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강대 정치학 박사
-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역임
-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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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2) 베트남 권력 '빅4' …'대나무 외교'는 지속된다
차기 최고위 지도자 후보군 2026년 초 제14차 공산당대회에서 누가 공산당 총비서로 선임될지 지금 예상하기 어렵지만,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볼 수 있다. 또럼이 제13기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회기 중간인 올해 8월에 총비서로 선임됐기에 차기 공산당대회까지 임기를 채운다면 약 1년 6개월간 총비서직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르엉끄엉도 1년 반 정도의 단기간에 국가주석직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이 정도로 최고위 권력 행사 후 은퇴할 가능성은 크지 않을 듯하다. 팜민찐 총리의 도전 가능성도 있지만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럼과 르엉끄엉이 차기 총비서 후보로 되기 위한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로서는 또럼이 상대적으로 유리해 보인다. 또럼 현 총비서가 차기 인사소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현재 공산당 정치국 위원 15명 중 6명이 공안 출신, 3명이 군부 출신으로, 정치국 내 공안 부문이 우위에 있다. 단지 정수 200명으로 구성된 제13기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출범 시 공안 출신자는 군부 출신자보다 적었다. 제13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중 공안 출신자는 6명, 군부 출신자는 23명이었다.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정치국 위원을 선출하고 총비서를 선임하기에, 차기 중앙집행위원회의 부문별 구성은 차기 최고위 지도자 선임과정에 의미 있게 작용할 것이다. 한편 또럼, 르엉끄엉, 팜민찐은 모두 2026년 초에 65세를 넘긴 상태가 된다. 공산당 총비서를 포함한 정치국 위원이 되기 위한 나이는 65세 이하여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응우옌푸쫑 전임 총비서가 65세를 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 승인’을 얻어 두 차례나 총비서로 선임된 적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나이 제한으로 인해 총비서 후보로 나서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들 중 한두 명이 최고위 ‘네 기둥’ 직위를 지속한다면 최고위 지도부의 세대교체는 지체될 것이다. 이 최고위 지도자 4인이 차기 총비서 선임에 합의하지 못해 동반 퇴진하는 일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보다 젊은 세대 인사가 후보로 나설 가능성도 있다. 현 정치국 위원들 가운데 2026년 초에 65세 이하인 위원은 전체 15명 중 7명이다. 또럼 총비서의 ‘대나무 외교’ 계승 또럼 총비서 취임 이후에도 베트남의 대외관계는 비교적 순조롭게 전개됐다. 베트남이 개혁을 선포한 이후 곧 채택한 ‘다변화, 다양화’ 외교는 세계정치 무대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해 왔다. 베트남은 개혁 이전에 진영 외교에 기반하여 자본주의권에 대한 사회주의권의 승리를 대외정책의 기반으로 삼았었다. 베트남은 개혁 이후에 여전히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진영 외교를 일찍이 폐기했고 1990년대 초부터 다변화 외교를 실천해왔다. 응우옌푸쫑 전임 총비서는 이를 ‘대나무 외교’라고 하며 강조했다. 또럼 총비서 시기에도 이 기조는 유지되고 있다. 또럼 공안부장관이 올해 5월에 국가주석으로, 8월 3일에 총비서로 선임됐는데, 10월 21일 르엉끄엉 국가주석을 선임하기까지 총비서와 국가주석을 겸직하고 있었다. 그는 이 겸직 기간에 중국과 미국을 방문하면서 외교무대에 등단했다. 또럼은 공산당 총비서로 선임된 지 보름 만에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두 지도자는 양국이 사회주의 형제이며 주요 외교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은 베트남과 ‘운명공동체’라고 주장하지만, 베트남은 중국과 ‘미래공유 공동체’라고 고집한다. 또럼은 9월 25일에 유엔 연차 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해 뉴욕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회담했다. 두 지도자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양국은 지난해 9월 양자 관계를 포괄적 동반자 관계에서 두 단계를 뛰어넘어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었다. 바이든은 남중국해에서 평화‧안정‧협력을 지속하기 위해 베트남과 긴밀히 협력하고 싶다고 했고, 또럼은 베트남이 독립, 자주, 다변화 외교를 지속할 것이라고 했다. 또럼은 미국 방문에 이어 쿠바를 방문하여 전통적 우호 관계를 확고히 했다. 그는 이후 10월 6-7일에 프랑코포니 정상회의 참석차 프랑스를 방문하여 마크롱 대통령과 회담하고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유럽 국가 중 최초로 베트남의 최고위 수준 양자 관계국이 됐다. 이런 일련의 정상 외교는 또럼 총비서 겸 국가주석 개인의 사고에 기반한 성과라기보다 공산당 중앙대외위원회, 외교부 등 베트남 대외정책 집행기관의 집단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봐야겠다. 베트남의 대외관계에서 제약도 여전히 있다. 베트남은 남중국해의 해상영유권을 둘러싼 갈등 상황에서 중국의 도발에 대응하는 데 적절한 방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중국이 아세안 및 베트남과 남중국해의 행동준칙을 마련하자고 해놓고 합의는 지체되고 있다. 미국은 최근 또럼 총비서 겸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 시장경제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처럼 베트남의 외교는 그 한계도 있으나 국익에 기반한 실용주의 면모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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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1) 다낭과 호이안 …베트남과 한국의 인연을 찾아서
호이안이 투본 강 하구에 토사가 쌓이며 교역항으로서 기능이 약화된 이후 다낭은 외국과의 교류 지점이었다. 다낭은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후 남베트남 제2의 도시였다. 분단 이후 곧이어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다낭은 외국군의 베트남 출입구가 됐다. 한국과의 인연도 만들어졌다. 황석영이 소설 <무기의 그늘>에서 안영규 상병을 다낭 합동수사대로 보내며 자본주의 시장이 지배하는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각종 물건들이 넘쳐나던 곳이 ‘도끄랍(Doc Lap 독럽)’ 거리와 ‘르 로이(Le Loi 레러이)’ 거리 사이의 뒷골목이었다. 현재 독럽 거리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레러이 거리는 그대로 있다. 이외에도 그때와 지금의 거리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낭과 호이안이 역사적으로 한국과 인연이 있어 한국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 도시들에 친근감을 갖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들은 옛 인연을 좇아 다낭과 호이안으로 달려간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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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0) '진정한 사회주의자' 응우옌푸쫑 베트남 총비서가 남긴 것
