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인사이트

2026.08.13 THR
브랜드칼럼
곽재원 논설위원장
곽재원 논설위원장 kjwon54@gmail.com
  • - 아주경제 수석논설위원
    - 가천대 교수
    - 前 중앙일보 경제연구소 소장
  • [곽재원의 Now&Future] 트럼프의 과학경시…세계 기술패권의 판도가 바뀐다

    2026년 8월 초, 미국 연방의회 상원 세출위원회는 백악관 행정관리예산국(OMB)이 제출한 보조금 규정 개정안의 발효를 최소 12월 11일까지 연기하는 잠정 예산안을 전격 발표했다. 당초 트럼프 행정부는 10월 1일부터 연간 1조 달러가 넘는 정부 보조금과 연구비 심사 체계를 전면 개편하려 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명확했다. 수십 년간 미국 과학기술의 정통성을 떠받쳐온 전문가들의 ‘동료평가(Peer Review)’를 단순 조언으로 격하시키고, 대통령이 지명한 정권 담당자가 정책 우선순위와 국익 부합성을 직접 검증하여 연구비 지급 여부를 최종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전문가 심사의 무력화, 정치적 검증의 제도화, 이에 따른 연구비 지급 중단 사태는 현장 연구자들을 거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미국의 전후 80년을 지탱해온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가 제시한 『과학, 그 끝없는 국경(Science, the Endless Frontier)』의 철학, 즉 정부의 차별 없는 공공 기초과학 투자와 학문의 자율성이었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는 정치적 진영 논리와 단기 성과주의가 그 뿌리를 흔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과학경시’ 정책은 단순한 자국 내 행정 개혁을 넘어, 미국이 지닌 지정학적 패권의 기초를 스스로 허무는 자해가 되고 있다. ‘개혁’이라는 수사(Rhetoric)와 ‘자해’라는 현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국(OSTP)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 『Science: A New Golden Age』를 통해 이번 정책이 낡은 대학 기득권 체제를 해체하고 AI 중심의 국가 미션을 유연하게 추진할 ‘80년 만의 대개혁’이라 강변한다. 관료화된 대학과 지루한 절차를 뛰어넘어 혁신적 개인 연구자에게 직접지원(direct-funding)을 제공하고 벤처 캐피털 방식의 파격 투자를 단행하겠다는 수사다. 그러나 비전과 현장의 실제 간극은 참담할 정도로 벌어져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글로벌 과학계가 경고하듯, 현 행정부의 행보는 ‘과학의 해체’에 가깝다. 첫째, 장기적 원천기술의 씨앗이 되는 순수 기초과학 연구비가 대폭 삭감되고 있다. 당장 수익이 나는 응용 분야나 정치적 치적이 되는 첨단 산업에만 자금이 쏠리면서 10~20년 뒤의 기술 혁신을 책임질 기초 연구 생태계가 말라붙고 있다. 둘째, 과학 연구의 급격한 정치화다. 연구비 신청서에서 ‘기후변화’나 ‘다양성’ 같은 단어를 스스로 검열하고 삭제하는 기괴한 현상이 미국 주요 대학 연구실에서 일상화되었다. 정권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연구가 정치 임명권자에 의해 잘려 나갈 수 있다는 공포는 학문의 자율성과 객관적 신뢰성을 사장시킨다. 셋째, 인재 안보의 자발적 포기다. 외국인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유학생과 연구자에 대한 비자 문턱을 높이고 국제 공동연구에 정치적 잣대를 대면서, 전 세계의 유능한 두뇌를 흡수하던 미국의 가장 강력한 자석(Magnet) 효과가 파괴되고 있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서 농부마저 쫓아내는 격이다. 데이터가 증명하는 냉혹한 결과 중국의 역전 우려는 이미 가시화된 데이터로 입증되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과학기술 지표 2026』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중국의 연구개발비 총액은 전년 대비 13.1% 급증한 97.1조 엔(1엔은 10원) 으로, 미국(95.3조 엔)을 제치고 마침내 세계 1위에 등극했다. 중국은 이미 전체 논문 수(2017년), 상위 10% 고품질 논문 수(2018년), 상위 1% 최우수 논문 수(2019년)에서 미국을 연이어 추월한 바 있다. 이제 연구비 투자 총액마저 미국을 앞지름으로써, 명실상부한 글로벌 과학기술 1위국으로 올라섰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대중 첨단기술 제재와 규제는 중국 제조업 기업들의 사활을 건 독자 R&D 투자를 폭발시킨 촉매가 되었다. 중국 기업 R&D(75.4조 엔)는 컴퓨터, 전자, 광학 등 첨단 제조업에 집중되며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반면 미국 기업 R&D의 절반은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등 비제조업에 쏠려 있다. 미국이 정치적 이념 논쟁과 예산 삭감, 연구비 지급 지연이라는 내부 진통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중국은 국가 주도의 압도적 물량 공세로 기술 패권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기술강국(한·일)에 던진 실전적 과제 미중 격돌과 미국의 시스템 파행은 한국과 일본 같은 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 기반 기술강국에 심각한 화두를 던진다. 이번 지표에서 일본은 22.1조 엔으로 3위, 한국은 15.3조 엔으로 5위를 기록했다. 양적으로는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나, 두 나라 역시 R&D 시스템의 근본적 재편이라는 피할 수 없는 논쟁에 직면했다. 우선, ‘전략기술(미션형)’과 ‘기초연구’ 간의 예산 포트폴리오 정립이다. 미중 기술 전쟁 속에서 국가전략기술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트럼프 행정부처럼 기초과학을 외면한 채 단기 산업 성과에만 매몰되면 장기적인 기술 체력이 고갈된다. 또한, 관료주의적 연구 관리 시스템의 개혁이다.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낡은 평가 체계나 과제수주제(PBS)를 허물고, 실패를 자산으로 삼는 고위험·고수익(High-risk, High-reward) 연구 지원 모델을 어떻게 안착시킬 것인가가 관건이다. 아울러 저출생으로 인한 이공계 인력 부족 상황에서 미국이 폐쇄적 자국 우선주의로 밀어내는 글로벌 우수 인재들을 끌어안을 유연한 ‘친화적 인재 안보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도 시급하다. 한국의 생존 전략, 제3의 R&D 혁신 모델을 향하여 미국의 정치적 자해와 중국의 국가주도형 질주 사이에서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율성과 전략성이 조화를 이루는 고도화된 3세대 R&D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첫째, 정치와 정권으로부터 독립된 ‘장기 기초연구 방화벽(Firewall)’을 구축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R&D 예산이 흔들리고 연구 현장이 겪는 파행은 국가적 비극이다. 국가 미션형 전략기술 투자는 신속하고 과감하게 진행하되, 순수 기초과학과 원천 연구는 정치적 잣대나 단기 시장 논리로부터 완벽히 보호받는 장기 지원 시스템을 제도화해야 한다. 둘째, 세계 우수 인재를 흡수하는 ‘글로벌 R&D 블랙홀’로 거듭나야 한다. 미국이 비자 장벽과 정치적 검증으로 우수한 외국인 연구자들을 머뭇거리게 만들 때, 한국은 파격적인 연구 환경, 신분 보장, 정주 여건을 제공하여 이들을 적극 유치해야 한다. 인재 유입의 폐쇄성을 깨는 나라가 차세대 기술 전쟁의 승자가 될 것이다. 셋째, 에너지, 데이터, 지역 거점이 결합된 제조업 기반의 독자적 초격차를 확보해야 한다. 소프트웨어에 편중되는 미국이나 규격화된 물량 공세를 퍼붓는 중국과 달리 한국은 전력 공급(Watt)과 AI 데이터 인프라(Bit), 그리고 지역 산학연을 연계한 고도화된 제조업 R&D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대체 불가능한 핵심 기술 마이크로 거점을 전국 단위로 배치하는 전략이다. 트럼프의 과학경시는 전 세계 기술 지형을 흔드는 거대한 위기다. 그러나 역사는 시스템이 휘청일 때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스스로를 혁신한 자에게 새로운 패권을 허락했다. 정치적 파행을 넘어서는 학문의 자유, 그리고 정교한 국가 전략이 어우러진 R&D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미중 격돌이라는 격랑 속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가장 확실한 생존법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트럼프의 과학경시…세계 기술패권의 판도가 바뀐다
  • [곽재원의 Now&Future] 동경대에서 한일 AI기술산업동맹을 생각하다 ③

    제3부. 경쟁을 넘어, 함께 세계를 설계할 시간 동경대 캠퍼스를 걸으며 필자가 떠올렸던 1990년대 초반의 모습은 이랬다. 당시 일본은 세계 제조업의 상징이었다. 미국은 정보통신 혁명의 출발점에 있었고, 한국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쉼 없이 달리던 산업국가였다. 그 무렵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가장 강한 경쟁자로 인식했다. 더 좋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경쟁했고, 더 많은 자동차를 팔기 위해 경쟁했으며, 더 높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경쟁했다. 그 경쟁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한국은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와 디지털 제조 역량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고, 일본은 정밀 제조와 소재·부품·장비,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경쟁은 양국을 성장시켰고, 오늘의 산업 기반을 만들었다.그러나 AI 시대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경쟁만으로도 충분한가. AI는 단순히 새로운 산업 하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제조업과 금융, 의료와 교육, 국방과 물류, 에너지와 도시를 하나의 지능형 시스템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문명이다. 따라서 AI 시대의 승부는 개별 기업이나 단일 산업이 아니라, 얼마나 큰 생태계를 만들고 얼마나 많은 국가와 기술을 연결하느냐에서 결정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은 경쟁을 포기할 이유도 없지만, 협력을 미룰 이유는 더더욱 없다. 한국은 AI와 반도체, 디지털 전환과 실행력이 강하다. 일본은 정밀 제조와 로봇, 소재·부품·장비와 품질관리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양국이 가장 잘하는 분야는 서로 다르지만, 미래 산업이 요구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는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그래서 필자는 '한일 AI 기술산업동맹'을 단순한 협력사업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 모델로 바라본다. 