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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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임진왜란 도공의 기술 …고흐와 모네의 영감이 되다
요즘 날씨가 한여름보다 더 더운 느낌이다. 입추가 지났으니 더위가 한풀 꺾일 만도 한데 여름날씨의 마지막 발악일까,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매일 땀으로 샤워하며 절감하고 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니 몸의 온도유지가 일정치 못하면서 콧물과 재채기가 그치질 않는다. 내 몸도 변화를 혼란스러워 하는 거 같다. 그래서 요즘 부쩍 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한국·중국·일본은 오랫동안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이나 음양오행론 같은 세계관 안에서 몸을 이해해왔다. 몸은 소우주(小宇宙)로서 자연과 호흡하고, 장부와 기혈은 하늘·땅·사계절과 연결된 질서 속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관에 변화가 찾아왔다. 일본이 네덜란드를 통해 <해체신서>(解體新書, 1774년)라는 독일의 해부학자 요한 쿠르무스의 <해부학 입문(Anatomische Tabellen)>네덜란드어 판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로써 일본 학자들은 직접 시체를 해부하여 기존의 한의학적 설명과 맞지 않는 부분을 확인했고, 이를 통해 몸=자연 질서의 축소판이라는 직관적·우주론적 이해에서 몸=해부 가능한 물질적 구조라는 실증적 이해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 변화는 단순히 의학의 전환을 넘어, 인간관과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을 촉발했으며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이해하다’ 혹은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가 보통 ‘안다’고 하는 과정은 크게 '분석적 지식'과 '직관적 지식'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적 지식 (Knowing by Analysis)은 대상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각각의 부분을 탐구하고, 그 관계를 파악하여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성을 중시하며 증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관찰-분석-추론-종합의 과정을 거치며 검증하는 것이다. 직관적 지식(Knowing by Intuition)은 분석과정 없이 대상을 한 번에, 즉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논리적 추론이 아닌, 경험과 감각, 그리고 무의식적인 통찰력에 기반한다. 즉각적이고 주관적이며 비언어적인 것이 특징이다. 오랜 경험 축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대상에 대한 내재적인 감각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오랜 시간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답을 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대상을 부분으로 나누지 않고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숙련된 장인이 망치 소리만 듣고도 쇠의 온도를 아는 것은 직관적 지식이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소리와 온도의 관계가 그의 몸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쪼개서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논리가 발달했고, 직감으로 전체를 아우르려는 태도에서는 통찰이 중요시되는 경향이 있다. 직감은 논리적 절차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이렇다'라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 쉽고,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기보다는 '그냥 느낌이 그래', '내 경험상 이래'와 같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요즘 한국의 국회나 청문회 등을 보면 정상적인 대화를 볼 수 없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지만 이성적이고 논리적 대화하기 보다는 고함지르기가 자랑이고 윽박지르는 것이 일상이다. 솔직히 이들을 좀 배운 지식인이나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라고 하기엔 낯부끄럽다. 통찰의 노동자, 논리의 감독관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현장 문제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을 갖게 된다. 노동자의 몸은 수십 번, 수백 번 같은 작업을 반복하며 문제의 징후를 감각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 소리는 용접 부위가 잘못됐다는 신호다", "이 냄새는 전기 합선이 곧 일어난다는 뜻이다"와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직감으로 상황을 '안다'. 노동자에게 중요한 것은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이렇게 하면 돼"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생긴다. 반면, 감독관은 도면과 규정, 공학적 지식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현장을 관리하려고 한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으로 확인하고, 수치를 측정하고, 관련 규정을 찾아보는 등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과정을 거치려 한다. 감독관의 역할은 '왜' 문제가 발생했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모두에게 납득시킬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규정에 어긋나니 다시 해야 합니다"와 같이 원칙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방식의 차이는 종종 현장에서 충돌을 일으킨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감독관이 현장의 미묘한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절차를 고집하며 일을 지연시킨다고 느끼며 화부터 낸다. 감독관 입장에서는 노동자가 검증되지 않은 개인의 경험만 믿고 위험하거나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일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이 충돌은 단지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가'에 대한 갈등이기도 하다. 경험과 몸의 감각을 중시하는 태도와 논리와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가 부딪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방식은 서로를 보완할 때 가장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의 직관적 통찰이 문제의 조기 발견에 도움이 되고, 감독관의 논리적 분석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경험이 이론으로 정립되고, 감독관의 논리는 현장에서 더 유용하게 다듬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현장의 안전교육에는 주의사항 전달이나 기능적 교육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교육내용이 더더욱 필요한 것이다. 작년 이맘때 나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에 그림 그리는 작가로 참가했었다. 유럽에 간 김에 런던, 파리 그리고 헬싱키를 돌아보았다. 주로 미술관을 방문했는데 우연인지 모르지만 미술관마다 인상파 그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인상파가 일어날 당시 유럽은 일본에서 건너온 우키요에(浮世絵)라는 목판 인쇄그림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일본 도시 상인과 서민 사이에서 목판 인쇄로 대량 제작된 우키요에는 값싸고 친근한 대중문화였다. ‘떠도는 세상(浮世)’이라는 뜻의 우키요에는 가부키나 노우 공연의 안내 포스터 출연 배우나 잘나가는 기생, 명승지, 그리고 일상생활이 담긴 자유로운 표현의 예술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우키요에는 일본의 도자기 수출 과정에서 우키요에 목판화가 포장재(완충재)로 실려 나갔는데, 유럽 상인과 예술가들은 우연히 이 목판화를 발견해 그 신선한 시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화가들은 우키요에의 평면적 색면, 비대칭 구도, 윤곽선 강조, 일상 속 순간의 포착 방식을 적극 수용하며 자포니즘이라는 붐이 형성되었다. 클로드 모네는 일본 다리와 연못을 모티브로 ‘수련 연작’을 그렸으며, 빈센트 반 고흐는 히로시게(広重)의 ‘명소 에도 100경’을 모사했고, 에드가 드가는 우키요에에서 무희들의 동작 포착과 화면 잘라내기를 학습하여 발레 무희를 생생히 표현했다. 클림트의 '황금 시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반복적이고 기하학적인 패턴들도 우키요에가 가진 장식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우키요에는 근대 서양 미술의 자유로운 시각, 언어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임진왜란과 문화 기술의 이동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계기는 도자기 덕분이었다. 사실 돈이 된 것은 도자기였다. 일본 도자기가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출신 도공들의 역할이 컸다.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에 큰 상처를 남겼다. 전쟁은 인구 감소와 경제 쇠퇴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불안정을 초래했다. 하지만 일본에선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의 뛰어난 장인들, 특히 도공들이 일본 각지로 이주하며, 그들의 기술이 일본 도자기 산업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임진왜란이라는 비극 속에서 조선 도공의 기술과 일본 상업문화가 결합해 일본은 도자기와 우키요에를 세계에 알렸고, 유럽 미술 혁신을 이끌었다. 조선은 '기술'이라는 문화적 자산을 소유했으나, 이를 제대로 평가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부족했지만, 일본은 이 기술을 받아들여 그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제공했고, 이는 일본 상공업과 나아가 유럽 무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근대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인류학자 최협 교수는 문화란 누가 최초로 무엇을 만들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파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책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에서 강조되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문화란 창조보다 전파의 방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화가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힘은 ‘무엇을 처음 만들었는가’보다 ‘그것이 어떻게 퍼지고, 어떻게 공유되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의 사용, 농업, 철기, 문자 등은 한 곳에서만 창조되었더라도, 그것이 전파·수용·응용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회가 변하고 새로운 문명이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문화는 창조가 아니라 전파 속에서 힘을 얻는다. 몸의 지혜든, 노동의 경험이든, 예술의 감각이든, 나눠지고 공유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처음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형되며 확산되느냐다. 직관과 분석, 경험과 논리의 차이를 넘어, 상대에 대한 증오와 열등감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지식과 문화는 지금 어떻게 서로에게 전해지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기후위기의 시대, 패권전쟁의 시대에 흔들리는 사회에서 새롭게 붙잡아야 할 문화의 생명일 것이다. 이두수 작가 소개 idoosoo@navor.com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에서 빈곤지역 교육지원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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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타는 목마름으로