‘진정한 사회주의자’와 이별 지난 19일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푸쫑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가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2011년부터 2024년 사망 시까지 공산당 총비서로 있었으며, 레주언(Le Duan) 이후 가장 오랫동안 총비서직을 맡은 지도자였다. 그는 베트남 사회에 큰 영향을 남겼다. 사회주의 이념을 넘어 진정한 지도자의 전범을 보였다. 그가 총비서로 재임하는 기간에 사회주의 체제를 지탱하려고 노력했고, 사회에 만연한 부패를 일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히 반부패운동을 추진했다. 이제 그는 갔다.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응우옌푸쫑을 보면 그가 ‘진정한 사회주의자’의 면모를 지녔다고 느껴진다. 그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 유지에 엄격했다. 사욕을 채웠다고 알려진 바도 없다. 그는 1998년산 도요타 크라운 자동차를 사망할 때까지 사용해 검소함을 보였다. 2000년 하노이시 공산당위원회 비서로 취임하며 이 개인용 관용차를 쓰기 시작해 끝까지 바꾸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에게도 엄격했던 듯하다. 그의 부인이 최고 권력자의 부인이라고 나선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아들과 딸을 뒀는데, 이들이 이제까지 언론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정부 부처에서 일반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그의 엄격함은 주로 사회주의 체제 유지와 반부패운동에서 나타났다. 그는 국가의 발전과 현 상황에서 사회주의 실현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현 체제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부패를 청산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졌다. 특히 응우옌떤중 총리 재임 시기에 만연했던 지대추구(rent seeking) 행위를 국가 전체의 발전보다는 집단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비판했다.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를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일소하고자 했다. ‘불타는 화로’라고 불리며 2016년부터 본격화된 반부패운동은 많은 공산당원 및 관료들을 물러나게 했다. 베트남에서 반부패운동은 그 10년 전에 선포됐지만 지지부진하다가 응우옌푸쫑이 두 번째 총비서 임기를 시작하며 강력히 추진됐다. 이로써 베트남의 부패인식지수 순위는 작년에 180개 국가 중 83위로 큰 폭으로 상향했다. 균형외교로서 ‘대나무 외교’ 베트남 발전을 위해서라면 유연한 정책을 펴는 게 응우옌푸쫑의 기본적 생각이었다. 대외관계에서 그의 치적은 이념과 무관하게 ‘대나무 외교’로 잘 알려진 균형외교를 추구한 점이다. 특히 베트남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쳐 최근 2년간 바이든, 시진핑, 푸틴 등 세계 강국의 지도자들을 하노이로 불러들였다. 그는 통일 이후 미국을 방문한 유일한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미국으로 초대했으나 그가 건강 때문에 또는 다른 이유로 두 번째 미국 방문을 실행하지 못했다. 응우옌푸쫑은 한국 및 한국인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한국 기업인과 학자들의 협력하에 조철현 작가가 <베트남 총비서 응우옌푸쫑>을 발간해 그에게 헌정한 것도 이 우호관계의 산물이었다. 이는 세계 유일의 응우옌푸쫑 전기가 됐다. 공안 출신 우위의 권력구도 한편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반부패운동을 지속하면서 공안 우위의 권력 구도라는 부산물을 남겼다. 2021년 1월 출범한 제13기 정치국 위원은 당초 18명이었으나 6명이나 중도 퇴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정치국 위원들이 부패와 관련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었다. 제13기 이전까지 정치국 위원이 중도 퇴임하는 일은 드물었고, 퇴임하더라도 그 수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제13기 정치국 위원 전체 중 3분의 1이나 퇴임하며 최근 2년래 베트남 내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었다. 이후 공산당은 2024년 5월 위원 4명을 충원하여 정치국을 16명 위원으로 구성했다. 그 이후 딘띠엔중 하노이시 당 위원회 비서가 중도 퇴임하고 응우옌푸쫑 총비서가 사망하며, 정치국 위원은 현재 14명으로 줄었다. 이들은 공안 출신 5명, 군 출신 3명, 당 전임자 및 국회 출신 4명, 학계 출신 1명, 테크노크라트 겸 당 전임자 1명으로 구성됐다. 최고위 인사 4인은 공안 출신 2명, 국회 출신 1명, 군 출신 1명으로 구성됐다. 이를 보면 정치국 전체와 최고위 인사 4인 중 공안 출신이 가장 우위를 보인다. 최고위 4인에 국회의장 1명이 있는데, 그를 당 및 국가기관에서 주로 경력을 쌓아온 인사로 분류하더라도 당 전임자의 쇠퇴는 분명하다. 더불어 테크노크라트가 쇠퇴했음은 분명하다. 베트남이 2026년 초로 예정된 제14차 공산당대회 이전에 정치국 위원을 보충할지는 알 수 없다. 또럼 국가주석은 신임 르엉땀꽝 공안부 장관을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시키려는 의사를 갖고 있을 듯하다. 정치국 내 공안 출신이 다수인 현 상황에서 위원들이 이에 대해 합의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지체된 세대 교체 또한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정치지도자들의 세대 교체를 준비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지도자를 선임하려다 보니 그는 65세를 넘긴 지도자를 차기 총비서 후보로 추대하려고도 했다. 2021년 제13차 공산당대회 직전에 쩐꾸옥브엉 당 상임비서를 차기 총비서 후보로 추대하려다 실패했다. 이는 새로운 세대 정치지도자들이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졌는지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최근 새로운 세대 중 가장 두드러졌던 인물은 보반트엉 전 국가주석이었다. 보반트엉은 1970년생으로 사회주의 혁명가의 자녀 세대인 ‘붉은 씨앗’ 지도자였다. 그는 호찌민공산청년단에서 경력을 쌓았고, 공산당 중앙선전교육위원회 위원장, 당 비서국 상임비서를 거쳐 2023년 초 응우옌쑤언푹 사임 이후 국가주석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그도 부패에 연루돼 2024년 3월에 퇴임하고 말았다. 브엉딘후에 국회의장도 차기 총비서 후보로 유력했지만 부패에 연루돼 2024년 5월에 퇴임했다. 현재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할 만한 인사는 레민흥 당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장, 쩐시타인 하노이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정도다. 베트남 발전을 위하여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이제 공과를 뒤로하고 하노이에 있는 마이직 국가지도자 묘지에 묻혔다. 그의 별세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문을 던진다. 그가 강력히 추진하던 반부패운동은 어찌 될 것인가? ‘대나무 외교’로 불리던 균형외교는 지속될 것인가? 공안 출신 우위의 권력 구도는 베트남의 국가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우호적 환경은 조성될 것인가? 우선 드는 생각은 이렇다. 반부패운동은 한동안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동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응우옌푸쫑은 본인과 가족들이 부패에 연루되지 않았기에 이를 강력히 추진하는 동력을 가질 수 있었다. 현재로서는 그에 상당한 다른 인사가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외교부문에서 베트남 균형외교의 기반은 다져졌으며, 공산당과 정부 내에 이에 대한 컨센서스가 있는 듯하다. 균형외교 대외정책은 지속될 것이다. 응우옌푸쫑이 건강이 악화되면서 후보자를 찾는 데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또럼 국가주석이 공산당 총비서 직무를 대행하게 됐다. 공안 우위의 권력 구도가 당장은 지속될 것이지만 지금부터 2026년 초 제14차 공산당대회까지 권력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다. 정치국 위원과 부총리 가운데 사임하게 될 인사가 또 있다는 소문도 있기에 향후 정국은 불안정하다. 베트남의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정책은 정권의 변화에 따라 급변하진 않겠지만 베트남이 발전하려면 외국인 투자 의존도를 줄이고 국내 기업을 진흥시키는 데 진력할 수밖에 없다. 양자가 상호 이익을 도모할 타협책을 만들어 이 전환 과정을 유연하게 끌어가야 한다. 새로운 최고 지도자들이 빨리 실용주의 모드로 전환하고 박차를 가해야 국가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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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9) 푸틴은 사랑을 싣고 ...베트남 연가