이 동맹은 정치적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대학과 연구소가 공동으로 연구하고, 기업이 함께 투자하며, 스타트업이 자유롭게 오가고, 표준과 특허를 공동으로 만들며, AI 인재가 국경을 넘나드는 생태계가 구축될 때 비로소 실체를 갖게 된다. 양국 정부가 추진할 과제도 분명하다. 첫째, '한일 AI 기술산업위원회'와 같은 상설 협의체를 만들어 반도체·AI·로봇·에너지·데이터센터를 아우르는 공동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대학과 연구기관을 연결하는 '한일 AI 공동연구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필자가 다시 찾은 동경대와 한국의 주요 대학, 연구소들이 하나의 혁신 네트워크로 연결된다면 그 자체가 동북아 최대의 지식 생태계가 될 수 있다. 셋째, 기업 간 협력도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 공동 연구개발을 넘어 공동 투자와 공동 표준, 공동 브랜드 전략으로 확장해야 한다. AI Factory, 차세대 반도체, 휴머노이드 로봇, 자율주행, 양자기술은 이러한 협력이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들이다. 넷째, 협력의 무대는 처음부터 세계여야 한다. 아세안과 인도, 중동, 유럽, 미국을 함께 연결하는 글로벌 공급망과 시장 전략을 세울 때 비로소 한일 협력은 국제적 설득력을 갖는다. 이러한 협력은 어느 한 나라의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이 강해지고 일본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며, 일본이 앞서고 한국이 뒤처지는 것도 아니다. AI 시대의 산업질서는 제로섬이 아니라 네트워크 경쟁이다. 연결이 많을수록 가치가 커지고, 협력이 깊을수록 혁신의 속도는 빨라진다. 동경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시작된 필자의 생각은 결국 하나의 확신으로 이어졌다. 20세기 한일 관계의 키워드는 '추격'과 '경쟁'이었다. 21세기의 키워드는 '공동 설계(Co-design)'와 '공동 창조(Co-creation)'가 되어야 한다. AI 시대는 어느 한 나라가 홀로 미래를 독점하는 시대가 아니다. 서로 다른 강점을 연결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국가가 세계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동경대를 뒤로하며 필자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한국과 일본이 손을 맞잡는다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답은 생각보다 크다. 양국 산업의 미래만이 아니다. 아시아의 혁신 생태계를 바꾸고, 세계 공급망의 새로운 축을 만들며, AI 시대의 산업문명을 함께 설계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를 잊는 용기가 아니다. 과거를 직시하면서도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지혜다. 경쟁은 양국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협력은 세계를 움직일 차례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동경대에서 한일 AI기술산업동맹을 생각하다 ③
  • [곽재원의 Now&Future] 동경대에서 한일 AI기술산업동맹을 생각하다 ②

    제2부. 경쟁을 넘어 동맹으로, AI 시대의 새로운 산업지도 필자가 이번에 정리한 세 장의 인포그래픽은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한국과 일본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을 함께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세계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첫 번째 <그림1> 「한국 vs 일본 산업경쟁력 비교(SWOT 분석)」​은 감정이 아니라 산업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의 강점은 AI와 반도체, 초고속 디지털 인프라, 그리고 무엇보다 뛰어난 실행력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HBM 메모리와 첨단 제조 역량은 AI 시대의 핵심 자산이다.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제품으로 만들고 시장으로 연결하는 속도는 한국 산업이 가진 독보적인 경쟁력이다. 반면 일본의 강점은 다른 곳에 있다. 산업용 로봇, 정밀 제조, 소재·부품·장비, 품질관리, 장수기업이 축적한 생산기술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를 실제 공장과 산업 현장에 구현하려면 일본이 오랫동안 축적해 온 제조기술이 필요하다. 이 비교는 승자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AI 시대에는 두 나라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메워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은 AI가 강하지만 산업용 로봇과 초정밀 장비에서는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 일본은 제조기술이 세계 최고지만 글로벌 AI 플랫폼과 반도체 메모리, 디지털 전환 속도에서는 한국과 협력할 여지가 크다. 다시 말해 한국은 'Speed & Scale', 일본은 'Depth & Quality'​를 대표한다. AI 시대에는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비로소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두 번째 <그림 2> 「한일협력을 통한 글로벌 톱 전략」은 경쟁 이후의 미래를 제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협력의 대상이 단순히 반도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는 앞으로 양국이 함께 추진해야 할 분야를 열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AI다. 생성형 AI와 산업 AI, 피지컬 AI, AI Factory 운영기술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데이터와 인재를 연결해야 한다. 둘째는 제조업이다. 독일이 'Industry 4.0'으로 제조혁신을 추진했다면 한국과 일본은 AI Factory를 중심으로 새로운 제조혁명을 함께 설계할 수 있다. 셋째는 반도체다. 한국의 메모리와 패키징, 일본의 소재·장비·정밀기술이 연결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공급망이 만들어질 것이다. 넷째는 소프트웨어다. AI 운영체제와 산업용 소프트웨어, 임베디드 시스템은 앞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다섯째는 플랫폼이다. AI 시대에는 플랫폼이 곧 시장이다. 한국의 디지털 서비스와 일본의 금융·산업 플랫폼이 연결된다면 새로운 아시아형 플랫폼 모델도 가능하다. 여섯째는 로봇이다. 휴머노이드와 산업용 로봇은 AI Factory의 마지막 퍼즐이다. 한국의 AI와 일본의 로봇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의 조합이 될 수 있다. 일곱째는 자동차다. 자동차는 이제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움직이는 AI 컴퓨터다. 현대차의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전략과 일본의 품질관리·부품기술이 만나면 미래 모빌리티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 수 있다. 여덟째는 소재·부품이다. 첨단산업은 소재가 결정한다. 반도체든 배터리든 양자기술이든 소재기술 없이는 세계 1등이 될 수 없다. 아홉째는 서비스 산업이다. AI 의료와 스마트 물류, 디지털 금융, 관광 플랫폼 등 서비스 산업 역시 제조업 못지않게 중요한 성장축이 될 것이다. 마지막은 글로벌 브랜드다. 브랜드는 기술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한국의 역동성과 일본의 신뢰가 결합된다면 세계 시장에서 새로운 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들 가능성도 충분하다. 세 번째 <그림 3> 「한일 AI 산업동맹이 바꾸는 세계지도」는 이러한 협력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한일 협력을 양국만의 문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AI 시대의 산업동맹은 처음부터 세계를 목표로 해야 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아세안과 인도다.세계 최대의 제조 성장지역이며 가장 빠르게 AI 수요가 증가하는 시장이다. 중동은 또 다른 축이다. 풍부한 자본과 에너지,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결합되면서 세계 최대의 AI 인프라 투자 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유럽 역시 중요한 협력 대상이다. 탄소중립과 스마트 제조, 로봇과 표준 분야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은 말할 필요도 없다.세계 최고의 AI 플랫폼과 반도체 설계기술을 가진 미국과 협력하면서 동시에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새로운 공급망을 구축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큰 전략적 공간이 열린다. 여기에서 필자는 하나의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고 싶다. '한일 AI 기술산업동맹(Korea–Japan AI Technology & Industry Alliance)'​이다. 이 동맹은 군사동맹도 아니고 정치동맹도 아니다. AI를 중심으로 반도체, 제조업, 로봇, 에너지, 데이터센터, 인재, 대학, 연구기관, 스타트업, 금융이 함께 움직이는 미래형 산업동맹이다. 20세기가 자동차와 철강, 석유를 중심으로 산업질서를 만들었다면, 21세기는 AI와 데이터, 반도체, 전력이 새로운 산업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그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큰 생태계를 설계하느냐다. AI 시대의 승자는 가장 뛰어난 기술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산업동맹을 구축한 나라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경쟁국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한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동경대에서 한일 AI기술산업동맹을 생각하다 ②
  • [곽재원의 Now&Future] 동경대에서 한일 AI기술산업동맹을 생각하다 ⓛ