며칠간 지속된 더위는 내 육체적 한계를 드러냈고, 내 삶의 리듬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뜨거운 여름 건설 현장에서 '노동은 곧 운동'이라며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일하면 일이 재미있고, 재미있으면 피곤함을 잊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과도하게 흘린 땀은 내 몸의 생체리듬을 무너뜨리고, 일에 대한 의욕을 앗아가며, 사소한 일에도 짜증마저 유발하는 '노이즈'의 시작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혼란은 단순히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의 문제였다. 몸무게의 70%가 물이라는 사실이 이토록 절실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단순한 갈증을 넘어선 탈진 상태는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나와 세상 사이의 관계마저 뒤틀리게 했다. 물 한 병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사소한 부주의가 개인의 신체 리듬을 넘어 삶의 질서와 가치를 허물어뜨리는 경험은, '물'이라는 근원적인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제를 재해원인분석 툴인 '4M'으로 분석해 보면. 먼저, 사람(Man)의 문제는 나 자신의 부주의한 선택이었다. 뜨거운 몸을 식히려고 차가운 물만 벌컥벌컥 마셨고, 충분한 수분 섭취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이는 관리(Management)의 문제, 즉 개인의 건강을 스스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찜통 같은 환경(Media)과 기본적인 냉방조차 쉽지 않은 건설 현장(Machine)의 물리적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나를 극한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실제 땀으로 인한 탈수 증세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일상의 독서, 그림 그리기, 운동 같은 소중한 나의 루틴들은 무겁고 피곤한 몸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졌다. 약간 무리한 인용일 수 있지만 이 상태는 마치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규범이나 가치관의 부재, 혼란, 또는 붕괴로 인해 개인이 느끼는 불안감, 좌절감, 무력감 등 무규범 상태인 아노미(Anomie)라고 말한 그와 같은 상태였다고도 볼 수 있다. 개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환경에서 철학, 과학, 예술 같은 고차원적인 가치들은 설 자리를 잃고, 오직 생존 본능만이 남는 혼돈 그런 상태 말이다. 물: 생존을 넘어선 '로고스'의 기반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로 보았다. 평범한 이 시각이 그리스가 그동안 신 중심의 신화문명에서 인간중심의 철학문명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던 그의 시도는 '물'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서 시작되었다. 물은 고체, 액체, 기체로 자유롭게 변한다. 고이면 썩고, 흐르면 살아 움직인다. 얼면 견고하고, 끓으면 보이지 않게 증발한다. 물은 ‘형태를 가지지 않으면서도 모든 형태가 되는’ 존재다. 물의 이러한 유동성과 포용성은 당시의 수준에선 우주의 근원이라는 말에 손색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근대에 들어와 우리는 이 ‘물’로부터 리터(Liter)와 킬로그램(Kilogram)이라는 단위마저 끌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10평방센티미터에 담긴1리터의 물은1킬로그램이다. 즉, 무게와 부피라는 물리 단위조차 ‘물’을 기준으로 정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탈레스의 말은 단지 상징이 아니라 측정과 질서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기준이 세워질 때 시민의식이 형성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도 우린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이는 물이 단순한 생존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감정 조절, 그리고 사회적 관계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고스(Logos)'의 기반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 부족으로 뇌 기능이 저하되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고,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노이즈'가 발생하며, 결국 '나와 물체 간에, 나와 동료, 인간들 사이의 질서가 붕괴되는 것이다. '물 한 방울'의 관리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 관계의 파열, 나아가 문명의 취약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地-圖-理': 지식 탐구의 세 단계 어떤 노이즈 상태에서 로고스를 끄집어 내는 과정을 지-도-리로 간략화 해보자. 地 (현실, 경험, 데이터)는 단순히 물리적인 땅(Earth)을 넘어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인지하고 경험하는 모든 복잡하고 정제되지 않은 현상 그 자체다. 무수히 많은 별들,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 그리고 내가 현장에서 경험한 극한의 갈증과 피로가 여기에 해당한다. 圖 (개념, 모델, 재현, 체계화)는 단순히 지리적인 지도(Map)를 넘어, 현실을 이해하고 표현하며 활용하기 위한 모든 형태의 표현물, 모델, 계획, 추상적인 개념, 혹은 질서화된 정보 체계를 의미할 수 있다 밤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들 속에서 찾아낸 '별자리', 측정의 기준이 되는 '미터법', 사과의 낙하에서 유추된 '수학 공식'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나의 경험에서 얻은 ‘따뜻한 물을 마셔야 하는 내 체질에 날 덥다고 찬물만 마셔 내 몸에 음기가 서린’ 것은 나름의 체질 분석으로 나에게는 일종의 '圖'가 되었다. 理 (이치, 원리, 궁극적 법칙, 완전한 추상)는 '圖'를 통해 이해된 여러 현상이나 개념들 간의 숨겨진 연결고리, 모든 것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법칙을 탐구하는 단계다. 탈레스의 '물은 만물의 근원'이라는 사유나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양자역학의 기본원리, 그리고 동양의 이기론처럼, 개별적인 '圖'들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를 파악하려는 시도이자 '圖'의 한계를 넘어서는 완전한 추상의 영역이다. '圖'를 넘어서는 직관과 지혜: 禪과 易의 가르침 우리가 만든 '圖'와 ‘理’는 아무리 정교해도 '地'의 완벽한 복사본이 아니다. 별자리가 우주의 극히 일부만을 포착한 '圖'이듯이, 우리의 모든 개념과 이론은 실재의 풍부함과 복잡성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따라서 '圖와 理’를 넘어 다시 '地'로 돌아가 직관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선(禪)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된 '圖와 理'의 한계를 넘어, 실재('地')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깨닫는 것을 강조한다. '불립문자'의 가르침처럼, 아무리 지도를 잘 그려도 그 땅 위를 직접 걷는 경험과는 다르듯이, 선은 직접적인 '地'의 경험을 통해 총체적이고 비분석적인 이해에 도달하려 한다. 역(易)은 '변화'를 핵심 원리로 삼아 우주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는 원리를 탐구한다. 팔괘와 육십사괘라는 상징 체계('圖')를 통해 우주와 인간 세상의 변화 패턴('地')을 설명하며, 정적인 '圖'로는 다 포착할 수 없는 '地'의 끊임없는 변화와 그 속의 관계성,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까지를 '圖' 안에 담아내려 한다. 결국 선과 역은 모두 '圖와 理가 가진 본질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뛰어넘어 '地'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깨닫거나 '地'의 동적인 측면과 그로부터 얻는 지혜까지를 '圖와 理’ 안에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재현이나 추상화를 넘어선다. 나의 경험 또한 그랬다.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냉방된 휴게실에서 얻었던 순간의 쾌락은 결국 '圖'에 갇힌 미숙한 선택이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외면하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 역시 나의 '圖'가 '地'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다시 '地'로 돌아가 나의 몸이 보내는 직관적인 신호에 귀 기울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지혜를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물 한 방울이 던지는 질문: 개인을 넘어선 문명의 문제 건설 현장에서의 물 부족 경험은 단순한 개인의 신체적 고통을 넘어선다. 그것은 물 관리, 환경 윤리, 사회 시스템,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탈진 상태에서 겪은 짜증과 관계의 마찰은 한정된 자원 앞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축소판이었으며, 물 부족 환경이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로 기능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가 깨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가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과거 군주들의 통치에서 치산치수(治山治水)를 강조하며 보와 수로를 증설한 것은 결국 식량증산을 위한 물관리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지금도 물 문제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 도시화된 현대 사회는 복잡한 물 공급 시스템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이나 홍수는 이러한 시스템을 언제든 마비시킬 수 있다. '물 한 방울'의 문제는 결국 문명 전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번 경험을 통해 나는 단순한 개인적 목마름을 넘어, 물이 생명과 질서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는 '로고스'의 힘이 약해졌을 때, 짜증과 자기 비하에 빠지는 나의 모습은그간 하찮게 여겼던 '물'이라는 근원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우리는 아직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의미를 낮을 곳을 향하는 물의 겸허와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부쟁의 의미, 어떤 장애물도 돌아서 가는 유연함,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스스로 맑아지는 정화의 힘과 포용력 이런 은유적 의미보다는 단지 '물은 흘러야 한다'라고 피상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 한 방울의 소중함과 그것이 개인과 사회, 그리고 문명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을 깊이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地'에서 '圖'를 거쳐 '理'에 이르는 지식의 여정 속에서 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는 이 여름날 흘린 땀방울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삶과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노동을 마치고 물 한 잔을 마시며 물 한 방울이 우리의 생존과 이성, 감정, 인간 관계, 나아가 문명의 지속가능성까지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 하이쿠 한 수> 물 한 잔 무시, 길을 잃은 내 영혼 껍데기일 뿐. 水一杯無視すれば魂も空っぽう。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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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노마드 시대 …다시 회복해야 할 노동의 품격
이제 광주 일곡현장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와 이달 말쯤이면 할석팀도 빠질 거 같다. 건물 주변 되메우기 공사가 시작되면 골조공사는 거의 끝났다는 얘기다. 할석미장팀만 남아 마지막까지 내장시공에 아무 문제없도록 틈을 메우고 있다. 마무리 단계에선 역시 선이 중요하다. 인체에서 골격이 좋다는 것은 선이 아름답다는 말처럼 건물도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지만 무엇보다 선이 예뻐야 한다. 마무리 공정에 들어가면 근로자들은 다음은 또 어느 현장으로 갈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건설노동자는 모두 일용직 노동자이기 때문에 여기서 일이 끝나면 또 어디 가서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인 것이다. 직업은 있으나 직장이 고정된 것이 아니니 늘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좋게 생각하면 일용직 건설노동자는 현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노마드적 삶을 사는 직종이기도 하다. 직업과 노동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보통 '저는 ○○입니다'라고 답한다. 이 빈칸에는 흔히 자신의 직업이 들어간다. 교사, 회사원, 건설노동자, 예술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직업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고 사회적 위치를 표현한다. 그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직업이 곧 정체성의 뼈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질문은 더 깊은 울림을 가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단지 나의 직업을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직업을 넘어선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질문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가 하는 일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그리고 이 일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인류 역사 전체로 보자면 꽤 최근의 일이다. 고대 사회에서 노동은 하층민과 노예의 몫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은 자유인의 덕목이 아니며, 정신적 성찰은 노동에서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고 했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시민은 정무나 철학, 예술 활동에 참여해야 했고, 육체노동은 종속의 상징이었다. 중세에는 신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노동’은 육체의 타락과 원죄에 대한 속죄로 이해되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고통받고, 그것을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지만 때로는 처벌의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직업은 여전히 신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사회적 이동은 제한되었다. 이러한 노동 개념에 근본적 전환을 가져온 것은 종교개혁이다. 루터는 모든 직업이 신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칼뱅은 성실한 노동, 근면, 검약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았다. 직업이 ‘소명(vocation)’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노동을 통한 자기 수양과 성공을 미덕으로 여기는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가 되었다. 이렇게 근대에 들어오면서 자본주의 등장과 시민계급의 부상은 노동의 성격을 바꾸었다. 직업은 신분을 넘어선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자 내면의 윤리를 담는 그릇이 된 것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출발점에서 직업윤리는 곧 인간의 윤리였고, 노동은 곧 자아 실현의 터전이었다. 