- 냉전 시기 베트남-소련 관계 소련은 1950년 중국 다음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 즉 통일 이전 북베트남과 수교한 국가였다. 베트남이 통일되기 전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소련은 북베트남에 중국 다음으로 많은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했다. 북베트남-중국 관계는 베트남전쟁에서 전술상의 차이,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지원 축소 등으로 인해 이미 전쟁 중에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이 관계는 전쟁이 끝나고 중국이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자 냉각됐다. 동시에, 베트남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중국이 1979년 2월 베트남을 침공하며, 베트남과 중국 관계는 완전히 단절됐다. 반면 베트남은 1978년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권 경제협력체 코메콘에 가입하며 소련에 경도됐다. 이후 베트남은 1990년대 초까지 주로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 경제적, 정치적 우호 관계를 발전시켰다. 베트남은 소련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주요 포스트가 됐다. 베트남은 소련에 2004년까지 깜라인(캄란 Cam Ranh)만에 해군기지를 운용하도록 허용했다. 소련은 1979년 봄부터 군사력을 전개하고 기지를 업그레이드해 바르샤뱌 조약기구 이외 지역의 해군기지로서는 가장 큰 기지로 변모시켰다. 한편 1985년 고르바쵸프가 등장하며 소련의 대외정책을 급격히 전환해 자유주의권 국가들과 교류를 모색했다. 그는 미국이 필리핀의 수빅과 클라크 기지에서 철수하면 소련도 깜라인에서 철수하겠다고 제안했다. 소련이 개혁‧개방에 착수하며 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삭감했고 베트남과의 관계도 중시하지 않았다. 소련의 정치적 후원도 약화됐다. 1988년 남중국해의 존슨 사우스 리프(베트남어명 각마)에서 베트남과 중국이 충돌했을 때도 소련은 중국을 비판하지 않았다. 이에 대응해 베트남은 대외관계의 다변화를 모색했다. 베트남-소련 관계는 경제부문에서 진전됐다. 노이바이 공항과 하노이 시내를 잇는 탕롱 대교가 1985년 완성되며 양국 협력의 상징이 됐다. 탕롱 대교는 당초 중국의 지원으로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중단됐다가 소련의 지원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1986년 양국의 합작기업으로서 비엣솝페트로(VietSovPetro)가 출범해 원유 발굴에 나선 것도 중요한 성과였다. 1980년대 말에는 호아빈 및 찌안 수력발전소, 파라이 화력발전소 등이 소련 지원으로 건설됐다. - 탈냉전 시기 베트남-러시아 관계의 변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탈냉전의 문턱을 넘으며 소련의 베트남에 대한 지원은 축소됐다. 1991년 소련의 해체는 베트남에 큰 충격이었고,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 노력과 함께 비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협력 관계를 확대해 나갔다. 1994년 보반끼엣 총리는 모스크바를 방문해 양국 간 기본조약을 체결해 1978년 우호협력조약을 대체했다. 이제 양국은 더 이상 동맹국이 아니며 많지 않은 공동의 이익을 가진 상대였다. 반면 비엣솝페트로는 1991년 기업 운영을 개시하여 1990년대에 걸쳐 원유 생산을 확대했다. 비엣솝페트로가 양국 협력의 성공 사례였다. 깜라인의 러시아 해군기지는 1990년대에 계속해 쇠퇴했다. 이 기지와 관련한 종사자와 가족들의 수는 1987년 6천 명에서 1990년대 초 700명으로 감소했다. 1995년 깜라인 비행장 근처에서 러시아의 Su-27 전투기 세 대가 사고로 파괴되며 기지의 낙후한 장비 문제가 제기됐다. 이에 러시아는 2002년 기지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러시아는 Su-27 전투기, Su-22M4 폭격기, 미사일 탑재 함정 등 무기를 베트남에 계속 수출했다. 인적 교류에서도 옛 소련과 러시아는 베트남에 우호적이었다. 소련 및 러시아 유학생수는 지난 60년간 7만여 명에 달하며, 그중 3만여 명의 학사, 3천여 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9만 8천 명은 직업훈련을 받았다. - 푸틴 집권 시기 양국 관계 푸틴이 2000년 러시아의 대통령이 되며 그의 시대를 열었다. 푸틴은 국제적 지위를 되찾고자 적극적 대외정책을 채택하고 아시아 외교에도 중점을 뒀다. 러시아의 아시아 정책에서 베트남은 특별 지위를 갖게 됐다. 푸틴은 2001년 베트남을 방문해 전통적 우호관계를 강조했다. 양국간 교역은 2002년 4억 달러에서 2005년 9억 달러로 증가했다. 그러나 2000년대 말에 러시아 전체 교역에서 베트남과의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0.4%, 베트남의 전체 교역에서 러시아와의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1.3%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2000년대에 러시아의 베트남으로의 무기 수출은 확대됐다. 베트남은 2003년에 Su-30MK 전투기 네 대를 주문했다. 양국간 방위협력 MOU를 체결한 2008년 군사장비 계약액은 10억 달러, 2009년 35억 달러에 달했다. 이때 베트남은 Su-30MK 여덟 대, 함정 등을 주문했고, 킬로급 잠수함 여섯 기를 주문했다. 2010년경 베트남은 중국, 인도 다음으로 러시아의 세 번째 무기 수출대상국이었다. 2010년대 양국 관계가 더 밀접해지며 양국은 2012년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는다. 양국은 2014년에 러시아 군함이 깜라인만에 기항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협정을 체결했고, 러시아 공군기가 깜라인 공항을 유류 재공급을 위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베트남이 러시아에 주문했던 킬로급 잠수함 여섯 기는 2017년 초까지 베트남에 인수됐다. 한편 2010년 러시아 국영기업 로사톰(Rosatom) 산하 아톰스트로이엑스포트(Atomstroyexport)가 베트남의 첫 번째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권을 땄다. 그러나 2011년에 일본 후쿠시마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고 예산 제약으로 인해 이 사업은 중단됐다. 반면 원유기업 비엣솝페트로는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양국은 2030년까지 이를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가즈프롬(Gazprom)도 베트남에서 천연가스를 생산한다. 또한 베트남의 페트로베트남도 러시아에 투자하여 루스비엣페트로(RusVietPetro) 합작기업을 설립하여 원유를 산출하고, 가즈프롬비엣(GazpromViet)이 천연가스를 생산한다. 원유와 천연가스 분야 이외에서 양국간 협력은 많지 않은 상태다. - 현시기 푸틴의 베트남 방문의 의미 현시기 상황으로 보아 베트남이 2024년 6월 푸틴의 하노이 방문을 주도적으로 추진했을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러시아가 우크라니아 침공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궁지에 몰렸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를 찾는 때다. 