    제1부, 동경대에서 떠오른 질문…왜 지금 한일인가 오늘 필자가 30여 년 전 다녔던 일본 동경대학의 중앙도서관과 이에 이웃한 공학부 건물을 지나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름 햇살 아래 익숙한 캠퍼스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공간을 둘러싼 시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학생 시절 이곳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세계 경제의 중심 화두는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이었고, 미국은 정보통신 혁명의 문을 막 열기 시작한 시기였다. 반도체와 자동차, 공작기계와 소재기술은 일본 경제의 상징이었고, 한국은 그 뒤를 부지런히 따라가는 산업국가였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동경대의 풍경은 그대로인데 세계 산업의 질서는 완전히 바뀌었다. 생성형 AI가 등장했고, AI Factory가 새로운 산업혁명의 상징이 되었으며,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로봇과 자율주행, 에너지와 소프트웨어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로 연결되고 있다. 제조업 중심의 경쟁은 AI를 중심으로 한 산업 생태계 경쟁으로 확장되었고, 국가 경쟁력의 정의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질문은 단순했다. "왜 지금 한국과 일본은 손을 잡고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은 과거를 잊자는 뜻도, 경쟁을 멈추자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자는 제안이다. AI 시대의 경쟁은 더 이상 한 나라가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GPU와 HBM,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전력과 통신망, 소재와 장비, 인재와 자본이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어야 비로소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산업은 점점 더 거대한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그 플랫폼은 국경을 넘어 형성되고 있다. 실제로 세계는 이미 새로운 산업동맹의 시대에 들어섰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AI 생태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동맹국들과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다. 유럽은 반도체와 친환경 산업을 중심으로 전략적 협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중동은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AI 데이터센터와 첨단기술 투자를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역시 거대한 시장과 인재를 기반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가장 가까운 경쟁자로 바라보는 데 익숙했다. 반도체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했고, 자동차에서도 세계 시장을 다투었으며, 디스플레이와 배터리에서도 선두를 놓고 겨루었다. 경쟁은 양국 산업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경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는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산업 전체를 연결하는 운영체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가 더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가보다 누가 AI 기반의 모빌리티 생태계를 구축하는가가 중요해졌고, 누가 더 좋은 반도체를 만드는가보다 누가 AI Factory 전체를 설계하고 운영하는가가 승부를 좌우한다. 경쟁의 단위가 기업에서 산업 생태계로, 산업 생태계에서 국가 연합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은 놀라울 정도로 상호보완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은 속도가 강하다. 메모리 반도체와 AI 인프라 구축, 디지털 전환과 실행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산업화하고 시장으로 연결하는 능력 역시 탁월하다. 반면 일본은 깊이가 강하다. 정밀 제조, 산업용 로봇, 소재·부품·장비, 품질관리와 장수 기업의 노하우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산업의 뿌리를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과 경험은 일본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이다. 속도와 깊이. AI 시대가 요구하는 두 축을 한국과 일본이 각각 강점으로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는 이 두 강점이 경쟁 관계 속에서 소모되었다면, 앞으로는 서로를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한일 AI 기술산업동맹을 생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역사 문제와 정치적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며, 양국 국민의 감정 역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산업과 기술은 감정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 공급망은 기다려주지 않고, AI 혁명은 어느 나라의 사정을 고려해 속도를 늦추지도 않는다. 선택을 미루는 동안 다른 국가들은 이미 새로운 동맹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동경대 캠퍼스를 걸으며 필자는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21세기 한일 관계의 핵심 질문은 과거처럼 "누가 더 강한가"​가 아니다. 새로운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한다면 세계는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AI 시대 동북아의 미래를 결정할 가장 중요한 전략 과제가 될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동경대에서 한일 AI기술산업동맹을 생각하다 ⓛ
  • [곽재원의 Now&Future] AI에 길을 묻자 한국의 길이 보였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그동안 정부가 내놓은 정책과 메시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필자는 세 가지 키워드에 주목했다. 첫째는 'AI 3대 강국'이라는 국가 비전이다. 둘째는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축으로 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다. 셋째는 진영보다 국익을 앞세우는 실용외교다. 각각은 과학기술정책과 산업정책, 외교정책으로 보이지만 이 세 가지를 하나의 축으로 연결해 보면 새로운 국가상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로 'AI 선도중견국(AI Leading Middle Power)'​이다. AI 3대 강국은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를, 3대 메가프로젝트는 이를 실현할 산업 기반을, 실용외교는 세계와 연결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 세 축이 하나로 결합할 때 비로소 한국형 AI 국가전략이 완성된다. 필자가 'AI 선도중견국'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즘 정책 책임자와 오피니언 리더들사이에 가장 빈번히 오가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인공지능 시대에 한국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짧지만 무거운 내용이다. 한국의 현실적 조건과 미래 가능성을 함께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국가 비전이 절실해졌다는 방증이다. 이 지점에서 ‘AI 선도중견국’의 개념을 좀 더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중견국은 단순히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있는 국내총생산이나 인구, 군사력의 중간 규모 나라를 의미하지 않는다. 국제정치에서 중견국은 강대국처럼 세계 질서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힘은 없지만 외교적 신뢰와 전문성, 국제적 연대를 통해 특정 의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를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중견국은 강대국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는 가교국가, 국제사회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조정국가, 다자주의를 지키는 규범국가의 역할을 맡아왔다. 한국은 이미 상당한 중견국적 자산을 갖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경제와 제조업, 반도체·자동차·배터리·조선·통신 산업, 높은 교육 수준과 연구개발 역량,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경험, 세계적인 문화 영향력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일본·유럽·아세안·중동과 폭넓은 경제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자산이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로, 기술을 수입하던 나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제품을 만드는 나라로 성장한 경험 역시 다른 중견국들이 쉽게 갖지 못한 자산이다. 그러나 중견국이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견국이 자신의 규모와 한계를 설명하는 말이라면 ‘선도’는 그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이다. 선도한다는 것은 모든 분야에서 세계 1등을 차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특정 분야에서 남보다 먼저 길을 열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며,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선도중견국은 작은 강대국이 아니다. 강대국의 축소판이 되려는 나라도 아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해 기술과 산업, 규범과 국제협력을 결합함으로써 세계의 변화를 촉진하는 국가다. AI 시대에는 이러한 선도중견국의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과거의 국력은 영토, 인구, 천연자원,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 규모에 크게 좌우됐다. 그러나 AI 시대의 국력은 연산능력, 데이터, 반도체, 소프트웨어, 전력, 인재, 산업현장, 제도적 신뢰와 국제 네트워크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다. 