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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반대'는 그만, 대안으로 말하라
대한민국 보수가 가야 할 길 ⑥ 한국 정치는 언제나 극적이다. 정권이 교체되면 정치 구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경제 철학도 크게 달라진다. 지금은 진보 정권이 들어서 복지와 분배 중심의 정책을 강화하는 국면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 야당이 어떤 전략으로 국민 지지를 확보하고 경제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을까.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미래 비전을 보여주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처럼 기업이 경제성장의 핵심 엔진인 나라에서 보수의 경제 전략은 기업과 국민을 어떻게 연결 짓느냐가 핵심이 된다. 보수 정당은 전통적으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내세워 왔다. 그러나 이를 직접적으로 강조할 경우 재벌 편향이나 대기업 중심 이미지가 강화될 위험이 크다. 진보 진영은 늘 ‘재벌 특혜’라는 프레임을 덧씌우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가 내세워야 할 프레임은 이를 뛰어넘어야 한다. 기업의 성장이 곧 국민소득 향상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진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는 일본의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추진한 아베노믹스를 사례로 들었다. 아베 전 총리는 기업 세제 감면을 단순한 기업 혜택이 아니라 ‘임금 인상을 조건부’로 연계했다. 그 덕분에 정책은 기업 지원이 아니라 국민소득 증대로 이어졌고, 보수 집권당이면서도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권 이사는 “한국 보수 야당도 이런 전략적 설계가 필요하다. ‘기업이 잘돼야 국민이 잘산다’는 단순한 등식에서 더 나아가 ‘기업의 성과를 국민에게 환원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통적 논리라면 진보 정권이 분배와 복지에 집중할 때 보수는 미래 성장과 기술 투자를 앞세워야 한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보유한 분야, 다시 말해 반도체·AI·그린수소·바이오헬스 등 신산업을 중심으로 한국형 메가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이재명 정부가 야당보다 훨씬 미래지향적이고 망라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어 보수 야당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따라서 야당은 이런 정책의 핵심이 국가 주도가 아니라 민간 주도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뿐 아니라 스타트업과 중견기업이 중심이 되고, 정부는 규제 완화와 인프라 제공을 통해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보수의 경제 전략은 단순히 기업 편향이 아니라 ‘민간이 이끄는 국가 성장 프로젝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는 곧 '기업=국가 성장 파트너'라는 명확한 구도로 연결된다. 보수가 규제 완화를 외치면 곧바로 기득권 대기업의 편익으로 귀결될 수 있다. 무분별한 규제 완화는 국민적 지지를 얻기 어렵다. 대안은 명확하다. 규제혁신의 수혜를 스타트업과 지방 중소기업에 우선 배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규제 샌드박스’ 모델을 확산시켜야 한다. 혁신 기업이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수 있도록 일정 기간 규제를 유예하거나 실험적으로 풀어주는 방식이다. 이 모델은 단순히 경제정책 차원을 넘어 지역균형발전과도 연결된다. 지방의 중소기업과 청년 창업자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보수의 규제혁신은 '국민을 위한 혁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정치에서 숫자는 강력한 무기다. '성장률을 높이겠다'는 막연한 구호는 설득력이 약하다. 대신 보수 야당은 경제정책의 구체적인 성과지표를 제시해야 한다. 예컨대 청년 고용률 몇 % 달성, 가계 실질소득 몇 % 증가, 지역별 신산업 투자액 확대 등 이런 지표를 통해 정권 비판을 넘어 '우리가 집권하면 이렇게 달라진다'를 수치로 보여줄 수 있다. 경제정책이 국민 생활과 직접 연결된다는 확신을 줄 때 보수는 미래의 집권 세력으로서 신뢰를 쌓을 수 있다. 보수의 경제전략은 국민과의 소통 방식에서도 달라져야 한다. 단순히 정책 자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기업·정부·국민의 3자 동맹을 강조하며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온·오프라인 타운홀 미팅, 유튜브 경제 브리핑, SNS 경제 캠페인 등 국민과 직접 연결되는 플랫폼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도 현 정권이 야당보다 압도적인 강세를 보인다. 대만 국민당이 진행했던 ‘경제 현장 간담회’는 좋은 벤치마킹 사례다. 기업을 방문한 뒤 근로자, 지역 상인과 함께 공개 토론을 열어 경제 정책을 생활 현장에 맞춰 설명했다. 한국 보수 야당도 기업 방문과 지역 민생 현장을 결합한 ‘국민경제 소통 캠페인’을 통해 경제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다. 결국 보수 야당이 국민에게 각인시켜야 할 메시지는 단순하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곧 국민이 잘사는 나라'라는 공식이다. 단기 분배 정책은 당장의 만족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투자와 성장, 기회의 확대가 필요하다. 보수는 기술혁신과 투자 주도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성장은 곧 복지'라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진보가 복지를 앞세운다면 보수는 성장을 내세워야 한다. 국민에게는 선택지가 필요하다. 복지냐 성장이냐, 단기냐 장기냐, 재분배냐 투자냐. 이 구도가 분명해질 때 보수의 존재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렇듯 보수 야당이 국민에게 던질 수 있는 메시지는 예를 들어 '우리는 기업을 살려 국민을 살립니다. 성장은 곧 복지입니다' '기술혁신으로 내일의 일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지방에도, 청년에게도, 중소기업에도 기회가 돌아가는 경제를 만들겠습니다' 등이 있을 수 있겠다. 이 메시지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전략과 정책으로 뒷받침될 때 국민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진보정권 시대일수록 보수 야당의 경제 리더십은 단순한 견제가 아니라 대안과 혁신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 보수가 국민의 선택을 다시 얻는 길이다. 최근 오피니언 리더들이 모이는 한 포럼에서 ‘AI 강국 건설, 보수 야당이 취해야 할 길’이란 주제로 논의가 있었다. 이재명 정권이 내세우고 있는 최중요 경제 전략은 단연 ‘AI 강국 건설’이다. 정부는 인공지능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규정하며 대규모 재정 투입과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선두를 추격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국민 여론 역시 총론에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AI는 시대적 대세이고, 한국 경제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반드시 매달려야 할 분야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문제는 각론이다.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재정과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수 야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은 국민적 호응을 얻기 어렵다. 그렇다고 무조건 동조한다면 존재감이 사라진다. AI 강국이라는 국가적 비전에는 동의하되 실행 방식과 정책 수단에서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향후 수권정당으로서 입지를 다지는 길이다. AI 강국은 특정 정권의 과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과제다. 지금 세계는 미국, 중국, 유럽이 치열한 AI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이 뒤처지면 경제와 안보 모두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보수 야당이 이 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국민 눈높이에도 맞지 않고 장래의 전략적 선택지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 야당이 취해야 할 기본 태도는 ‘조건부 동의’다. 즉, AI 강국이라는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해서는 철저히 검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길은 맞지만 방법은 더 정교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이 포럼에서는 진보정권 방식의 문제점이 지적됐다. 현 정권의 AI 전략은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을 노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재정 의존적 성격이다. 대규모 예산을 앞세운 국가 프로젝트는 단기간 효과는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재정 건전성을 훼손한다. 특히 고령화와 복지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AI 분야까지 막대한 지출을 감당하는 것은 미래 세대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둘째, 생태계 불균형이다. 정부 주도의 지원은 대기업 위주로 집중될 위험이 크다. 이 경우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혁신 역량은 위축되고, 오히려 산업 다이내믹스가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셋째, 제도적 불투명성이다. AI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신뢰성이 핵심이다. 그런데 정책 과정에서 특정 기업·집단과 유착되거나 불투명한 지원 구조가 발생하면 사회적 반발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단순한 정치적 반대를 넘어 국민들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우려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수 야당은 이를 ‘건설적 비판’의 지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와 함께 보수 야당도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 비판만으로는 정치적 존재감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수 야당은 ‘보수식 AI 국가 전략’을 분명하게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시행 저스트 이코노믹스 논설실장은 다음과 같이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 민간 주도-정부 촉진자 모델이다. 정부는 인프라 제공, 제도 정비, 규제 완화 등 큰 그림에 집중하고 실제 투자와 혁신은 민간이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길을 닦고, 기업은 달린다'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둘째, AI와 일자리의 조화를 강조해야 한다. 국민의 가장 큰 불안은 AI가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보수 야당은 'AI로 새로운 고급 일자리를 창출하고, 전 국민 재교육(Reskilling) 체계를 구축한다'는 메시지를 내세움으로써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셋째, 지역 균형 발전형 AI 전략을 내야 한다. 지금처럼 수도권 중심으로만 자원이 집중된다면 지방 소멸은 더 빨라진다. 지방 대학과 기업을 연계한 지역별 AI 허브를 육성함으로써 전국적 파급효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넷째, 글로벌 연계 전략이다. 한국의 AI 전략이 미국이나 중국의 기술 종속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유럽·동남아 등 다양한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 반도체에서 ‘K-칩 동맹’을 만들었듯이 AI에서도 ‘K-AI 글로벌 네트워크’를 추진하는 것이 보수식 비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무조건 찬성만 해서는 야당의 존재감이 없다. 무조건 반대만 해서는 국민의 호응을 얻기 어렵다. 따라서 보수 야당은 ‘찬성+감시+대안 제시’라는 삼중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 즉 'AI 강국은 우리 모두의 목표다. 그러나 무분별한 재정 낭비와 불투명한 정책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더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길을 제시하겠다'는 식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은 국민에게는 책임 있는 대안세력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정치권 내부에서는 향후 수권정당으로서 신뢰를 다지는 데 기여할 것이다. AI는 시대정신이다. 한국이 AI 강국으로 도약하지 못하면 제조업·서비스업 전반에서 국제 경쟁력을 상실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비전 자체는 초당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는 각 정치세력의 철학과 역량이 시험대에 오르는 무대다. 보수 야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AI 강국이라는 국가적 대의에는 함께하되 집권 여당의 정책 추진 방식에 대해서는 철저히 검증하고 더 나은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보수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낡은 이미지를 벗고, 국민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책임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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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日 기업 의 변신 …M&A로 부활의 엔진 켜다
