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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4 W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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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 논설고문
박종렬 논설고문 jrpak88@gmail.com
  • - 고려대 철학과
    - 중앙대 정치학 박사
    -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 EBS 이사
    - 연합통신 이사
    - 언론중재위원
    -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 [박종렬의 제왕학] "하늘 끝까지 오른 용은 후회한다"

    비상 통치 논란과 ‘계엄령’의 함정 정치의 본질은 ‘힘의 충돌’과 ‘심리 전쟁’이다.『손자병법(孫子兵法)』은 “상병벌모(上兵伐謀), 기차벌교(其次伐交), 기차벌병(其次伐兵), 기하공성(其下攻城)”이라 했다. 최고의 전략은 싸우기 전에 상대의 계책을 꺾는 것이며, 정면충돌은 최하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전술 중 하나가 상대 장수를 도발해 분노로 이성을 잃게 한 뒤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만드는 ‘격장지계’(激將之計) 계략‘이다. 흔히 성격이 급한 적장을 상대로 상대 장수의 감정을 결정적으로 자극시켜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계책인데 윤석열이 이재명의 격장지계에 걸려들었다. 윤석열 정권 몰락의 결정적 계기는 ‘계엄령’ 논란이었다. 야당은 격장지계인 도발 전략으로 윤석열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윤석열은 민주당의 감사원장 등 20여 차례 탄핵 공세와 김건희 여사 특검 추진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누구도 예상 못한 계엄령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정면충돌을 택한 윤은 상대가 도발로 유도한 ‘정치적 함정’에 스스로 뛰어든 격장지계의 전형적 사례였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이라는 감정적 강경 대응은 정치의 본질—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기술—을 간과, 오히려 지지율 급락과 정치적 고립을 자초했다. 『한비자(韓非子)』는 “용기(勇氣)만 있고 계책(計策)이 없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힌다(勇而無謀者(용이무모자), 必爲人擒(필위인금)”며 “장노이불절(將怒而不節), 즉병란이국위(則兵亂而國危)” 즉 “장수가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면 군대가 혼란해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한다. 이를 예견하듯 “힘으로만 이긴 자는 힘이 다하면 반드시 패한다(以力勝者, 力盡則敗:이력승자, 역진즉패)”(『자치통감(資治通鑑)』)고 기록했다. 그의 통치는 힘에 의존했으나, 민심과 조직 장악이라는 근본적 ‘세(勢)’를 놓쳤다. 결론은 ‘권력은 세(勢)로 다스린다.’로 요약된다. 역사적으로 인내(忍耐)의 대표적 사례는 삼국지의 사마의(司馬懿)다. 삼국지에서 제갈량(諸葛亮)은 위나라 정벌을 위해 사마의가 지키는 성을 공격했으나, 사마의는 굳게 성문을 닫고 수비를 이어갔다. 조급해진 제갈량은 ‘격장지계’를 써서 사마의에게 여자 옷을 보내 모욕했다. 보통 장수라면 분노로 성문을 열고 나오겠지만, 사마의는 이를 간파하고 치욕을 참았다. 결국 촉군은 장기 원정으로 피로 누적에 빠졌고, 제갈량은 ‘밥은 적게 먹고 일은 번잡한’ 식소사번(食少事煩)으로 시달리다 54세에 과로로 사망했다. 『자치통감』은 사마의를 “인욕이대(忍辱以待)”, ‘모욕을 참으며 때를 기다린 자’라 평했다. 승패는 전장에서의 무력보다 인내와 심리전에서 갈렸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도발에 맞선 인내와 후흑(厚黑)의 지구전(持久戰)으로 승리했고, 조조(曹操) 밑에서 위나라 권력을 장악한 그는 겉은 충신처럼 꾸미되 속에 야심을 감췄다. 《한비자(韓非子)》의 “겉은 관대한 척했으나, 속은 엄격함(外寬而內嚴)”을 실천하며 조조 3대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했고, 훗날 그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진(晉)을 세워 삼국을 통일 했다. 역사는 이를 ‘인내로 적을 제압(以忍制敵)하고 후흑으로 공을 이룸(以厚黑致功)’의 전형으로 본다. 진(晉)나라 중시조가 된 사마의는 ‘작은 분노’를 참으며 장기적으로 ‘창업 개국’의 포석을 깔았다. 그의 처세는 “이퇴위진(以退爲進)”, 즉 한 걸음 물러서 두 걸음 나아가는 제왕술의 완성형이었다. 이재명도 정면충돌 대신 ‘기다림의 매복전(埋伏戰)’을 택했다. 첫째, 윤석열의 자충수를 기다려『손자병법』의 “불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을 현대 정치에 적용해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길을 추구했다. 둘째, 민생 이슈로 여론을 장악, 정치 공방 대신 물가·경제·일자리 등 민생에 집중,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셋째, 법적 위기를 정치적 무기로 전환, 검찰 수사를 ‘정치 탄압’으로 규정, ‘피해자 이미지’프레임을 부각시켜 지지층을 결집했다. 이는 ‘격장지계’로 상대의 분노를 유도하고, 동시에 민생과 여론을 묶어 전략적 우위를 점하는 정치술이었다. 윤석열의 패착이 된 자충수를 관찰하면 ‘인내가 권력을 지킨다’라는 말이 실감 난다. 윤은 권력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중용(中庸)』은 “치우치지 않음이 중이며, 변치 않음이 용이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라 했다. 여기서 ‘중(中)’은 단순히 중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최적(最適)의 균형점을 찾는 ‘시중(時中)’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비상 통치 논란은 정치적 균형을 상실한 ‘치우침’이었다. ‘시중’을 잃은 강권의 자해(自害) 행위였다. 자신의 통치 능력을 과신하고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 권력은 결국 자기파괴의 길을 걷게 된다. 정치는 단순한 도덕의 영역이 아니다. 슈미트(Carl Schmitt)가 말했듯, 정치의 본질은 ‘동지와 적을 구별하는 행위’이며, ‘위기 속 결단이 주권자의 본질’이다. 여기에 제왕학은 한 가지를 덧붙인다.『정관정요(貞觀政要)』는 “소분불인, 즉란대모(小忿不忍, 則亂大謀)” 즉 “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면 큰 계책을 어지럽힌다.”고 지적한다. 또 “치국선치리(治國先治吏)”라 했다. 사람과 조직을 다스리지 못하면 국정(國政)은 무너진다. 지도자는 인내와 절제로 감정을 제어하고, 심리전을 꿰뚫어야 한다. 윤의 분노는 몰락을 불렀고, 이의 인내는 승리를 가져왔다. 병법과 제왕학은 “지도자는 감정으로 망하고, 인내로 권력을 지킨다.”고 한목소리로 경고한다. 역사 속 난세의 지도자들과의 비교 역사 속 위대한 지도자들은 난세 속에서 역경을 극복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위기 상황에서 발휘한 인재 활용 능력과 충언(忠言) 수용의 자세에 있었다. 