모든 자원을 자국 안에 보유하지 못하더라도 특정한 기술과 산업을 연결하고 빠르게 실증하며 국제표준으로 확산시키는 능력이 있다면 세계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바로 여기서 한국의 기회가 열린다. 한국은 미국처럼 거대 AI 플랫폼과 초대형 클라우드를 지배하지 못한다. 중국처럼 방대한 인구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국가 차원의 AI 생태계를 구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한국은 AI를 공장과 도시, 병원, 자동차, 로봇, 에너지, 국방, 농업에 적용할 수 있는 세계적 제조업과 산업 기반을 갖고 있다. AI 기술을 현실세계의 생산성과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능력에서 한국은 충분히 독자적인 길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이 AI 선도중견국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전략은 ‘AI 생산성 국가’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AI 경쟁은 주로 누가 더 큰 모델을 만들고, 더 많은 GPU를 확보하며,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하는가에 집중돼 왔다. 물론 이러한 기반은 중요하다. 그러나 AI의 최종 성과는 컴퓨팅 자원의 보유량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의 생산성이 얼마나 높아졌는가로 평가해야 한다. 기업이 AI를 활용해 제품 개발 기간을 줄이고, 공장의 불량률과 에너지 사용을 낮추며, 중소기업이 인력 부족을 극복하고, 병원이 더 정확하고 신속한 진료를 제공하며, 정부가 더 빠르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할 때 비로소 AI는 국가경쟁력이 된다. 한국의 AI 정책 목표도 ‘AI 기술 강국’에서 ‘AI 활용 강국’을 거쳐 ‘AI 생산성 강국’으로 진화해야 한다. 국가 AI 성과를 평가하는 지표 역시 모델 수나 GPU 숫자뿐 아니라 노동생산성, 제조원가, 서비스 처리시간, 중소기업 AI 활용률, 새로운 일자리와 산업의 창출로 바뀌어야 한다. 두 번째 전략은 한국을 ‘AI Factory 국가’로 전환하는 것이다. AI Factory는 단순히 기존 공장에 로봇 몇 대와 소프트웨어를 추가하는 스마트공장이 아니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AI 모델, 디지털트윈, 자율로봇, 통신망, 에너지 시스템이 결합해 공장 전체가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며 최적화되는 새로운 생산체계다. 한국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배터리, 기계, 바이오, 방산 등 세계적 제조업을 보유하고 있다. 이 산업들을 AI 기반으로 다시 설계할 수 있다면 한국은 범용 AI 모델 경쟁에서는 뒤처지더라도 산업 AI와 피지컬 AI에서는 세계적인 선도국이 될 수 있다. 제조현장을 가진 한국의 강점은 AI 시대에 낡은 유산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전략자산이 될 수 있다. 한국 제조업 전체를 거대한 AI 실험실이자 AI 생산성 플랫폼으로 바꾸는 국가적 전환이 필요하다. 세 번째 전략은 ‘AI 실증국가’다. 한국의 장점은 새로운 기술을 비교적 빠르게 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국토가 비교적 작고, 디지털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으며, 제조업과 도시서비스가 밀집돼 있어 기술의 실증과 확산에 유리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규제가 실증을 가로막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사업이 분절되며, 실증 결과가 전국적 확산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는 지역별 산업 특성을 활용한 국가 규모의 AI 실증체계가 필요하다. 수도권은 AI 서비스·플랫폼·금융, 충청권은 반도체·바이오, 울산과 경남은 자동차·조선·기계·방산, 광주·전남은 에너지·AI 생산성, 전북은 농생명·식품, 강원은 의료·관광 AI의 실증지역이 될 수 있다. 지역 특화산업과 AI 실증을 결합하면 지역균형발전과 국가경쟁력 향상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다. 규제특례, 실증, 안전성 검증, 성과평가, 제도개선을 하나의 순환체계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대한민국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AI테스트베드로 만드는 발상이다. 네 번째 전략은 ‘AI 연합설계국’이 되는 것이다. AI 시대에 어느 한 국가가 반도체, 클라우드, 데이터, 소프트웨어, 에너지, 인재를 모두 자급할 수는 없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수동적 위치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필요한 국가와 기업을 연결하는 능동적 네트워크 국가가 되어야 한다. 미국과는 AI 플랫폼·클라우드·안보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일본과는 로봇·소재·부품·제조 AI를 연결하며, 대만과는 반도체 공급망을 고도화해야 한다. 유럽과는 AI 규범·안전·그린 전환·산업표준에서 협력하고, 인도와는 인재와 소프트웨어, 아세안과는 제조업의 AI 전환, 중동과는 에너지·자본·데이터센터 분야의 협력을 확대할 수 있다. 한국은 이들을 연결해 아시아와 세계의 AI 공급망을 조직하는 ‘네트워크 빌더’가 되어야 한다. 이렇듯 AI 선도중견국은 국제규칙을 따르기만 하는 나라가 아니라 규칙을 제안하는 ‘룰 메이커’, 국제표준을 먼저 만드는 ‘스탠더드 세터’, 새로운 기술을 현실에서 검증하는 ‘테스트베드 국가’, 국가와 기업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빌더’여야 한다. 한국이 모든 AI 분야의 패권국이 될 수는 없지만 제조 AI, 피지컬 AI, 반도체, 로봇, AI 안전, 디지털 공공서비스와 같은 분야에서는 충분히 세계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운영체제도 달라져야 한다. AI를 과학기술 부처만의 정책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AI는 산업, 경제, 에너지, 교육, 노동, 외교, 안보, 복지, 지역정책을 모두 관통하는 국가전략이다. 대통령실과 국가AI전략위원회, 관계 부처와 지방정부, 기업과 대학·연구기관을 하나의 실행체계로 묶어야 한다. 한국이 보유한 GPU, 데이터센터, 전력, 데이터, 인재, 특허와 산업현장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AI 국가대차대조표’도 필요하다. 동시에 AI 전환의 혜택이 대기업과 수도권, 고숙련 인재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소기업과 지역, 청년과 고령층, 전환위험 노동자가 AI 변화에서 배제된다면 기술적으로 앞선 나라가 되더라도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선도국은 될 수 없다. AI 선도중견국은 기술적 경쟁력과 사회적 신뢰를 함께 갖춘 나라여야 한다. 한국의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AI 모델을 보유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GPU를 가진 나라가 되는 것도 현실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은 AI를 제조업과 공공서비스, 도시와 지역, 국민의 일상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세계가 AI 기술을 산업과 사회에 적용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참고하는 나라, 선진국과 신흥국을 연결하며 새로운 협력모델을 제시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 5년 뒤,10년 뒤의 한국은 세계 최대의 AI 국가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가 가장 많이 참고하는 AI 국가가 될 수 있다. 기술을 개발하고, 산업에 적용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국제규범을 만들고, 연합을 조직하는 능력을 함께 갖춘 나라다. 한국의 길은 작은 초강대국을 흉내 내는 데 있지 않다. 규모의 한계를 인정하되 전략의 수준을 높이고, 모든 분야를 좇기보다 선택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하며, 추종자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드는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이 가야 할 ‘AI 선도중견국’의 길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AI에 길을 묻자 한국의 길이 보였다
  • [곽재원의 Now&Future] 레버리지 ETF에서 본 공급망 사슬의 동조화

    지난 16일자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머리기사는 월가의 새로운 혼란 속에서 미국 칩 및 메모리 주가가 하락하고 있다는 소식을 무겁게 전했다. 이 경고는 연일 서울과 도쿄 증시를 강타하며 테크 시장 전체를 흔드는 대폭락과 맥락을 같이 한다. 시장이 출렁일 때마다 언론과 여론은 늘 눈에 보이는 명확한 희생양을 찾기 마련이다. 이번 조정 장세에서 지목된 대표적인 주범은 단연 금융공학이 낳은 양날의 검으로 불리는 레버리지 ETF다. 하지만 이 현상을 단순히 일부 고위험 금융 상품 때문에 시장이 망가졌다는 식의 얄팍한 책임 전가로 덮어버리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하는 일이다. 필자가 칼럼의 화두를 레버리지 ETF ‘때문에’가 아니라 레버리지 ETF ‘에서’ 본 공급망 사슬로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레버리지 ETF는 이번 폭락을 유도한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어차피 마주해야 했을 기술주 및 인공지능(AI) 밸류에이션의 대조정기라는 불가피한 시장의 흐름 속에서, 레버리지는 단지 그 조정 속도를 한 박자 빠르게 가속화하고 널리 전파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을 뿐이다. 진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핵심은 그 아래에 굳건히 도사리고 있는 글로벌 반도체 가치사슬의 초(超)동조화 구조, 그리고 유독 이 충격을 더 취약하게 받아내는 한국 자본시장의 체질적 한계다.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지난 상반기 동안 글로벌 증시를 지배했던 인공지능 혁명의 스토리는 지나치게 뜨거웠다. 엔비디아를 비롯한 하드웨어 공급망에 몰린 자금은 기업의 실제 이익 창출력보다 몇 걸음은 앞서 나간 상태였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이 퍼붓고 있는 천문학적인 설비투자 대비 실질적인 현금 회수 시점이 과연 언제인가에 대한 차가운 현실 검증은 금융 상품의 유무와 상관없이 어차피 도래할 수밖에 없었던 거시적 조정 과정이다. 다만 이 당연한 대조정의 계곡에서 레버리지 ETF는 하락의 경사도를 일시적으로 가파르게 만든 촉진제였다. 주가가 임계점 아래로 밀려나자 담보 가치 하락과 마진콜 압박을 이기지 못한 레버리지 상품들과 프로그램 매매가 기계적으로 기초자산을 청산하며 낙폭을 키웠을 뿐이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분석가들이 레버리지 ETF와 마진 계좌에서의 유동성 회수가 조정 압력을 키우고 있다고 진단한 것은 금융적 전파 경로를 설명한 것일 뿐, 레버리지 자체가 이 하락을 지어냈다는 뜻이 아니다.