러시아는 우크라니아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북한으로부터 무기 공급을 받아야 하고, 세계에서 고립되어 있지 않음을 표방할 장소를 베트남으로부터 제공받아야 했다. 이런 점에서 푸틴의 이번 북한과 베트남 방문은 푸틴에게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푸틴의 하노이 방문은 양국의 협력을 한층 더 증진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양국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기로 하고, 상대국에 적대적인 동맹에 가입하지 않는다고 표명했다. 베트남이 이미 ‘4불 정책’을 표방하고 대외정책을 집행하고 있는 점에서 보면, 이번 동맹 불가입 표명은 기존 정책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한편 양국은 남중국해와 관련해서 국제법에 따른 항행의 자유 보장, 무력 불사용,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고, 남중국해 당사국 행동선언의 완전한 이행과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행동준칙의 조속한 협상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이러한 안보 관련 선언은 각각 미국과 중국에 대한 러시아와 베트남의 이해를 지지하는 것이다. 푸틴의 하노이 방문이 미국 또는 자유주의권에 대한 균형 외교일까? 역사에서 봤듯이 베트남은 이를 중국에 대한 균형 외교로 활용할 수도 있다. 베트남에게 러시아의 전략적 중요성은 중국에 대한 균형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베트남은 2022년 3월 유엔총회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 결의에 기권한 바 있다. 베트남이 우크라이나 침략 국가의 수뇌인 푸틴을 맞아 정상외교를 한 것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여전히 남는다. 경제부문에서, 양국의 교역액은 2021년 55억 달러를 초과했으나 2023년 36억 달러 수준에 있다. 러시아는 베트남에서 186개 프로젝트에 투자해 투자순위에서 26위에 있다. 이처럼 양국간 경제 협력은 비교적 약한데, 양국은 교역을 증진시키고 투자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기로 했다. 정리나 특파원의 보도에 따르면 양국은 에너지·석유·가스 분야 핵심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신에너지·청정에너지·지속가능발전 분야 등에서의 연구 협력도 조속히 확대하기로 했다. 러시아 로사톰 대표와 베트남 과학기술부 장관은 베트남에 원자력 과학기술센터를 건립하는 양해 각서를 체결해 원전 건설 가능성을 열었다. 베트남 산업통상부는 러시아 국영 자루베즈네프트에 베트남 남부 대륙붕 11-2 광구 개발을 허가했다. 러시아의 에너지 기업 노바텍도 베트남에서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를 시작할 계획이다. 베트남은 레닌 동상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국가다.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가 국가의 기반이 되는 이념이지만 실제로 일반인들은 이념을 고려하지 않고 산다. 베트남인들, 특히 북부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 이상으로 러시아에 호감을 갖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는 베트남 통일 전과 후에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해준 고마운 국가였다.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 사람 중에는 러시아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많다. 특히 공산당, 정부 및 학계에서 활동하는 중장년 세대에 러시아 유학파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현재 베트남 젊은이들 가운데 러시아 유학을 ‘꿈꾸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베트남의 미래 세대는 대부분 미국과 유럽을 선호한다. 베트남과 러시아가 전통적 우방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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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8) 정치국 위원 3분의1 물갈이 … 베트남 정가 '격변의 5월'
반부패운동이 낳은 정치국 위원의 중도 퇴임 러시 금년 5월은 베트남 정치 격변의 달이었다. 공산당이 제9차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근 2년 동안 퇴임한 공산당 정치국 위원들의 공석을 채운 것이다. 2021년 1월 말부터 임기를 시작한 제13기 공산당 정치국은 18명의 위원 중 6명이 중도 퇴임한 기록을 남겼다. 이전에는 임기 중간에 퇴임한 정치국 위원이 한두 명에 불과했는데, 이처럼 전체 위원의 3분의 1이나 중도 하차한 적은 없었다. 이는 응우옌푸쫑 공산당 총비서(서기장)가 주도한 반부패운동의 결과다. 여기에서 공산당 정치국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베트남 정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베트남에서는 정치국 위원들이 국가기관의 주요 직위를 담당하기에, 이들의 변화는 정치체제 변화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예컨대 공산당 정치국 서열 2위 인사가 국가주석, 3위 인사가 총리, 4위 인사가 국회의장을 맡는다. 보통 국가기관 고위 지도자들의 인사는 먼저 공산당이 단독 후보를 지명한 후 국회가 인준하는 절차를 거친다. 최근의 정치적 격변은 2023년 초 팜빈민, 부득담 두 부총리가 퇴임한 것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응우옌쑤언푹 국가주석이 사임하면서 시작됐다. 보반트엉 공산당 비서국 상임비서가 작년 3월에 국가주석직을 맡았지만, 그도 올해 3월에 퇴임했다. 이후 브엉딘후에 국회의장, 쯔엉티마이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장 겸 비서국 상임비서의 퇴임이 이어졌다. 이보다 앞서 쩐뚜언아인 공산당 중앙경제위원회 위원장도 중도 퇴임했다. 이로써 최고위 직위인 공산당 총비서, 국가주석, 총리, 국회의장 중 두 자리나 공석을 남겼다. 제13기 정치국에서 중도 퇴임한 위원 중 테크노크라트는 4명(팜빈민, 응우옌쑤언푹, 쩐뚜언아인, 브엉딘후에), 당 전임자는 2명(보반트엉, 쯔엉티마이)이었다. 여기에 정치국 위원이 아닌 부총리 및 장관급 인사를 포함하면 고위 지도부에서 테크노크라트의 쇠퇴는 더 분명해진다. 중도 퇴임한 공안과 군부 출신 최고위 인사는 없었다. 이들의 퇴임 과정을 보면, 모두 본인들이 사임을 요청하고 공산당이 이를 수용하는 형식을 취했다. 형사 처벌 대상이 된 인사도 없었다. 퇴임하는 지도자들의 면모를 살리는 형식이었다. 공산당은 퇴임하게 된 지도자들의 퇴임 이유로 당원 및 지도자로서 결점을 나타냈고 이들의 잘못된 행동이 공산당과 국가의 위신을 훼손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들의 퇴임 이유를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주로 그 비서 또는 하급자의 부패와 관련해 책임을 지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부패에 연루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공안-군부 우위의 새 정치국 진용 공산당은 지난 5월 16일 중앙집행위원회 제9차 회의를 열어 정치국 위원 4명을 새로 선임했다. 제13기 정치국 위원이 당초 18명이었지만 6명이 중도 퇴임하고 4명이 새로 선임돼 현재 16명으로 됐다. 이 회의에서 쯔엉티마이 당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장 겸 비서국 상임비서가 돌연 자진 사퇴하면서, 르엉끄엉 군 정치총국 주임이 상임비서직을 맡았다. 이번에 새로 선임된 정치국 위원은 레민흥 당 비서국 중앙사무처장, 응우옌쫑응이어 당 중앙선전교육위원회 위원장, 부이티민호아이 당 중앙동원위원회 위원장, 도반찌엔 베트남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주석(위원장)이다. 새로 정치국 위원으로 선임된 인사 중 레민흥 당 중앙사무처장은 테크노크라트 겸 당 전임자라고 할 만한 인사다. 그는 공공정책을 공부했고 국가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며 당 중앙사무처장을 맡아 왔다. 응우옌쫑응이어 당 중앙선전교육위원회 위원장은 군 출신이며, 부이티민호아이 당 중앙동원위원회 위원장은 당 감찰 계통, 도반찌엔 베트남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주석은 소수종족 출신으로 지방 행정 및 당 간부 경력을 갖고 있다. 