조조는 ‘유교적 명분’과 ‘법가적 실리’를 결합해 혼란한 시대를 제어했다. 그는 인재를 등용할 때 가문이나 혈통이 아닌 오직 능력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자신에게 비판적 목소리를 낸 순욱(荀彧) 같은 인물도 중용했다. 이는 인재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유연한 리더십을 보여준다. 징기스칸은 정복 군주였지만, 정복 이후에는 문치(文治)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거란 출신 지식인 야율초재(耶律楚材)를 등용하여 몽골 제국의 행정 체계를 구축하고, 과도한 약탈을 막아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는 무력만으로는 제국을 유지할 수 없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태종(唐太宗)은 신하 위징(魏徵)의 직언을 수용, 쓴소리를 '인간 거울'로 삼아 자신의 허물을 고치며 중국 최대의 태평성대(太平聖代)라는 '정관(貞觀)의 치(治)'를 열었다. 비록 충언이 불편하고 모욕적일지라도, 이를 경청하는 지도자의 자세가 국가의 번영을 이끌었다. 현대 정치사의 사례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반복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전시(戰時) 내각을 구성하며 정적을 포용했고,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 분석하며 전쟁을 지휘했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도 남북전쟁 당시 자신과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경쟁팀의 팀'을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 위기 속에서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고 통합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반면 윤은 비판을 ‘적대(敵對)’로 간주했고, 정책 결정은 폐쇄적인 소수 그룹에 의해 이루어졌다. “겸청하면 밝다(兼聽則明)”를 외면, 정책 오류(誤謬)는 누적되었고, 국민적 불신을 초래했다. 제왕학이 주는 현대 정치의 세 가지 경고 윤 사례는 제왕학이 과거 유물이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 리더십에 대한 강력한 경고임을 보여준다. 첫째, 인재와 충언의 균형이다.『정관정요』는 명확하게 “두루 들으면 밝고, 한쪽만 들으면 어둡다(兼聽則明, 偏聽則暗)”고 했다. 지도자는 자신에게 쓴소리하는 충신과 충성심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측근을 모두 포용하고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이는 다양한 관점과 정보를 통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함이다. 윤 정권의 인사 구조는 이 원칙을 거스른 결과였다. 폐쇄적 인사는 정보 편향을 낳았고,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이어졌다. 둘째, 과단성과 절제의 동시 필요성이다. ‘난세의 지도자’는 결단력과 함께 절제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중용』의 ‘時中’은 상황에 따른 균형 감각을 뜻한다. 이는 '적당히'가 아니라, 급진적 개혁과 신중한 안정 사이에서 최적 지점을 찾아내는 지혜를 의미한다. 지도자는 과감한 결단이 독선이나 무모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 계엄령 논란은 ‘과단성’으로 포장된 무모함이었고, 절제가 없는 강권은 민심을 떠나게 했다. 정치적 절제가 부족한 리더십은 결국 자기 파멸을 초래한다. 셋째, 덕화(德化)와 신뢰 회복이다.『한비자』는 “현명한 군주의 길은 상벌을 반드시 믿게 하는 것이다(明主之道, 賞罰必信)”라 했다. 일관성 있는 상벌과 국민과의 신뢰가 통치의 기본이다. 법치주의는 중요하지만, 법률만으로는 통치를 유지할 수 없다. 리더의 도덕적 권위와 국민적 신뢰가 무너질 때, 아무리 강력한 법적 권한도 무용지물이 된다. 윤은 여러 차례 논란에 휩싸이며 신뢰를 잃었고, 법적 정당성마저 의심받게 되었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지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치 자산이다. 윤석열 ‘거울 없는 권력’의 불가피한 종말 윤의 몰락은 제왕학의 ‘거울’이 사라진 결과였다.『사기』는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알 수 있다(以人為鑑, 可以知得失)”고 했다. ‘사람’은 단순히 신하(臣下)를 넘어, 국민 전체를 의미한다. 현대 민주정에서 지도자는 국민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허물을 살펴야 한다.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고통에 공감하며,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 거울'을 사용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고전의 거울은 물론, 국민이라는 거울마저 외면한다면, 권력은 스스로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제왕학은 더 이상 봉건 시대 군주만의 학문이 아니다. 오늘날 정치 리더십의 위기와 지도자의 몰락은, 고전이 던지는 경고를 외면한 ‘거울 없는 권력’의 숙명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윤석열 사례는 그 경고가 현실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교본이 되었다. 이 시대의 지도자들은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며, 자신을 성찰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권력을 유지하고 국가를 번영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제왕학은 “권력은 냉혹하며, 이를 잊는 자는 권력에 삼켜진다.” 결론짓는다. 높이 나는 용은 바람을 의심해야 하고, 땅에 붙은 잡초는 뿌리로부터 강해야 한다. 강해야 오래가고, 분별할수록 흔들리지 않는다. 정치의 세계에서 인내와 분별은 권력을 지키는 최후의 덕목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박종렬의 제왕학] 하늘 끝까지 오른 용은 후회한다
  • [박종렬의 제왕학] "하늘 끝까지 오른 용은 후회한다"

