 단기 대응조차 임기응변에 급급한 것이 작금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단순한 변동성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비용 효율성’과 ‘자유 무역’이라는 경제적 알고리즘이 붕괴되고, 그 자리에 ‘지정학적 생존’과 ‘자국 우선주의’라는 안보 논리가 들어앉은 ‘전쟁경제(War Economy)’의 서막이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국가가 내놓는 정책은 무엇보다 ‘방향타’가 선명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정책 대응은 극단적인 이분법에 갇혀 표류하고 있다. 금리나 환율을 만지는 거시(Macro) 담론은 국민의 삶과 동떨어져 체감되지 않고, 소상공인이나 개별 가계를 핀셋 지원하는 미시(Micro) 정책은 거대한 파고를 막아내기엔 그 규모와 범위가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이 양극단을 잇는 ‘메조(Messo) 경제’의 복원이다. 메조 경제란 특정 산업 생태계, 지역 공동체, 혹은 에너지·교통·데이터와 같은 사회적 인프라 단위를 일컫는다. 거시 경제의 충격이 미시 경제의 파멸로 이어지지 않도록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관절’이자 ‘방파제’와 같은 영역이다. 신뢰가 붕괴된 국제 사회에서 정책 당국이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메시지는 “세상은 요동쳐도 우리의 핵심 시스템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바로 이 메조 경제를 얼마나 단단하게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이재명 정부가 중동 위기 극복을 위해 편성한 26조2000억원 규모의 비상 경제대책(추경 중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재정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단순히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과거의 관성적 문법으로 접근해서는 백약이 무효이다. 이번 추경의 용처는 ‘전쟁경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 경제의 메조 단위 시스템을 수리하고 보강하는 ‘전략적 방패’가 되어야 한다. 첫째, 에너지 메조 시스템의 안정화다. 유가 폭등은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변수다. 그러나 이 리스크가 물류망을 마비시키고 서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은 메조 단위에서 차단할 수 있다. 이번 추경에 포함된 에너지 바우처와 유가 보조금 확대는 단순한 현금 지원이 아니다. 우리 경제의 혈맥이 굳지 않도록 하는 ‘항응고제’ 처방이며, 공급망 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둘째, 비용 구조의 혁신을 통한 생활 인프라 보호다. 대중교통 K-패스 확대나 석유 최고가격제 관련 예산은 가계 부채라는 미시적 난제와 고물가라는 거시적 난제 사이에서 ‘교통’과 ‘에너지’라는 중간 인프라 비용을 낮춰 실질 소득을 보전하는 효과를 낸다. 국민이 느끼는 체감 물가의 저지선을 메조 단위에서 확보하는 것이다. 셋째, 산업 생태계의 회복탄력성(Resilience) 강화다. 특정 부품이나 원자재가 막혔을 때 개별 기업이 각자도생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산업 전체가 버틸 수 있도록 피해 기업 손실 보전과 수출 금융 지원을 결합해야 한다. 이는 기업에 주는 특혜가 아니라 대한민국 수출 네트워크라는 메조 자산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본의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최근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은 예산 정책의 패러다임을 크게 바꿨다. 그들은 예산을 ‘위기 관리 투자’와 ‘성장 투자’로 명확히 구분하되, 이를 일체적으로 추진한다. 일본의 위기 관리 투자는 식량, 에너지, 의료, 사이버 보안 등 사회 전반의 리스크에 관민이 협력하여 선제적으로 자금을 투입하는 전략이다. 이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국민 생활의 안정을 지키는 ‘방패’를 만드는 일이다. 동시에 AI, 반도체, 항공·우주 등 첨단 기술에 투자하는 성장 투자를 통해 이 방패를 ‘창’으로 바꾼다. 위기 관리를 통해 확보된 ‘억지력’과 ‘회복탄력성’이 기업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미래 기술에 투자하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추경 역시 이러한 ‘안보-성장 일체형’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 에너지 위기 대응이 단순히 고통을 분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에너지 자립을 위한 기술 투자나 공급망 재편으로 이어지도록 예산의 용처를 정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일본이 다년간의 별도 예산 체계를 도입해 재정 규율을 유지하면서도 성장을 도모하듯, 우리도 추경이 단발성 소모품이 되지 않도록 관리 체계를 고도화해야 한다. 지금 정책 당국자들에게 ‘신뢰’라는 단어는 사치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당장 내일 유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신뢰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뢰는 평시가 아닌 위기 시에 그 진가를 발휘한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는 것은 정부가 미래를 완벽히 맞추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예측 불가능한 폭풍 속에서도 정부가 내 삶의 기본값을 지켜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당국은 이제 거시 지표의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임기응변에 매달리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책은 위험 속에서도 길을 내는 작업이다. 정책 당국은 거시와 미시를 잇는 메조 경제의 컨트롤타워로서, 이번 추경 26조2000억원을 우리 경제의 관절을 튼튼히 하는 ‘골든타임의 수술비’로 써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문명사적 전환의 진통을 겪고 있다. ‘신뢰를 기반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회’가 아니라, ‘신뢰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정책 역량을 총동원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역발상의 시대다. 전쟁경제의 파고는 높고 기존의 경제 이론은 무력해졌지만, 우리 경제의 허리인 메조 단위를 보강하고 일본의 전략적 사례처럼 위기 관리와 성장을 하나로 묶어낸다면, 이 위기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으로 도약하는 거대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번 추경 예산이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이겨내는 단단한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 세계 경제는 이미 지정학, 에너지, 금융, 재정이 하나의 통합 시스템처럼 반응하는 단계로 들어왔고, 그 결과 전통적 거시전망의 수명이 짧아졌다. 그래서 앞으로는 전망의 정확도보다, 충격이 왔을 때 얼마나 빠르게 가정을 수정하고 정책·포트폴리오를 바꾸느냐가 더 중요한 능력이 될 것이다. 무너진 예측의 자리에 확고한 정책적 신뢰가 다시 들어차는 것, 그것이 이 가혹한 시대를 건너가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정공법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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