이 시기부터 노동은 단지 생존이 아니라 개인의 자립, 덕성, 그리고 사회 기여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혁명과 함께 노동은 대규모 조직 속의 단위 행위가 되었다.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되었고, 이로 인해 노동자의 인간성 상실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시기의 노동을 마르크스는 소외된 노동이라고 비판했으며, 사회 발전은 물질적 생산양식에 의해 결정되며,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사회 발전을 야기한다는 그의 유물변증법 이론은 현재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 노동은 또 다른 의미도 갖는다. 바로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노동조합, 파업, 사회주의 운동, 복지국가의 형성 등 노동이 사회적 담론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 우리는 다시 노동의 의미를 묻고 있다. 자동화, AI, 일용직, 파견직,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화 등은 기존의 고정된 직업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있다. 일은 있는데 직업은 없고, 일터는 있지만 고용은 불안정하고, 일은 자유로운데 보상은 불공정하다. 이러한 형태의 노동은 갈수록 보편화되고 있지만 정체성을 지탱해줄 기반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이처럼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인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초기에는 생존을 위한 행위였던 노동이 점차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관계, 더 나아가 정치·문화적 의미까지 내포하게 되었다. 노동은 여전히 존재의 문제이며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나는 왜 일하는가?' '노동은 나에게 무엇인가?' 노동자의 아비투스와 공동체 이런 상황 속에서 직업의식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때때로 강요처럼 들린다. 오늘 하루 일한 사람이 내일은 일을 못 할 수도 있는 시대에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나 사명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노동이 일시적이고 대체 가능할수록 나 역시 일시적이고 대체 가능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공허해진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은 많은 통찰을 준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우리의 생각, 행동, 감각은 사회적 구조가 몸에 새긴 무의식적 성향이다. 다시 말해 노동에 대한 태도는 개인의 성격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사회 환경과 조건이 형성한 결과다. 예컨대 장기간 저임금·불안정 노동에 종사한 사람은 자신을 하찮게 여기기 쉽다. 정리정돈에 대한 개념이 체화되지 않거나 거친 말과 격식 없는 행동, 기술 숙련보다 속도를 우선시하는 문화에 노출된 사람은 그 스스로도 자신의 일을 ‘어쩔 수 없는 생계 수단’으로만 인식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단지 게으름이나 책임감 부족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형성한 노동자의 아비투스다. 이러한 조건에서 직업의식이 부재한 공동체가 어떻게 시민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당연한 것이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자긍심이 없는 사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갖기 어렵다. 공동체는 ‘권리’만이 아니라 ‘기여’와 ‘참여’의 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늘 임시직으로 전전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일한 사람이 자신의 일을 존엄하게 여기기란 쉽지 않다. 그에게는 ‘내 일’이라는 감각 자체가 체화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일을 방어적으로 수행하며, 동료와의 관계도 일시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보다는 생존이 우선이 된다. 이처럼 직업의식의 부재는 공동체 의식, 시민의식의 부재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업의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직업은 단지 생계수단이 아니라 사회와 연결되는 방식이자 내가 사회에 기여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시민의식이란 투표권만 갖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지는 태도이다. 그런데 자신을 대체 가능한 존재, 수시로 밀려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공동체를 책임지려 할 수 있을까? 결국 시민의식은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긍정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직업의식이란 그런 점에서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며,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조건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직업의식 자체를 교육이나 훈계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아비투스를 형성할 수 있는 환경, 즉 ‘장(field)’이다. 선임 숙련공과의 도제관계, 동료와의 신뢰 기반과 협업, 현장에서의 예술과 인문학적 실천, 작업일지와 글쓰기 등은 모두 그 장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 ‘이 일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끌어낼 수 있는 구조와 공간 말이다. 현실과 거리감이 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노동이 예술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드릴로 벽을 깨고, 모르타르로 벽을 바르고, 타일을 붙이고, 벽지를 바르는 작업을 더 안전하고 더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그는 이미 예술가가 아닌가. 역사적으로도 노동이 생존을 위한 노예들의 작업에서 개인의 덕성과 시민의식을 키우는 행위로 발전해 왔듯이, 노동을 통한 몸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노동자가 노동을 예술로 꿈꾸고, 철학을 상상하는 그런 노동현장이 될 때 노동은 소외를 넘어 예술이 되고 최고의 복지가 되지 않을까. 그럴 때 비로소 직업은 다시 존재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다. 며칠 전 건축가 윤경식 선생이 모차르트의 대표적인 오페라 ‘돈 조반니’ 총예술감독으로 성공적인 공연을 치렀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번 공연은 건축가가 총예술감독을 맡아 고전 오페라의 형식을 넘어 ‘공간과 예술, 인간의 존재성’을 아우르는 종합예술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건설노동자다'라는 말이 단지 신분이 아니라 철학이 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직업 없는 노마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노동의 품격일지 모른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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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거짓이 판치는 시뮬라시옹의 세상
진짜의 세상을 바라며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정말 그 사람 자체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배경과 조건을 보고 있는가?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점점 더 후자의 방식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풍조가 짙어지고 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어디 출신인가, 어떤 직장을 다니는가, 어디에 사는가 하는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 사람의 ‘등급’을 판단하기 위한 사전 정보 수집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는 단순한 관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다. 우상과 권위에 의탁하는 사회 개인의 발견은 근대 정신의 핵심이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선택과 판단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에 서툴다. 자율적 판단의 부담 대신 누군가의 말을 따르고 싶어 한다. 전문가, 인플루언서, 지식인, 정치인 등 소위 ‘권위 있는 사람’에 대한 맹신과 의탁이 여전히 강하다. 이런 현상의 본질은 일종의 마조히즘적 심리이다. 스스로 판단하는 대신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싶어 하는 욕망. 이것이 우상화로 나타나고, 권위주의로 이어진다. 정치를 향한 광적인 지지 또한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질서에 복종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일 수 있다. 문제는 단지 정치나 권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취향’마저도 정치화되고 있다. 어떤 음악을 듣는가, 어떤 커피를 마시는가, 어떤 브랜드를 입는가가 그 사람의 지적 수준, 문화적 자본, 계급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신호가 되어버렸다. 여기에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구별짓기”와 “문화자본” 개념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상류층은 자신의 취향을 ‘자연스럽고 세련된 것’으로 위장하면서, 그와 다른 대중의 취향을 미숙하고 천박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취향의 정치화는 단순한 소비 행태를 넘어서, 사람 사이의 관계마저 서열화하고 계급화시킨다. 결국 우리는 인간을 ‘그 자체’로 보기보다, 그가 가진 배경, 학벌, 취향, 소속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판단하려 한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단지 문화적 왜곡이 아니라, 사회적 병리다. 사기, 거짓말, 과도한 경쟁, 혐오 등은 결국 이런 구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때때로 “권위”와 “권위주의”를 혼동한다. 권위란 신뢰와 실력, 성숙한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리더십이다. 반면 권위주의는 권력을 휘두르고 서열을 강요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태도다. 학벌, 출신 지역, 배경 등을 근거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행위는 가장 치졸한 권위주의의 한 형태다. 자신이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타인의 인격을 평가하려 드는 것은, 실력의 표현이 아니라 자격지심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그런 사회는 결국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회가 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인간 한 사람에 대한 사유의 부족이다.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이 속한 집단과 배경”을 먼저 보는 사회는 지적으로, 윤리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회다. 인간은 배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이야기, 생각, 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화려한 이력서나 매력적인 스펙이 아니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눈, 그리고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는 용기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성숙한 사회다. 한 사람을 그가 가지고 있는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로 볼 수 있는 사회, 그의 배경이 아닌 그의 존재를 존중하는 문화, 바로 그곳에서 인간다운 삶, 그리고 진짜 공동체가 시작된다. 우리 사회가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거짓이 판치는 시뮬라시옹의 세상 그러나 우리사회는 거짓과 속임수가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 세상을 망친 건 단지 몇몇 사기꾼의 출현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거짓에 익숙해졌고, 어쩌면 거짓이 편한 사회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어?”, “너무 순수하면 바보야”, “이기는 쪽에 줄을 서”라는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명품을 좋아한다. 하지만 품질보다는 ‘좋다고 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보다 이미지, 실체보다 명성을 쫓는다. 그 제품을 만든 노동자의 땀과 손끝은 지워지고, 대신 누가 사용했는지, 얼마나 유명한 브랜드 인지에만 관심이 집중된다. 외양이 노동의 가치를 대신하고, 간판이 손의 노고를 덮어버린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를 ‘시뮬라시옹의 세계’라 불렀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즉 현실을 흉내 낸 이미지들이 진짜를 대체하고, 사람들은 복제된 이미지가 진짜인 줄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짜가 사라지고 가짜가 진짜인 척하는 세계.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렇다. 이제 사회는 ‘진정성’이라는 말만 남았고, 실제 노동의 거칠고 투박한 진짜는 외면 당한다. 사람들은 노동을 ‘좋아하는 척’할 뿐이다. 손에 흙 한 번 묻히지 않고도, 땀 흘려 일해보지 않고도 노동의 존엄을 운운한다. 그 말이 자신을 개념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말은 화려하지만, 노동의 고통과 생명력은 점점 사라진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조차 민주적이기보다는, 과거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명분을 소비한다. 