지난주 ‘일본 기업들의 M&A, 1~6월 사상 최대… 세계 시장 점유율 10% 초과는 버블 이후 처음’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일본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일본 기업이 인수자로 참여한 국내외 M&A(인수합병)가 2025년 1~6월 기간에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금액 기준으로 전년 동기 대비 3.6배 증가한 2148억 달러(약 310조원)로, 통계가 집계된 1980년 이후 반기 기준 최대 규모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버블 시대 이후 34년 6개월 만에 10%를 넘어섰다. 자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일본의 그룹 재편과 해외 성장 추구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영국 LSEG에 따르면 1~6월 세계 M&A 규모는 1조9792억 달러로 30% 증가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일본 제외) 기업들의 인수합병은 90% 증가한 3775억 달러를 기록했다. 미국 기업들의 인수합병은 9% 증가한 8309억 달러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 영향으로 세계 평균보다 성장률이 낮았다. 유럽도 3457억 달러로 1% 증가에 그쳤다. 일본 기업의 인수 금액이 세계 전체의 10%를 초과한 것은 1990년 7~12월 이후 처음이다. 엔화 기준 인수 금액도 7년 만에 역대 최고를 경신했다. 올해 상반기는 일본의 전통적인 거대 기업들이 그룹사 재편을 통해 자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움직임이 잇따랐다. 도요타 자동차는 약 4조7000억엔으로 계열사인 도요타자동직기에 대한 TOB(주식 공개 매수)를 결정했으며, NTT는 2조엔 규모로 상장 자회사인 NTT 데이터 그룹을 완전 자회사화했다. 상장 기업이 계속 증가해온 일본 시장은 신진대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대형 기업이 상장 자회사를 보유하고 있거나, 거래 유지를 위해 그룹 내에서 주식을 상호 보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액티비스트(적극 주주)들은 기업에 자회사 상장이나 상호 보유 해소를 촉진하고 경영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압력을 높였다. 일본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합병도 7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1~6월에는 802억 달러로 2.5배 증가했다. 소프트뱅크그룹은 미국 반도체 설계 기업인 암페어 컴퓨팅을 65억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으며, 미국 오픈AI에 대한 투자도 결정했다. 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는 독립계 M&A 자문사인 브노아는 “최근 몇 달간 일본 기업으로부터의 문의가 급증했는데 이는 지난 20년간 전혀 없던 현상이다”라고 지적했다. 비핵심 사업이나 자회사를 분리하는 '카브아웃'도 일본에서 증가하고 있다. 레코프 데이터에 따르면 1~6월 동안 약 270건으로 30% 증가했다. 2008년 이후 17년 만에 과거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일본 주요 기업의 현금 보유량은 2008년 회계연도 이후 3번째로 많으며, 투자 여력이 증가하고 있다. 도요타자동직기의 비공개화에 미쓰이스미토모 은행 등 3대 은행이 약 2조8000억엔을 대출하는 등 일본 금융기관이 자금 공급 역할을 맡고 있는 것도 일본 기업이 구매자로서 존재감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M&A의 주요 시장인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초기 독점금지법 심사가 완화되며 M&A에 긍정적인 바람이 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1~3월 분기 경제 성장률이 3년 만에 마이너스로 전환된 가운데, 상호 관세를 부과한 4월 ‘해방의 날’ 직후 “미국 관련 M&A는 대부분 보류됐다”(미국계 투자은행 고위 관계자). 인수 자금을 펀드 대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미국에서는 시장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필요한 인수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진다. 현재 주가도 회복되며 일시적인 혼란은 가라앉았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펀드가 제한된 자금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일본 기업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호 관세를 도입한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기업에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향후 일본 기업이 전략적으로 미국에서 인수를 늘릴 가능성도 있다. 이같이 일본에서 M&A 시장이 활기를 띠는 배경에는 기업들이 경영 효율성을 높이고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적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이 있다. 우선 선택과 집중을 통한 사업 재편이다. 많은 기업들이 핵심 사업에 집중하고 비핵심 사업을 분리하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사업의 카브아웃이 대표적이다. 자기자본이익률(ROE)을 중시하는 시장의 트렌드를 반영해 비핵심 사업이나 자회사를 매각하는 '카브아웃'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쓰비시 케미컬 그룹은 제약 자회사를 매각하고 화학 관련 사업에 집중할 의향을 밝혔다. 세븐&아이 홀딩스도 마찬가지로 편의점 사업에 경영 자원을 집중하기 위해 비핵심 사업을 매각할 방침이다. 다음은 사업 재편이다. 일본담배산업(JT)은 본업인 담배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의약품 사업을 약 1600억엔에 시노기제약에 매각했다. 일본우편은 토나미 홀딩스를 인수해 물류 사업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두 번째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다.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글로벌 사업 재편과 공급망 강화를 꾀하고 있다. 해외 기업 인수가 늘고 있는 이유다. 일본제철은 US스틸 인수를 완료해 글로벌 생산 능력을 강화하고 중국 기업에 맞서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미쓰이상선은 네덜란드의 LBC 탱크 터미널스를 인수해 화학품 해상 운송을 강화한다. 호시자키는 미국의 식품 쇼케이스 제조사 인수를 통해 북미 시장 확대를 노리고 있다. 기업 지배 구조(거버넌스) 개혁의 진전도 M&A를 촉진하고 있다. 주식 상호 보유 해소나 모자회사 상장 해소 등이 진행되며, 기업은 더 효율적인 경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미즈 건설은 상장 자회사인 일본도로를 완전 자회사화했다. 향후 M&A 시장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리스크 분산과 자본 효율성 향상 방안으로 M&A의 중요성은 더욱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M&A의 활성화는 일본 기업이 변화에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5월30일 ‘2025년판 제조업 백서’를 발표했다. 이 백서는 최근 세계 각국에서 산업정책의 전개가 가속화되며, 산업경쟁력·탈탄소·경제안보의 3요소를 복합적으로 고려하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제조업체는 탈탄소와 경제안보 관점을 고려한 중장기적 성장 투자를 실시하는 것이 중요해진다고 강조했다. 또한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제조업에서의 디지털 전환(DX) 추진은 제조업체의 수익력 향상과 그린 전환(GX) 추진 등에 기여하는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이 백서는 이러한 과제들의 실행 현황과 실제 대응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앞서 일본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2025년 '디지털 경제 보고서'도 매우 시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디지털 적자를 안고 있는 일본 — 생존 전략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일본이 직면한 심각한 디지털 적자의 실태를 분석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의 디지털 적자는 2024년에 3조엔에 달하며, 2035년에는 최대 45조엔으로 확대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중국의 대형 기업이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는 가운데, 일본 기업은 여전히 기반이 되는 데이터나 플랫폼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오랜 기간 제조업 중심의 경제를 유지해 왔지만, 디지털 경제가 성장하는 현대에는 그 구조가 취약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일본 기업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며, 해외 클라우드 서비스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일본의 경제 경쟁력 저하를 초래하며, 장기적으로는 산업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일본이 디지털 경제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략으로 고부가가치 분야에 대한 투자와 차세대 기술에 대한 선제적 투자를 제안하고 있다. 외부 플랫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의 데이터 활용 능력을 높이고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기업은 제조업 중심의 전통적인 강점을 유지하면서도, 디지털 분야에서의 혁신을 가속화하고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을 재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 차원에서도 디지털 기술 강화와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정책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이 보고서는 강조했다. 이처럼 일본 기업들의 M&A 의욕, 제조업 백서, 디지털 경제보고서는 하나의 맥락을 이룬다. 일본 기업의 변신 방향을 보여준다. 일본경제 전문가인 맨넥스그룹의 예스퍼 콜 글로벌 앰배서더는 “일본은 부활의 시작점에 서 있다”고 일본경제신문 기고에서 논평했다. 그는 현재 세계의 투자자와 분석가들이 일본이 승자로 부상할 가능성을 점치기 시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이례적인 행동으로 인해 세계의 금융, 경제, 사회, 정치 구조가 파괴되고 있다. 당분간 이는 일본의 경제에도 타격을 줄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관점에서 보면 일본은 신뢰할 수 있는 발전 추세에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먼저 정책 결정이다. 성장을 추구하는 실용주의다. 향수를 자극해 포퓰리즘을 부추기는 정치인이나 재정·금융 긴축에만 집착하는 관료는 없다. 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뉴머니 엘리트도 없다. 일본의 부처 간 협력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일본 엘리트들은 여전히 협조적 행동을 자부심으로 여기며, 허세 가득한 SNS 전쟁을 본질적으로 경시한다. 일본은 어떤 선진국과 비교해도 공공 인프라와 공공 서비스는 금메달급이다. 누가 총리가 되든, 경단련이나 경제동우회의 수장이 누가 되든, 변하지 않는 점이 평가된다. 기업 리더들은 버블 시대 이후의 에너지와 위기감을 가지고 행동을 시작하고 있다. 과거의 전통과의 근본적인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 연공서열형 보상제도 대신 성과급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기업 리더들이 직원들의 정착, 동기 부여, 기술 향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지금이 바로 좋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다. 기업 문화를 바꾸고 성과 향상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며 성공에 보답하려는 노력이다. 이것이 일본이 부활의 시작점에 있다는 이유다. 기본적이고 일관된 수요에 응답하는 일본의 강점에 부는 순풍은 당분간 잦아들지 않을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많은 경제회생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이웃 일본에서 부는 부활의 바람을 면밀히 살피는 일도 좋은 전략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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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이재명 대통령, '실용적 시장주의' 본격 시동 …관건은 디테일
이재명 대통령이 ‘첫 정상외교’ G7 (선진 7개국)회의 (캐나다 6.16~6.18)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6월 24일~25일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도 참석할지 타진하고 있다. 서방국가들의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양대 축이 G7(경제)과 나토(안보)다. 이 대통령은 세계가 지정학적, 지경학적으로 가장 리스크가 커진 이때 첫 외교길을 트고 있다. 그가 주창한 국익우선 실용외교의 첫 테스트 베드이다. 1박3일의 초청외교지만 의미가 작지 않은 이유다. 이 대통령은 지금부터 내치에 집중한다고 한다. 그가 기치로 내걸고 있는 ‘실용적 시장주의’가 본격 가동될 것이다. 국민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대목이다. '실용적 시장주의'는 경제 성장과 국민 생활의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유연하고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대통령은 경제 회복과 성장 촉진을 위해 비상 경제 점검 태스크포스(TF)를 설치했다. 재계와도 만났다. 매우 신속한 대응이다. 또 재정 정책 강화를 위해 추경예산 편성이나 세법 개정을 통해 경제 성장을 지원하는 재정 기반을 정비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추경을 경제 위기의 첫 출구로 삼는다. 물론 중장기적으로는 분배와 복지 확대를 염두에 두고 있다.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소득 재분배와 복지 확대를 추구하는 정책이다. 이를 통해 국민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에너지 정책 개혁도 새 정부의 핵심사안이다. 산업부와 환경부를 재편해 에너지와 기후 분야를 통합한 '기후 에너지부'를 신설한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차세대 원자로 개발도 포함된 민생과 관련해서 부동산 시장의 안정화와 교통 인프라의 정비는 새 정부 임기 내내 챙겨야 할 일로 꼽고 있다. 이 대통령이 이번 G7회의 참석 때 비록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우리 국제 통상 정책의 중심인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최우선시 하고 있다. 이는 한국 기업의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경제 협력은 한국의 수출 시장을 확대하는 것으로 매우 절실한 사안으로 통상정책에서 중요도가 커졌다. 