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밸류에이션의 과열이고, 레버리지는 이를 시장에 더 빨리 도달하게 만든 전령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가 진짜 깊게 이해해야 할 대목은 물리적 사슬과 유동성의 동조화다.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는 미국 설계에서 대만 위탁생산, 한국 메모리 공급, 일본 장비 및 소재로 정교하게 엮여 있다. 미국 빅테크의 투자 속도 조절 전망은 즉각 대만과 일본, 한국의 관련 수주 감소 우려로 전이된다. 이 물리적 사슬 위를 흐르는 금융 자본의 동조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다는 점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다. 특히 한국 시장은 이 동조화의 충격을 가장 맨몸으로 거칠게 받아냈다. 한국의 개인 투자자들은 미국 반도체 지수를 몇 배나 추종하는 레버리지 상품을 전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사들였다. 미국 증시의 자연스러운 미끄러짐이 한국 투자자들의 대규모 평가손실과 담보 부족을 낳고, 이것이 다시 국내 증시에서의 반대매매와 동반 패닉 셀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 것이다. 결국 레버리지 탓을 하기 전에 글로벌 벨트에 완전히 종속된 우리의 포트폴리오 구조와 거시경제적 취약성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 차가운 대조정의 시기는 한국의 경제 정책당국자들에게 단순한 상품 규제를 넘어선 체질 개선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던진다. 여론의 화살이 레버리지 ETF라는 금융 상품 자체로 향할 때 정책당국이 저지르기 가장 쉬운 실수는 가입 조건을 까다롭게 하겠다는 식의 단편적 규제다. 이는 본질을 외면한 미봉책에 불과하다. 오히려 당국은 글로벌 자본 이탈 시 외환 및 거시경제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미국 테크주의 기술적 청산 과정에서 기계적으로 빠져나가는 외화 유출이 원·달러 환율 급등을 부르고, 이것이 다시 외국인 투자자의 국내 증시 이탈을 자극하는 다중 악순환을 막는 거시건전성 정비가 훨씬 근본적이다. 동시에 국내 증시의 체질 강화와 변동성 완화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글로벌 시장이 기침할 때마다 한국 증시가 독감에 걸리는 이유는 시장의 체력이 얕기 때문이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국내 우량 기업들이 글로벌 매크로 유동성의 일시적 썰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본질 가치 지지선을 형성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확실히 다져주어야 한다. 투자자들 역시 이번 사태를 통해 금융 공학의 도구를 대하는 성숙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 레버리지를 투기가 아닌 속도 조절 장치로 이해해야 한다. 레버리지 상품은 시장이 확실한 방향성을 잡았을 때 일시적으로 기회비용을 줄이는 고난도 도구일 뿐, 장기적인 가치 투자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하락장에서 뼈아프게 작용하는 변동성 누적 감쇄 효과를 명확히 인지하고 극도로 절제된 자금 관리를 실천해야 한다. 또한 포트폴리오의 연결성을 입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엔비디아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분산해서 들고 있으니 안전하다는 것은 허상이다. 이들은 물리적 공급망과 글로벌 유동성 체인이라는 단 하나의 끈으로 묶인 공동 운명체다. 업황과 매크로 유동성의 상관관계가 낮은 비동조화 자산군을 반드시 일정 비율 섞어야만, 레버리지가 시장을 뒤흔드는 조정 국면에서도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 레버리지 ETF가 시장을 망쳤다는 일각의 목소리는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쳐다보는 격이다. 지금의 조정은 가야 할 길을 가는 것뿐이며, 레버리지는 단지 그 도착 시간을 조금 앞당겼을 따름이다. 소란스러운 유동성의 소음을 걷어내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기업이 실제로 벌어들이는 이익과, 그 이익을 지탱하는 글로벌 공급망 속 독점적 지위다. 시장의 단기적인 광풍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공급망 사슬의 본질적인 구도를 냉정하게 읽어내며 대조정기 이후의 진짜 강자를 골라내는 혜안이 절실한 시점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레버리지 ETF에서 본 공급망 사슬의 동조화
  • [곽재원의 Now&Future] 4755조의 갈림길… 팹만 키울까, 판을 키울까

    인공지능(AI) 붐이 세계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 수혜의 지형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비대칭이 보인다. 반도체 최강국이라 불리는 한국보다 '잃어버린 30년'의 대명사였던 일본이 훨씬 넓고 두텁게 AI 붐의 과실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숫자가 말해주는 역전 일본반도체제조장비협회(SEAJ)에 따르면 2025회계연도 일본산 반도체 장비 판매액은 사상 처음으로 5조엔 벽을 넘어섰고, 2026회계연도에는 전년 대비 12% 늘어난 5조5000억엔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 흐름을 타고 올해 상반기 외국인 투자자의 일본 주식 순매수 규모는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인 10조9391억엔을 기록했다. 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그 자금의 방향이다. 시장에서는 글로벌 자금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한국 반도체 대장주 대신 일본의 반도체 공급망 종목으로 향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도쿄일렉트론(장비), 어드밴티스트(검사장비), 스크린홀딩스·고쿠사이일렉트릭(웨이퍼 세정·열처리), 아지노모토(반도체 절연재), 후지쿠라(광섬유) 등 업종도 규모도 제각각인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단 하나, 모두 AI 반도체가 만들어지는 공정 어딘가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닛케이225지수가 사상 처음 7만선을 돌파하며 시장에서는 "일본 증시가 더 이상 전통 제조업 중심 시장이 아니라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수혜 시장으로 재평가받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엔화와 자동차가 움직이던 시장이 이제는 AI와 반도체가 지수를 결정하는 시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완제품 챔피언' 모델의 그늘 한국 반도체 산업은 분명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제조업 생산의 약 10%, 수출의 약 20%를 차지할 만큼 비중도 크다. 하지만 이 성공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소수의 완제품 기업에 고도로 집중된 구조에서 나온다. 재벌 중심의 수직계열화와 '선택과 집중', 이는 짧은 기간에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만들어낸 한국형 성공 방정식이었다. 문제는 이 방정식이 AI 시대의 산업 지형과 잘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순식간에 위기에 몰렸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불화수소 국산화 이후 반도체 핵심 품목의 일본 수입 비중은 2018년 34.4%에서 약 24.9%까지 낮아졌지만 AI 서버용 고성능 반도체 기판(ABF)·코터(축 연결쐐기)·디벨로퍼 같은 핵심 공정 소재·장비의 구조적 의존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완제품에서는 세계를 제패했지만 그 완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상류(上流) 생태계는 취약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제품 국가의 함정'이다. 소수의 챔피언 기업이 최종 제품 시장을 장악하는 모델은 그 시장의 사이클이 다운턴이든 지정학적 충격이든지 간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게다가 후방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생태계가 얇으면 완제품 하나가 흔들릴 때 기댈 언덕이 없다. 일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긴 이유 일본의 반전은 정반대의 경로에서 나왔다. 가전과 스마트폰 같은 완제품 경쟁에서는 밀렸지만 그사이 정밀가공·소재기술의 축적은 자동차·공작기계·전자 등 여러 산업에 걸쳐 저변화되며 오히려 살아남았다. AI 붐이 터지자 이 저변이 한꺼번에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첨단 반도체 공정에서 회자되는 "ASML이 찍고, TEL(도쿄일렉트론)이 감싼다"는 표현은 이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노광은 네덜란드가, 그 앞뒤 공정의 상당 부분은 일본이 쥐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반도체 미세화가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부상한 '어드밴스드 패키징' 경쟁까지 더해지면 정밀 가공에 강점을 가진 일본 장비사들의 입지는 한층 더 공고해진다. 즉 일본은 완제품이 아니라 '공정 그 자체'를 지배하는 전략을 택했다. AI 붐이 GPU로 튀든, HBM으로 튀든, 파운드리 증설로 튀든 그 흐름이 어디로 향하더라도 일본은 공정망 어딘가에 걸려 있다. 베어링 같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부품까지 수혜 목록에 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폭이 넓다는 것은 결국 리스크가 분산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협력의 실마리, 그러나 근본 처방은 아니다 물론 희망적인 신호도 있다. 지난 5월 도쿄에서 열린 '한·일 비즈니스 플라자'에서 한국 측은 "한국은 제조와 양산 역량을, 일본은 소재와 장비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협력을 통한 공급망 구축을 제안했다. 한국의 메모리 생산력과 일본의 소부장 기술력을 결합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자는 구상이다. 경쟁 일변도로만 여겨졌던 한·일 반도체 관계를 수직적 분업 관계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방향 자체는 옳다. 하지만 협력은 완제품 국가의 구조적 함정을 근본적으로 해소해 주지는 않는다. 