구호가 실천을 대신하고, 말이 현실을 대체한다. 진짜는 조용히 사라지고, 거짓은 요란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너무 많은 소음 속에서 진짜의 소리는 묻혀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자부심이 없으니 남의 삶을 모방하려 든다. 팬덤 문화가 정치에까지 침투하고, 외모지상주의와 돈·권력 숭배가 사회를 지배한다. 위조와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을 얻으려 한다. 남을 위한 봉사보다 SNS에 올라갈 사진 한 장이 더 중요하다. 심지어 이것도 실력이라고 한다. 위에서 말한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러한 현상을 '문화자본' 개념으로 설명한다. 부유한 계층은 더 높은 수준의 문화와 교육에 접근할 수 있고, 이는 다시 사회적 성공을 낳으며 계층을 고착화한다. 보여지는 것에 집중하는 사회,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디 출신이냐'를 중시하는 문화는 진짜를 외면하게 만든다. 진짜보다는 가짜가 더 화려하다. 어쩌면 우리사회는 진짜를 부담스러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는 여전히 있다. 건설 현장이 그 증거다. 거짓과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곳. 내가 잘못 시공하면 바로 다음 공정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선 실수가 눈에 띄고, 책임이 즉각 드러난다. 노동은 몸을 움직이는 일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다는 건 깨어 있다는 것이며, 깨어 있다는 것은 생각하고 상상하며 창조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노동자는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다. 원래 인간은 누구의 길을 흉내 내는 존재가 아니다. 자기만의 길을 만드는 창조자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에 남는 발자국이 바로 새로운 길이다. 어느 날 수많은 소리가 엉킨 어수선한 건설 현장에서 망치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망치소리, 아직은 인간만이 일하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호소하는 듯한 울림으로 들려왔다. 망치소리 망치 소리는 뼈와 뼈가 부딪는 소리다. 쇠가 긁히는 소리로, 결코 나긋나긋한 소리가 아니다. 너와 내가 부딪히는 살 떨리는 소리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짜증나는 소리다. 오늘도 하늘에선 타워크레인이 빙빙 돌고 쉴 새 없이 레미콘 차량은 들락거리고 지게차는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호각소리, 사이렌소리, 그리고 째지는 외침소리, 광장에서 들려오는 유세소리에 망치소리는 희미해진다. 진짜 세상을 만들자고 했고, 진짜가 나타났다고도 했다. 거짓이 많을수록 조미료를 많이 타고, 포장은 과해지며 목소리는 커진다. 아스라이 들리는 콘크리트 벽을 두드리는 망치소리는 살아 있다는 신호다. 각목에 못질하는 망치소리는 제대로 서라는 가르침의 소리다. 기억하라, 행복한 우리 집을 만드는 것은 땀방울에 물든 거친 망치소리임을. ‘망치소리’는 시뮬라시옹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가장 정직한 소리다. 포장되지 않은 진실의 육성이며, 삶과 노동의 실재다. 보드리야르는 ‘진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믿는다. 진짜는 사라진 게 아니다. 단지 너무도 많은 거짓된 소리들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귀를 기울이면, 진짜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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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소쇄원을 거닐며… 이상을 꿈꾸다 현실에 갇히다
요즘 나는 광주 일곡지구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골조공사가 끝나고, 곧 조경공사가 시작된다. 그래서 부쩍 정원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마침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들과 함께 담양 소쇄원을 찾았다. 이들은 한국의 문화 관광자원을 세계에 널리 알려 1억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당찬 비전을 품고 있었다.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한 기운이 씻긴 듯 흐른다’는 뜻이다. 흐르는 물소리,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대숲, 낮은 담장을 넘어오는 햇살이 어우러진 그곳은,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었던 한 사내의 쓸쓸한 뒷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는 조광조의 제자였다. 중종 시대, 성리학적 이상정치인 왕도정치를 꿈꾸었던 조광조와 개혁적 사림 출신 인재들이 기묘사화로 몰락했다. 왕권의 정통성이 부족했던 중종은 개혁 의지를 접고 훈구 세력과 손잡으며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양산보는 그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고 출사를 포기한 채 고향 담양으로 내려왔다. 벼슬길이 끊긴 젊은 유학자는 자연 속에서 나마 따로 이상세계를 꾸리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소쇄원은 그렇게 태어났다. 세속과 단절되고 자연과 어우러진, 작지만 순결한 세계로. 별서정원(別墅庭園) — 속세를 떠난 선비들이 은거 생활을 위해 조성한 공간 — 의 전형이다. 나는 전에 영주 현장에서 일할 때,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자주 찾았다. 소수서원은 안향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초였고, 이후 이색-정도전-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조광조-이황으로 이어지는 영남 사림파의 거점이 되었다. 이 지역은 세조 때의 계유정란과 맞닿아 있었다. 왕권 찬탈의 소용돌이 속에서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많은 선비들이 충절을 지키려다 피를 흘렸다. 그 흔적은 지금도 '피끝마을'이라는 지명에 남아 있다. 광주 현장으로 온 뒤로 담양 소쇄원을 두 번 찾았다. 이곳은 세조의 손자인 중종 시대, 기묘사화라는 또 다른 정치적 참화와 연결되어 있다. 훈구세력에 의한 조정의 보수화에 맞서 신진 사림파 중심으로 일어난 혁신운동은 좌절되었고, 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역사 속에서도 선비들은 오히려 더 간절히 이상국가와 왕도정치를 꿈꾸었을 것이다. 소쇄원의 구석구석에는 그런 정신과 다짐이 녹아 있다. 광풍각(光風閣)은 소쇄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전각으로, 손님을 위한 사랑채 같은 공간이다. '비갠 뒤 청량한 바람'을 뜻하는 이름처럼 자연의 빛과 바람, 물소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세속의 때를 씻고 자연과 하나 되기를 바랐던 마음이 읽힌다. 제월당(霽月堂)은 주인이 거처하며 학문에 몰두했던 공간이다. ‘비 갠 뒤 맑게 뜬 달’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맑고 고요한 심경을 유지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다. 이는 스승 조광조의 청렴한 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진다. 제월당의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작품이다. 오곡문(五曲門)은 물이 다섯 번 굽이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따고 싶었으나, 스스로 겸손을 담은 이름으로 보인다. 자연과 교감하고, 동시에 번다한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상징적 장치이기도 하다. 대봉대(待鳳臺)는 ‘봉황을 기다리는 대(臺)’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는 하(夏)-은(殷)-주(周)와 같은 이상적 세상을 이끌 임금을 기다리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것이다. 소쇄원은 양산보라는 한 선비의 좌절과 꿈 위에 세워진 공간이다. 세속 정치의 소용돌이를 떠나 작은 골짜기 안에 스스로의 이상사회를 조성했지만, 그 이상은 자연 안에 고립되었고 현실을 바꾸는 힘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소쇄원은 아름답지만, 결국 ‘현실을 넘어설 수 없었던 이상’의 표상이다. 자연과 하나 되고자 했지만 세상과 단절된 작은 섬에 그쳤다. 이곳을 거닐며 나는,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로 연결하지 못하는 한국적 정신구조를 본다. 중국, 한국, 일본의 정원은 모두 자연을 재현하려 하지만, 그 방식에는 각기 다른 정신의 지형이 담겨 있다. 중국은 자연을 인공의 손길로 조탁해 하나의 우주를 펼쳐 놓았고, 일본은 자연을 추상과 사유의 대상으로 밀어 올렸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그 사이 어디쯤으로 자연을 존중하고 인공을 최소화한 자연과 인공의 적절한 융합이라고 자랑하지만 그 ‘융합’은 정원이 도시 안이 아니라, 늘 자연 속에 깃드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사람 사는 이 세상을 정원으로 바꾸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으로의 도피다. 사람들은 한국 정원은 “자연에 물들어 들어가는 느낌”이고 일본 정원은 “자연을 마음 안에 담아 표현한 느낌”이라며 한국정원은 실경을 살리고, 일본은 심경을 구현했다는 식으로 한국정원도 일본정원 못지 않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낸다. 더 나아가 한국 정원은 자연을 정복하지 않으며 최소한의 인공은 자연을 억누르지 않고 그 흐름에 순응한다 라고 평하는데 이런 말은 일견 멋진 표현 같지만 바로 그 점이 현대 도시문화 속에서는 한계로 작용한다. 한국의 정원은 대개 마을 한복판이나 도시 안에 있지 않다. 산과 물, 자연 속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그리워하지만, 그 자연을 현실로 끌어오는 데는 서툴다. 자연을 사랑하지만 자연을 상상하거나 추상화하는 힘이 부족하다. 우리는 자연을 그리워하면서도 현실로 끌어오는 데는 실패하고, 대신 아파트라는 반자연적 인공구조물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현실의 우리들 주거공간의 대부분은 아파트다. 자연을 흉내 낸 조경 몇 점을 곁들인, 반자연적이고 획일화된 건물과 단순한 도시 풍경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전통을 존중하고 그리워하지만, 실상은 동경만 할 뿐 현실로 구현할 의지나 체계는 부재하다. 이러한 구조는 정치 문화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현실을 돌파할 역량은 키우지 못한 채, 모든 문제의 원인을 과거의 일제잔재, 독재의 잔재 탓으로 돌린다. 청산이란 계몽이나 캠페인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현재의 힘이 과거를 이길 만큼 강하면, 청산은 저절로 이뤄진다. 지금도 여전히 과거에 발목 잡혀 있다는 것은 현재가 과거보다 미약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문화에서는 이 틀을 깨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류는 더 이상 일본이나 서구문화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히 경쟁하며 자부심을 드러낸다. 스스로 강해지니 자연스레 과거의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이다. 오늘 우리 정치는 어떠한가? 지금도 여전히 뒤를 돌아보며 신발끈을 만지작거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 시대의 정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저 과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은 이상으로 남겨두고, 현실은 현실대로 방치하는 방식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아름다운 정원을 꿈꾸되, 그것을 현실의 삶 속으로 끌어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소쇄원의 고요를 넘어서, 살아 있는 자연, 살아 있는 이상을 품은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최진석 교수가 정원에 대해 말한 부분은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정원을 ‘정원’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알게 된 사실은 정원이 제국을 운영해봤거나 적어도 꿈꿔본 적이 있는 나라에서라야 문화의 중심 줄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자유ㆍ주체ㆍ독립ㆍ창의 등의 힘보다는 종속적 상황에 갇혀 사는 나라에도 정원이 없진 않지만, 그것이 누구나 맘만 먹으면 하게 되는 문화의 일반성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다. 문화의 일반성으로 드러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매개로서의 그것을 비교적 어색하지 않게 대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활화라고 하자. 이때는 누구나 여건이 되기만 하면 정원을 가지고 싶어 한다. 이것은 삶의 의미에 눈뜰 때면, 누구나 시인을 꿈꾸는 바로 그 마음에 가깝다. 비 오는 날, 빗방울 소리가 리듬을 꾸리면서도 하나하나 따로 들릴 때 피아노 건반에 자신을 맡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는 것과도 비슷하다. 정원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소쇄원의 대숲 사이를 걷던 어느 봄날, 나는 다짐했다. “이상은 소중하지만, 현실을 이길 힘을 기를 때 비로소 그것이 진짜 삶이 된다고...”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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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노동이 문장이 되는 순간 …