이로써 공산당 정치국은 응우옌푸쫑 총비서, 또럼 국가주석, 팜민찐 총리, 쩐타인먼 국회의장, 르엉끄엉 당 서기국 상임비서, 응우옌반넨 호찌민시 당 위원회 비서, 딘띠엔중 하노이시 당 위원회 비서, 판딘짝 당 중앙내정위원회 위원장, 쩐껌뚜 당 중앙감찰위원회 주임, 판반장 국방부장관, 응우옌호아빈 최고인민법원장, 응우옌쑤언탕 호찌민국가정치학원(아카데미) 원장, 레민흥 당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장 겸 중앙사무처장, 응우옌쫑응이어 당 중앙선전교육위원회 위원장, 부이티민호아이 당 중앙동원위원회 위원장, 도반찌엔 베트남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새 진용을 갖췄다. 현 정치국 위원 16명 중 공안 출신은 5명, 군 출신은 3명으로, 이 두 부문 출신자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분류하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당 전임자는 4명 또는 5명이나, 테크노크라트는 딘띠엔중, 레민흥 2명에 불과하다. 최근 베트남의 정치적 격변으로 공산당 정치국 내 공안 및 군부 세력의 강화와 테크노크라트의 쇠퇴는 분명해 보인다. 정치적 격변과 권력구도의 변화 5월 18일 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마치며 응우옌푸쫑 총비서와 팜민찐 총리, 국가주석 후보 또럼 공안부 장관, 국회의장 후보 쩐타인먼 국회부의장, 르엉끄엉 당 비서국 상임비서, 레민흥 당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장 겸 중앙사무처장이 회합했다. 이들이 제13기 최고위 지도부 인사들이며 이들 중 일부는 2026년 초에 시작하는 차기 최고위 지도부 후보들이라고 여겨진다.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세 임기를 맡았고 건강상 이유로 차기 지도자로 또 나서기에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팜민찐 총리는 2021년 초 제13기 당 정치국과 제15기 정부 출범 시 중도 퇴임하리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번 임기 말까지는 총리 직무를 수행할 듯하다. 또럼 공안부장관이 국가주석으로 부상한 점이 두드러진다. 또럼 국가주석은 응우엔푸쫑 총비서가 적극적으로 수행한 반부패운동의 최대 수혜자다. 또럼이 경찰과 국가정보원의 기능을 합친 공안의 수장으로서 캐비넷 열쇠를 쥐고 그 안에 쌓아 놓은 최고위 정치지도자들의 파일을 하나씩 공개한 셈이다. 현재로서는 그가 차기 총비서 후보로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그는 공산당 정치국 및 중앙집행위원회 내에서 동의를 얻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의 당 중앙집행위원회 내 신임도는 비교적 높지 않다고 알려졌다. 제13기 당 중앙집행위원회 회기 중간회의에서 있었던 신임투표에서 그에 대한 신임 비율은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낮은 편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군부와의 협력이 또럼의 차기 총비서 추대에 중요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올해 5월 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르엉끄엉 군 정치총국 주임이 당 비서국 상임비서로 선임되고 또럼 공안부장관이 국가주석으로 추천된 것은 일견 공안과 군부 간의 타협으로 보이나 양자 간 균형을 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응우옌푸쫑 총비서가 용호상박 구도를 만들었다고 평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공안과 군부 간 협력의 기조가 2026년 초로 예정된 제14차 공산당대회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현재 또럼이 차기 총비서 후보로 가장 유력하나 단독 후보로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2021년 초 제13차 공산당대회를 앞둔 상황을 떠올려보면, 응우옌푸쫑 총비서는 당시 당 비서국 상임비서였던 쩐꾸옥브엉을 차기 총비서 후보로 추대하고자 했으나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베트남은 공산당 내 ‘민주화’가 제법 진전된 국가다. 한편, 베트남 정치지도자들의 세대교체는 헛된 일이 됐나? 2021년 초 제13기 정치국이 출범하면서 보반트엉, 쩐뚜언아인 등 ‘붉은 씨앗’ 젊은 세대 정치인들의 등장이 베트남 정치체제의 변화를 예고한 것 같았다. 이들이 중도 퇴임하면서 두드러진 젊은 세대 지도자의 수는 적어졌다. 레민흥, 쩐시타인 하노이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등이 현직에 남아 있다. 차세대 최고위 정치지도자로 이번에 정치국 위원이 된 레민흥을 주목해볼 수 있다. 레민흥은 공공정책을 공부하고 국가은행 총재를 역임한 테크노크라트였지만 이후 공산당 비서국 중앙사무처장을 맡으며 당 전임자가 됐다. 이번에 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동시에 당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선친이 공안부장관을 지냈고 형이 공안으로 있어, 그가 공안 부문과의 협력을 잘 해낼 수 있는 인사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로의 교체는 2026년 초 제14차 공산당대회를 지켜봐야겠다. 이번 새 정치국 출범은 그간의 정치적 격변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2026년 초에 열릴 14차 공산당대회를 향한 권력 경쟁의 또 다른 시작이 됐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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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7) '외자'가 이끄는 베트남 경제…국내 기업 경쟁력 높여야
- 산업 및 소유 부문별 비중의 변화 산업부문별 구성의 변화를 보면, 전체 경제 중 농림수산업의 비중은 2010년 15.4%로부터 2023년 12.0%로 감소했다. 같은 시기에 공업-건설부문의 비중은 33.0%로부터 37.1%로 증가했다. 서비스부문 비중은 40.6%에서 42.5%로 증가했다. 베트남도 산업구조에서 경제성장에 따라 공업과 서비스부문 비중이 증가하는 개발도상국의 일반적 경향을 보인다. 산업부문별 비중의 변화 (%) 연도 농림수산업 공업-건설부문 서비스부문 2010 15.38 33.02 40.63 2023 11.96 37.12 42.54 한편,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소유부문별 비중의 변화는 중요하다. 2015년과 2021년의 경우를 들면, 전체 경제 중 국유경제의 비중은 22.8%로부터 21.2%로 감소했으나, 국내 민간경제부문 비중은 50.6%에서 50.0%로 유사했고, 외국인투자부문 비중은 17.5%로부터 20.0%로 증가했다. 이는 베트남에서 국유경제부문의 지속적 감소와 외국인투자부문의 지속적 증가 추세를 보여준다. 이제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두 부문의 비중은 각각 21%, 20%로 비슷한 지점에 이르렀다.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가 외자 의존적 경제성장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투자가 베트남의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하는 현실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다. 흔히 지적하듯이 베트남 경제는 외자 의존적 성향이 강하다. 외국인투자 기업이 수출의 70%를 차지하는 현실만을 들어도 그렇다. 베트남은 이러한 성장전략을 앞으로도 유지할 것인가 주목해봐야 한다. 소유부문별 비중의 변화 (%) 연도 국유경제부문 국내 민간경제부문 외국인투자부문 세금-보조금 2015 22.84 50.63 17.46 9.07 2021 21.18 50.04 20.02 8.76 전체 경제 중 소유부문별 비중의 변화는 사회주의 체제 변화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전체 경제에서 국유경제부문의 위상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기업 수에서 국유부문 비중은 2010년에 1.2%를 차지했으나 2021년에 0.3%로 감소했으며, 같은 기간에 국내 민간부문 비중은 96.2%에서 96.6%로 소폭 증가했고, 외국인투자부문의 비중은 2.6%에서 3.2%로 증가했다. 