그러나 이는 외교적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에 신중한 대응이 요구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와 함께 과거 보수·진보 정권의 정책을 구분 없이 채택해 실용적 관점에서 국가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자세와 정치적 분단을 극복하고 국민의 통합을 기반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목표도 주목된다. 한마디로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적 시장주의'는 경제 성장, 복지 확대, 에너지 개혁, 부동산 정책, 국제 통상 개선을 축으로 한 유연한 정책 접근 방식이다. 이 철학은 한국의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용적 시장주의는 과거의 전통적인 시장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용적 시장주의가 경제 위기 대응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기업의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규제를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이는 기업이 자유롭게 창업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향으로, 경제 위기 상황에서 기업의 활력을 불어넣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AI,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경제 위기 속에서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 경제 회복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 이에 대해 경제계의 평가와 기대하는 내용을 정리해 보자. ‘이 개념은 시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고 한다. 실용적 시장주의는 기업이 고객의 필요와 선호를 이해하고 반영하도록 유도한다. 이를 통해 기업은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할 때 고객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혁신을 촉진할 수 있다. 또 시장 지향적인 접근은 기업이 경쟁 환경에서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기업이 시장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장기적인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용적 시장주의는 기업이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배분하도록 돕는다. 고객의 피드백과 시장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면,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더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시장 지향적인 기업은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할 수 있다. 이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환경적 요인도 고려하여 장기적인 성공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 사실 실용적 시장주의는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적용되고 있다. 독일의 사회적 시장 경제 모델은 실용적 시장주의와 유사한 개념으로, 시장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한다. 이 모델은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형평성을 조화롭게 결합하려는 노력을 포함하고 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 여러 유럽 국가에서 이러한 접근 방식이 채택되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 한국,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시장의 자유를 조화시키는 경제 모델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일본은 전통적인 아시아 가치와 현대적 실용주의를 결합하여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한국은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를 통해 실용적 시장주의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중국은 1978년부터 시장 경제로의 전환을 시작하면서 실용적 접근을 채택했다. 정부는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경제를 통제하지만, 시장의 원리에 따라 가격을 설정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렇듯 실용적 시장주의는 다양한 국가에서 경제 정책의 유연성을 강조하며, 각국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형평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정부는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개입하여 형평성을 높이는 동시에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거나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는 정책은 형평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적 시장주의는 꽤 기간에 걸쳐 준비되어 왔다. 이 대통령의 오랜 동지이자 정책멘토인 이한주 국정기획위원회(인수위 역할) 위원장은 이 대통령과 2인3각으로 많은 전문가들을 결집시켜 이 철학을 완성시켜 왔다. 대통령선거 직전에 나온 ‘잘사니즘, 포용적 혁신 성장’(2025.3.20.)은 그 완결점이다. 이전에는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2016.10.10.), ‘뉴 머니, 지역화폐가 온다’(2020.4.30.), ‘공정한 부동산, 지속가능한 도시’(2021.6.28.), ‘공정한 사회의 길을 묻다’(2021.6.28.), ’지속가능한 공정경제‘(2021.8.20.), ‘공정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복지’(2021.8.20.) 등이 있다. 이한주 위원장은 지난 8일 민생과 경제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지목하며 "가장 빠른 처방은 소비"라고 말해 경기 대응의 속도감을 강조했다. 즉시 집행 가능한 민생경제 처방으로서 정부 재정을 통한 직접적 소비 유도가 최우선 정책이 될 것임을 시사했다. 이는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2차 추경과 맞닿아 있다. 9일 2차 비상경제대응TF 회의에서 추경의 구체적 윤곽을 논의했다. 당정은 추가경정예산 규모와 관련해 추경 규모가 35조원이 돼야 한다는 입장을 제기해왔는데, 1·2차 추경을 합하면 그 규모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18일 국회에서 열린 당정 정책협의회의에서 확인된 내용이다. 문제는 추경 35조원을 어떻게 조달하는가이다. 재원은 전통적으로 국채, 세계잉여금 등등이 있을 텐데 어느 부문을, 얼마나 동원할지가 괸심이다. 국채발행이 커지면 정부 부채가 늘어나고, 금리가 올라가 기업이나 개인의 차입과 상환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국민 설득이 긴요해진다. 이 대통령의 실용외교는 첫 삽을 떴고 이어 실용적 시장주의가 시동을 걸고 있다. 이 대통령은 ‘총론은 부드럽고, 각론은 엄격하다’라는 평가가 있다. 이는 그가 디테일에 강하다는 얘기다. 지난 10년 가까이 준비해 온 실용적 시장주의를 이제 전 국민에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 실험이 아니라 경제위기의 실제상황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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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누구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길 것인가?
대선까지 18일 남았다. 결승을 향한 ‘정치의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유권자를 의식해 알기 쉬운 정책들을 무차별하게 쏘아 올린다. 선거전 막판에 정치 구호들이 유사해지면서 쟁점이 희석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폭넓게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책의 차별성을 흐리거나, 특정 쟁점을 부각시키기보다 대중적인 메시지에 집중하는 경향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권자가 바람직한 투표행위를 하기 위한 판단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표면적인 구호의 유사성 속에서도 후보자나 정당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기준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우선 구체적인 정책 내용과 실현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이다. 단순한 슬로건 뒤에 숨겨진 구체적인 정책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경제 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어떤 산업을 육성할 것인지, 세금 정책은 어떻게 바꿀 것인지 등 세부적인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제시된 정책이 과연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지, 필요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는 공약의 허점이나 모순은 없는지 따져보는 일이다. 둘째는 후보자의 과거 행적과 자질을 평가하는 것이다. 후보자가 과거에 어떤 결정을 내렸고,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왔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의 행동은 미래의 행동을 예측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나아가 리더십 스타일, 문제 해결 능력, 위기 대처 능력 등 후보자의 전반적인 자질과 도덕성을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한 투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셋째는 정당의 정체성과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후보자가 속한 정당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이념이나 가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정당이 과거에 어떤 정책을 추진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파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정당의 역사를 통해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우선순위를 엿볼 수 있다. 유권자들이 당연히 알 것 같아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새로운 인식이 생겨날 것이다. 넷째는 장기적인 비전과 방향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단기적인 성과나 즉각적인 혜택만을 약속하는지, 아니면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비전과 방향성을 제시하는지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미래를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담겨있는지 평가하는 것은 절대 필요하다. 다섯째는 소통 방식과 태도를 관찰하는 것이다. 후보자나 정당이 유권자들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반대 의견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등을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다. 존중하고 경청하는 자세인지, 아니면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태도인지 등을 통해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정치 교과서에 실린 얘기지만, 유권자는 이러한 기준들과 다양한 정보를 비교 분석하고 자신만의 판단 기준을 세우는 과정 자체가 성숙한 민주 시민으로서의 중요한 투표 행위임을 다시 각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이를 따르지 못한다. 선거에서 후보자들의 매니페스토(Manifesto)보다는 인기영합적인 발언이나 포퓰리즘(Populism)적 행동이 더 많은 표를 얻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정치에서 오래되고 중요한 주제다. 매니페스토는 선거에서 후보자나 정당이 유권자에게 제시하는 구체적인 정책 목표와 그 실현 방안을 담은 공약집이다. 정책의 실현 가능성과 재원 조달 방안 등을 명확히 제시해 유권자가 후보의 자질과 정책 역량을 평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예전에 강지원 변호사 등이 매니페스토 후보를 자임하며 정책 중심의 선거를 시도한 사례도 있다. 이에 대해 포퓰리즘은 대중의 직접적인 의지에 호소하며 기존 엘리트나 기득권층을 비판하고, 흔히 단순하고 매력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정치 스타일을 의미한다. 유권자의 감정이나 즉각적인 요구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정치 전문가들은 유권자들이 매니페스토보다 포퓰리즘적 접근에 더 반응하는 이유를 몇 가지 관점에서 분석한다. 먼저 정보의 복잡성과 접근성이다. 매니페스토는 종종 상세하고 복잡한 정책 내용을 담고 있어 일반 유권자가 모든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평가하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 포퓰리즘적 발언은 단순하고 명확하며 감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다음은 감정적 호소력이다. 포퓰리즘은 유권자들의 불안, 분노, 희망과 같은 강력한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한다. 예컨대 특정 집단을 비판하거나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을 약속하는 등의 메시지는 복잡한 정책 설명보다 유권자의 마음을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미디어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현대 미디어 환경은 자극적이고 논쟁적인 이슈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후보자의 포퓰리즘적 발언은 뉴스 헤드라인이나 소셜 미디어(SNS)에서 빠르게 확산되며 큰 주목을 받는 반면, 매니페스토의 상세한 정책 내용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될 수 있다. 특히 SNS에서는 에코챔버 현상(같은 의견의 정보만 흘러나오는 현상)을 심화시킨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유권자의 우선순위다. 