광주 일곡 현장에서 새로운 동료를 만났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쯤 더 많았지만 친구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늦게 시작한 신앙생활 덕분에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고 했다. 그의 간증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그 경험을 글로 써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글을 써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난색을 표했다. "지금 나한테 한 이야기를 그대로 글로 쓰면 된다"고 했지만 그는 망설였다. "근데 명사가 뭐예요? 학교 다닐 때도 동사, 형용사 같은 문법 용어를 몰라서 문법 자체가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는 공부와 인연이 없었다며 일찍부터 몸을 쓰는 일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명사: 존재를 인식하는 것 명사란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존재를 인식하려면 이름이 필요하고, 그 존재에 이름을 붙여준 것이 명사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 그가 무엇을 하나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나 보시려고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세기 2:19) 아담이 자연 만물에 이름을 붙여준다. 나무, 돌, 산, 바다, 하늘처럼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명사다. 보이지 않는 것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행복, 마음, 생각도 명사다. 인간 창조에 대한 또 다른 신화가 있는데 로마신화에 쿠라Cura 여신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쿠라는 강을 건너다가 진흙을 보고 그것으로 조심스레 어떤 형상을 빚기 시작한다. 쿠라는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에게 자신이 빚은 작품에 생명(혼)을 불어넣어 달라고 청한다. 유피테르는 쿠라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면서 자신의 이름을 붙여 주려 하자 둘이 옥신각신하는데, 이번엔 대지의 여신 텔루스가 벌떡 일어나 끼어들었다. 결국 셋은 시간의 신 사투르누스를 판관으로 불러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청했다. 사투르누스가 내놓은 중재안은 이러했다. "유피테르, 당신은 피조물에게 혼을 주었으니 그가 죽은 후 혼을 가져가시오. 텔루스는 몸을 주었으니 죽은 후 그 몸을 돌려받으시오. 그리고 쿠라는 맨 처음 그 형상을 빚었으니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가지시오. 다툼거리가 된 그 형상은 후무스Humus(흙이라는 라틴어)로 만들어졌으니 이름은 호모homo라고 합시다." 성서나 로마신화나 인간은 흙에서 비롯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처음 사람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토인土人인 것이다. 존재란 이름을 붙여줄 때 의미가 있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김춘수의 시 _꽃_을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존재를 인식하고, 본연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동사: 움직이며 의미를 찾는 것 이제 이 토인이 어떻게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내보이는 행위를 하면서다. 이 토인이 노동을 통해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한자 人間의 간은 사이 관계를 의미한다. 내적인 영혼이나 무형세계와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 온 것이다. 움직이다, 일하다, 먹다, 자다, 입다, 싸다 이 모두가 다 동사다. 할석이 주로 하고 있는 자르고, 깎고, 쪼고, 가는 행위도 모두 동사인 것이다. 즉 동사는 움직이고 행동하며 의미를 찾는 것이다. 나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노동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명사가 존재를 규정한다면 동사는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다. 인간이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곧 동사의 역사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사회를 구성하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움직이고, 일하고, 먹고, 자고, 입고, 짓고, 가꾸는 모든 행위가 동사다. 노동이란 명사지만 본질적으로 동사다. 노동은 움직임이며,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자신의 의미를 찾아간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이는 곧 동사가 사라지는 것이며, 노동하는 인간이 점점 소외되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한승태 작가의 책 <어떤 동사의 멸종>에서 그는 특정 직업이 사라지는 것을 단순한 산업 변화가 아니라 '그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던 인간이 사라지는 일'로 본다. 노동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삶의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문장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형용사: 노동에 감정을 더하는 것 형용사는 명사의 태도나 성질을 말한다. 삶이 문장이라고 할 때 명사와 동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일하고 먹고 싸고 자는 것이 전부일 수가 없다. 어떤 느낌,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형용사는 노동에 감정을 더하는 것이다. 노동에도 감정과 태도가 스며든다. 같은 노동이라도 어떤 느낌과 태도로 임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18세기 초 영국의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할 때 세 명의 석공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석공은 "돈을 벌기 위해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석공은 "건축을 하기 위해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세 번째 석공은 "저는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이 부족한 사람이 석공 일을 배워 거룩한 성전을 짓는 데 한몫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태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이 된다. 노동이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의미 있는 과정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부사: 삶의 윤활유 삶에는 행동과 느낌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에도 활력과 리듬이 필요하다. 건설 현장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일을 아리까리하게 하면 안 되잖아요." "꼼꼼하게 일해야지, 설렁설렁 대충 하면 사고 나요." 여기서 '아리까리하게' '꼼꼼하게' '설렁설렁' 같은 말이 부사다. 부사는 문장에 생동감을 주듯 노동에도 변화를 만든다. 부정적이긴 하지만 ‘빨리 빨리, 대충대충, 얼렁얼렁’ 때로는 긴 문장이 필요 없이 이런 말 한마디에도 충분히 의미는 전달된다. 노동이 글이 되는 세상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의 소외'가 노동자에게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친다고 썼다. 노동자는 일에서 자신을 긍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자신을 부인한다. 비참하고 불행하다고 느낀다. 자유로운 정신적·심리적 에너지를 개발할 수 없다. 육체를 손상시키고, 마음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일하지 않을 때에만 자신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일하는 중에는 자신을 못 느낀다. 일하지 않을 때는 마음이 편안하지만 일하고 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므로 그의 노동은 자발적이지 않고 강요된, 즉 강제노동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내적 만족을 얻지 못한다. 노동은 단지 외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이다. 정말 그런가. 노동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노동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알고(명사), 의미 있는 행동을 하며(동사), 삶의 태도를 만들고(형용사), 활력과 변화를 더한다(부사). 노동이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문장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의 의미를 깊이 고민한다면 앞으로 더 많은 노동자들이 글을 쓸 것이다. 생각이 깊어지면 철학이 되고, 그것에 자기 감정을 표현하면 시와 수필이 되고, 상상력을 더하면 소설이 된다. 이런 표현이 현장에서도 자유로워지고 풍부해진다면 그만큼 현장은 더 안전하고 즐거워지지 않을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기술과 문명)을 주었고, 이는 노동과 창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에피메테우스는 사후적으로만 깨닫는 어리석은 자로, 무책임한 선택의 대가를 치른다. 이처럼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미래를 내다보고 창조적으로 일할 것인가, 아니면 에피메테우스처럼 무의미하게 시간만 보낼 것인가. 노동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노동이 소외나 먹고 살기 위한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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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노동과 음악의 단절
입춘이 지났다. 입춘이라고 해서 바로 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계절의 변환점인 지금이 가장 겨울다운 날씨일지 모른다. 오늘도 이곳 광주 일곡 현장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공사현장에서 방진막 너머로 바라다보는 눈 오는 풍경이 진경산수화처럼 보인다. 하늘에서 눈은 소리 없이 소복하게 내리건만, 땅에서 눈을 밟는 소리는 소란스럽기만 하네. 雪は音無しで爽やかに降るが、雪を踏む世の音は騒々しい。-平作人 계엄과 탄핵정국으로 나라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도시 거리마다 증오의 구호와 함성으로 가득하다. 다들 구국의 심정으로 뛰쳐나왔겠지만 하루속히 진정되길 바랄 뿐이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빠짐없이 나타나는 것이 음악이다. 노래 자체가 감성에 호소하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면 공감과 결속력이 강해진다. 아마 이런 현상은 예술 가운데 특히 음악이 집단의 행위, 즉 함께 노동하는 가운데서 자연발생한 긴 역사적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 초기의 예술은 주술적인 또는 의식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 내용은 대개가 풍요와 다산을 염원하고 있다. 그러한 간절한 주술적 염원들을 영상화 한 것이 예술의 시작이다. 예를 들어, 고대 동굴 벽화나 조각품은 풍요와 다산, 그리고 자연의 힘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주술적 염원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망과 염원을 보다 구체화하고, 그 힘을 빌려 현실에서 성취하고자 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예술 작품들이 인간의 내면 깊숙한 염원과 소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예술은 단순한 미적 경험을 넘어, 인간의 감정, 신념, 그리고 염원을 전달하는 강력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역사적으로 노동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노동의 고통과 피로를 해소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노래와 춤이 활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노동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음악이 존재해 왔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의 리듬에 맞춰 노동요를 부르며 일했고, 산업혁명기에는 공장 노동자들이 기계 소음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음악과 문학을 만들었다. 산업혁명기 이전, 담배나 목화 특히 설탕을 만들기 위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노동요가 리듬, 블루스, 재즈 등으로 발전한 것처럼 노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태어났다. 예전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행적을 따라가다가 미국 남부 멤피스에 간 적이 있다. 로큰롤(Rock and Roll)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적 고향이다. 당시 멤피스는 다양한 음악 장르가 공존하는 곳으로, 블루스, 로큰롤, 소울 음악과 더불어 컨트리 음악에도 기여한 바가 큰 곳이었다. 이곳에서 리듬앤블루스를 처음 들었다. 리듬 앤 블루스(Rhythm and Blues, R&B)는 20세기 초 미국 남부에서 시작된 블루스와 가스펠을 기반으로 발전한 음악 장르다. 리듬앤블루스(R&B)는 미국 남부 흑인 노예들이 그들의 고된 노동 속에서 불렀던 노래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노래는 단순한 노동의 리듬을 넘어서 그들의 고통, 희망, 그리고 자유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노래는 나중에 블루스, 재즈, 소울 등의 다양한 음악 장르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예술(여기선 음악)은 노동의 과정에서 탄생하고 발전해왔다. 노동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은 인간의 창조성과 강인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러한 예술의 힘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이런 노동과 예술의 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특히 건설 노동 현장 같은 곳에서는 새로운 음악이 탄생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적 표현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예전에는 노동이 공동체적인 성격을 띠었지만, 지금은 개별적이고 기계적인 노동이 많아졌고, 지금은 노동이 생존권이 달린 절박한 상황도 아니고, 그래서 노동자들도 직접 예술을 생산하기보다는 소비하는 방향으로 바뀐 것일까. 아니면 예술이 밥 먹여주냐? 하는 본초적인 질문에 ‘아니다’라는 집단적인 깨달음이 있었던 것일까. 