노동자 고용 비중에서는 같은 기간에 국유부문이 전체의 10.2%로부터 8.1%로 대폭 감소했는데, 국내 민간부문은 86.3%에서 82.6%로 약간 감소했으나, 외국인투자부문은 3.5%로부터 9.3%로 대폭 증가했다. 운전 자본의 비중에서는 같은 기간에 국유부문이 전체의 34.2%에서 20.9%로 대폭 감소했으나, 국내 민간부문은 50.3%에서 59.3%로 증가했고, 외국인투자부문은 15.6%로부터 19.8%로 증가했다. 소유부문별 항목별 비중의 변화 (%) 항목 연도 국유경제부문 국내 민간경제부문 외국인투자부문 기업 수 2010 1.17 96.23 2.59 2021 0.27 96.59 3.15 노동자 고용 2010 10.2 86.3 3.5 2021 8.1 82.6 9.3 운전 자본 2010 34.15 50.29 15.57 2021 20.87 59.31 19.81 기업 수, 고용 노동자 수, 운전 자본의 비중에서 보면, 국유경제부문의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크게 하락했다. 이에 반해 국내 민간경제부문은 운전 자본의 증가세를 보였고, 외국인투자부문은 기업 수, 노동자 고용, 운전 자본 모두에서 증가세를 보였다. 이제 베트남 국유부문은 외국인투자부문보다 노동자 고용 비중에서 약간 적고 운전 자본 비중에서 약간 많은 수준에 있다. 이로써 두 부문이 전체 경제에서 비슷한 위상에 처하게 됐다. - 지역의 발전과 향후 과제 2022년 기준 지역총생산(GRDP)은 호찌민시가 가장 많았고, 하노이, 빈즈엉, 동나이, 바리아-붕따우 등이 뒤를 이었다. 2022년 1인당 지역총생산은 바리아-붕따우가 3억3550만동(1만4420달러)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서 꽝닌 1억9880만동(8545달러), 하이퐁 1억7390만동(7474달러), 빈즈엉 1억6490만동(7088달러), 박닌 1억6380만동(7040달러), 호찌민시 1억5750만동(6770달러), 하노이 1억4190만동(6099달러) 순이었다. 참고로 2022년 전국 평균 1인당 GDP는 9560만동(4124달러)이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덜 발전된 지역의 1인당 지역총생산은 북부 산악지대의 하장 3350만동(1440달러), 까오방 3960만동(1702달러), 디엔비엔 3970만동(1706달러) 등이었다. 베트남은 이제 GDP 규모로 세계 35위 국가가 됐다. 이미 많이 투자한 동아시아 기업들 외에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베트남 투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베트남은 경제성장을 위하여 국내외 민간기업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국유경제부문이 경제에서 주도적 위상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당면한 과제는 외국인투자 기업의 국내 기업과의 연계성을 높이고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 세계시장에서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로써 베트남은 외국인직접투자에 의존한 경제성장을 국내 기업의 성장에 의한 경제성장으로 전환할 방안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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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6) 소설이 담아낸 베트남의 굴곡진 현대사
-토지개혁의 ‘흑역사’와 전쟁의 참화 현대 베트남 국가 건설 과정에서 가장 큰 격동은 북부에서 1953년 시작된 토지개혁이었다. 당시 5% 지주 규정으로 인해 지주가 아닌 사람도 지주로 몰려 희생되기도 했는데, 희생된 사람이 1만6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정치지도자들은 토지개혁 과정의 오류를 깨닫고 1956년에 이를 서둘러 종료했다. 따라서 북부의 토지개혁은 베트남 현대사에서 ‘흑역사’에 해당하기에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린다. 이 소설의 주인공 푹은 그 절정기인 1955년에 '검은 폭풍 같은 토지개혁'을 맞는다. 지주로 몰려 재산을 빼앗긴다. 도자기는 깨지고 유교 경전은 불태워 버려진다. 논은 물론이고 잘 가꿔졌던 정원 응우옌끼비엔은 훼손되고, 넓은 마당을 가진 집도 농민들에게 넘겨진다. 정교하게 지었던 조상 사당은 허물어져 그 벽돌은 농민들이 담장을 쌓는 데 사용한다. 나중에 응우옌씨 가문은 1980년대 중반에야 빼앗겼던 정원을 되찾아 복원하고 사당을 다시 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당의 복원은 피붙이가 아닌 양아들에 의해 이뤄진다. 토지개혁 이후 북부 농촌은 집단농장화가 진행됐다. 이는 토지개혁에 비해서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1960년 무렵에 농촌은 대부분 ‘합작사’라는 이름의 초급 단계 집단농장으로 재편된다. 남북 베트남은 곧 196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전쟁의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북부 마을은 미군기의 공습으로 병원, 다리, 시장 등 곳곳에 피해를 입었다. 북부 사람들은 식민지배 시기 프랑스보다 미국이 더 야만적이고 잔학했다고 느끼며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농민들은 식량이 부족했지만 이를 전선으로 더 보내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한편 이 소설에서 통일 이전 남부로 이주한 사람은 주인공 푹의 셋째 아들과 양아들의 친아버지인 프랑스 혼혈아였다. 푹은 셋째 아들이 북부에서 떠나 계속 공부하길 원했기에 그 아들은 남부로 이주해 공부를 마친 후 남부 정부의 공무원이 된다. 프랑스 혼혈아는 1954년 월맹 세력이 북부에서 권력을 회복하기 전에 프랑스군 지역 초소장으로 있다가 이후 남부로 이주해 지방 성의 성장이 되어 권력을 이어간다. -남부 위상의 변화와 훼손된 혁명적 순수성 베트남전쟁 시기에 북부 지도자들에게 남부 정부는 공식적으로 미국의 괴뢰정권이었다. 베트남은 통일 이후에도 통일 이전 남부 정권을 지칭할 때 미국의 괴뢰라고 칭하였다. 1991년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기 이전에 남북한이 상대방을 공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괴뢰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베트남이 개혁정책을 집행한 이후에도 남부 정권을 괴뢰정권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나 최근에는 드물게 국가명인 ‘베트남공화국’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는 통일 직전인 1974년에 중국이 파라셀 군도 남서부를 침략할 때 저항하다 희생된 남베트남 군인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 수 있게 몇 해 전부터 용인한 것과 연관된다고 짐작한다. 한편 개혁으로 국가가 발전하면서 해외에 있는 남부 출신 베트남 동포들을 포용할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된 점도 이에 한몫한 듯하다. 이 소설에서 통일 이후, 특히 개혁 시기에 각 인물의 생존 방식은 기존 캐릭터의 본질을 뒤집는다. 통일 이전에 남부로 이주해 공무원이 됐던 푹의 셋째 아들은 교통부 도로교량총국 계획국장 보좌관이 됐고 통일 이후에 국장급 이상이 참가하는 사회주의 개조학습에서 빠질 수 있었다. 오히려 북부에서 문필가였던 둘째 아들이 문예운동에 참여한 경력으로 인해 개조학습을 받아야 했다. 푹의 큰아들은 공산당 간부가 되어 재산을 모으고, 맏손자는 러시아에서 밀수꾼으로서 재산을 모은다. 푹의 큰아들 부자는 1985년 화폐개혁 때 미리 돈을 금으로 바꿔 큰 부를 축적해 붉은 자본가가 된다. 맏손자는 부동산, 자동차 매매사업으로 큰돈을 벌고, 심한 낭비벽으로 1년에 자동차를 두세 대 바꾸고 애인을 다리 긴 모델들로 서너 명씩 바꾼다. 이렇게 일부 권력자 가족은 자본주의 물결에 편승해 자본가, 즉 기업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호앙밍뜨엉이 이 소설 속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우선 드는 생각은 그가 여러 유형의 인간상을 보임으로써 베트남 현대사가 이들이 살아낸 역정을 통해 복합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이념의 허망함까지는 아닐지라도 국가나 이념보다는 인간의 삶 자체가 의미 있고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와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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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5) 베트남의 초특급부자들 …그들은 어떻게 탄생했나?