협력은 의존을 관리하는 방법이지 저변을 스스로 넓히는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왜 반세기 가까이 반도체 완제품 챔피언을 키우면서도 그 뒤를 받치는 소부장 생태계를 두텁게 키우지 못했는가. 소프트웨어에 쏠린 시선, 다시 제조업으로 한국은 AI 경쟁을 이야기할 때 유독 LLM 개발이나 AI 서비스 쪽에 시선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중요한 영역이다. 하지만 AI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소프트웨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반도체 생산능력과 제조장비, 소재, 전력 인프라, 데이터센터까지 아우르는 산업 생태계 전체가 곧 국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4755조원의 결단 - 방향은 옳다, 그러나 절반의 답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6월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는 눈여겨볼 장면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이 자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나란히 등장해 각각 2655조원, 2100조원, 총 4755조원에 이르는 국내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국가 예산의 6배가 넘는 규모다. 이 대통령은 두 회장을 향해 "국가영웅, 국민영웅"이라 칭하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내용을 뜯어보면 이 투자는 단순한 반도체 증설이 아니다. 삼성은 평택·용인 기존 클러스터 확장(2030조원)에 더해 호남(광주) 신규 반도체 클러스터, 충남권 HBM 패키징 팹, 영남권 로봇·피지컬 AI·전고체 배터리 사업까지 아우른다. SK는 2035년까지 전국에 15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만드는 동시에 용인·청주·서남권을 잇는 메모리 생산벨트 구축에 나선다. 여기에 GS그룹도 강원 동해에 아시아 최대급 AI 데이터센터 캠퍼스를 짓겠다며 가세했다. 반도체 팹, HBM 패키징, 데이터센터, 로봇·피지컬 AI, 차세대 배터리 등 정부가 밝힌 삼각축(반도체·피지컬AI·AI데이터센터)대로 수도권에 갇혀 있던 투자가 호남·충청·영남으로 퍼지는 모양새다. 바로 여기서 앞서 지적한 것을 소환해 보자. 지금까지 한국의 반도체 투자는 대체로 완제품 팹 증설, 즉 '더 많이, 더 빨리 만드는' 방향에 집중되었다. 이번 메가프로젝트가 다른 것은 데이터센터·로봇·피지컬 AI·차세대 배터리까지 폭을 넓혔다는 점이다. 완제품 하나에 쏠려 있던 베팅이 처음으로 AI 생태계 전반으로 분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방향은 분명히 옳다. 다만 이 투자가 진짜 '완제품 국가의 함정'을 넘어서는 계기가 되려면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하다. 일본이 넓은 수혜를 누리는 이유는 팹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팹을 돌리는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층이 두껍기 때문이었다. 지금 발표된 4755조원 가운데 얼마만큼이 완제품 팹과 데이터센터 건설로, 또 얼마만큼이 국내 소부장·후방 산업 생태계를 키우는 쪽으로 흘러가는지는 아직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팹은 지어졌지만 그 안을 채우는 장비와 소재는 여전히 수입에 의존한다면 이번 투자는 규모만 커진 '완제품 챔피언 모델의 확장판'에 그칠 수 있다. 만년의 약점을 넘어설 절호의 기회 그럼에도 이번 발표는 한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안고 있던 만년의 약점인 좁은 수혜 구조를 정면으로 해소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임은 분명하다. 국가 예산의 6배에 이르는 자본이, 그것도 정부와 양대 그룹이 정치적 명운을 걸고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순간은 흔치 않다. 이 자본이 반도체 팹 증설에만 쓰인다면 우리는 또 한번 같은 함정에 빠질 것이고 반대로 이 기회를 소부장 생태계와 후방 공급망을 두껍게 만드는 데 함께 쓴다면 한국은 처음으로 '넓은 수혜'를 가진 제조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관건은 속도가 아니라 배분이다. 정부가 밝힌 것처럼 청와대에 직할 담당관을 두고 신속하게 집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 천문학적 자본 가운데 얼마가 완제품 팹을 세우는 데 쓰이고, 얼마가 그 팹을 채울 장비·소재·부품 기업을 국내에서 길러내는 데 쓰이느냐다. 일본이 반세기에 걸쳐 축적한 저변을 한국은 이번 메가프로젝트를 지렛대 삼아 훨씬 짧은 시간에 만들어낼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 잠재력을 실제 생태계의 두께로 바꿔내느냐가 이 역사적 투자 발표를 '진짜 대도약'과 '규모만 큰 반복'으로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4755조의 갈림길… 팹만 키울까, 판을 키울까
  • [곽재원의 Now&Future] 'AI 금융 허브' 꿈꾸는 서울…새로운 기회이자 시험대

    어제(7월 7일) 세계 투자자들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서울 증시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AI 반도체 관련 종목이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코스피가 약세를 보였고, 몇 시간 뒤 문을 연 뉴욕시장에서도 AI 관련 종목들이 동반 약세를 나타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AI 투자 사이클의 지속 가능성과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우려를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고, 서울에서 형성된 투자심리는 시간대를 넘어 뉴욕으로 이어졌다. 물론 뉴욕 증시가 하루의 등락을 삼성전자 한 종목 때문에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금리, 달러, 고용지표와 같은 거시 변수는 여전히 세계 금융시장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나 이날 시장이 보여준 장면은 AI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AI 공급망에 관한 중요한 신호는 뉴욕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서울과 타이베이에서 형성된 가격이 뉴욕 AI 기업들의 가치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시장 현상이 아니다. 세계 자본시장의 작동 원리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 증시는 하나의 질서 속에서 움직였다. 뉴욕이 하루의 방향을 결정하면 도쿄가 반응하고, 서울과 홍콩이 그 흐름을 이어받았으며, 유럽이 마지막 바통을 넘겨받았다. 세계의 자금은 시간대를 따라 이동했고, 월스트리트는 언제나 그 출발점이었다. 한국 투자자들은 밤사이 뉴욕시장의 움직임을 확인한 뒤 아침 투자전략을 세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AI 혁명은 이러한 익숙한 질서에 균열을 만들고 있다. AI 산업은 자동차나 스마트폰 산업과 다르다. 하나의 완성품 기업이 시장을 이끄는 구조가 아니라 GPU, HBM, 첨단 패키징, 파운드리, 데이터센터, 전력, 네트워크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움직인다. 어느 한 곳에서 이상 신호가 발생하면 그 충격은 즉시 전체 가치사슬로 확산된다. 바로 이 점이 금융시장에도 새로운 변화를 만들고 있다. 과거 금융시장이 '시간(Time Zone)'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AI 시대의 금융시장은 '공급망(Supply Chain)'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투자자들은 뉴욕의 전날 주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HBM 가격과 반도체 기업의 실적 전망, 타이베이의 파운드리 가동률, 미국 빅테크의 AI 투자계획을 하나의 연결된 시스템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변화는 하나의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필자는 이를 'AI Street'​라고 부르고자 한다. AI Street는 특정한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울, 타이베이, 실리콘밸리, 뉴욕을 하나로 연결하는 새로운 금융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월스트리트가 세계의 자본이 모이는 상징이었다면, AI Street는 AI 공급망의 가치가 가장 먼저 가격에 반영되고, 그 가격이 다시 세계 자본의 방향을 결정하는 새로운 금융 공간이다. 20세기에는 자본이 기술을 평가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투자자들이 그 가치를 판단했고, 그 결과가 주가에 반영됐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그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기술 공급망의 변화가 자본의 움직임을 결정한다. GPU 공급이 흔들리면 뉴욕이 흔들리고, HBM 공급 전망이 바뀌면 세계 AI 기업들의 가치평가가 동시에 수정된다. 자본이 기술을 평가하던 시대에서 기술 공급망이 자본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 속에서 서울의 위치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오랫동안 서울 증시는 세계 금융의 '수용자'였다. 뉴욕에서 결정된 흐름을 받아들이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AI 시대의 서울은 점차 AI 공급망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가장 먼저 가격에 반영하는 시장으로 변하고 있다. 이는 서울이 뉴욕을 대신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AI 투자자들이 뉴욕을 보기 전에 서울을 먼저 주목해야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는 한국 경제에 역사적인 기회다. 제조강국으로 축적해 온 반도체 경쟁력이 금융시장의 위상까지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술력이 자본의 흐름을 움직이는 시대, 서울은 더 이상 글로벌 시장의 변화를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도시가 아니라 세계 AI 산업의 체온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선행시장'으로 진화할 가능성을 갖게 됐다. 그러나 기회가 커질수록 위험도 함께 커진다. 세계 자본의 시선이 서울을 향한다는 것은 세계 자금의 변동성이 가장 먼저 서울을 통과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AI Street는 축복인 동시에 새로운 시험대다. 서울이 AI Street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은 분명 한국 경제에 새로운 기회다. 