모든 유권자가 후보자의 정책 하나하나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유권자는 후보자의 이미지, 리더십 스타일, 또는 특정 이슈에 대한 명확하고 강력한 메시지에 더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적 불만이 클 때, 현실적인 제약이 따르는 복잡한 정책보다는 당장 변화를 약속하는 단순한 주장에 더 끌릴 수 있다. 최근 선거 공약 분석에서도 복지에서 경제와 산업의 성장으로 중심 이동이 관찰되는데 이는 유권자의 경제적 관심사를 반영하며 포퓰리즘적 접근과 연결될 수 있다. 여기에 정치적 불신이 가세한다. 기존 정치 시스템이나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깊을수록, 복잡한 정책 과정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매니페스토보다는 강력한 지도자가 나서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는 포퓰리즘에 기대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이렇듯 매니페스토는 정책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여 정책 중심 선거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도구이지만, 포퓰리즘은 유권자의 감정과 즉각적인 요구에 효과적으로 호소하며 더 넓은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권자 교육과 정책 토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외국 언론은 한국 대선의 어떤 측면에 가장 주목하고 있는가? 많은 외신들은 이번 대선을 '분열된 선거'로 보도하고 있다. 특히 후보 간 대립과 선거 과정에서의 네거티브 캠페인이 강조되고 있으며, 후보와 그 가족에 대한 스캔들이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선거가 “스캔들과 말다툼으로 오염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선포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치러지는 선거로, 한국 사회의 심각한 분열을 해소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보는 미디어도 있다. 특히 리더십 교체가 한국의 안정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외신들은 한국의 새 대통령이 국제관계, 특히 미·중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도 주목하고 있다. 새 대통령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중국 언론은 새 대통령이 미국에 편향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후보 동향과 관련해서는 선두를 달리는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의 경제정책과 사회통합 비전이 주목받고 있으며, 국힘당의 김문수 후보는 경제 지원을 강조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고 전한다. 외신들은 한국 언론의 보도 스타일에 대해서는 정책검증이 부족하다며 상당히 비판적이다. 특히 후보자의 사생활이나 가십성 보도가 많고, 정책에 대한 논의가 적다는 지적과 함께 유권자들은 언론에 보다 공정한 보도를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외신들은 한국 대통령 선거의 경제정책에 대해 매우 주목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우선 AI와 경제부흥을 꼽을 수 있다. 대선 후보들이 한국을 세계 최고의 AI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후보들이 공통적으로 AI 분야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규제 완화와 기업 지원, 문화산업에 대한 지원도 주요 이슈로 다룬다. 국제적인 관점에서 외신들은 한국의 경제정책이 미국과의 무역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한국 경제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 대통령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주목한다. CNN은 한국 유권자들이 경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경제를 살릴 수 있는 후보를 원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처럼 외신들은 한국 대선의 경제 정책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특히 AI와 문화산업 투자, 규제 완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이 한국의 경제 부흥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경제신문 5월 13일자 사설이 관심을 끈다. ‘한국 대통령 선거, 분단극복으로 나아가는 논쟁이 필요하다’는 주제의 사설은 “한국 사회는 보수와 혁신, 지역 간뿐 아니라 청년과 노인, 젊은 남성과 여성 등 다양한 대립 축으로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국민통합과 경제성장, 격차 해소, 일자리 창출, 복지정책 등 실효성 있는 개혁을 내놓을 수 있느냐가 중도·무당파층의 지지로 직결된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국의 해양진출 등 군사적 위협은 물론 동맹국인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고관세 정책도 한국에 직격탄을 날린다. 한·일 양국은 공통의 현안을 안고 있고, 한국이 흔들리면 지역 안보와 경제 협력도 흔들릴 수 있다. 한국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고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크게 흔들리기 쉽지만, 국정과 지역 안정을 위해 미래지향적인 논쟁을 기대해 본다”고 이번 대선을 보는 시각을 정리했다. 오는 6월 3일 대통령 선거가 한국의 미래에 큰 희망을 주는 선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 관리, 유권자 참여 촉진, 후보자들의 정책 비전 제시, 갈등 해소와 화합의 메시지 등의 요소들이 잘 결합된다면, 한국의 미래에 큰 희망을 주는 선거가 될 것이다. 대선까지 남은 기간은 한국의 유권자로서도 적극적인 참여와 성찰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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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지금의 대한민국 '시대정신' 읽는 지도자가 절실하다
⑨ 세계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글로벌 시장은 격변기를 맞고 있고, 지정학적 불안정성은 심화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표방한 ‘미국 우선주의’에서 비롯된 이른바 ‘미국발 대혼란’이다. 지난 1월 트럼프의 두 번째 미국 대통령 취임식 때부터 시작된 미국의 무차별 관세 인상 정책은 세계에 큰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긴장에 더해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고, 유럽의 정치적 불안이 커지고 있다. 지난 3개월간 미국의 경제정책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특히 관세정책을 중심으로 한 보호주의적 접근이 강화되면서 이것이 무역전쟁에서 금융시장으로의 영향을 확대시키는 형태로 '금융전쟁'이라 불리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이런 미국발 대혼란 속에서 한국은 지난 4개월 동안 극도의 정치혼란에 빠져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계엄정국-탄핵정국-헌재정국-파면정국-대선정국으로 이어지며 격렬하게 요동치는 정국이 세계 주요 미디어의 톱뉴스로 연일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혼란은 독특한 우리의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과거부터 사상가와 학자들은 ‘시대정신(Zeitgeist)’의 중요성을 설파해 왔다. 시대정신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사회적, 지적 경향을 설명할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시대정신의 개념은 요즘과 같은 전환기, 격변기 또는 문화적 변화의 시기에 매우 중요하다. 이는 특정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 신념, 가치를 포착하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정신에 대한 논의는 철학과 역사를 넘어 마케팅, 기술, 정치 분석과 같은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정치 지도자는 시대정신을 이해함으로써 큰 혜택을 볼 수 있다. 집단적 사고방식에 적응함으로써 대중에게 공감할 수 있는 정책과 메시지를 만들 수 있다. 시대정신을 무시하면 손에 닿지 않거나 비효율적으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사회 개혁가, 활동가, 혁신가들은 종종 자신의 행동을 시대정신과 일치시켜 추진력을 얻는다. 마틴 루서 킹 같은 사상가나 스티브 잡스 같은 기술 리더들은 시대정신을 활용해 변혁을 주도했다. 시대정신에 대한 인식은 불필요한 마찰을 방지할 수 있다. 기존의 정신에 반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리더나 조직은 대중의 반발에 직면하거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의 경우 시대정신을 인식하면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사회적 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문화, 기술 또는 정치의 변화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적응할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복수의 AI(인공지능) 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아 정리해 봤다. 이 시대의 글로벌 시대정신은 급속한 기술 발전, 환경의 시급성,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의 증가로 정의되는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AI 통합 추진, 기후변화 대응, 제도적 격차 해소 등 진보와 보존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와 세계적 흐름을 기반으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시대정신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포용과 다양성이다.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다양한 배경과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글로벌 시민의식과 연결되어 있으며, 사회적 화합을 촉진한다. 둘째는 기술혁신과 인간성의 조화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서 기술 발전과 인간 중심 가치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셋째는 사회적 정의와 공정이다. 격차 해소와 공정한 기회 제공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핵심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넷째는 지속가능한 환경이다. 기후위기 대응과 환경보호는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으로 강조된다. 다섯째는 정치적 성숙이다. 갈등과 퇴행을 넘어 실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정치가 필요하다. 이 시대정신은 단순히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넘어, 공동체와 미래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협력해야 한다고 AI 에이전트들은 결론을 내린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시대정신은 정치와 경제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이는 사회적 가치와 국가적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시대정신은 선거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며, 정치적 리더와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2002년 한국 대선에서는 '정치 개혁'과 '세대교체'가 시대정신으로 작용했으며, 2007년에는 '경제성장'이 중심이 되었다. 시대정신이 공정성과 통합을 강조할 경우 사회 갈등을 완화할 수 있지만,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면 불안과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또 시대정신은 정부의 역할을 재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강하고 유능한 정부'를 요구하는 시대정신은 시장 규제와 국민의 안전 보장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울러 시대정신은 경제 정책의 우선순위를 설정한다. 복지국가와 공정한 분배를 강조하는 시대정신은 신자유주의 모델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장 전략을 요구한다. 자산 불평등과 삶의 질 양극화는 시대정신에 의해 해결책이 제시되며, 이는 경제 정책에서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다. 한편 제4차 산업혁명과 같은 기술 변화는 새로운 산업화를 선도하며, 시대정신은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 이같이 세계에 통용되는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특히 인구문제, 사회경제적 격차, 지역소멸, 격심한 정치 분란 등 전례없는 혼란상을 보이고 있는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꼭 주지해야 할 시대정신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한국의 시대정신은 인구학적 위기, 사회경제적 도전,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독특하게 형성되었다. 한국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노동인구 감소로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인구통계학적 변화는 경제적 안정을 위협하고 주거비, 성 불평등, 일과 삶의 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긴급한 정책 개혁을 촉발시켰다. 팬데믹으로 인한 소득 불평등과 임시직 고용, 부의 집중과 같은 구조적 문제로 인해 사회경제적 격차도 확대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심화되고 행정 개혁이 균형 발전을 이루지 못하면서 지역 해체는 또 다른 복잡성을 더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한국은 양극화와 이념적 충돌이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반영하는 극심한 분열에 직면해 있다. 특히 민주주의 피로와 정치적 양극화는 최대 난제로 꼽힌다. 제도권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고 있고, 사람들은 좌파와 우파 모두에 대해 냉소적이며, 정치 담론은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승리에만 집중한다. 