    윤석열은 검찰총장에서 대통령으로 벼락출세한 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급전직하로 추락했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로 몰려 수인(囚人)의 나락으로 떨어져 영어(囹圄)의 신세가 된 그의 운명은『주역』이 경고한 “하늘 끝까지 오른 용은 후회한다(亢龍有悔)”의 전형이었다. 최고 권력에 도달한 자가 겸손을 잃고 독선에 빠지면 결국 파멸을 자초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생생히 보여준 것이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권력의 문제’이다. 난세일수록 지도자의 판단과 통치술은 한 국가의 흥망을 가른다. 오늘날 민주정(民主政) 체제에서도 권력의 본질을 꿰뚫는 이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제도와 절차, 여론을 분석하는 현대 정치학의 틀로는 권력의 본질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국가 운영의 실제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변수를 통해 극적으로 달라진다. 시대와 체제를 넘어, 권력자의 성향과 결단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통치 원리는 냉혹하다. 윤석열의 강압 통치는 자신을 파괴했고, 이재명은 이를 활용해 정권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이재명 또한 결코 안심할 수 없다. 권력을 획득하는 창업(創業)보다 더 어려운 것은 권력을 유지하는 수성(守成)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추락은 최고 권위에 오른 자가 자신을 절제하고 덕(德)으로 민심을 얻지 못하면, 권력은 언제든 ‘독(毒)’이 되어 자신을 삼킨다는 교훈이다. 역사는 이를 거듭 입증해 왔다. 사마천(司馬遷)은『사기(史記)』에서 항우(項羽)를 두고 “힘이 산을 뽑고 기운이 세상을 덮었으나(力拔山氣蓋世)” 결국 교병지패(驕兵之敗), 곧 오만이 부른 패망으로 귀결되었음을 기록했다. 윤석열의 궤적은 항우형 지도자의 전형을 닮았다. 결단과 추진력으로 정상을 향해 치고 올랐지만, 민심을 수성(守成)하지 못한 채 독주와 충돌을 거듭하다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이재명에게도 이 원칙은 예외 없이 적용될 것이다. ‘윤 어게인(Yoon Again)’을 외치는 세력은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며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지만, 오만한 권력자의 말로가 얼마나 비정한지를 이미 숱한 역사에서 증명해왔다. 권토중래는 단순한 정치 복귀가 아니라 형세(形勢), 민심(民心), 천명(天命)의 삼위일체적 전환을 전제로 한다. 즉, 윤석열의 재기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그는 검사로서 ‘권력운용’ 경험은 있었으나 포용과 절제의 통치술은 미흡했다. 대선 토론 과정에서 ‘확정적 범죄자’로 규정했던 이재명을 대통령 시절 면담하는 등 정치적 경쟁자와의 무분별한 화합 시도는 정권의 정당성을 흔들었고, ‘적과 동지의 경계’가 무너진 순간 리더십은 급속히 약화했다.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군주론의 “군주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경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윤의 몰락과 이재명 정권의 탄생은, 현대 정치의 한 장면이면서 동시에 최고 권력자들이 반복해 온 역사의 궤적이다. 대선에서 성공, 대통령이 된 윤이 내란수괴로 몰린 극적 반전이 이루어진 이 드라마는 권력운용의 고전적 원리를 무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실패를 넘어, 민주사회에서도 제왕학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를 웅변한다. ‘비상계엄’이라는 파천황(破天荒)의 자충수를 둔 윤석열의 몰락은 ‘자업자득’이었다. 윤석열은 검찰총장에서 대통령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레토릭으로 ‘강직함’과 ‘법치주의 수호’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대권을 잡았다. 민심은 군주에게 ‘강단(剛斷)’과 ‘덕치(德治)’의 균형을 요구한다. 권력 유지의 본능이 강화될수록, 윤석열의 통치 기반은 협소해졌다. 지지층에 갇힌 정치는 확장성을 잃었고, 위기 국면에서 협치와 타협 대신 강경책으로 응수했다. 계엄령 논란은 법치의 수호자에서 헌정의 위협자로 전락하는 극적 반전을 연출했다. 이는 ‘덕 없는 강권’이 필연적으로 부르는 자멸의 전형이다.『한비자(韓非子)』는 “군주가 권력을 쥐고도 민심을 잃으면, 그 칼은 결국 자신을 찌른다.”고 했다. 계엄령과 내란 시도 논란, 헌정질서의 위기, 민심의 격렬한 이반(離反)은 바로 이 경고의 실증이었다. 반면, 이재명은 난세의 정치 지형에서 ‘붕괴 작전’을 전술로 택했다. 범죄자만 상대하며 온실의 화초처럼 박근혜 대통령을 구속하는 등 평생 검사(23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갑(甲)으로 잔뼈가 굵은 윤석열은 풍찬노숙하며 산전수전 겪은 잡초형 생존 전략에 이골이 난 이재명의 매복전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不戰而屈人之兵)”을 상책으로 본다. 이재명은 정면충돌보다 윤석열의 자해(自害) 행보를 기다리며 민심을 흡수했다. ‘피의자’로 내몰린 법정 공방 속에서 ‘피해자 프레임’을 활용, 경제·민생 이슈에서 서민층의 불만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지지 기반을 확장했다. 정치적 맥락에서 ‘적이 예측하지 못한 순간과 장소에서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주도권을 빼앗는 전술’인 매복전을 시의적절하게 구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36계(計)’ 가운데 승전계(勝戰計) 네 번째 계책인 ‘편안함으로 피로함을 기다린다’는 ‘이일대로(以逸待勞)’로, 전장이 될 만한 곳에 먼저 도착하여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피로에 지쳐 도착하는 적과 싸우는 전술을 구사했다. 자기편 힘을 보존하고 적의 약점을 극대화, 전투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함으로써 적을 효과적으로 격파하는 이 전술은 ‘적의 피로와 자멸’을 기다리는 손자병법 지혜의 현대적 변용이었다. ‘군주의 자기 점검’, “동(銅)거울, 역사(古)거울, 사람(人)거울” 리더는 끊임없이 ‘성찰’을 통해 ‘자기 점검’을 해야 한다. 조선 500여 년 왕조 지탱의 힘은 왕의 끊임없는 성찰과 왕권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 시스템인 ‘경연(經筵)’ 제도였다. 신료들이 왕과 함께 학문과 국정을 토론, 왕의 독단과 전횡을 막아 왕이 '군주'로서 갖춰야 할 덕목과 통치 철학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민심을 헤아리는 군주로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중국 최고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 태종(唐太宗) 이세민은『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 신하 위징(魏徵)이 죽자 “동(銅) 거울, 역사(古) 거울, 인(人) 거울”로 성찰해 왔다고 고백했다. • 동(銅) 거울: 제도와 법률을 상징한다. 지도자는 법률적 정당성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외형을 단정히 하고, 국가 기틀을 확립한다. 통치 기본이자 최소 요건이다. • 역사(古典) 거울: 역사 속 흥망성쇠를 통해 교훈을 얻는 도구다. 과거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미래 위기에 대비하는 지혜를 얻는다. 역사 반복성을 인지하고 과거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성찰적 자세를 의미한다. • 사람(人) 거울: 인재와 신하 충언을 통해 자신의 득실을 살피는 지혜를 상징한다. 가장 얻기 어려운 거울이며, 지도자의 오만을 경계하게 한다. 자신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직언을 경청하는 능력은 지도자의 그릇을 보여주는 핵심 지표다. 윤석열의 리더십은 첫째 거울, 즉 법률적 정당성에만 지나치게 집착했다. 