언젠가 60이 넘으면 남미 아르헨티나에 탱고(땅고)를 배우러 유학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탱고의 리드미컬한 음률과 여기 맞춰 춤을 추는 남녀의 춤은 너무 매혹적이다. 내 인생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에 적당할 거 같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탱고는, 초기에는 사교적인 춤이 아니라 노동자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탱고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예술 형식이 되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탱고는 그들의 문화가 혼합되며 탄생한 독특한 춤과 음악이다. 특히 이탈리아, 스페인 이민자들의 전통 음악과 아프리카 리듬이 결합되었고, 거기에 아르헨티나의 전통 음악인 밀롱가(milonga)와 하바네라(habanera)의 영향이 더해진 것이다. '사랑은 길들지 않은 새'라는 유명한 가사로 시작하는 하바네라는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오페라 '카르멘'의 중요한 아리아 중 하나로 부르는 곡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많은 현대 음악 장르 특히 블루스, 재즈, 리듬 앤 블루스(R&B), 가스펠 그리고 탱고 등은 고된 노동에서 비롯된 감정의 표현물들이다. 당시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 저항, 생명력, 희망이 음악을 통해 표출되었고 이 음악들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에는 왜 이런 종류 아니 변화된 노동현실에 맞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등장하지 않는 걸까. 어느 날 104동에서 땜빵을 하며 세대를 돌다가 아주 감미로운 음악을 들었다. 기계음이나 파열음 같은 거친 소리만 가득한 건설현장에는 안 어울릴 거 같은 감미로운 클래식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현장에 카페가 생겼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찬 바람을 막기 위해 출입구에 설치해 놓은 비닐막을 제치자 거기엔 조적공이 우아한 음악을 들으며 벽돌을 쌓고 있었다. 물론 작업을 위해 설치한 라이트이긴 하지만 조명 빛이 빛나고 커피포트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의 작업 공간은 아늑했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일하면 작업 능률도 좋아지고 무엇보다 피로감이 덜하다고 한다. 그는 내게 커피 한잔을 권했다. 따뜻했고 맛도 좋았다. 현재 건설 현장에서 새로운 음악 장르나 창의적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만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 요인, 그리고 현대 노동의 특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흑인 노예들이 음악적 저항을 통해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것처럼, 현재의 노동자들도 자기 표현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는 그 표현이 나타날 수 있는 여건이나 장소가 부족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자기 표현의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하면 건설 현장과 같은 힘든 노동 환경에서도 음악이나 문화적 창작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또한 그들의 경험이 보다 문화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건설 노동자들이 문화 예술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보다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교양은 단순히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에, 건설 현장과 같은 고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자기 표현의 능력이 향상된다. 다양한 인문학적 분야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이렇게 자기 표현을 통해 노동자들은 문화적 생산자로서 새로운 음악, 예술, 혹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둘째 사회적, 문화적 이해를 증진시킨다. 건설 노동자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일하고 있다. 최근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늘었다. 인문학을 배우면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이 길러져, 협업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 또한, 노동자들이 사회적 문제나 문화적 현상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인 생산물도 더 풍부하고 다층적이 될 수 있다. 셋째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정신적, 정서적 해소를 가져올 수 있다. 힘든 노동 환경에서 정신적 해소는 매우 중요하다.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면 문학이나 철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거나, 미술이나 음악을 통해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인문학 교육은 노동자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안전 교육과 인문학 교육의 결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 건설 현장에서의 안전 교육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안전 교육이 신체적 안전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안전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인문학적 교육을 안전 교육과 결합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안전 교육 중에 감정 관리나 정신적 웰빙을 다루는 시간을 마련하면, 노동자들이 일상적인 스트레스나 고된 노동 속에서도 정신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문학이나 철학을 통해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 둘째, 건설 현장에서 팀워크가 중요한데, 안전 교육 시간에 소통의 중요성과 협력을 다루는 인문학적 접근을 도입한다면, 노동자들이 더 효과적으로 팀워크를 형성하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안전 교육 시간을 통해 예술적 창작이나 자기 표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좋겠다. 문학, 그림, 음악 등을 다루는 미니 워크숍을 열어, 노동자들이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나아가 그들이 새로운 문화적 생산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건설 노동자들이 단순히 예술과 문화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교육은 필수적이다. 국민 한사람 한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재능을 최대로 발휘토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건설현장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이것이 우리 사회의 희망 아닐까.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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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새해 벽두에 정리정돈의 의미를 찾아보다 .
2025년의 새해가 밝았다. 숫자 2025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연수 0부터 9까지를 모두 더하면 45가 되며 이 45를 거듭 곱하면 2025라는 숫자가 나온다. 45의 4와 5를 더하면 9가 된다. 2025의 숫자를 다 더해도 9가 된다. 9라는 숫자를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완벽수로 본다면 2025년은 새로운 세계를 맞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하는 그런 해가 아닐까 생각한다. 새해 들어 고작 3일이 지났지만 지난 2024년은 너무 다사다난했다. 세계도 우리나라도 좋지 않은 일이 많아 혼란스러웠고 불안했다. 2025년 새해는 뭔가 새롭고 신선하고 청명한 한 해가 되길 바라본다. 이런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며 아침 출근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청소부였다. 그는 남들이 출근하기 전 이른 시간에 길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해 놓는다. 청소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얼마나 신성한 일인가. 그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때를 씻겨준다는 사제보다 더 현실적인 우리 사회의 필수 공익요원이다. 개인적으로 2025년의 연두 표어를 ‘정리정돈整理整頓’으로 정했다. 이제까지 뭔가 많은 것을 한 것 같은데 결실은 미미하고 남는 게 없고 보람도 적다. 생각해 보면 필요 없는 것, 쓸데없는 것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보다 더 나은 앞으로의 삶을 위해서라도 정리와 정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정리’의 뜻은 일반적으로 버릴 것은 버리고 질서 있게 분류하여 필요한 것만 남기는 것을 말한다. 버린다는 것은 유형적인 물건의 폐기나 제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형적인 인간관계에서의 정리, 즉 헤어짐도 포함한다. ‘정돈’은 정리한 것들을 깔끔하고 조화롭게 재배치하거나 조직화하는 것이다. 즉 목적과 종류에 따라 위치를 변경하여 쓰기 편하도록 적재적소에 재 배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건설현장에서도 사고예방을 위해서는 정리정돈이 매우 중요하다. 자재가 널브러져 있고 전선이 꼬여 있는 곳에서 작업하면 주의력이 떨어지고 산만해져 사고 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정리정돈은 내 개인사만이 아니라 현장작업에도 꼭 필요한 덕목이 된다. 요즘 이런 덕목을 잘 지켜 자기 분야에서 어느정도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덕후라고 한다. 덕후라는 말은 일본어 오타쿠(お宅)에서 유래된 단어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나 활동을 깊이 탐구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타쿠라는 일본 발음을 한국에선 德厚라는 한자로 음차해 ‘덕이 깊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치환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덕을 동아시아에선 이상적 인간상에 이르게 하기 위한 금욕적 노력의 성과를 떠올리는 ‘옳은 삶’을 향한 자기극복의 노력으로 보는 반면 서구에선 덕을 인간을 행복에 이르게 하는 ‘좋은 삶’을 향한 자기실현의 노력으로 본다는 것이다. 문제는 ‘옳은 삶’이라는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덕을 쌓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옳은 삶, 정의를 소리 높이 외치는 사람들일수록 일이 잘못되었을 때 죄책감 보다는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절대자나 자기 양심에 비추어 죄책감을 느끼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치부를 덮으려 든다는 것이다. 시골 건설현장에서 할석미장공으로 일하는 한 노동자가 국가와 세계를 걱정한다고 해서 얼마나 영향을 주겠으며, 사상과 철학을 논한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겠나 생각하면 나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구조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그 속에서 자아를 찾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 자신을 혁신하는 것이 사회 혁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번잡하게 늘어놓는 나의 생활스타일과 인간관계를 포함한 생활환경부터 정리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마감공정으로 전환되는 현장의 일을 위해서도 이제는 꼼꼼하게 일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整理整頓이라고 한자로 써보면 이 네 개의 한자어에는 엄청난 의미가 들어있다. 리理와 돈頓을 정整한다는 것이다. 유학의 이황과 이이의 이기논쟁과 불교의 지눌과 보우의 돈점논쟁을 정리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이다. 조선 유학은 사실 이기논쟁이다. 주리론을 주장하는 이황은 리를 만물의 본질로 보고 리가 기를 통제한다고 주장하며 도덕교육과 사회윤리의 틀을 제공했다면, 주기론을 편 이이는 기를 만물의 작동원리로 보고 기가 발하고 이가 따른다고 주장하며 현실문제해결과 실천적이며 개혁적 정책제시를 우선했다. 리를 사단으로 보고 기를 칠정으로 보는 사단칠정론의 논쟁은 조선의 성리학을 교조주의에 빠뜨려 새로운 사상유입을 차단했다. 한편 돈점논쟁이란 돈오와 점수의 논쟁이다. 불교에선 돈오頓悟라는 부처가 되기 위해 진심(眞心)의 이치를 깨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다만 수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가, 마음의 이치를 먼저 밝혀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가 오랫동안 있어왔다. 보조국사 지눌은 깨달음 뒤에도 계속 수행이 필요하다고 설했고, 태고 보우는 한번 깨우치면 더 이상 닦을 게 없다고 했다. 깨우침이라는 것이 더 이상의 수행이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엄청난 불교와 유학의 중심적 내용이 정리정돈이라는 말에 융화되어 있는 이 정리정돈을 신년도 내 덕목으로 삼겠다고 하니 나도 보통 노동자는 아닌 것이 틀림없다.^^ 각설하고 새해용 노트를 하나 준비했다. SNS를 통한 기록보다는 역시 종이에 직접 기록하는 것이 솔직하고 마음의 정리도 더 잘되겠다는 생각에서다.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다. 일일 계획- 실천- 결과- 반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일 활동 내용은 현장업무가 중심이 되지만 그 외에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운동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내 생활습관을 고치기로 했다. 일어나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를 생각한다. 그것을 어떤 마음 가짐으로 보낼지도 생각한다. 화장실 사용부터 바꾸었다. 여러 명이 사용하니 금새 더러워진다. 