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49) 다낭 뒤편의 '亡國恨'… 모레로 흩어진 참파의 눈물

  •  1600년 역사 숨 쉬는 베트남 속 힌두왕국 여행: 다낭, 뀌년, 냐짱, 판랑

이한우 단국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 단국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베트남은 여전히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여행지 중 하나다. 다낭에 다녀온 한국인이 많다 보니 여행사들은 얼마 전부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냐짱(Nha Trang)이 그중 하나다. 한국인들은 1960~1970년대 베트남전쟁 때 베트남어에 익숙치 않아 이를 ‘나트랑’이라고 했다. 그 습관이 남아 지금도 ‘나트랑’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다낭도 그렇지만 냐짱도 여름 휴양지로 손색이 없다. 해변이 초승달처럼 길게 뻗어 있고, 넓은 백사장은 한여름의 느림을 즐기려는 이들을 맞는다. 베트남 중부부터 남부까지는 해안에 훌륭한 백사장을 갖춘 곳이 많다. 해산물도 비교적 싼값에 넉넉히 즐길 수 있다. 베트남을 다룬 한국 소설에도 이곳 지명이 여러 군데 등장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은 다낭을 배경으로 삼았고,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은 뚜이호아(Tuy Hoa)를 배경으로 삼았다. 이 밖에도 소설이나 회고록에서 뀌년(Quy Nhon), 닌호아(Ninh Hoa), 냐짱, 깜라인(Cam Ranh) 등이 언급된다. 이 지역이 이렇게 한국인 사이에도 들어와 있으니 베트남 중남부를 여행하며 그곳의 사회와 문화도 들여다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먼 옛날 이 지역은 베트남이 아니라 참파(Champa)라는 나라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북부에 있던 베트남이 전 영역을 석권하며 이제 남겨진 유물로 참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말이다.
 
먼 옛날 북부의 베트남과 남부의 참파
 
베트남 중남부를 여행하다 보면 해안과 바다도 좋지만 다채로운 문화를 볼 수 있어 좋다. 이 지역에서 힌두 문화 유산을 쉽게 접하게 된다. 베트남이 종교적으로 불교를 기반으로 하고 사회적으로는 유교를 받아들여 정치 및 사회 질서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국과 베트남의 문화가 비슷한 게 많다고 느낀다. 하지만 베트남은 먼 옛날 현재 영역의 북부에만 있었고 중남부에는 참파 왕국이 있었다. 참파는 동남아 해양부 지역과 연계돼 있었다. 종족도 문화도 해양부와 연계됐다. 북부에 있던 베트남과는 사회와 문화에서 크게 달랐다. 참파의 영역은 시기별로 다르지만 초기에는 대략 후에(Hue), 다낭에서부터 판랑(Phan Rang)까지였다.

참파의 존재는 기원후 137년 당시 중국 지배하에 있던 베트남의 가장 남쪽인 일남군 상림현(象林縣)에서 구련(區憐)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중국 문헌 기록 덕분에 알려졌다. 베트남은 반랑(Van Lang)에서부터 시작해 어우락(Au Lac)으로 됐다가 기원전 179년 중국 남부 광둥, 푸젠 지역에 걸쳐 있던 남월(南越)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은 한나라 때인 기원전 111년부터 남월을 지배하면서 베트남 영역도 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한나라는 남월 지역에 7개 군, 이후에는 9개 군을 설치했다. 이 가운데 세 개 군이 현재 베트남 영역 내에 있었다. 그것은 교지(交趾), 구진(九眞), 일남(日南)이었다. 그 최남단 일남군의 상림현에서 구련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이후 이 세력은 192년 독립국가를 세우는데, 중국은 이 나라를 임읍(林邑), 점성(占城), 점파(占波) 등으로 불렀다. 점파는 참파와 발음이 유사한 한자 표기일 것이고, 점성은 참파의 도성일 것이다. 중심지는 다낭 인근 인드라푸라(Indrapura)였다.