세대와 지역 간 이념적 분열이 심하다. 한편 한국은 기술적으로는 최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교육, 노동, 복지 등 사회 시스템은 이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기회와 불안정성을 동시에 낳는다. 한마디로 '위기 속의 압축된 근대성'이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은 빠르게 근대화를 이뤘지만, 그 속도만큼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 압박을 받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시대정신은 한편으로는 문화적 활기와 기술력,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구조 변화, 정치적 불안정, 사회경제적 불평등 등 대조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압박과 씨름하는 한국이 적응하고 공통점을 찾는 능력에 따라 21세기에 회복력 있는 리더로 부상할지 아니면 분열의 무게에 계속 흔들릴지 결정될 것이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시대정신은 불확실성이 점점 더 커지는 세상에서 변화를 헤쳐나가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제 정치 지도자에게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것은 유용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시대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유권자를 소외시키고 관련성을 잃을 위험이 있다. 시대정신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는 리더는 기후 변화, 사회 정의 또는 기술 혁신과 같은 시대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시대정신을 이해하면 리더는 대중에게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만들어 신뢰와 참여를 촉진할 수 있다. 시대정신에 익숙한 지도자들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같은 역사적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중의 정서 변화를 예측하고 그에 따라 전략을 조정할 수 있다. 대공황 시기의 루스벨트와 디지털 운동 부상기의 버락 오바마가 좋은 사례이다. 지도자는 현재를 이해하고 상황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지도자는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답변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미래를 구상하고 창조해야 한다. 좋은 리더는 더 나은 내일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로드맵을 개발한다. 로드맵은 구상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계획을 나타낸다. 비전과 로드맵은 리더가 집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결정을 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좋은 리더는 자신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 낸다. 문제는 오늘날의 도전 과제 중 하나가 명확한 공통 시대정신의 부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시대정신이 확산된 시대에 살고 있다. 리더는 분열을 막고, 불안을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은 더 많은 편안함과 마음의 평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오늘날 기회의 세계를 포용하기 위해 지원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발전의 일부이며 집단이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리더는 '함께 발전한다'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야 한다. 흔히 세계 정치가들 가운데 국가통치와 정권운영에 있어서 '시대정신'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시대정신은 정치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강력한 힘이다. 많은 지도자들이 정책과 수사를 기존의 문화, 경제 또는 사회적 흐름에 맞춰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활용해 경제 개혁과 사회 보장에 대한 대중의 요구에 공감했다.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와 같은 지도자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시대에 화해와 정의의 시대정신을 구현했다. 이러한 성공사례는 명확한 비전을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리더의 능력에 달려 있다. 민심의 물결을 타고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국가의 배를 조종하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지금 한국은 이러한 도전을 넘어 회복 탄력성과 혁신의 빛을 찾아야 할 때다. 시대정신을 무시하는 지도자와 정부는 생존하기 어렵다. 성공한 정부는 시대정신을 활용한다. 하지만 시대정신이란 특정 시기에 사회 구성원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견해와 신념의 집합이다. 지도자의 신념도 포함된다. 시대정신을 잘 간파하고, 이를 당차게 이끌고 갈 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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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때릴수록 강해진다 … 中 하이테크의 역공
이번 전인대에서는 중국 정부의 2025년 과학기술 예산안 3981억 위안(약 80조원)을 승인했다. 이는 전년 대비 10% 늘어난 것으로 13%였던 2019년 이래 최대 증가율이다. 이를 발판으로 국가기관에서는 AI 등의 기초연구를 확충하고 첨단 반도체를 개발하는 메이커에는 보조금을 더욱 두텁게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권과의 대결이 길어질 것으로 보고, 민간도 합세시켜 하이테크 발전을 서두른다. 딥시크의 등장으로 일약 각광받은 AI와 로봇, 신소재 등이 주요 대상이다. 캐나다의 조사회사 테크인사이츠에 의하면 중국의 반도체 등 ‘핵심적인 기초 부재’의 자급률은 2023년 시점에서 23%에 이른다. 2015년에 정부가 내건 ‘2025년에 70%’라고 하는 목표는 아직 멀다. 때문에 정부 예산을 적극 투입해 반도체 제조장치와 관련기술의 대중 수출을 금지하는 미국의 포위망을 뚫겠다는 복안이다. 나아가 국산 하이테크를 다양한 산업에서 실용화시켜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전략도 그린다. 중국의 하이테크 분야 10년간의 육성 계획 ‘중국 제조 2025’가 정한 목표의 90% 가까이를 달성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일부 하이테크가 세계를 리드할 때까지 성장한 배경에는 2025년에 최종년을 맞이하는 진흥계획인 ‘중국 제조 2025’의 존재가 있다. 시진핑 지도부는 2015년 이노베이션을 활용한 산업모델 전환을 목표로 이 계획을 수립했다. 건국 100주년인 2049년 세계 제조강국의 선두권 진입을 최종 목표로 정하고, 1단계인 2025년까지 세계 제조강국 반열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대중 강경파인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2024년 제2차 트럼프 정권 발족 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대부분의 분야에서 목표로 한 기술의 최첨단에 도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세계 리더로 꼽은 전기자동차(EV)는 배터리 기술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 등으로 BYD 등 중국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갖춘 고품질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선은 미국의 200배라는 생산능력을 갖고 있으며 조선소의 생산규모는 다른 나라의 합계와 맞먹는다고 했다. 중국은 항공모함과 액화천연가스(LNG) 유조선도 건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컸다. 이번 전인대에서 드러난 중국 정부의 과학기술 진흥 전략의 가장 큰 특징은 ‘신형 거국체제’이다. 민간기업에도 연구개발을 독려해 기술혁신의 속도를 높이겠다는 뜻이다. 리창 총리가 5일 읽은 정부활동보고에서 신형 거국체제의 강점을 마음껏 발휘하겠다고 밝혔다. 예컨대 스마트폰 대기업 샤오미는 올해 300억 위안을 연구개발에 투입하고 4분의 1을 AI 관련에 쓸 것이라고 한다. ‘모든 소비재에 AI 탑재’를 기치로 내건다. 시진핑 중국 지도부가 2026년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5개년 계획에서도 AI와 우주 등 첨단 분야에의 투자 확대는 1순위로 올라있다. 구체적인 투자 확대 대상에는 바이오와 양자기술, AI 탑재 로봇, 6G 등 신산업이 포함됐다. 제조업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과 대규모 언어 모델을 공장이나 자동차 등 다분야에서 활용하는 ‘AI 플러스’의 추진도 꼽았다. 특히 인간형 로봇은 이미 중국 기술이 세계를 이끄는 유망 분야로 승부를 건 투자가 예상된다. 시진핑 주석은 “과학기술과 산업의 혁신이 새로운 질의 생산력(실제적인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길”이라고 강조한다. 중국은 앞서 2024년 7월에 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3중 전회)에서 중장기에 이르는 경제정책의 방침으로서 AI나 항공 우주, 신에너지 등의 산업 육성을 내세웠다. 새 5개년 계획은 이 노선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중국은 새 5개년 계획이 끝나는 2030년까지 많은 고비를 맞이한다. 2027년 차기 전당대회에서는 시진핑 지도부의 4선 진입 여부가 초점이다. 중국군은 같은 해 건군 100년을 맞아 대만을 무력 통일하기 위한 군사능력이 완성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더욱이 2029년은 시진핑 지도부가 3중전회에서 내건 경제개혁을 완료시킨다는 목표의 해이기도 하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11일 전인대 폐막 연설에서 ‘불가역의 미·중 분단’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권력일정을 염두에 둔 각오로 해석된다. 국영 중앙TV(CCTV)는 ‘전인대의 핫 워드는 테크 이노베이션(과기창신)’이라며 맞장구쳤다. 시진핑 지도부는 미·중 간의 분단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첨단기술 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경제신문은 중국의 정책이 ‘미국 없는 경제’를 겨냥한 산업 구조의 전환 전략이나 다름없다고 분석했다. 니시무라 유사쿠 중국 대외경제무역대학 국제경제연구원 교수는 “불가역의 미·중 분단이 중국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대 강대국의 무역전쟁은 관세와 통상품목만을 다투는 단선적인 힘겨루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만 문제나 우크라이나 정전 교섭, 중동에서의 주도권 등 세계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 있어서의 복선적인 딜과 맞물린다. 세계가 직면하는 것은 미·중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둘러싼 싸움이다. 최근 미국의 통신방송업계를 감독하는 연방통신위원회(FCC)가 국가안전보장평의회를 신설했다. 중국으로부터의 사이버 공격에 대한 방위 강화와 AI 등 국가 전략상 중요한 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평의회는 고속통신규격 '5G'나 차세대 통신규격 '6G', AI, 위성, 우주, 양자컴퓨터, 자율제어시스템 등 미국이 '매우 중요하게 자리매김하는 기술 분야‘에서 중국과 전략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설하는 평의회의 목적 가운데는 미국이 적대국으로부터의 사이버 공격, 첩보(정보) 활동, 서플라이 체인에 있어서 적대국에의 의존도를 저감하는 것이 포함된다. 앞서 미 의회는 중국 정부로부터의 안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2023년 중국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미국 정부는 광범위한 중국의 위협에 보다 포괄적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서로 다른 기관의 자원을 결집시켜 체제를 강화해 왔다. 이번 평의회 설립도 그 일환이 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2021년 중국의 위협에 강력 대처하기 위해 정보 수집이나 분석 능력을 강화하는 ’중국 미션 센터(CMC)‘를 신설했다. 미국 국무부도 같은 조직인 ’차이나 하우스‘를 신설했다. 미국 상무부에서는 수출 규제를 담당하는 산업안전보장국(BIS)이 특히 AI나 반도체 분야에 있어서 중국이 미국의 중요 기술을 입수하는 것을 어렵게 하기 위한 대처를 강화하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에 대처하기 위한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은 한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리스크는 기회도 동반한다. 향후 중국에서는 하이테크의 비약적 발전에 따라 관련 시장의 폭발적 성장이 일어날 것이다. 부품과 재료 등 한국 기술에 대한 수요는 반드시 있다. 동시에 중국과의 경제관계에서 트럼프의 견제나 제재를 받지 않으려면 미·중 협상의 양상을 정교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국가의 인텔리전스와 관민 제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새로운 질서를 목표로 하는 세계 속에서 한국이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지, 한국에도 각오와 국가전략이 동시에 요구되고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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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과학기술혁신 한국은 준비됐나