더럽다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솔선해서 화장실 청소를 하기로 했다. 소변도 이제는 변기에 앉아서 하기로 했다. 앉아서 일을 보면 변기를 훨씬 깨끗하게 사용하게 된다. 출근은 차를 타지 않고 뛰어서 한다. 출퇴근을 뛰어서 하면 달리기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시간에 독서 시간을 더 늘릴 수 있다. 식사전엔 감사기도를 하기로 했다. 감사히 먹으니 음식을 남기지 않게 되었다. 일을 끝내고 주변을 정리정돈을 하게 되니 일한 뿌듯함이 샘솟는다. 내 기술과 기능이 더 향상되는 거 같다. 짐에 돌아와서는 독서를 한다. 올해는 학위논문에 도전하는 만큼 노동환경과 안전에 관한 책을 더 읽게 된다. 주말에는 한 주를 돌아보며 반성의 시간을 가져본다. 그리고 개인적 성과를 체크해 본다. 앞으로 노동현장도 기술적 상상력을 갖춘 미학적 신체를 요구할 것이다. 인부들의 노령화 고령화는 노동의 정신화를 더 촉진할 것이다. 공부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으면 뒤쳐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1위가 되겠다는 서열화는 사라질 것이다. 노동의 유희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상상력은 생산력이 되고 기술은 예술이 되며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기술과 예술 그리고 인문학이 자유자재로 소통하고 융합되는 것이다. 그런 2025년이 되길 희망하며 나부터 정리정돈을 해보도자 한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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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나만의 건설노동자 브랜드가 되기로 했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12월이 되었으니, 아니 겨울이 되었으니 날이 추워지는 건 당연한데도 추위에는 익숙하지 않다. 건설 현장에서 미장 일이란 것이 레미탈을 물에 개서 발라야 하기 때문에 아침나절에 일할 때는 손가락이 시려 몇 번이고 장갑을 벗어 손을 덥혀야 한다. 춥다고 몸을 움츠리기보다는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몸에 좋다고 생각해 일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요즘 연말이 다가오니 송년모임이나 동창회 관련 연락이 자주 온다. 나도 올해 고등학교 졸업 40주년 기념파티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언제나 청춘인 줄 알았는데 내 나이도 어느덧 60줄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내 의식과 행동은 아직도 미숙하고 의욕만은 청년 같지만 생물학적 나이는 곧 노인임을 알려주고 있다.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65세부터 노인으로 대우한다. 이 법적 기준이 마련되던 1981년 당시 평균 기대수명은 67세였다고 하는데, 이런 기준에서 보면 현재 평균기대수명이 84.4세이니 노인 기준은 최소 80세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어쨌거나 이번 기회에 내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고 앞으로 맞이할 40년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는 이 세상에 무엇을 하려고 나왔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제법 일찍부터 인생 목표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그때그때에 맞추어 살아온 거 같다. 우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삶의 궤적을 그려본다. 나는 아버지 덕분에 실제 나이보다 세 살이나 줄어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출생신고를 늦게 했다. 그래서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 학교에서 너무 어려 입학 불가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사정과 설명으로 겨우 입학했다. 두촌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는 집을 떠나 춘천에서 다녔는데 대학에 한 번 미끄러져 1년 재수를 하게 되어 실제로는 4년 다닌 셈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도중에 군대 갔다오고 해서 졸업하는 데 7년 걸렸다. 결혼하고 일본에 건너가 7년, 그리고 한국에 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왔다 갔다 하며 7년을 보내니 마흔 살이 되었다. 그동안에 아이를 3명이나 얻었다. 그후 북해도에서 평화네트워크 4년, 일한문화교류회에서 4년,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4년, 글로벌피스재단에서 2년 그리고 현재 건설 현장에서 6년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햇수를 보면 미등록기 3년- 초등 유년기 12년- 고등과정 4년- 한국, 일본, 미국에서 생활 21년, 그 후 4년 주기로 평화, 문화, 국제개발협력, 노동에 관여한 삶을 살고 있다. 아마 차원은 다르겠지만 후반기 삶도 이런 패턴으로 다시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삶은 일직선으로 진행되어 온 거 같지만 생각해 보면 반복되는 측면도 있다. 나는 대학생활 내내 야학활동을 운영했다. 졸업 후에는 청소년 문화교실과 주부학교까지 운영하며 사회 변화에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여기서 교육은 피교육생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교사의 활동 자체가 매우 교육적이라는 것이다. ADRF 활동은 이 야학활동의 글로벌 버전으로 아프리카·아시아 저개발 국가 아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은 잠시 교육 현장을 떠나 있지만 언젠가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이번에 돌아가면 100만 교육봉사자 양성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다. 전 세계 누구나 이 프로젝트에 동참할 수 있다. 자기가 가진 재능과 지식을 어려운 사람,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봉사를 하는 것이다. 장소, 시간, 교육 내용은 모두 봉사자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 이름도 정했다. 에드볼룬(Edu-Volun)이라 이름 지었다. 이런 교육봉사자들이 전 세계에 100만명이나 움직이고 있다면 세계는 크게 변화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한류가 이런 면에서 큰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 생각한다. 한류는 한국만의 문화콘텐츠가 아니라 하나의 인류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흐름이라 생각한다. K-팝 가수들의 볼룬티어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 영향력이 크다. 이들이 전 세계를 돌면서 교육 기회 확산을 위한 채리티 공연을 이어간다면 엄청난 호응이 일어날 것이다. 이와 연계해서 100만 엽서그림전시회도 생각하고 있다. 한 주제를 놓고 전 세계 100만명, 특히 어린이들이 참여하여 엽서에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이것은 평화와 인권과 자유를 위한 한목소리의 기도가 될 수 있고 외침이 될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호소력이 큰 행사가 있을까. 모두 디지털문화에 익숙해 연필로 그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 자기 생각을 이미지화해서 자기 손으로 직접 표현하는 데에는 엽서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할석 미장공으로 일하는 건설 노동자로서 이런 일을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가는 향후 나의 과제지만 꿈꾸는 노동자로서 이것이 나의 삶의 목표다. 이 일을 위해 나는 일상에서 이런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첫째는 할석 미장공으로서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일한 곳에서는 절대 하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며 누가 보더라도 깔끔하게 일을 잘했다는 평가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일을 대충하면 계속해서 다시 손을 봐야 한다. 그것은 나 스스로도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한번 손을 대면 그것이 마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꼼꼼하게 일하는 것이다. 나는 독서하는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일주일에 책 2권을 읽는다. 1년이 52주니까 1년이면 100권을 읽게 된다. 이 일을 10년 계속해야 겨우 1000권 읽는 것이다. 이번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씨와 더불어 올해의 작가상을 받은 사람이 개그맨 고명환씨다. 그는 독서를 통해 자신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현실로 증명해 낸 분이다.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물론 정치인들의 노력이 중요하겠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 스스로가 자신을 혁신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기 혁신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역시 독서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독서는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글쓰기로 이어질 것이다. 언젠가 나에 대한 호칭이 작가로 바뀌었다. 몇 군데 칼럼을 쓰긴 하지만 그것으로 작가 타이틀이 붙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작가 타이틀이 맘에 든다. 그래서 일주일에 칼럼 1개씩 쓰기로 맘먹었다. 1년이면 52개 칼럼이 된다. 이 정도면 책 1권을 낼 수 있다. 그래서 매년 출판 기념회를 여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매일 일기 쓰듯이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기분에 따라 들쑥날쑥 이다. 자신을 너무 압박하는 것 같아 일주일에 2점 그리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취미가 부담이 되어서는 지속적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기 위해 약간의 여유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 그림으로 매년 전시회를 4회 연다. 최근엔 어찌된 영문인지 매년 해외에서 한 번씩 전시회를 열고 있다. 작년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었고, 올해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에 참가했다. 내년부터는 아프리카, 아시아 쪽에서 현지 아동들과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는 운동하는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건설 노동 자체가 몸으로 하는 일이니 그 자체가 운동이라 할 수 있지만 튼튼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금도 출퇴근을 뛰어서 하고 있긴 하지만 좀 더 체계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매주 주말이면 10㎞ 달리기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하프마라톤에 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은 풀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져진 체격을 보디프로필 사진으로 남길 것이다. 소방공무원이나 경찰공무원들이 매년 보디프로필 사진을 찍어 달력을 만들어 배포하는데 나도 건설노동자를 대표해서 보디프로필 사진을 찍어 달력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기도 하다. 건설 현장에 젊은 인력이 더 많이 유입되게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좀 더 깨끗한 화장실과 샤워실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현장에 체력단련실을 만드는 것이다. 안전한 환경은 튼튼한 체력을 만드는 것이 최상이다. 세 번째는 군대에 진중문고가 있듯이 건설 현장에도 현장문고가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쉬는 시간에 다들 잠자는 것만 원하는 것은 아니다. 휴게실에 인문서적과 안전, 자기계발을 위한 책이 있다면 안전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는 건설노동자도 각 개인이 탁월함을 보여줘야 할 때가 되었다. 건설 현장에서도 대중스타가 나와야 한다. 몸 좋고 얼굴 잘생긴 젊은이가 땀 흘리며 내 나라 건설에 혼신을 다하는 모습, 능숙한 외국어로 외국인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나 보기 좋은가. 모험과 스릴을 느끼면서 고층에서 일하는 현장 모습은 어드벤처 장소가 되어 얼마든지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건설노동자들도 자기 명함을 가지고 퍼스널 브랜드 관리를 해야 한다. 자기 실력과 경험을 널리 알려야 자기 몫의 역할과 보수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높이는 이런 노력은 건설업의 장인이나 명장,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될 것이다. 퍼스널 브랜드 관리는 이렇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관리하는 힘을 준다. 그리고 더 많은 네트워킹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와 경력 발전에 도움을 줄 것이다. 노동 해방은 일하지 않고 편히 노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 해방은 노동을 고통이나 고역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노동을 즐기는 것이다. 일하는 즐거움, 일하며 느끼는 보람, 성취감, 만족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생산성 향상과 나의 기술과 기능의 혁신 그리고 나의 지식능력과 재능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40년이 그런 날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 품품이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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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의 절차탁마]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영주에 내려와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한 지 4개월이 지나간다. 