검사 출신으로서 '법치'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웠고, 모든 문제를 법률적 잣대로만 재단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정치의 본질은 단순히 합법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민심의 정서적 공감대와 시대적 정합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복합적 행위다.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을 주는 것이 낫지만, 두려움이 증오로 변하는 순간 그는 파멸한다”고 경고한 마키아벨리 지적대로 윤석열은 법 집행의 엄격함으로 일정 부분 국민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둘째 거울(역사의 교훈)과 셋째 거울(충언)을 외면한 결과, 그의 통치 방식은 국민에게 점차 증오의 감정을 유발했다. 민심은 단순히 법의 잣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공감과 소통이 부재한 권력은 필연적으로 반발에 부딪힌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변증법적 역사관을 빌리자면, 지도자의 독선은 반작용(反作用)을 낳아 결국 새로운 변화의 동력(動力)이 된다. 이처럼 윤석열 정권의 몰락은 지도자의 자기 성찰 부재가 초래하는 비극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검사형 리더십의 태생적 한계 윤석열 리더십의 핵심은 검찰 조직문화였다. 위계(位階)질서 속의 충성, 상명하복, 법률 중심 사고가 국가 운영에 그대로 이식되었다.『자치통감』은 “장수가 무능하면 삼군이 연좌된다(將帥無能, 累及三軍)”고 했다. 지도자의 사고방식이 조직 전체를 규정하듯, 검사형 리더십은 국정 운영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검사형 리더십은 다음과 같은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첫째, 단죄와 책임 추궁에는 능하지만, 다양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능력은 취약하다. 정치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싸움이 아니라, 타협을 통해 공동 이익을 창출하는 과정이다. 법률적 판단은 명확한 결론을 요구하지만, 정치는 모호함 속에서 최선의 합의를 찾아야 한다. 둘째, 흑백 논리에 빠지기 쉽다. 법정에서는 유죄·무죄만 존재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회색지대’가 훨씬 넓다. 윤 대통령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세력을 '적폐'나 '카르텔'로 규정, 대결 구도를 심화시켰다. 정치적 스펙트럼을 단순화, 협치 여지를 없애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 수직적 의사 결정 구조를 선호한다. 검찰조직에서 익숙했던 하향식 지시 체계는 정치적 소통을 가로막고, 수평적 협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다양한 의견 수렴을 방해하고, 결국 고립된 의사 결정으로 이어졌다. 윤의 계엄령 실패는 박정희, 전두환의 군인형 리더십과 대비된다. 박정희는 군사적 과단성과 함께 필요할 때는 정적을 포용하거나 정치적 거래를 통해 정국을 장악했다. 1960년대 한·일협정 당시, 반대 여론에 직면했을 때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동시에,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재야 세력과의 밀실 협상을 병행했다.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 리더가 결단력과 함께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윤은 이와 달리 정치적 연합 구도를 형성하지 못했고, 비판 세력을 포용하기보다 적으로 돌리는 데 집중했다. 막스 베버(Max Weber)가『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강조했듯, 정치는 단순한 관료적 행정이 아니라 '열정과 책임감, 균형 감각'을 요구하는 행위다. 윤의 검사형 리더십은 관료적 책임감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정치의 본질을 놓쳤다. 충언 배제와 내부 붕괴의 전조(前兆) 권력의 몰락은 외부 공격보다 부식(腐蝕)된 내부 붕괴에서 먼저 시작된다. 이는 고대의 난세에서부터 반복된 ‘정치 철칙(鐵則)’이다. 윤석열의 몰락도 박근혜 탄핵 때처럼 한동훈 등 내부 배신에서 조짐을 보여 단순한 권력투쟁 패배나 여론 악화로만 치부할 수 없다. 권력자 주변에 아첨꾼이 모여들고, 충언하는 신하 배척 현상은 역사 속에서 반복됐다. 윤 정권 후반에 불거진 핵심 측근 이탈과 배신은 권력 기반의 균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한비자』도 “근신들은 아첨을 공으로 삼는다(近習之臣, 皆以讒諂為功)”고 경고했다. 윤의 몰락은 3류급의 무능 무위한 참모 임용 등 ‘인사가 만사’임을 외면한 권력 운용 결과로 해석되며, 곧 ‘거울 없는 권력’의 필연적 파국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가 되었다. 권력의 비판적 자기 성찰 기능이 상실되었을 때, 어떤 재앙이 초래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다. 역사적 사례는 왕망(王莽)의 신(新) 왕조다. 그는 유교적 명분을 내세워 혁명적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자신의 개혁 노선에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측근들만을 가까이했다. 충언하는 신하를 멀리하고 아첨꾼만을 중용, 민심과 동떨어진 정책을 남발했다. 결국 대규모 농민 반란과 내부 분열로 신 왕조는 짧은 역사를 마감해야 했다. 사마천은 “신임이 부당하면 나라가 기운다(信任 不當, 國必傾危)”라고 했다. 윤은 비판 목소리를 내는 인물을 멀리하고, 오직 ‘충성 경쟁’을 하는 측근을 중용한 후과를 단단히 치르고 있다. 이는 권력 스스로가 자신을 갉아먹는 ‘자가포식(self-cannibalization)’을 초래했다. 다양한 정보와 의견이 차단된 권력은 현실을 왜곡해 보게 되고,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진다.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는 “권력이 다른 사회 시스템(경제, 문화 등)과 서로 작용하지 못하고 자율성이 지나치게 강화될 때, 시스템 전체 균형이 깨져 붕괴하게 된다”고 했다. 윤의 충언 배제는 권력이 사회 시스템과의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를 끊어버린 결과다.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반영하듯 외면하고 냉대하는 세상인심이 부박(浮薄)함을 탓하는 ‘고립무원’이라는 그의 법정 넋두리가 한심할 뿐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박종렬의 제왕학] 하늘 끝까지 오른 용은 후회한다
  • [박종렬의 제왕학] '영토완정(嶺土完整)' 선언한 김정은… 제2의 남침 노린다