국내파 민간 기업인의 성장 베트남이 1975년 통일된 후에도 남부, 특히 호찌민시에는 민간 경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민간인들은 한 가구 또는 그보다 조금 큰 규모의 상업과 소규모 제조업을 담당했다. 이러한 남부 자본주의 체제의 유산은 개혁 과정에서 민간기업 성장의 환경을 제공했다. 호찌민시에는 1990년대 초부터 민간 기업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몇 명의 사례를 들어보자. 반틴팟 그룹의 쯔엉미란이 이 부류에 속한다. 그는 레스토랑과 상업으로 시작해 부동산으로 사업 범위를 넓혔다. 그는 화인으로서 홍콩인 남편을 통해 사업 수완과 자금을 조달했다. 그는 1990년대 중반에 안동 시장 재개발과 윈저 플라자 호텔 투자로 이름을 알렸다. 사이공 상업은행(SCB)을 인수하고 최대주주가 됐다. 그러나 그는 2023년 말 SCB에서 부정 대출을 하는 등 16조원 상당을 횡령한 혐의로 체포됐다. 공무원들에게 제공한 뇌물이 67억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호찌민시 정치인들과 교류해왔다고 알려졌다. 도안응우옌득은 중남부 빈딘 출신으로 처음 중부 고원지대에서 학교에 납품하는 책상을 생산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목재가공 사업을 확장하고, 호앙안잘라이 그룹을 설립해 부동산, 고무 가공, 수력발전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는 축구학교를 설립하고 프로축구팀을 운영하며 박항서 감독과도 친분이 깊다고 알려져 있다. 쩜베는 남부 메콩 델타의 짜빈 출신 기업인이다. 그는 어릴 때 사이공으로 이주하여 전통시장에서 일했다. 그의 사업은 처음에 목재가공이었고, 이후 건설, 부동산, 금융 부문으로 확장해 사콤뱅크(Sacombank)에 참여했다. 노바랜드의 부이타인년은 메콩 델타의 동탑 출신으로 수의학을 공부한 뒤 독일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 후 호찌민시 지방정부에서 가축 사육과 수의학 분야에 종사하다가 1992년에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처음에 가축용 약품 등을 취급하다가 이후 부동산으로 사업을 확장해 대기업인이 됐다. 그가 독일에서 공부한 경력이 있지만 사업을 국내에서 시작했기에 국내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귀국파의 성장과 활약 개혁 이전 사회주의 시기에 베트남의 일부 인재들은 소련과 동유럽에 유학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귀국 후 관계나 학계에서 활동했지만 개혁정책을 채택한 이후 극히 소수는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했다. 몇몇 사례를 보자. 베트남 기업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가 빈 그룹의 팜녓브엉이다. 현재 그는 포브스의 세계 부자 순위에서 600위대에 랭크돼 있는데 300위대에 랭크되기도 했다. 그는 하노이에서 출생했지만 부친의 고향에 따라 하띤 출신으로 여겨진다. 1980년대 말 모스크바 지질탐사대학에서 공부하고 우크라이나로 옮겨 레스토랑을 열었고 라면을 생산하는 식품가공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이후 이 사업을 네슬레에 팔고 귀국했는데, 그의 사업 규모는 당시 1억5000만 달러 규모였다. 그는 귀국 후 부동산 사업에 집중하여 빈펄 리조트, 빈홈즈 아파트, 빈꼼 몰 등 사업을 열었고, 이후 빈멕 병원, 빈스쿨 및 빈유니 교육사업, 빈패스트 자동차 등으로 확장했다. 비엣젯 항공의 응우옌티프엉타오는 하노이 출신으로 플레하노프 러시아경제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 멘델레프 화학기술대학에서 경제관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92년 남편과 함께 러시아에서 소비코(Sovico) 회사를 설립하여 중공업 기계와 물자를 베트남으로 수입했고, 1997년 이래 부동산과 은행 사업으로 확장했다. HDBank, 다낭의 푸라마 리조트, 남사이공의 드래곤시티, 푸꾸옥 리조트 등이다. 프엉타오는 2007년에 비엣젯 항공을 설립하여 베트남의 대표적 저비용항공사를 출범시켰다. 마산 그룹의 호훙아인과 응우옌당꽝은 각각 하노이와 중부 꽝찌 출신으로 러시아에서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식품사업을 베트남으로 들여와 마산 그룹을 설립하여 라면과 간장 생산을 시작한 이래 식품부문 최고 기업으로 만들었다. 호훙아인은 테크콤 뱅크 주식을 사들여 지배지주가 된다. 마산은 베트남 내 최대 식품기업이 됐고 빈 그룹의 빈마트를 인수하기도 했다. 테크콤 뱅크는 베트남 내 최대 민간은행이 됐다. 응우옌득끼엔은 하노이 출신으로 베트남군사기술대학에 입학한 후 헝가리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 졸업 후 국영 베트남섬유의류회사에서 일하며 러시아와 교역하는 데 종사했다. 이후 그는 1990년대에 아시아상업은행(ACB)을 설립하고 다른 몇 개 소형 은행의 경영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그는 2012년에 체포되어 사기, 탈세, 불법 거래 등으로 30년형을 선고받았다. - 부동산과 은행을 통해 성장한 베트남 부자들 베트남의 부자들이 등장하고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면 ‘붉은 자본가’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개혁 이전 사회주의 시기의 공산당 고위 지도자와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개혁 이후 새로운 기업인으로 변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베트남 기업인들은 민간인으로 출발해 시장경제화의 기회를 잡아 대기업인으로 성장했다. 기업인의 성장 과정은 1990년대 국내파의 성장과 1990년대 말 또는 2000년대 귀국파의 약진으로 요약된다. 이들이 대부분 부동산과 은행을 통해 급속히 성장했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베트남 기업인 등장의 길에서 민간의 힘이 국가의 힘을 압도하는 듯하지만 이는 정치와 경제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와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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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4) 수교 50년 베트남-일본 …수백년 교류의 발자취