그간 아파트도 많이 올라가 기본 골조공사는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할석미장공으로 일하며 주로 땜빵 일을 하고 있다. 땜빵이라고 하면 하찮은 일, 혹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것으로 쉽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남이 해놓은 것을 다시 수정해야 하는 것은 정밀하고 세밀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나 정성이 곱절이나 든다. 그렇다고 일하고 나서 좋은 소리를 듣기보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일한 결과가 좋으면 아무 말이 없지만 잘못되었을 경우엔 한 소리 듣는 공정이 바로 땜빵이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신분제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던 조선시대도 아닌 민주공화정의 이 시대에 선비가 어떤 의미를 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식인의 이미지를 계승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지 않나 생각한다. 주소 이전으로 영주시민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나도 그 선비의 일원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주에는 소수서원이라는 유명한 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1542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고려말 송나라 주자의 성리학을 들여온 유학자인 안향을 기려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세우고 유생들을 교육시킬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이 서원은 후에 퇴계 이황이 명종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왕의 친필을 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은 편액을 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왕립학교가 되었다는 것이며 서원운영을 위한 여러 혜택을 받는다는 의미다. 사액서원이 되면 왕의 친필 현판뿐 아니라 서원 운영에 필요한 서적, 노비, 토지는 물론이고 면세, 면역 등의 혜택이 따른다. 때문에 소수서원 이후 세워진 전국의 서원들은 경쟁적으로 사액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영주지역에만 30여 개의 서원이 운영되었다. 이러한 학풍이 이 지역에 있어서였는지, 조선을 백성이 기본이 되는 나라, 민본을 국가이념과 비전으로 정립한 정도전이 영주 출신이다. 영주 시내를 관통하는 서천의 강변에는 지금도 삼판서고택이라는 집이 있는데 이 집이 바로 정도전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 집은 처음 정도전의 부친 정운경이 지은 집으로 그의 사위 황유정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은 또 그의 사위 김소량에게 물려주었는데 그의 아들 김담이 모두 판서를 역임했다는 데서 판서 3명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집 이름이다. 이렇게 걸출한 인물과 지식인들이 많았던 고장이라 그런지 세조 때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단종폐위를 반대하던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세조에 의해 순흥으로 유배를 오자 이 지역 선비들은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단종복위운동을 펼쳤다. 안타깝게도 내부 고변으로 발각되어 역사는 이 일을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기록하는데 이 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당하며 영월로 유배를 가고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순흥도호부는 폐부당해 현으로 강등되었으며, 여기에 가담한 순흥의 선비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순흥 주민 및 인근 30리 지역 주민들에게도 혐의점을 뒤집어 씌워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고 한다. 수많은 백성들을 학살하여 순흥부를 가로지르던 죽계천은 온통 피로 물들어 오랫동안 핏물이 10여 리를 흘러들어갔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지금도 영주시 안정면 동촌리는 피끝마을이라고 불린다. 이런 역사적 유래와 아픔을 머금은 이 지역 사람들은 남다른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수를 기록한 ‘국조방목’에 의하면 이 지역 문과 급제자 수가 153명으로 전국 4위에 이른다고 한다. 당시 평안도의 평양이나 큰 도회지보다도 더 많은 지식인들을 배출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소수서원이 처음부터 과거준비와 국가의 관리를 길러내기 위한 인재양성소 같은 관학적 기능이 강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이 서원에서 공부하면 5년도 안되어 모두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과거의 명소로 급부상했다고 한다. 현대판 스카이캐슬의 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역사적 아픔을 ‘입신양명’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욕구가 강했는지도 모른다. 선비란 도대체 무슨 말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학식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으며 고결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비란 인격과 지성을 갖춘 도덕적인 사람을 말한다.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입신양명(立身揚名)과 거경궁리(居敬窮理)다. 현재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세상에 알린다는 뜻으로 약간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명성을 얻어 이름을 드높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직장이나 사업, 예술과 창작, 사회적인 활동과 봉사, 개인의 성장과 자기계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될 수 있는 말로 열심이 노력하여 얻어지는 명예로운 결과다. 셀럽이 되는 것이다. 입신양명의 과정이 바로 거경궁리다. 거경(居敬) 은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고 바르게 가지는 내적 수양이라 할 수 있다. 궁리(窮理)는 사물의 이치를 널리 파악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으로 외적 수양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이루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자기계발이 되는 것이니 예나 지금이나 선비가 갖추어야 할 이 덕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선비들이 추구하는 인재상이랄까 모델이 군자다. 선비는 군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군자는 도덕적이고 품위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올바른 가치와 도덕을 추구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사람쯤으로 보면 될 거 같다. 이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을 즐긴다고 한다. 첫째가 부모님 모두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형제와 갈등 없이 잘 지낸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늘과 인간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적이며 맑은 삶을 사는 것이고,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발굴하여 교육하는 것이다. 이것이 군자의 이상적 가치이며 지향점이며 군자의 삶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고결하고 도덕군자인 양하는 선비도 실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아 때로는 추악한 인물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양반(선비)이 지켜야 할 덕목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절기비사(絶棄鄙事) 양반은 농업 사업 공업 등 천한 일을 하면 절대 안된다. 자기 밭에 난 잡초 한 포기도 자신이 뽑으면 안되고 꼭 사람을 불러 뽑아야 한다. 수무집전(手毋執錢) 불문곡가(不問穀價)양반 손으로 돈을 만지거나 세면 안되고, 쌀값이 얼마인지 물어서도 안된다. 소설의 형태로 선비의 위선적인 모습을 꼬집은 내용이긴 하지만 대부분 현실적인 지적이었다. 강상(綱常)은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등의 관계를 의리·자애·우애·공경·효도 등을 매개로 파악하는 매우 아름다운 용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 유교 윤리가 사회적 통치의 근간 이념인 조선시대에 있어서 강상을 무너뜨리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위중한 범죄 행위였고 이에 대해서 국가는 범죄의 범위와 내용, 그리고 그에 적용되는 형률을 규정하여 엄벌에 처하였다. 사농공상의 차별적 신분제가 매우 엄격하게 적용된 사회였던 것이다. 구한말 의병들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명분이 겉으로는 왜양 척결이었지만 실상은 바로 이 강상의 도리였다. 개화사상가들이 내놓은 개혁안에서 남녀차별과 신분차별을 금지하자는 내용을 가장 반대하고 급기야는 거병을 하여 조정을 탄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지방에서 거병할 때 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종들이 그 가마를 날랐다. 며칠 전 영주에서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고 몇 명의 지인들이 모였다. 선비의 고장 영주의 역사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이 대개 이런 이야기들이다. 이 시대 선비의 고장 영주 시민으로서 시민인 선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의견이 있었다. 모임의 이름도 지어보았다. 큰일을 일으킬 숨어있는 선비라는 의미로 도모거사. 난 며칠 전에 읽은 이시다 바이간의 <도비문답>이란 책을 소개했다. 도비문답에 나오는 비(鄙)와 양반전에 나오는 절기비사의 비는 같은 한자다. 비루(鄙陋)하다의 그 비자다. 비루하다는 말은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허름하고 지저분하다, 하찮고 시시하다 그런 의미다. 그러니까 도비문답은 도회지의 세련되고 아름답고 우아함과 시골스런 허름하고 지저분한 것과의 대화라는 의미다. 아름답고 추함의 대화라고 해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한쪽은 유학을 이런 식으로 비루한 것을 다루려고 했고 또 한쪽의 유학은 비루한 것을 아예 자르고 버리라고 하는 이런 노력의 차이가 훗날 두 국가의 운명을 갈랐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적인 한일관계상 우리가 일본의 중요성과 장점을 거론하는 것은 스스로 토착왜구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에 관한 한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오직 감정적인 분노로 대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알려주려고도 하지 않으며 몇몇의 편견과 무시로 일관된 폄하의 태도를 자랑스럽게 견지해 왔다. 영주에 역사적으로 많은 선비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주를 선비의 고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영주의 선비들이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지식인으로 일반 백성을 훈화하고 이끌어주려는 역할을 게을리 한 것이다. 이제 한국의 위상은 세계적인 리더국가의 반열에 서려고 한다. 일본을 넘어서려 하고 있고 무시해도 괜찮을 그런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함부로 무시하고 있는 우리는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일본이 어떻게 일류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고 조선은 그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일본도 성리학을 받아들였고 주자학이 독존적인 지위로 보장되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들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통용되던 시기가 있었고 상인은 최하위 신분이었다. 이럴 때 이시다 바이간은 상업에서 이윤을 얻는 것은 결코 부끄럽지도 비천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상행위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바이간은 중요한 전제를 단다. 아무 이윤이 아니라 정당한 이윤이라는 것이다. 이 정당함을 담보해 주는 것이 도리이고 마음이다. 사무라이에게 무사도가 있듯이 상인에게 상인의 도가 있다고 말한다. 무사가 충성의 도리를 다하고 당당히 봉록을 받듯이 상인들도 손님에 대하여 도리를 다하고 이윤이라는 봉록을 당당히 받으라고 말한다. 그는 상인들에게 의무와 책임, 그리고 긍지를 심어 주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빗대어 보면 이런 상도가 일본 자본주의 정신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의 이미지가 된 친절, 검소, 근면, 장인정신 등의 가치들은 상당부분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설노동자를 천하게 보는 것은 먼지 구덩이에서 일하는 그 모습이 비루하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가장 비싼 명품은 아파트다. 그 명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건설노동자들이다. 이시다 바이간은 사농공상이라는 귀천의 구별이 형태의 차이, 즉 발현된 것의 차이일 뿐 그 근본의 도는 모두 같다고 했다. 무엇이 귀하고 천한지는 상대적인 관계로서 정해지는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귀는 천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길러지고 있음을 강조하며 그 희생을 언제나 의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묵묵히 수고하는 많은 근로자들, 군인들, 공공요원들, 그리고 지식인들 덕분에 세상은 밝게 빛나는 것이다. 요즘 APT. 라는 노래가 세계적으로 유행한다고 한다. 나도 거기서 일한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