    남북전쟁이 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우리 무력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고 사활적인 과업은 전쟁, 전쟁에 대처한 준비다…. 공화국 무력은 우리 주권이 행사되는 모든 곳에서 적들의 온갖 침해행위를 강력한 군사적 행동으로 제압할 수 있게, 유사시 부과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게 철저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노동신문, 24. 11. 18.)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1월 14~15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인민군 제4차 대대장, 대대 정치지도원대회’ 마지막 날, “전쟁준비 완성에 총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핵 무력 강화 노선은 이미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역적인 정책으로 된 지 오래며 이제 남은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핵 무력이 전쟁억제의 사명과 제2의 사명(유사시 선제공격)을 수행할 수 있게 더욱 완벽한 가동 태세를 갖추는 것뿐”이라며 전쟁준비 태세 확립을 지시했다. 올해 6월 19일 열렸던 ‘푸틴-김정은 회담’ 이후 북한과 러시아는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고, 북한은 ‘러시아와의 동맹’ ‘고도화된 핵 무력’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지렛대를 배경으로 전쟁 불사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이어 10월 중순 이후, 북한은 4개 여단 병력 10,000여 명을 러시아에 파병해 대(對)우크라이나와 전쟁에 참전, 전쟁 양상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시작, 전쟁 발발 1000일을 넘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우리 정부 역시 간접적으로 참전 중이다. 정부는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변함이 없다”고 했지만,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은 궁극적으로 모든 유럽 국가들을 합친 것보다 많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했다”고 보도했다.(한겨레, 2023-12-06) 한국이 미국에 155㎜ 포탄 50만 발을 대여하고 미국은 비축된 기존 포탄을 우크라이나 지원하는 우회·간접 지원방식이었다. 해외에서 남북전쟁이 이미 시작된 모양새다. 푸틴은 한국산 포탄의 미국 수출이 확인된 2022년 10월 27일, 모스크바 발다이 국제회의 석상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나 포탄을 제공하면, 한러 관계는 파탄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고, 북・러의 ‘전략적 협력 강화’ 빌미가 되어 우크라이나 전쟁의 불길이 한반도로 번지고 있다. 지난 11월 17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대응, 지금까지의 정책을 바꿔 사거리가 약 300km인 에이태큼스(ATACMS)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해 러시아 본토 공격을 허가했다. 미국 관리들은 러시아군이 북한군 1만 명이 포함된 5만 병력으로 쿠르스크 탈환전에 나선 것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군이 지난 8월 기습 점령한 자국의 서쪽 영토인 쿠르스크의 일부 지역을 되찾기 위한 대규모 작전을 시작했고, 미국은 북한군도 이 전투에 가담하고 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11월 11일, 우크라이나군이 쿠르스크에서 적군 약 5만 명과 교전 중이며 1만1천여 명의 북한군이 배치됐다고 주장했다. 북・러 간에 군사 밀착, 무기 지원뿐만 아니라 파병까지 이뤄줘 우크라이나에서 남북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미사일 사거리 제한 해제에 대해 러시아는 ‘3차 세계대전’을 경고하는 등 북한 파병으로 우크라이나 상황은 미・러 관계 뿐 아니라 미・중 경쟁 및 동북아시아 역내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도화선(trigger)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미 미・중 경쟁이 첨예한 가운데 미・러 갈등도 심화하는 등 정권 교체기의 미국의 혼란스러운 리더십으로 한반도 관련 안보 상황에 ‘전략적 공백’이나 ‘틈새’가 발생할 것으로 북한이 인식할 경우 예측불허의 상황이 전개될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아울러 러시아의 의도가 현상 변경 시도에 있고, 중국 역시 이를 미・중 경쟁에 활용할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김정은은 도발이나 무력시위를 벌이더라도 중・러가 이를 옹호할 것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중・러와 연대해 무력시위의 강도를 높여 현 상황을 시험하거나 미국의 관심을 유도해 한・미・일 구도를 흔들며 대미 협상력을 높이고자 할 가능성 등 한반도의 정세가 위기로 치닫고 있다. “한국 괴뢰 족속들을 우리의 전정에 가장 위해로운 제1의 적대국가,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남한 영토를) 점령, 평정하는 것을 국시(國是)로 결정한 것은 우리 국가의 영원한 안전과 장래의 평화를 위한 천만 지당한 조치로…, 평화는 구걸하거나 협상으로 맞바꿔 챙기는 게 아니고. 전쟁은 사전에 광고를 내지 않는다. 적들이 무력을 사용하려 든다면 우리 수중의 모든 초강력을 동원해 적들을 끝내버릴 것이다.” (북한 대외 관영 ‘조선중앙통신’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2024.2.9.) 김정은 위원장은 조선인민군 창건일 즉 건군절인 지난 2월 8일, 딸 주애와 함께 국방성을 방문, 한국을 괴뢰(傀儡)라면서 헌법을 고쳐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이자, ‘불변의 주적’으로 명기, 남한 점령이 국시,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선언했다. 지난해 12월 26일부터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조선반도에서 압도적 힘에 의한 대사변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는 않겠지만 전쟁을 피할 생각 또한 전혀 없다”며 전원회의에서 남측을 ‘적’이라고 처음 표현했다.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대남사업 부문의 기구들도 정리, 개편하기 위한 대책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런 발언은 북한이 최근 남조선이란 명칭을 ‘대한민국’으로 변경한 것의 일환으로, 남북 관계를 동족·민족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敵對的) 두 국가’, ‘교전 중 두 국가’ 체제로 보고 ‘대남 방침의 근본적 방향 전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지난날 김일성이 ‘남조선 해방’을 명분으로 6.25를 일으킨 시점(時點)이 집권 2년 차인 38세(1912년생)였던 점을 상기하면 올해 40세로 집권 12년 차를 맞는 김정은이 조부 김일성과 ‘이미지 과잉경쟁’ 상태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특히 김일성이 생전에 그토록 염원했던 ‘핵폭탄’이라는 절대무기를 확보한 그의 야망(野望)은 최근의 호전적 발언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대한민국이 우리 국가를 상대로 감히 무력 사용을 기도하려 들거나 우리의 주권과 안전을 위협하려 든다면, 주저 없이 수중의 모든 수단과 역량을 총동원해 대한민국을 완전히 초토화해버릴 것”이라며 “우리와의 대결 자세를 고취하며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적대국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제일로 중시해야 할 것은 첫째도, 둘째도 자위적 국방력과 ‘핵전쟁 억제력 강화’”라고 역설했다. 