⑨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2025년은 매우 독특한 해다. 지난해가 ‘선거의 해’였다면 올해는 ‘정책 경쟁의 해’로 불릴 것 같다. 지난해에는 64개국에서 대선과 총선이 있었다. 지구 인구 80억명 가운데 50억명이 선거에 참여했다. 그 결과 2025년에 새로운 전략과 정책이 대거 쏟아질 전망이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트럼프 2.0의 등장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행정명령을 대거 내놓으면서 세계를 더욱 불가측한 상황으로 몰고 있다. 중국발 ‘딥시크 쇼크’는 거기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다. 세계 각국은 ‘트럼프 2.0’에 대처하는 데 한층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래서 올해는 ‘정책 경쟁의 해’로 정의될 것이다. 큰 눈으로 볼 때 이 상황을 꿰는 중심 키워드는 ‘경제안보’다. 이 키워드 아래에서 세계는 전략적인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을 할 터다. 경제안보라는 벡터를 끌고 나가는 견인차는 ‘기술’이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서 상징하듯이 기술경쟁이 한층 격화되는 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지금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국가의 열량(熱量)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인구 감소와 경제력 저하에 대처해야 한다는 국가적 과제가 분명해졌지만 행정과 정치가 기능 부전에 빠져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의 영향으로 가족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 규범, 노동시장과 사회경제적 환경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아울러 전 세계적으로 기술 혁신이 진행되고 있건만 정책 업데이트가 늦어지면서 성장에서 뒤처지고 있다. 변화를 외면하고, 임시방편적인 정책을 반복해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시대에 뒤떨어진 정책은 경제활동의 발목을 잡고 구조적 성장을 저해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세계의 큰 흐름을 읽고, 장기적 관점에서 정책을 수립해 추진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구 감소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산성이 향상되지 않으면 경제는 쇠퇴한다. 여성과 고령자의 노동 촉진은 중요하지만 이들의 참여율은 이미 높다. 노동 참여율을 높이는 노력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남녀 임금 격차 해소, 노동 이동의 원활화 등 각자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환경 정비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개인과 기업의 성장 의욕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고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와 기술력 제고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의 저온(低溫) 경제를 달구고, 세계 기술경쟁을 뚫고 나가기 위한 유일한 방안으로 과학기술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바야흐로 세계는 이미 전례 없는 기술시대에 돌입했다. 주요국들은 과학기술정책에서 뜨거운 경쟁을 벌이는 양상이다. 한국은 이제 총력전으로 맞서면서 생존과 번영의 출구를 찾아야 하는 험난한 노정에 나서야 한다. 세계를 둘러보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23일 대통령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를 새로 구성한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공지능(AI), 양자 컴퓨팅, 첨단 생명공학 등의 발전이 세계의 힘의 균형을 바꾸고, 완전히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며, 생활과 노동의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며 “미국이 이 분야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술적 우위를 유지·획득하는 것이 국가안보상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학계, 산업계, 정부에서 유망한 인재를 모아 PCAST를 구성한다. PCAST는 24명 이내 위원으로 구성된다, 그중 대통령 보좌관(과학기술정책담당)과 AI·암호자산 담당 특별보좌관이 위원으로 참여하며 공동의장을 맡는다. 나머지 위원들은 과학, 기술, 교육, 혁신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전문성을 갖춘 인물을 대통령이 임명한다. PCAST는 과학, 기술, 교육, 혁신 정책에 관해 대통령에게 자문을 제공하고, 미국 경제, 미국 노동자, 국가안보 등 공공정책 수립에 필요한 과학적·기술적 정보를 대통령에게 제공한다. 이에 앞서 1월 13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AI 발전 가속화를 위한 청사진으로 'AI 기회 행동 계획'을 발표했다. 이 행동 계획에 따라 영국은 AI 활용을 통해 향후 10년에 걸쳐 경제성장과 혁신을 주도하고, 공공 서비스의 효율성 개선에 나서게 된다. 이 계획은 영국을 AI 기업들에 최고의 투자처로 만들기 위한 대책도 담고 있다. 영국은 AI 산업의 최전선에 서서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겠다는 전략이다. 과학기술부 장관과 에너지부 장관이 의장을 맡는 ‘AI 에너지 위원회’도 설립해 에너지 기업과 협력해 기술 개발의 원동력이 되는 에너지 수요와 과제를 파악한다고 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1월 9일 “향후 수년 동안 1090억 유로(약 151조3200억원)를 AI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국내외에서 대규모 민간 투자를 유치할 것으로 예상된다. 1090억 유로라는 금액은 국가 전체의 혁신을 목표로 하는 정부의 5개년(2022~2026년) 투자 계획인 '프랑스 2030'의 총 투자 금액의 2배에 해당한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큰 규모의 투자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은 내년부터 시작되는 제7기 과학기술이노베이션기본계획(2026∼2030년)을 짜고 있다. 과학기술기본계획은 일본의 과학기술과 혁신 창출 촉진에 관한 정책의 기본 문서로서 5년마다 수립된다. 내년은 1996년에 제1기 과학기술기본계획이 수립된 지 30년 되는 해다. 일본 정부는 10년 정도 미래를 내다본 과학기술기본계획으로 그동안 사회의 변화와 새로운 과제에 대응해 왔다. 일본 정부는 과학기술정책의 방향을 종래 연구개발 투자 확대와 연구개발 시스템 개혁 중심에서 '혁신 창출'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기본계획 명칭도 6기(2021∼2025년)부터 '과학기술이노베이션기본계획'으로 바뀌었다. 혁신을 단순히 기업의 신제품과 서비스 개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추진하겠다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일본 정부는 작년 12월 총리 직속의 종합과학기술이노베이션회 산하에 기본계획조사회를 설치하고, 제7기 과학기술이노베이션기본계획에 ‘과학기술 창조입국'을 실현하기 위한 장기적인 비전을 담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제7기 기본계획에 중요 첨단기술의 개발과 지원, 과학기술 국제협력의 강화, AI 분야의 연구개발 강화와 안전성 확보 등 3대 역점 사업을 가속화한다는 내용을 담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경제성장과 경제안보에 중요한 첨단기술로 AI, 양자, 생물공학(바이오테크놀로지), 소재, 반도체, 핵융합 기술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양자기술과 핵융합기술이 새로운 산업의 싹이 되는 기술이며 AI, 생물공학(바이오테크놀로지), 소재, 반도체는 일본의 경제성장에 중요한 기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앞으로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는 이러한 중요(코어) 첨단기술의 개발을 서두르는 한편 다른 전략 기술 분야와 융합을 통한 연구개발, 산업화, 인재 육성을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뿐만 아니라 AI와 양자, 로봇, IoT 기술 등과 융합해 연구개발과 제조공정의 자동화와 고속화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차세대 청정에너지인 핵융합에너지의 조기 실현을 목표로 핵융합발전 실증 시기를 앞당기기 위한 대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는 중국 시진핑(習近平) 지도부가 2015년 5월에 발표한 하이테크 산업 정책인 ‘중국제조 2025’의 마지막 해다. 2025년까지 중국이 세계 제조 강국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품목별로 국제 비율 목표를 설정했다. 로봇은 70%, 이동통신 시스템은 40%로 늘린다는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미국 미디어들은 '시진핑의 기술 우위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중국제조 2025' 이니셔티브가 대부분 성공해 고속철도, 그래핀, 무인항공기, 태양광 패널, 전기자동차, 리튬 배터리 등 13개 주요 기술 중 5개 분야에서 중국이 선두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7개 분야에서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미래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산업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을 뜻한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는 미국과 세계의 혁신을 동시에 방해할 수 있는 ‘엄격한 조치’를 제외하고는 “중국의 기술적 부상은 미국의 제재에 의해 방해받지 않을 것이며,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억제 정책이 자칫 미국을 고립시켜 기업과 소비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중국은 ‘중국제조 2025’가 건국 100주년인 2049년에 '세계 제조강국 선두 그룹 진입'을 목표로 산업 보조금 등 다양한 강화책의 근간이 되고 있는 만큼 계속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미·중 간 하이테크 패권 경쟁은 한층 치열해질 것이다. 이러한 주요국의 과학기술이노베이션 정책 추진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이런 점에서 일본 미쓰비시종합연구소의 제언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연구소는 일본의 과학기술이노베이션 정책이 지향해야 할 '3대 방향성'을 제시했다. 첫째 목표로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일본'을 확립하기 위한 과학기술이노베이션 정책을, 둘째 목표로 웰빙을 '기점'으로 한 과학기술이노베이션을, 셋째 목표로 과학기술이노베이션 시스템의 리노베이션을 제시했다. 학계와 기업 모두 오픈 이노베이션의 부족, 조직의 유연성 부족 등 문제를 해결하고, 디지털 전환(DX)를 실현하면서 경제적·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쓰비시연구소는 “수많은 과제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어 개별 부처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과제의 전체 구조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 정책 영역(소관 부처)에 걸친 시책을 프로그램화하여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과학기술정책도 이러한 관점에서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지금은 자국의 생성 AI가 없으면 국가 운영과 안보 측면에서 큰 리스크가 될 수 있는 시대다. 경제안보와 기술도 불가분의 관계가 됐다. 한국은 이제 국가 생존과 미래를 내다보는 관점에서 앞으로 과학기술정책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다뤄야 한다. 그래야만 지속 가능한 선진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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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글로벌 원전 르네상스' 한국이 맨 앞에 서려면
지난 10일 원자력계 신년회에는 산학연 관계자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국회의원과 정부부처 장차관도 나와 격려했다. 황주호 한국원자력산업협회장(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의 신년사에 참석자들은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 황 회장의 신년사는 오는 3월 체코 원전 최종 계약을 앞둔 시점이라 한층 묵직하게 다가왔다. “지난해 국내 원자력계는 원전을 안전하게 운영하며 미래 성장 기반을 다졌습니다. 2015년 이후 최고의 원전 이용률인 83.8%를 달성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에 이바지했습니다. 신한울 1·2호기를 종합 준공하고 신한울 3·4호기를 착공해 원전생태계에 소중한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체코 신규 원전 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고, 1조2000억원 규모인 루마니아 원전 설비 개선 사업을 수주해 본격적인 해외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아울러 i-SMR(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사업 추진과 SMR 스마트 넷제로 시티 마케팅 등 미래 원자력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원자력계를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직접 원자력 정책에 관여해 보기도 한 필자도 신년회에 참석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필자의 머리속에 문득 2개의 장면이 떠올랐다. # 13대 국회(1988~1992)가 1988년 10월 정기국회에서 16년 만에 국정감사를 실시했다. 과학기술처와 관련 기관 국감은 국회 경제과학기술위원회가 담당했다. 당시 여소야대 정국에서 제1야당은 김대중 총재 휘하의 평민당이었다. 김대중 당수가 경과위 소속으로 국감에 출격하게 되니 매체들이 대거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첫 번째 국감 장소는 대덕연구단지였다. 이때 김대중 당수가 맨 먼저 들른 곳이 원자력연구소였다. 김 총재와 당시 한필순 소장은 차담회를 했다. 기자들과 일부 국회의원들은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필자는 김 총재 바로 뒤에서 취재수첩을 들고 있었다. “한 소장님, 미국의 오펜하이머를 잘 아시지요. 나는 우리나라도 엄청난 기술을 갖게 됐다고 봅니다.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잘 이용하고 산업 발전에 기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원자력연구소가 그 사명을 갖고 연구개발을 잘해주시길 기대합니다.”(당시 오펜하이머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김대중 총재는 그로부터 10년 뒤 제15대 대통령에 올라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IT강국 건설에 큰 업적을 남겼다. # 제17대 이명박 대통령(2008~2013)은 임기 첫해 녹색성장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을 세계에서 모범이 되는 ‘그린 뉴딜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필자는 녹색성장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에 임명됐다.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대통령과 차담회를 하는 자리였다. “원자력(발전)은 국제외교와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나는 원전외교를 잘 압니다(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대표로서 고리1호기부터 원전 건설을 주도했으며. 