베트남-일본 관계의 역사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에 간 사신들을 중심으로 베트남과 교류를 간간이 이어갔다면 일본은 베트남과 오래전부터 교역을 통한 교류와 근대 이래 지식인들의 교류를 지속해왔다. 일본인들은 16~17세기에 베트남 중부를 방문하여 활발하게 교역 활동을 벌였다. 다낭 남쪽 호이안 중심 거리에 일본이 16세기 말에 건설한 내원교는 영어로 ‘Japanese Bridge’라고 하듯이 일본이 건설한 것이다. 이는 동쪽의 중국인 거리와 서쪽의 일본인 거리를 잇는 다리다. 진주의 선비 조완벽이 1604년과 1606년 사이에 세 차례나 베트남에 다녀와 한국인 최초의 베트남 방문 기록을 남긴 것도 일본인 상인과 동행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에 일본으로 잡혀가 10년간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교토의 거상 스미노쿠라 료이의 주인선을 타고 베트남을 방문한 것이다. 그가 베트남에 간 것은 당시 국제어인 한문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미혜 동덕여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완벽이 방문한 곳이 베트남 호이안이 아니라 중북부에 있는 응에안 지방이었는데, 이를 보면 베트남은 일본과 여러 지역에서 교역했던 듯하다. 근현대에 들어 베트남과 일본 관계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하게 드는 것이 판보이쩌우가 1906년부터 벌인 ‘동유운동’이다. 이는 베트남 학생들을 일본으로 유학시키는 운동이었다. 판보이쩌우는 20세기 초에 판쩌우찐과 함께 베트남 사상가이자 민족운동가로서 쌍벽을 이루던 인물이었다. 동유운동으로 베트남인 약 200명이 일본에 유학했지만 프랑스의 탄압에 일본이 협력하면서 이 운동은 1909년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근대화의 길을 걸으며 강국으로 등장하여 여러 아시아 국가들이 모범으로 삼을 국가로 여겨졌다. 이후 일본이 주변국을 침략하며 모범국 위상은 사라지고 제국주의 국가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을 공격한 데 이어 1940년 9월에 베트남으로 진격해 들어가 1941년 후반에 전국을 석권했다. 일본은 당시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를 제압했으나 프랑스에 대해 식민 통치를 지속하도록 허용하다가 1945년 3월에 직접 지배로 전환한 바 있다. 일본이 1945년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많은 양곡을 베트남에서 공출해 북부 홍강 델타에서만 한 해에 200만명을 굶어 죽게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곧바로 베트남은 독립을 선포했다. 프랑스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식민 지배를 복구하려고 획책하여 베트남과 프랑스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른다. 이 시기에 베트남은 일본과 소원해졌다가 일본은 남베트남과 먼저 수교하게 된다. 일본은 1960~1970년대 베트남전쟁 시기에 미국 군사기지로 기능했고 소비재 공급처이기도 했다. 미국 B52 폭격기가 오키나와 공군기지에서 출격해 북베트남을 때렸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은 선풍기, 녹음기 등 일본산 제품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중지하고 미군을 철수하려고 파리평화협정을 1973년 1월에 체결하자 일본은 발 빠르게 그해 9월에 북베트남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양국 관계가 급속히 발전하지는 않았다. 개혁 시기 최고의 협력 파트너 1975년 4월에 베트남전쟁이 종결되자 베트남은 한국과 관계를 단절했지만 일본과는 이전처럼 관계를 유지해갔다. 그러나 베트남이 1978년 12월에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내려진 금수 조치에 일본도 동참하면서 실질적 관계는 중지됐다. 이후 일본은 베트남에 대한 원조도 중단했다가 1992년 11월에야 재개하게 된다. 베트남과 일본 간 협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베트남이 개혁에 착수하면서부터다. 이제 양국 경제 관계는 매우 밀접해져 있다. 2022년에 베트남은 일본에 242억5000만 달러를 수출하고 233억9000만 달러를 수입해 교역 총액 476억4000만 달러로 일본은 베트남의 제4위 교역 대상국 지위에 있다. 베트남은 지난 10년간 일본과 교역에서 적자를 내는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흑자를 내 왔다. 한국은 2022년에 교역액 877억 달러로 베트남의 제3위 교역 대상국 지위에 있다. 일본은 2023년 10월까지 등록 자본금 누계로 714억 달러를 투자해 제3위 직접투자국 지위에 있다. 한국은 베트남에 대한 직접투자 순위에서 지난 10년간 1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대체로 일본이 한국보다 한 수 위인 국가로 인식한다. 물건을 살 때도 일본 제품을 고급으로 여기는 편이다. 오래전부터 혼다는 현대 베트남에서 곧 오토바이를 뜻했다. 개혁 초반기에 “아이 해브 어 드림”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면서 태국산 드림Ⅱ 혼다 오토바이를 가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드림Ⅱ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갖고 싶은 선망의 오토바이였다. 요즘엔 오토바이와 스쿠터가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지만 말이다. 이제 베트남인들 사이에 한국산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 베트남이 자동차 시대로 전환해가면서 한국의 현대·기아와 도요타가 베트남 시장에서 경쟁을 벌인다. 일본의 이온몰이 베트남 사업을 확장해 한국의 롯데마트에 긴장감을 줬다. 해양 안보 분야에서는 베트남과 일본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다. 모두 남중국해에 직접 이해를 가진 국가들이어서 일본이 베트남에 해양경비정을 제공하는 등 협력 관계는 확대되어왔다. 한국이 현 정부 들어 남중국해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한·미·일 공조를 통해 중국에 대응하려 하고 있어 해양 안보 분야에서 베트남과도 협력이 확대될 것이다. 베트남에 대한 문화적 영향력 면에서는 한국이 앞선다고 생각하는 게 대체로 맞지만 모든 면에서 그런 건 아니다. 베트남이 개혁에 착수하면서 외국에 문호를 열자 <오싱>이 베트남인들 사이에 높은 인기를 끌었다. <오싱>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극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였다. 베트남이 통일 이후 10년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끝에 막 개혁에 착수했던 시기에 베트남인들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오싱>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지금도 <오싱>은 베트남에서 농담으로 가사도우미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후 한국 드라마가 도입되면서 <오싱>으로 대표된 일본 드라마 인기는 줄었고 한국 드라마가 이를 대체해 한류를 확산시켰다. 이처럼 베트남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은 여러모로 관련돼 있다. 모두 역사적 상흔도 지니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베트남인들이 방문하고 싶은 나라 순위에서 1~2위를 다툰다. 한편 베트남 이외 동남아 대부분 국가에서 일본의 영향은 강하게 작용하나 베트남에서만큼은 한국 위상이 일본에 버금간다. 그러나 한국 언론만 보면 지금 베트남이 한국풍 일색이라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는 큰 오산이다. 베트남과 일본의 인연이 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와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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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3) '사회주의' 베트남, 민간 주도 경제로 방향 트나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와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