올해 들어 ‘제150탱크사단’을 시작으로 군부대를 집중 방문, 현지 지도하고 있는 그는 ‘김정은식 무력통일’로 “전쟁이 나면 미군 도착 전에 대한민국을 완전 점령·평정·수복해 북한에 편입한다”며 ‘7일 전쟁’ 작전계획을 점검하고 있다. 경의선의 북측 구간도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그는 통일, 화해, 동족 개념을 아예 없애고, 80년간 이어온 남북 관계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반도 전쟁 가능성,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최고조 미국· 중국 등 한반도 전문가들의 ‘전쟁 위기’ 경고도 잇따르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 센터의 로버트 매닝 선임연구원은 지난 10월 7일 ‘한반도 전쟁 가능성이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가장 높다’고 분석했다. 현대 국제정치의 대가(大家) 한스 모겐소(Hans J. Morgenthau) 교수는 ‘핵보유국’과 ‘그렇지 않은 나라’의 관계를 “일본이 미국의 핵폭탄 공격을 대책 없이 맞고 있었던 것처럼, 핵을 보유하지 않는 나라는 핵을 보유한 적국에 ‘대들다 죽거나, 항복하거나’ 양자택일(兩者擇一)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1월 11일, 북한 전문가로 명성을 쌓아온 미국 미들베리국제연구소의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지그프리드 해커 교수는 “한반도 상황은 1950년 6월 초반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김정은이 1950년에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전쟁을 하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북한 전문매체 38노스) 할아버지 김일성은 전쟁준비가 덜된 상태였지만, 김정은은 6차례나 실험한 핵과 미국까지 사정권에 둔 미사일까지 갖춘 상태다. 한반도 유사시 국제정세상 유엔 개입이나 미국 지원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국토완정(國土完整)’을 주장한 김일성을 모방, ‘영토완정(領土完整)’으로 표현을 바꾼 그가 제2의 6·25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작년 말 김정은의 ‘영토완정’ 발언은 6·25 1년 전 김일성이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완정’을 주장하면서 소련·중공과 결탁해 남침(南侵)했던 역사적 사실을 연상케 한다. 김정은이 지난해 8월 29일, 한국과의 전면전을 가상한 ‘남(南) 점령’ 전군 지휘 훈련을 하는 지휘소를 방문, 작전 상황을 보고받는 등 그의 계속되는 미사일 실험과 전투부대 점검 행보는 철저한 ‘전쟁준비 시나리오’를 보여준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하마스-이란 간의 전쟁이 계속되고, 중국이 ‘대만 점령’을 목표로 전쟁준비를 끝낸 국제 정세가 유엔 개입이나 미국 지원 어려운 한반도의 ‘전략적 공백’이 임박했다고 판단되면, 김정은이 선언한 대로 ‘대한민국의 완전한 점령ㆍ평정ㆍ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을 위해 무모한 전쟁을 시도할 개연성이 높다는 점이다. 김정은이 “유사시 핵 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박차를 가해나가겠다”는 선언, ‘영토완정’을 2023년 ‘수정 헌법’에 명시해 놓아 단순한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략에 있다”(Stärke liegt nicht in der Verteidigung, sondern im Angriff)며 2개월 이내에 승리로 이끈다는 환상에 젖어 당시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독일의 180만 대병력으로 기습 공격했다 패망했던 히틀러. 그를 우상으로 신봉하는 김정은이 ‘조부 김일성’이 못다 한 ‘한반도 영토완정’을 위해 기습적으로 불장난을 벌일지 모른다는 우려가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을 뿐 그 패턴·운율을 반복한다는 말처럼 한반도의 전운(戰雲)은 시시각각 짙어지고 있다. 탄핵과 방탄으로 영일(寧日) 없이 정쟁만 일삼는 정치판을 바라보면 전략이 없는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한 선택은 과연 무엇인지 한심하다. 구한말 일본 주재 중국 외교관 황준헌이 <조선책략>에서 당시 망국(亡國) 전야의 조선 상황을 “집이 불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처마 밑에서 한가로이 노는 제비와 참새가 바로 조선의 처지를 ‘연작처당(燕雀處堂)’”으로 빗된 과거가 상기된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박종렬의 제왕학] 영토완정(嶺土完整) 선언한 김정은… 제2의 남침 노린다
  • [박종렬의 제왕학] 외모와 스피치 통치 스타일 까지 김일성 본뜬 격세유전 리더십

    할아버지 격세유전, 白頭血統 정통성 승계로 확보한 리더십 부각 본명이 김성주(金成柱)인 김정은의 조부 김일성(1912~1994)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古平面 南里: 현 평양 만경대구역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1894~1926)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강반석(康盤石:1892~1932)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모태신앙 기독교인으로 8살 때 부모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撫松)으로 이주, 유년시절을 보냈다. 김형직은 무면허 한의사로 공산주의자라면 치료도 거부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자의 미움을 사 김일성이 14살이던 1926년 32살에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김일성은 조부모 슬하에서 보통학교인 창덕학교를 거쳐 지린성 송화강변의 위원(毓文, 육문)중학교에 1926년 입학했으나 1929년 중퇴했다. 이 학교 중국인 선생 상웨(尙鉞)에게서 공산주의를 배우고,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에 가입,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투옥, 6개월여 수감 생활을 하던 중 퇴학당했다. 