참파는 북부의 베트남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베트남은 참파에 조공을 요구했지만 참파는 북국 베트남에 대등한 남국이었다. 베트남이 스스로 북국 중국에 대등한 남국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말이다. 베트남과 참파는 서로 침략해 약탈하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베트남은 곡창지대인 홍강 델타를 갖고 있었으나 참파는 경작지가 충분하지 않았다. 참파는 약탈과 교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확충했다. 그러나 두 나라가 몽골의 침입에 함께 맞선 적도 있었다. 베트남 쩐(Tran) 왕조 때 년똥 왕이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옌쩐 공주를 참파 국왕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참파 국왕은 그 대가로 중부 후에 지역까지 영토를 베트남에 떼줬다. 한 해 후 참파 국왕이 사망하면서 후옌쩐 공주는 귀국했다. 그러다가 베트남 후 레(Le) 왕조의 타인똥 왕이 15세기 후반에 대대적 참파 원정에서 승리하며 뀌년 이북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베트남의 참파 공세는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참파는 중심지를 남부로 계속 옮겨갔다. 그 중심지는 뀌년으로, 냐짱으로, 다시 판랑으로 옮기게 된다. 참파는 1832년 판랑 지역이 베트남 영역으로 귀속되며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1
다낭 인근 미선(My Son) 유적지 [사진=이한우]


 
- 힌두 사원 유적
 
참(Cham)인들은 주로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낭에서 서쪽으로 70㎞ 떨어진 곳에 미선(My Son) 유적을 남겼다. 미선은 캄보디아 초기 앙코르 유적과 닮은 데가 있다. 참인들은 벽돌을 쌓아 힌두 사원을 만들었다. 이후 앙코르는 큰 돌을 다듬어 사원을 건축했지만 미선에서 대형 석재로 지은 사원은 보이지 않는다. 미선을 비롯한 인근 지역 유물들은 지금 다낭의 참(Cham)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힌두 문화가 한국인에게 익숙지 않아서인지 미선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1
뀌년(Quy Nhon) 한 쌍 사원 [사진=이한우]

  
 
다낭에서 남부로 향하면 뀌년에 닿게 되고 뚜이호아, 닌호아를 지나 냐짱에 이르게 된다. 다낭에서 냐짱 사이에도 수많은 힌두 사원이 있다. 도시 내에 세워진 힌두 사원은 드물고 외곽 언덕 위에 세워진 게 많다. 도시 내에 세워진 것으로 뀌년의 한 쌍 사원(Thap Doi)과 냐짱의 포 나가르(Po Nagar) 사원이 있다. 참파 왕국 때 뀌년이 비자야(Vijaya)로서 중심지였고 이후 냐짱이 카우타라(Kauthara)로서 중심지였기에 도시 내에 사원이 있는 것 같다. 냐짱을 방문한 한국인들이 포 나가르를 다녀왔을 것이다. 이 사원은 국가 여신인 얀 포 나가르에게 봉헌된 사원이다. 얀 포 나가르는 참족의 전통 신앙에서 최고위 여신이며, 베트남어로는 티엔이타인머우(Thien Y Thanh Mau·天依聖母)라고 불린다. 이 여신이 참족의 창시자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수많은 신 가운데 브라흐마, 시바, 비쉬누를 가장 많이 숭배했는데, 특히 시바와 비쉬누 신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코끼리 머리와 사람 몸통을 한 가네샤(Ganesha)가 지혜의 신이어서 그런지 그 신상도 눈에 많이 띈다. 사원 내 신상은 잘 관리되는 사원에는 탑 안에 있지만 대개 신상이 훼손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
냐짱(Nha Trang) 포 나가르 사원 [사진=이한우]

 
 참인 디아스포라
 
참파가 세력을 잃고 중심지를 남부로 이전하고 결국 멸망하면서 참인들은 어디에 살게 됐을까? 참파 왕국이 건재할 때 살던 지역에 남은 사람도 있지만 참인 다수는 남부로 이주하거나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나 라오스로 이산했다. 호찌민시를 포함하여 오래전 캄보디아 영역이었던 현 베트남 남부 지역은 다양한 이주자들의 영역이다. 남부 메콩 델타를 개발할 때 베트남 지도자들은 혜택을 주면서 중부 지역 사람들의 이주를 받았다. 이 흐름에 참인들도 편승했을 것이다. 참인들 가운데 일부는 이슬람교도로 전환했고 메콩 델타에 거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참인들이 이산하여 베트남 소수종족이 된 것처럼 참 문화도 베트남 문화의 한 부분으로 편입됐다. 참인들이 남겨 놓은 힌두 사원을 보며 국가 흥망의 과정을 새겨 본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2026_외국인걷기대회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