그러나 세계 금융의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많은 자금이 몰리는 시장은 언제나 가장 큰 변동성을 함께 감당해야 했다. 기회와 위험은 언제나 같은 문을 통해 들어온다. AI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다. AI 산업의 성장 속도가 빨라질수록 세계 자금은 AI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더욱 집중될 것이다. 한국은 HBM과 첨단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시장이 확대될수록 서울 증시는 글로벌 AI 자금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시장 가운데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자본은 언제나 냉정하다. 기술이 좋다고 해서 자금이 영원히 머무는 것은 아니다. 성장의 기대가 꺾이거나 공급망에 균열이 생긴다고 판단하는 순간, 국제 자금은 들어올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빠져나간다. 필자는 이를 '플래시 캐피털(Flash Capital)'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과거 외국인 자금도 빠르게 움직였지만 AI 시대의 자금 이동은 훨씬 더 즉각적이다. 인공지능 알고리즘과 초고속 거래, 글로벌 ETF, 패시브 펀드가 결합하면서 시장의 평가가 바뀌는 순간 수십조 원 규모의 자금이 단기간에 이동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AI Street는 세계 자본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공간인 동시에 가장 먼저 떠나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서울과 타이베이는 이러한 구조적 특성을 함께 갖고 있다. 두 시장 모두 AI 공급망의 핵심 거점이라는 점에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금융시장 규모는 여전히 미국에 비해 작다. 시장이 작다는 것은 상승기에는 높은 탄력을 의미하지만, 충격이 발생했을 때는 변동성이 더욱 크게 확대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AI Street는 월스트리트와 다른 숙명을 안고 있다. 월스트리트는 세계 자본이 모이는 중심지이기 때문에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크다. 반면 서울과 타이베이는 AI 공급망의 중심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외부 충격을 완충할 금융의 깊이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AI 산업이 성장할수록 한국의 기술 경쟁력은 높아질 수 있지만 동시에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함께 키우지 못한다면 기술의 성공이 오히려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한국이 고민해야 할 것은 반도체 산업만이 아니다. AI 시대에는 제조 경쟁력과 금융 경쟁력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이 존재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계 자금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금융 인프라, AI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할 벤처캐피털과 장기 투자자, AI 산업을 이해하는 자본시장, 그리고 글로벌 투자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제도가 함께 갖춰질 때 비로소 서울은 진정한 AI 금융허브로 성장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한다. 한국은 AI 반도체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AI 시대의 자본이 가장 신뢰하는 시장이 될 것인가. 전자는 제조의 경쟁력에 관한 이야기이고 후자는 국가 시스템의 경쟁력에 관한 이야기다. AI 시대의 승자는 뛰어난 기업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뛰어난 기업을 세계 자본과 연결하는 금융시장, 혁신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연구개발 생태계, 장기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와 거버넌스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국가 전체가 경쟁력을 갖는다. AI 경쟁은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혁신 생태계의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AI를 기술혁명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AI는 금융혁명이기도 하다. 기술의 중심이 바뀌면 자본의 흐름도 바뀌고, 자본의 흐름이 바뀌면 세계 금융의 지도 역시 다시 그려진다. 20세기 세계 금융은 월스트리트가 시간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AI 시대의 금융은 공급망이 시간을 앞서기 시작했다. 서울과 타이베이는 더 이상 뉴욕의 결과를 확인하는 시장에 머물지 않는다. AI 공급망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가격에 반영하고, 그 신호가 다시 뉴욕의 투자심리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것이 AI Street의 본질이다. AI Street는 단순한 주식시장의 별명이 아니다. 그것은 AI가 세계 자본시장의 질서를 어떻게 다시 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다. 서울은 지금 역사적인 갈림길에 서 있다. AI Street는 세계 자본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길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먼저 등을 돌리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향할지는 반도체 기술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금융의 신뢰, 시장의 깊이, 제도의 안정성, 그리고 국가 전략이 함께 만들어 갈 미래다. AI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더 이상 생산량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세계 자본이 어느 나라의 기술을 가장 먼저 믿고, 어느 시장에서 미래의 가치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가가 새로운 경쟁력이 된다. 월스트리트가 지난 한 세기의 금융을 상징했다면, 앞으로의 시대는 AI Street가 세계 경제의 새로운 좌표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한가운데에 지금 서울이 서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AI 금융 허브 꿈꾸는 서울…새로운 기회이자 시험대
  • [곽재원의 Now&Future] 메타에서 시작한 AI 반도체 주식 급락 나비효과

    “우리 AI 서버 남는 거 외부에 빌려줄게.” 어제 메타(Meta)가 던진 이 한마디가 글로벌 금융시장과 한국 반도체 업계를 강타했다. 시장은 이 평범해 보이는 사업 계획을 전혀 다른 뜻으로 번역해 받아들였다. “우리 이제 AI 반도체 살 만큼 다 샀고, 시장에 칩이 넘쳐나기 시작했어.” 빅테크 기업의 미시적인 전략 변화가 글로벌 공급망의 종착역에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 폭락으로 이어진 이번 사태는 지금의 글로벌 테크 생태계가 얼마나 긴밀하고도 취약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나비효과’다. 실리콘밸리에서 불어온 미풍이 어떻게 한국 증시를 뒤흔드는 폭풍우가 되었는지 그 정교한 인과관계의 도미노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발단은 월가의 독촉과 메타의 궁여지책에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메타를 비롯한 빅테크 기업들은 인공지능(AI) 패권을 잡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올해 메타의 AI 인프라 투자 규모는 최대 1,450억 달러(약 225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시장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그 막대한 투자금은 언제, 어떻게 회수할 것인가"라는 월가의 날 선 의구심 앞에 마크 저커버그 CEO는 수익성 모델을 증명해야만 하는 압박에 직면했다. 이 시점에 터져 나온 블룸버그통신의 보도는 메타의 타개책을 공개한 것이다. 자사 데이터센터의 유휴 연산 자원과 AI 모델을 외부에 임대하는 ‘클라우드 인프라 사업’ 진출 검토 소식이었다. 메타 투자자들은 환호했다. 비용 덩어리였던 데이터센터가 드디어 자체적인 수익을 내기 시작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메타의 주가는 8% 이상 폭등했다. 그러나 메타 주가의 환호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체 기술 시장과 반도체 분석가들의 시선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메타의 발표 이면에 숨겨진 거대한 경고 신호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바로 ‘공급 과잉’의 징후다. 불과 얼마 전까지 글로벌 테크 기업들은 엔비디아의 AI 칩을 하나라도 더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메타의 입에서 "연산 자원이 남아서 외부에 판다"는 말이 나왔다. 이는 AI 컴퓨팅 파워의 공급이 이미 수요를 초과하기 시작했다는 강력한 방증이다. 시장은 즉각 역발상적 초점에 주목했다. 인프라가 남아돈다면 메타는 물론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대형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앞으로 비싼 반도체를 추가로 구매하며 데이터센터를 무한정 증설할 이유가 사라진다. 소문으로만 돌던 ‘AI 투자 피크아웃(정점 통과)’ 공포가 현실의 숫자로 다가온 순간이다. 이 나비효과의 최종 행선지는 거대한 제조 기지를 가진 아시아, 특히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었다. AI 인프라 투자 둔화 우려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엔비디아의 주가를 끌어내렸고, 이는 곧바로 엔비디아 밸류체인의 핵심축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로 번졌다. AI 서버의 두뇌 역할을 하는 GPU에는 한국산 초고속 메모리인 HBM(고대역폭 메모리)이 필수적으로 대량 탑재된다. 메타의 자원 판매는 곧 빅테크들의 HBM 주문량 감소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데이터센터 증설 속도가 조절되면 범용 서버용 D램 수요마저 도미노처럼 꺾인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끝날 수 있다"는 공포가 시장을 지배하자 외국인과 기관들은 한국의 두 반도체 거인에 대한 매도 버튼을 사정없이 눌렀다. 이번 사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고질적인 약점을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냈다. 