1930년 석방된 뒤 김일성(金日成)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한 그는 1931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33년 이후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의 소속으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부대를 조직해 ‘보천보 전투’ 등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군의 추격을 받은 김일성은 1941년 소련령 블라디보스토크로 피했다가 하바로프스크로 옮겨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88여단에서 특무공작 요원 훈련을 받고 소련군 소좌 계급장을 달았다. 1945년 33살이던 김일성은 광복을 맞아 9월 소련 상선을 타고 원산항에 입항, 10월 14일 평양의 군중대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북한에 돌아온 그는 1946년 2월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을 선포, 같은 해 7월에 스탈린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받아 해방정국에서 기라성(綺羅星) 같은 백전노장 독립투사들을 제치고 대권을 장악했다. 아버지를 잃은 한미(寒微)한 가문 출신으로 만주에서 10대에 독립운동을 시작, 일제 토벌군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갔던 그는 로마넨코, 스티코프 장군 등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 지도자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천거로 왕기(王器)임을 알아본 스탈린의 낙점을 받아 최고지도자로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김일성의 집권은 ‘문득 무심하게 고개 돌려 쳐다보니'처럼 홀연히 찾아든 선물 같은 북한판 맥연회수(驀然回首)였다. 김일성은 북조선 공산당과 북한 정권을 장악, 1950년 남침을 감행해 6·25 한국전쟁을 일으켰으며, 전후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등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확고한 1인지배체제를 구축했다. 1960년대 말부터는 개인숭배 운동이 고조돼 거의 신격화(神格化) 수준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북한 근·현대사는 김일성 가계 중심으로 재편됐다. 북한 정권 수립 뒤 일제하에서 공산당 최고 리더로 군림, 카리스마 넘치는 거물 박헌영 등 숱한 정적들을 제거한 김일성은 유일 체제를 확립했다. 특히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던 그는 세계공산주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대립하던 중-소대결의 틈바구니에서 ‘주체사상’을 제창, 신정체제(神政體制)와 같은 1인 독재체제를 완성한 것이다. 인민들에게 신(神)과 같은 존재로 생전에 이미 ‘무오류(無誤謬)의 전설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김정일은 마르크스 레닌의 공산 사상보다 우선시하는 ‘주체사상’을 ‘국책 이데올로기’로 확립하고 이를 기념, 연호(年號)를 김일성 출생 시기로 잡아 ‘주체(主體)’로 쓰는 현대판 왕조체제를 완벽하게 구축한 것이다. 우상화를 통한 개인숭배로 구축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후계 세습체제를 확고히 구축, 김일성 사후 장남인 김정일이 대권을 세습, 승계했다. 김일성은 ‘민족의 태양’이 되어 출생일이 국경절이 됐고, 주체사상 유일 지배체제로 사후에도 여전히 확고한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있다. 사망 후 3년 정도의 과도기에는 이른바 ‘유훈통치(遺訓統治)’로, 김정일 시대 개막 이후 현재까지 ‘영원한 수령’으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 김일성과 그의 부인 김정숙이 백두산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고 해서 김일성 직계 가족을 일컫는 ‘백두혈통’(白頭血統)은 상징적인 북한 체제 선전의 이데올로기다. 김정일은 집권 후 신격화를 위해 실제 출생지인 연해주 하바로프스크가 아닌 ‘백두산 밀영(密營)’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한다. 백두산 한 봉우리에 ‘정일봉(正日峰)’이란 이름을 붙이고, 생가로 밀영을 짓는 등 백두산과 김정일을 동일시하여 혈통적으로 우수함을 상징조작한 것이다. 김정은 역시 후계체제 세습의 정통성 명분과 ‘혁명 위업 계승자’라는 논리를 ‘백두혈통’에서 찾고 있다. 백두산 소재지인 양강도 삼지연군은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지역이자 김정일 출생지로, 북한 주민들이 순례하는 ‘혁명의 성지(聖地)’로 선전되고 있다. 북한 매체들은 중대한 고비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마다 “김정은 동지께서 백두의 첫눈을 맞으시며 몸소 백마를 타시고 백두산정에 오르시었다”라며 ‘백두혈통’ 상징인 백마 탄 김정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동안 ‘백두혈통’이라는 정통성을 바탕으로 권력을 세습, 김정일이 선친의 유훈(遺訓)을 통치지침으로 삼은 데 이어 그의 사후 권력은 그의 아들인 김정은에게 승계되었다. 김정은은 신화적인 조부 ‘김일성 통치행태’를 모방, ‘조부 이미지 전이(轉移)’를 통해 김일성이 누렸던 ‘위대한 어버이 수령’의 어진 모습을 부각하며 인민 생활 향상을 내세우는 인민 친화적인 대중적 이미지로 포지셔닝했다. 지난 2010년, 김정은은 집권 초 ‘3년 안에 주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도록 하겠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는 1962년 최고인민회의에서 당시 내각 수상이던 김일성이 했던 약속을 48년 만에 다시 들고나온 것이다.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신화처럼 김정은도 3살 때부터 백발백중(百發百中)의 명사수로 7개 언어를 구사한다는 등 선전도 흡사하다. 2012년 15일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태양절)을 맞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은은 앞뒤 좌우로 기우뚱기우뚱 몸을 흔들어가며 다소 빠른 속도로 나지막이 연설하는 목소리, 큰 몸집에 뒤로 쓸어올린 머리 스타일, 짙은 색깔의 인민복과 손뼉 치는 모습까지 닮은 모습을 연출했다. 이날 열병식에서는 흰색 망토를 휘날리며 백마부대가 등장, 역시 김일성 주석 생전에 있었던 열병식에서 자주 보이던 모습으로 김일성 시대의 향수를 자극했다. 젊은이답지 않게 성량(聲量)을 조절해가며 일부러 톤을 낮춘 김정은의 스피치 스타일은 평소 연설을 즐기던 김일성 주석의 지난 1948년 인민위원회 연설 때 장면과 흡사했다. 김일성의 출생일을 기념하는 국경절인 태양절 무대는 ‘이미지 메이킹’의 정점이었다. 주석단 무대의 김정은 왼쪽에 도열한 최룡해 총정치국장 등 군부 인사들의 둥근 모자와 흰색 예복은 김일성 주석이 해방 이후 처음으로 평양에 들어와 연설할 때 복장 그대로였다. 호방하게 웃는 모습, 짧게 친 머리 스타일, 롱코트 옷차림 등 젊은 시절 김일성 주석을 닮은 외양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 위원장은 집권 후 외모나 정치적으로 김 주석을 모방, 할아버지 김일성 ‘따라잡기’ 모습을 보여왔다. 목소리, 몸동작은 물론 연설 태도까지 할아버지를 너무나 빼닮아 ‘김일성이 환생(還生)’ 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북한 주민들에게 각인됐다. 이에 대해 ‘김일성 모방’을 학습해 ‘철저히 만들어진 지도자’ 이미지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김정은이 할아버지를 닮기 위해 6차례 성형수술을 했다”는 중국 일부 매체의 보도에 대해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근거가 없다” (2013.01.23.)