원자력산업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나 프랑스의 아레바 같은 원자력 기업들과도 인맥이 있습니다. 앞으로 원전외교를 위해 나도 앞장서서 뛸 테니 안전위 위원들은 원전이 안전하게 건설되고 가동되는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특히 미디어 출신 위원은 국민과 소통하고 설득하는 데 적극 노력해 주길 바랍니다.” 이때 원자력은 녹색성장기본법에 들어가 클린에너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주를 통해 한국을 원전 수출국으로 나아가는 데 큰 업적을 남겼고, 15년 뒤 체코 원전 건설을 수주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016년 창립 60주년을 맞아 60년간 가장 괄목할 만한 원자력 기술 발전과 성공한 원전사업 그리고 IAEA 지원 활동을 사진 60장으로 정리해 홈페이지에 올렸다. IAEA는 한국이 건설한 UAE 바라카원전을 역사상 처음으로 계약된 공사기간 내에 공사를 완료하고 계획된 공사예산 범위 내에서 공사를 마친(On time On budget) 성공사례로 실었다. 각기 다른 시기의 이 두 장면을 떠올리며 원자력은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지식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를 갖춘 국가 지도자의 결단에서 자라난다는 사실을 다시금 절감했다. ‘원자력은 국가다’라는 구호는 허울이 아니라 적확한 표현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데이터센터 건설을 견인차로 다시 불고 있는 세계의 원전 르네상스를 살펴보자. 많은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원전에 눈을 돌리고 있다.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의 기억이 남아 있는 일본도 이제 원전을 '탈탄소 전원'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미국의 테크 대기업들은 인공지능(AI)용 데이터센터의 대량소비 전력을 충당하기 위한 수단으로 원전을 주목하고 있다. 구글은 작년 10월 14일 차세대 원자로 '소형모듈원자로(SMR)'를 개발하는 미국 카이로스 파워(캘리포니아주)와 SMR로 생산한 전력을 조달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030년까지 첫 번째 SMR을 가동하고 2035년까지 SMR 여러 개를 추가할 계획이다. 총 발전 용량은 500메가와트(50만킬로와트)로 대형 원전 0.5기 규모 정도가 될 전망이다. 구글이 직접 나서서 고객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SMR 개발과 보급을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구글은 “태양광 발전에 대한 추가 투자를 검토하고 있으며, SMR과 같은 신기술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데이터센터, AI, 암호화폐(가상화폐)로 인한 전력 수요는 2022년에서 2026년까지 2.3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원전은 테크 대기업이 보유한 데이터센터에 가장 적합한 전원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24시간 가동되는 데이터센터는 발전량 변동성이 큰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에 비해 원전의 안정성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원전이 탈탄소 전원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이다. 테크 대기업들은 탈탄소 목표를 세우고 재생에너지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예컨대 구글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실질적으로 제로(net zero)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수립했다. 안정적인 가동이 가능하고 탈탄소 전력을 생산하는 원전은 테크 대기업에 기대되는 전원인 셈이다. AI용 데이터센터로 전력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미국 발전업계에 M&A(인수합병)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다. 기존 발전소를 보유한 타사를 인수하는 것이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한 신규 발전소 건설보다 쉽기 때문이다. 텍사스주 휴스턴에 본사를 둔 미국 최대 원전 운영회사인 콘스탈레이션 에너지는 한국 원자력계 신년회가 열린 10일 천연가스 화력발전업체인 칼파인을 164억 달러(약 2조6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전력회사로는 최대 규모의 M&A다. 동종 업계 M&A를 통해 발전 능력을 확대하기 위한 포석이다. 두 회사가 합병된 후 발전 용량은 약 6000만㎾(대형 원전 60기 정도)에 이를 전망이다. 콘스탈레이션은 약 3240만㎾의 발전 용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60%가 원전이다. 이런 세계 원전 르네상스 추세 속에서 한국수력원자력은 올해 원전 안전성 강화, 원전 수출 최종 계약 달성, 차세대 원자력 기술력 확보, 원자력계 현안 해결과 제도 개선, 탄소중립 사회 실현 등 5가지 주요 사업 목표를 내걸고, 세부 실행 지침과 함께 SMR 사업 등 중장기 로드맵도 그리고 있다. 원전의 미래 성장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계속운전, 인허가 등이다. 이는 한수원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와 행정이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은 세계 원자력 산업에서 중요한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원자력 수출도 마찬가지로 한수원 혼자서 할 수 없다. 원전은 기술과 상품을 파는 사업이 아니라 ‘국가의 신뢰’를 파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신뢰는 국내 환경이 부실하면 생겨날 수 없다. ‘원팀 코리아’가 필요한 이유다. AI는 원전 수출에서 글로벌 경쟁국으로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요 전략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첫째, 전략적 파트너십 활용이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서로의 강점을 결합해 국제 프로젝트 확보 가능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미국의 원천 원자력 기술에 접근하는 동시에 제조 기술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로써 세계 원전시장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대응할 수 있다. 둘째, 기술 혁신에 집중해야 한다. 첨단 원자로 설계, 특히 SMR 개발에 적극 투자해야 한다. 맞춤형 원자력 솔루션 제공을 통해 AI 데이터 센터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한다. 셋째, 국내 원자력 생태계를 강화하는 일이다. 원전산업 지원을 위한 대규모 펀드를 조성하고, 산학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2030년까지 국내 에너지믹스에서 원자력 비중을 최소 30%로 유지해 원전산업의 견고한 국내 기반을 확보하고, 글로벌 아웃리치를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 한국이 더 큰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원전 건설에서부터 해체와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이르기까지 원전산업의 다양한 측면에서 전문성을 개발해야 한다. 금융, 교육 및 장기 지원을 포함한 포괄적인 솔루션을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에 집중함으로써 한국은 기술 전문성, 전략적 파트너십, 안전과 혁신 강화를 통해 세계 원전시장에서 강력한 경쟁자로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다. 최근 국내에서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관련해 에너지 문제가 주요 이슈로 떠오르면서 문재인 정부 때 탈원전 정책을 추진한 더블어민주당이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을 위해서는 에너지정책의 탈정치화와 일관성이 매우 중요하며, 원전과 신재생에너지 등 발전원별 균형 잡힌 에너지 믹스가 필요하다는 변화된 인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반도체와 AI 등 초전력 산업의 발전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발전원별 전력수급 상황과 발전원가 분석을 통해 실용적인 에너지정책 수립이 요구된다는 데에도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소식통에 따르면 민주당 경제상황점검단과 미래경제성장전략위원회가 16일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을 위한 에너지 믹스 대책 간담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향후 민주당이 ‘탈원전 정책’을 계속해 나갈지에 대한 입장이 정리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민주당은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고, 원전 재흥(再興) 정책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정해야 한다. 한국이 세계 원전 르네상스 대열에서 이탈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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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올해 한국 경제는 수비 …절벽에서 안떨어지는 게 최선
2025년 한국 경제는 공격의 해가 아니라 수비의 한 해가 된다. 실업률 15%에 자기 소득 70%를 빚 갚는 데 쓰는 인구가 300만명이라고 한다. 환율 급등과 주가 급락보다 더 무서운 통계들이 즐비하다. 소비 단절이 온다. 한국 경제는 이전부터 졸졸졸 내려가고 있었는데 어느 시점에 충격을 받으면 절벽으로 떨어지게 된다. 당장은 2개의 절벽을 피하는 게 급선무다. 하나는 자동차산업이 당할지 모를 미국의 관세 폭탄이다. 일본은 자동차 관세 25%를 막기 위해 아베 전 총리 부인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동원해 외교전을 펼친다. 우리는 탄핵 정국에 빠져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는 부동산 시장 침체다. 여태껏 금융으로 지탱해 왔으나 한계에 부닥쳤다. 요즘 경매가 계속 늘고 있는 반면 낙찰 건수는 준다고 한다. 경매가 유동성을 상실하는 순간이 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을 풀어 시장을 유지했으나 이제는 한계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유동성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해야 한다. 우선 산업 유동성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부동산 쪽 유동성을 줄여가면서 산업의 유동성을 살려야 한다. 부동산은 진작에 조정했어야 했는데 못했다. 부동산에서 연착륙은 원래 없다고 할 만큼 대담한 정책 결정이 중요하다. 현재 미국 단기금리는 내리고 있고, 장기금리는 고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금리를 낮추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 유동성 확대도 제한되어 있다. 환율 상승 때문이다. 이미 유동성 늘려서 원화가 추락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우리 실력이 달러당 1600원 정도라고 분석한다. 외환시장 개입으로 1400원대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원화 약세는 대세다. 되돌릴 수 없다. 중국의 과잉생산도 한국 경제를 위협한다. 한국이 수출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싸구려 물건이 마구 들어 올 거다. 수출기업은 자금난에 봉착하고 설비투자를 못하는 형국이 된다. 10대 재벌조차 위기다. 지금 기업이 팔려는 부동산 매물이 50조~100조원에 이른다는 얘기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경제를 단기간에 안정시키고 중장기적으로 성장으로 나아가게 하는 바람직한 정책이 있을까. 2025년 한국 경제에 대한 암울한 그림을 보여주며 몇 개의 대화형 인공지능(AI) 서비스에서 답변을 들었다. 코파일럿(Copilot)의 해법을 알아보자. 코파일럿은 단기 안정화 정책으로 우선 통화 정책 조정을 제시했다. 한국은행은 인플레이션 관리와 통화 안정을 위해 금리 조정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는 중소기업의 운영비용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중소기업에 대한 맞춤형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것도 포함된다. 다음은 재정 부양이다. 공공 인프라 프로젝트와 친환경 기술에 초점을 맞춘 재정 부양책을 시행하면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 활동을 촉진할 수 있다. 환율 관리에도 나서야 한다. 외환시장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원화의 과도한 절하를 방지한다. 이는 수입 비용과 투자자 신뢰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부채 탕감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높은 부채 수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계와 기업을 위한 부채 탕감 프로그램을 도입해 채무 불이행을 방지하고 소비수준을 유지한다. 중장기 성장 전략으로는 먼저 구조 개혁을 제시한다. 노동시장 유연성 개선, 생산성 향상, 혁신 장려를 위한 구조 개혁을 시행한다. 다음은 교육과 훈련에 대한 투자다. 급변하는 경제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인력의 업스킬링과 재교육에 집중한다. 또한 연구개발(R&D)과 혁신을 지원해야 한다. R&D 자금을 늘리고 혁신적인 스타트업을 지원해 기술 발전과 경제성장을 촉진한다. 수출 시장 다변화도 긴요하다. 수출 대상국을 다변화하고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을 촉진해 일부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줄인다. 지속 가능한 개발 프로젝트에 투자해 환경문제를 해결하면서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보장한다. 다음은 챗GPT의 답변이다. 먼저 단기 안정화 정책을 살펴보자. 첫째, 산업 부문에 금융 유동성을 우선적으로 공급한다. 공급망 중단을 방지하고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 산업과 수출 주도 부문에 유동성을 확보해야 한다. 중소기업, 특히 첨단 제조 및 기술 부문 중소기업과 수출기업을 위한 맞춤형 신용 시스탬을 구축한다. 둘째, 전략적 부동산 디레버리징이다. 시스템적 위기를 유발하지 않으면서 부동산 익스포저(리스크에 노출되어있는 금액)를 줄이기 위한 단계적 정책을 도입한다. 셋째, 인플레이션과 통화가치 하락 완화다. 필수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목표 가격 안정화 조치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관리한다. 