거대 빅테크들의 자본지출(CAPEX) 계획이나 말 한마디에 시가총액 수십조 원이 증발하는 구조는 하늘만 바라보며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천수답(天水沓) 농사’와 다를 바 없다. 메타가 남는 연산 자원을 팔아 클라우드 사업에 진출하겠다는 것은 하드웨어 장악력을 바탕으로 ‘소프트웨어 및 서비스 생태계’로 진화하겠다는 뜻이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그들이 설계한 판 위에서 부품을 가장 잘 만드는 제조업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공급 과잉 우려가 나올 때마다 주가가 널뛰기를 반복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주어진 과제는 명확하다. 단순히 엔비디아나 메타가 주문하는 규격에 맞춰 HBM을 대량 공급하는 ‘수동적 공급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AI 연산 구조를 최적화할 수 있는 커스텀(맞춤형) 칩 설계 능력을 강화하고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를 원스톱으로 묶는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해야만 빅테크의 독점적 수요에 휘둘리지 않는다. 결국 이번 ‘메타 쇼크’는 AI 산업이 무조건적인 인프라 구축의 시대를 지나 철저한 효율성과 수익성 검증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변곡점이다. 빅테크의 말 한마디에 한국의 핵심 산업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작금의 사태는우리가 구축한 AI 동맹의 연결고리가 얼마나 유기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태로운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날갯짓은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되었지만 폭풍우는 오늘도 서울 여의도와 경기도의 반도체 공장 위로 매섭게 쏟아지고 있다. 날씨를 바꿀 수 없다면 이제는 폭풍우에도 견딜 수 있는 우리만의 단단한 집을 지어야 할 시간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메타에서 시작한 AI 반도체 주식 급락 나비효과
  • [곽재원의 Now&Future] 이대통령, 중도실용주의를 '한국형 제3의 길 2.0'으로 구체화 할때  

    영국 정치권에는 요즘 하나의 흥미로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당의 차세대 지도자로 꼽히는 웨스 스트리팅 전 보건장관이 파이낸셜타임스(6월13일자)에 기고한 '진보적 자본주의(Progressive Capitalism)'가 그 출발점이다. 그의 주장은 의외로 단순하다. "부를 나누기 전에 먼저 부를 만들어야 한다." 진보정치가 성장보다 분배를 우선하는 시대는 끝나고 있으며, 이제는 기업과 시장을 혁신의 파트너로 삼아 새로운 성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성과는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진보적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이 글이 영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단순히 경제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AI 혁명과 저성장 시대를 맞아 진보정치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는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선언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 한국 역시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한국이 처한 현실은 영국과 다르다. 영국의 고민이 성장의 부족이라면, 한국의 고민은 성장의 분리다. 최근 한국 경제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와 조선, 방산, AI 산업은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와 수주를 이어가고 있다. 첨단기업들의 실적은 개선되고 주식시장도 강세를 이어간다. 국가 전체로 보면 성장의 동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청년들은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지방은 인구 감소와 산업 공동화를 걱정한다. 노인 빈곤은 여전히 심각한 사회문제로 남아 있다. 건설과 내수경제는 장기 침체의 부담을 안고 있다. 같은 나라 안에 서로 다른 두 개의 경제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른바 'K자형 경제'다. K의 위쪽에는 AI와 반도체, 첨단 제조업, 방산, 금융시장이 있다. 아래쪽에는 청년, 지방, 자영업, 노인, 침체된 내수가 있다. 한국의 과제는 성장 자체가 아니라 이 두 경제를 어떻게 연결할 것 인가에 있다. 이 점에서 영국 노동당의 진보적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그러나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다. 한국은 영국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적 전환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최근 정부가 보여주는 정책 방향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대통령 취임 이후 주요 연설과 공개 발언의 핵심 키워드를 정리해 보았다. AI, 성장, 민생, 혁신, 국민, 통합, 실용, 미래와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물론 워드 클라우드만으로 통치철학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 드러난 방향은 이념보다 문제 해결을 앞세우는 '중도 실용주의'라는 하나의 축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과제가 남는다. 중도 실용주의는 훌륭한 통치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태도만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통치의 태도는 국가철학으로 발전해야 하고, 국가철학은 경제모델로 구체화되어야 하며, 경제 모델은 다시 국민이 체감하는 정책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한국형 제3의 길 2.0'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생겨난다. 1990년대 토니 블레어가 제시했던 제3의 길은 시장경제와 복지국가를 화해시키려는 시도였다. 당시 영국의 과제는 신자유주의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AI 시대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AI는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인 동시에 자본과 데이터, 알고리즘의 가치를 폭발적으로 키우는 기술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국가는 단순히 성장과 분배를 조정하는 수준을 넘어 AI가 만들어내는 생산성을 어떻게 사회 전체의 기회로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한국형 제3의 길 2.0'은 영국과 다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핵심은 '생산성 공유국가(Productivity Sharing State)'다. 이는 부를 단순히 재분배하는 국가가 아니다. AI가 만들어내는 생산성 자체를 국민 모두가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국가다. AI 제조혁신이 중소기업으로 확산되고, AI 의료가 지방의 의료격차를 줄이며, AI 교육이 지역의 교육기회를 넓히고, AI 행정이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국가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것보다 성장의 원천을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역균형발전 역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지역은 더 이상 지원의 대상만이 아니다. AI 생산성을 실증하고 확산시키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광주·전남 통합이나 AI 실증지역 구상은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때 비로소 국가전략으로 연결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역에 예산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 새로운 생산성을 창출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야 K자형 경제의 두 갈래가 다시 하나의 성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 AI 시대의 정치는 성장과 분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정치가 아니다. 성장을 통해 포용을 가능하게 하고, 포용을 통해 성장을 지속시키는 선순환을 만드는 정치다. 그것이 영국이 말하는 진보적 자본주의를 넘어 한국이 만들어야 할 새로운 국가모델일 것이다. 20세기 영국의 제3의 길은 시장경제와 복지국가를 화해시키려 했다. 21세기 한국이 직면한 과제는 조금 다르다. AI 혁명은 성장의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으며, 한국은 성장의 부족이 아니라 성장의 분리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 서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이념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운영체제다. 중도 실용주의는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적인 통치철학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AI 시대에 걸맞은 국가 비전으로 발전해야 한다. '한국형 제3의 길 2.0'은 바로 그 비전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 영국이 진보적 자본주의를 통해 저성장의 해법을 찾고 있다면, 한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AI가 만들어내는 생산성을 국민 모두의 기회로 연결하는 생산성 공유국가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AI 시대 '한국형 제3의 길 2.0'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그 길이 열린다면 중도 실용주의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AI 시대 한국의 새로운 국가 운영 철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곽재원의 Now&Future] 이대통령,  중도실용주의를 한국형 제3의 길 2.0으로 구체화 할때    
runtime:0.07013(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