고 보도했다. 김정은이 김일성을 닮은 것은 ‘격세유전(隔世遺傳·손자 세대 이후에 나타나는 유전)으로 매우 정상적’이라고도 평했다. 많은 설왕설래에도 불구, 그는 선친 김정일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된 행보를 보여 세대를 걸러 나타나는 ‘격세유전(atavism)’으로 조부인 김일성 스타일과 흡사하다는 평가다. 김정은의 통치 스타일은 김일성처럼 대중과의 스킨십 강화, 공개적인 대중 연설, 상대적으로 민생을 중시하는 정치, 대남 초강경 기조, 경제개혁 가능성 시사 등 통치방법도 유사하다. 김정은이 옷차림과 걸음걸이, 웃는 모습 등에서 할아버지를 본받으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국민을 아낀다는 인상을 주려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배를 내밀고 걷는 모습은 ‘타고난 위인’이라는 느낌을 전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조선일보, 2013.1.24.). ‘뿔테 안경에 뒷짐’을 쥐고 걷는 보행과 선대(先代) 패션을 따라 하는 행태는 폐쇄적인 독재 국가의 집권자인 만큼 단순한 패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선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연상케 하는 선글라스와 카키색 점퍼 차림의 연설 등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권력을 승계한 김 위원장으로서는 인민들에게 선대(先代) 향수를 자극함으로써 체제의 정통성을 부각,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패션 정치의 일환인 셈이다. 선친인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74년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이후 92년 인민군 창건기념일 때 딱 한 문장이 전부인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고 한차례 연설한 데 비해 김일성은 해마다 신년사도 직접 읽고, 주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접촉했었다. 이처럼 김정은의 할아버지 따라 하기는 ‘할아버지의 업적’에 기대 3대 세습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지금보다 형편이 나았던 김일성 시대를 상기시키기 위해 권위주의적인 아버지 김정일식 리더십보다는 주민과 병사들을 챙기는 ‘김일성식 수령 리더십’을 차용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조부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고, 생전에 만나지 못한 태생적 한계극복을 위한 눈물겨운 이미지 조작이라는 평가다. 공포통치 용인술, “닭 목을 쳐 원숭이 길들인다”는 ‘살계경후(殺鷄儆侯)’ 전술 김정은의 용인술(用人術)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공포통치의 전형(典型)을 보여준다. 집권 초 김정은은 체제 단속과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징역형도 무조건 공개처형’, ‘탈북자 무조건 사살’ ‘군부숙청’ 등 ‘공포심을 자극’하며 통치했다. 당시 주민들은 “어리다고 우습게 보지 마라”는 김정은의 공포통치라고 수군거리며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고위 탈북자 최모씨는 “1998년 공식 집권한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총소리를 울려라’고 인민보안부에 지시해 절도범까지 총살했다”며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김정은도 아비가 했던 짓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같다”고 했다(조선일보, 2011.12.15.). 집권 초 27세의 세습 권력자로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김정은은 이복형인 김정남을 지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할아버지의 사위이자 아버지의 매제였던 고숙 장성택을 가차 없이 숙청, 자신의 권좌를 넘보거나 걸림돌이 되면 가차 없이 제거한다는 본보기를 시현했다. 모택동이 자신을 위협하는 유소기 임표 등 2인자 제거를 통해 일벌백계(一罰百戒) 로 본보기를 보인 것과 유사한 통치 수법이다. 김정은은 곡예장의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지 않자 ‘원숭이는 피를 싫어한다’는 속설을 믿는 주인이 “닭의 목을 쳐 공포로써 원숭이를 길들였다”는 ‘살계경후(殺鷄儆侯)’ 고사를 실천한 셈이다. 원숭이(侯)가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린 닭(鷄)이 순식간에 피가 솟구치고 파닥거리다 죽자 공포에 질린 원숭이는 그제야 주인의 징 소리에 따라 필사적으로 주인이 시키는 대로 재주를 부리게 된다. 목숨을 건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살계경후’가 먹혀들게 하려면 되도록 ‘큰 닭’을 대상으로 피를 뿌리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럴수록 원숭이를 잘 길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의 26계(計)에 해당하는 지상매괴(指桑罵槐·뽕나무를 가리키며 회나무를 꾸짖는다) 같은 전술이다. 강력한 적을 제압해 다른 조직원들에게 경고를 보낼 때 흔히 쓰는 계책이다. 김정은은 권력층에 피바람을 예고, 누구도 권력을 넘보거나 까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고로 유일 영도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강태공(姜太公)이 제왕학 교과서인 『육도(六韜)』에서 “한 사람을 죽여 삼군(三軍)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다면 그를 죽이고, 한 사람에게 상을 주어 천하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에게 상을 주라”고 했다. 한 사람을 벌해 다른 사람에게 경고한다는 의미로, 공포심을 극대화해 뜻하는 바를 도모한다는 말이다. 『한서(漢書)』는 ‘하나로써 백을 경고하면, 모든 사람이 복종하게 된다. 공포감은 스스로 새롭게 변화시킨다(以一警百, 使民皆服, 恐懼改行自新).’고 했다. 2013년 12월 조선중앙통신은 당시 장성택 실각과 관련, “장은 겉으로는 당과 수령을 받드는 척 순종하면서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는” 양봉음위(陽奉陰違)식의 종파적 행위를 일삼았다”며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천세만세 높이 받들어 모시기 위한 사업을 외면하고 각방으로 방해하는 배신행위를 감행하였다”고 죄상을 밝혔다. 부자(父子)간에도 "재산은 나누어도 권력은 나누지 못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몰각, 방심한 자업자득이었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박종렬의 제왕학] 외모와 스피치 통치 스타일 까지 김일성 본뜬 격세유전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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