외환시장에 대한 신중한 개입을 통해 투기적 공격을 최소화하면서 원화 가치 하락을 통제한다. 환율 변동성 영향을 줄이기 위해 수출업체와 수입업체를 위한 헤지 메커니즘을 강화한다. 넷째, 고용과 가계부채 문제 해결이다. 기술, 친환경 에너지, 의료 등 수요가 많은 부문에 초점을 맞춘 고용 프로그램을 실시해 실직자를 흡수한다.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이 높은 가구를 대상으로 부채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시행해 소비자 신뢰와 구매력을 회복한다. 다섯째, 무역 외교의 강화다. 특히 자동차 부문에서 유리한 무역 조건을 확보하고 징벌적 관세를 피하기 위해 미국은 물론 G7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아세안과 신흥시장을 포함한 무역 파트너십을 다각화해 중국과 G7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완화한다. 이러한 정책을 위한 실행 과제로서 단기 유동성과 장기 재정 책임의 균형 유지가 중요하다. 이와 함께 실업률과 부채가 증가하는 가운데 대중의 정서를 관리하는 일도 긴요하다. 경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 입안자, 기업, 국제 파트너 간 협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즉각적인 경제 안정화 노력과 다각화 및 혁신을 위한 명확한 로드맵을 결합함으로써 한국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입지를 다질 수 있다. 경제 전문가와 관료들도 이러한 장단기 대책들이 타당성이 있고 실현 가능한 정책이란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올해 한국 경제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종합 패키지 정책과 자신감 있는 로드맵 수립이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종합 대책 수립은 지금과 같은 탄핵 정국의 정부에서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정치권은 올해 한국 경제의 위기를 인식하고, 정부의 경제 운영 시스템을 정상화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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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눈 크게 뜨고 나라 밖을 응시하자
한국은 지금 국회의 대통령 탄핵 결의로 사실상 최고통치권자의 유고 상태다. 이럴 때 경제와 안보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려면 어떤 방책이 필요한가.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정경일체(政經一體)가 되어 신속하고, 단호하며, 투명하게 행동함으로써 정치적 불확실성의 시기에 혼란을 최소화하고 경제와 안보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이를 효과적으로 풀어가기 위해선 여러 필요한 조치들을 시행해야 한다. 첫 번째는 정치적 안정과 제도적 복원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헌법 절차를 준수하는 게 급선무다. 탄핵 절차가 법에 따라 투명하게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 이와 함께 과도기적 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민을 안심시키고 통치 공백을 방지하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대화는 대단히 중요하다. 정치적 차이보다 국익을 우선시하기 위해 정당 간 협력을 촉진해야 한다. 두 번째는 경제를 안정시키는 일이다. 먼저 정책의 연속성을 보장해야 한다. 주요 경제 정책을 유지하고 시장을 불안하게 할 수 있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피하는 것이다. 금융 부문 지원도 긴요하다. 중앙은행은 유동성을 모니터링하고 필요한 경우 금융시장 안정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예컨대 한국은행은 금리 조정과 유동성 지원 등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선제적 조치를 지속적으로 취할 수 있다. 아울러 투자자를 안심시키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 펀더멘털을 강조하면서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명확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또한 일시적 부양책으로써 필요한 경우 중소기업 지원, 고용 안정, 소비자 신뢰 회복을 위한 단기 대책을 도입하는 것이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중소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 중소기업에 대한 재정 지원과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최우선 과제 중 하나다. 세 번째는 안보와 국방 조치를 단단히 챙기는 일이다. 먼저 군사 대비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북한의 중대한 안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군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대비태세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지역 동맹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동맹국, 특히 미국과 긴밀히 협력해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외부 위협을 억제해야 한다. 내부 불안 방지도 중요한 안보 사항이다. 시위나 불안을 관리하기 위한 적절한 보안 조치을 취하면서 시민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네 번째는 대중과의 소통과 투명성을 확대하는 일이다. 열린 소통을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다. 정부 관계자는 잘못된 정보와 유언비어가 퍼지지 않도록 상황에 대한 업데이트를 자주 제공해야 한다. 동시에 대중의 신뢰 회복을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대중의 우려를 인정하고 거버넌스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다섯 번째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다. 먼저 위기관리 태스크포스를 설치한다. 고위급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새로운 문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해결한다. 에너지, 통신, 교통 네트워크를 포함한 중요 인프라를 보호하고 서비스 중단이 없도록 현장관리를 강화해야 한다. 여섯 번째는 국제 외교를 챙겨야 한다. 국제사회와 긴밀히 소통해 한국의 무역 파트너와 동맹국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불확실성을 악용해 이익을 취하려는 외부 행위, 이른바 ‘지정학적 착취’가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해온 국가위기 관리의 기본적인 프로토콜이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흥분해 불안정한 탄핵 정국에서는 기본을 망각함으로써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치닫는 것을 외국 사례에서 자주 목격해 왔다. 다행히 우리는 2004년 3월 12일부터 2004년 5월 14일까지 진행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소추·심판사건(노무현 탄핵소추)의 와중에서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슬기롭게 수행한 경험이 있다. 세계 주요 미디어들은 이번 한국의 탄핵 사태를 보면서 한국의 성숙한 민주주의를 칭찬하면서도 이 사태를 얼마나 이른 시일 내에 극복하고, 과연 이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더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있다. 영국 파이낸설타임스는 며칠 전 한국의 탄핵 사태와 관련해 '정치적 무권위(No political authority): 한국의 임시 지도자가 직면한 어려운 과제'라는 내용의 머리기사를 실었다. 현재 한국 상황은 노무현 탄핵 소추 때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위기의 늪에 빠져 있는 시기와 미국의 새 정부 출범이 맞물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다.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와 ‘아메리카 퍼스트’를 기치로 내건 트럼프 정권이 펼칠 강권 외교에 벌써부터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행정과 외교의 커리어가 이미 나라 안팎에서 공인된 인물이다. 과거 노무현 탄핵 정국 때도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을 보좌한 이력이 있다.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경제계가 한덕수 권한대행에게 기대하는 이유다. 한덕수 권한대행은 특히 미국 정치·경제 상황 전개를 파악해가면서 트럼프 행정부와 새로운 경제협력의 실마리를 찾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주특기를 살리는 길일 것이다. 일부 경제 전문가는 트럼프 정부가 기축으로 삼는 ‘공급 중시 경제정책’을 잘 분석해 보면 차제에 한국 경제를 재흥(再興)시키는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가 재무부 장관으로 지명한 스콧 베센트는 공급 중시 경제정책 옹호자다. 그의 경제 철학은 재화와 서비스 공급을 늘려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을 강조하는 공급 중시 경제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일반적으로 세금 감면, 산업 규제 완화, 생산성과 효율성 향상을 위한 자유시장 원칙 장려 등이 포함된다. 트럼프는 2017년 취임 이후 감세·일자리 법안과 다양한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 노력과 같은 공급 중시 정책을 폈다. 베센트는 3-3-3 원칙을 내세운다. 그는 재정적자를 GDP 대비 3%로 줄이고, GDP 성장률을 3%로 끌어올리고, 산유량을 하루 300만배럴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3-3-3 규칙'을 시행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베센트의 접근 방식은 정부 개입을 줄이고, 민간 부문의 성장을 촉진하며, 경제 효율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출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정치·경제에 나타날 '일런 머스크' 효과도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는 얼마 전 SNS를 통해 취임 첫날 멕시코과 캐나다에 25%, 중국에 1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경제학의 기본 이론에 의하면 관세의 비용은 결국 수입국 소비자와 수출국 기업이 부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만약 관세 보복 전쟁이 벌어진다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는 차기 정권(트럼프 2.0)에서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정부효율화부를 자문기관으로 신설했다. 이는 감세와 규제 완화를 통한 공급 중시와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대선 기간 중 2조 달러(전체 지출의 약 30%) 지출 삭감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최근에는 국제기구에 대한 자금 지원을 포함해 5000억 달러 이상 삭감을 제안했다. 이는 의회가 승인하지 않았거나 의도하지 않은 지출로,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시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감세, 규제 완화, 작은 정부의 조합은 미국 민간 기업의 애니멀 스피리트(도전 정신)를 자극하고 개인 소비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트럼프와 머스크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것이 실현된다면 관세로 인한 경기 하방효과를 상쇄하거나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정책 믹스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소니파이낸셜그룹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스가노 마사아키는 “정부 기관의 대폭 축소는 다양한 마찰을 일으키고 미국 국민들의 비판이 거세질 수 있다. 트럼프와 머스크의 밀월 관계도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향성을 강화하는 트럼프 2.0에서 이러한 정책이 잘 작동하면 미국의 내수 진작을 통한 새로운 성장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일런 머스크 효과’에 힘을 주듯이 트럼프는 지난주 법무부 반독점 국장에 밴스 차기 부통령의 정책 고문을 지낸 게일 슬레이터를 임명하고,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에는 현 위원인 앤드루 퍼거슨을 승진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한 대로 바이든 대통령의 적극적인 기업 규제와 거리를 두고 스타트업의 성장과 기술 혁신을 중시하는 인물이 선임돼 M&A(인수합병)도 원활해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빅테크 기업들에 대한 강경 노선만은 대체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AI·가상화폐 차르(총책임자)’에 데이비드 색스 전 페이팔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지명했다. 색스는 오랫동안 실리콘밸리 권력 구조의 중심에 가까이 있었다. '페이팔 마피아'의 일원이었던 그는 수년간 페이팔의 최고운영책임자를 역임했으며 일론 머스크와도 가까운 사이다. 색스는 자신의 팟캐스트와 소셜 미디어에서 트럼프의 친산업적 입장이 기술 산업의 혁신을 촉진하고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2기의 세상은 더 위험해졌다. 두 곳의 지역 전쟁, 미·중 경쟁 심화, 러시아와 이란·북한이 일으키는 심각한 혼란, 세계 경제의 침체, 인공지능(AI)을 비롯한 파괴적 기술이 트럼프 1기와는 전혀 다른 요구를 정권에 던질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미국 우선주의 외교정책의 영향은 광범위하다. 거래 중심의 외교 스타일과 초강대국 대통령의 영향력이 자칫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발동될 가능성이 높다. 한덕수 권한대행과 정치권은 탄핵 사태에 따른 내정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노력 이상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과 그에 따른 외세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대비책을 마련해 시행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국민과 국가를 위한 진정한 길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