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섭의 Fin포인트 금융권 주 4.5일제 현실화하나…24년 만에 근무체계 개편 '시험대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총파업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금융권이 24년 만에 다시 근무체계 개편의 시험대에 올랐다. 금융노조가 임금 삭감 없는 주 4.5일제 도입을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하면서다. 디지털 전환으로 일하는 방식이 달라진 만큼 근로시간도 줄여야 한다는 노조와 생산성·비용 부담을 먼저 따져야 한다는 사측의 입장이 맞서면서 향후 제도 변화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윤섭 기자
-
박진영의 비즈+ 마이크론·中까지 뛰어든 'HBM 전쟁'…SK하이닉스 50%·삼성 33% 격차 줄어
고대역폭메모리(HBM) 이미지 인공지능(AI) 반도체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의 주도권 경쟁이 거세지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시장 절반을 차지하며 선두를 유지하는 가운데 삼성전자의 점유율이 빠르게 확대되며 양사 간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하반기 HBM3E에서 HBM4로 세대교체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내년에는 삼성전자가 HBM4 시장에서 1위에 오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여기에 미국 마이크론이 HBM4
박진영 기자
-
송윤서의 ‘주‘경야독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뭐길래…증시 급락 원인으로 지목된 이유
전날 코스피가 이례적인 급등락을 보였습니다. 뚜렷한 단일 악재가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엔화 강세와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 가능성이 부각되면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에 대한 경계감이 투자심리를 자극했다는 분석이 나왔는데요. 낯선 표현인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과연 무엇일까요? 2시에 돌연 닥친 급락세…단숨에 200포인트 넘게 하락 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전날 코스피
송윤서 기자
인기 컷 기사
-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밀어버리는거야"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 ‘다양성 영화’는 단순히 장르를 뜻하기보다 상업 중심의 주류 영화와는 다른 시선·형식·주제를 가진 영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양한 국적, 장르, 소수성 등을 포함하는 범주를 갖고 있다. 누군가는 불편하다며 외면했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마주하는 역할을 기대해본다. '우'리들의 '다'양한 '세'상을 위해.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람들은 화를 내는 사람을 보며 불편해한다. 목소리가 커지고, 말투가 거칠어지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왜 저렇게까지 하지?’라고 생각이 들곤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왜 화가 났는지 이유를 들여다보는 데에는 인색하다.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타인의 분노를 얼마나 이해하려 하는가. 그리고 누군가가 끝내 폭발하기까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알고 있는가. 주인공 혜영(김혜윤)은 평범한 청춘과는 거리가 멀다. 팔에 큰 용 문신을 한 그녀는 거친 말투와 다혈질적인 성격을 지녔다. 누군가에게 무례하고 까칠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영화는 혜영을 ‘성격이 센 여자’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가 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준다. 혜영의 삶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고를 기점으로 무너진다. 아버지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서 혜영은 한순간에 가족의 보호자 역할을 떠안게 되고 병원비와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어린 동생까지 돌봐야 하는 그는 아버지가 남긴 빚까지 해결해야 한다. 아직 자신의 삶조차 온전히 꾸려나가기 어려운 스무살 혜영에게 세상은 너무 많은 책임을 안겨준다. 더 큰 문제는 아버지 구본진(박혁권)이 운영하던 중국집과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다. 개발업자 측은 혜영의 가족에게 토지를 넘기라고 압박한다. 혜영에게는 이를 막아낼 경제적 힘도, 사회적 영향력도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혜영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중국집 가게 건물이 사실 아버지 소유가 아닌 과거 아버지가 일한 중장비 회사 최 회장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휴대전화에서 녹취록을 발견한 혜영은 최 회장과 본진 간의 건물을 둘러싼 거래를 발견한다. 알고 보니 최 회장은 본진에게 ‘자유롭게 건물을 쓰라’며 건물을 내주었고 본진은 4억 원의 빚을 내 건물을 2층으로 증축했으나, 국회의원에 출마한 최 회장은 ‘부술 건물에 무슨 권리금이 있느냐’며 권리금을 주치 않은 채 건물이 있는 땅을 골프연습장으로 되팔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같은 내용이 담긴 녹취록을 최 회장과 정계 인사들과의 식사자리에서 폭로하려던 혜영은 건장한 남성들에 의해 쫓겨나고 해당 녹취록은 삭제되고 만다. 그래도 혜영은 무너져있을 수만은 없다. 최선을 다해 진실을 파헤치는 것만이 혜영이 가족을 지키고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뛰어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경찰을 찾아가고 자신의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뿐이다. 왜 분노하는가 이미 기울어진 힘의 균형 앞에 혜영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불도저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그는 동생을 친척집에 맡긴 뒤 중장비 회사로 향한다. 그리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배운 불도저를 몰며 중국집 건물을 스스로 허물고 최 회장의 저택 성벽을 향해 돌진한다. 그러다 출동한 경찰의 총에 맞은 혜영은 돌진을 멈추게 되고 시간이 흐른 뒤 교도소에서 출소한 혜영의 모습을 비춘다. 그녀는 동생과 작은 옥탑방에서 살아간다.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선 예전에 없던 평온함마저 느껴진다. 불도저는 도시를 개발하고 기존의 건물을 밀어내는 존재다. 혜영은 이 거대한 불도저에 올라탐으로써 자신을 밀어내는 세상을 향해 거꾸로 돌진한 것이다. 혜영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누군가 혜영의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대신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혜영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불도저에 올라탄 것은 혜영이 스스로를 지키는 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의 선택이 옳은가를 판단하기 전에 그 선택밖에 남지 않은 혜영의 절망을 느낀다. 영화는 혜영의 통장으로 죽은 아빠의 보험금 4억 원이 입금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종종 분노의 원인보다 분노의 방식에 먼저 주목한다. ‘왜 저렇게 과격해?’ ‘조금만 참으면 되잖아’ ‘말을 좋게 하면 되지’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무엇을 참아왔는지는 묻지 않는다. ‘불도저에 탄 소녀’는 혜영의 거친 모습을 지우지 않는다. 대신 분노만큼의 상실과 무력감을 예상케 한다. 아버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족의 삶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자신의 목소리가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다는 절망.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 그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인 끝에 혜영의 분노가 있다. 돈이나 권력 등 힘을 가진 사람은 화를 내지 않아도 자신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다르다. 아무리 억울해도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혜영이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다. 최 회장에게는 돈과 조직이 있고, 혜영에게는 자신의 몸과 목소리밖에 없었다. 결국 혜영은 자신이 가진 가장 거친 방식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로 한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처럼 불도저에 올라탄 것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복수극의 클라이맥스로만 보기 어렵다. 누군가는 법과 돈으로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불도저에 올라탄 혜영은 세상을 부수려 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녀가 마지막 힘을 다해 밀어내고 싶었던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려 했던 무력감이었는지도 모른다.
강소영 기자 -
'호프'에 4점 준 이동진은 왜 욕먹었을까?이동진 평론가는 또 해명했다. 그는 자신의 평가가 대중의 감상과 엇갈릴 때마다 감독과의 친분, 정치적 성향, 영화계의 이해관계가 평론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평론의 논리보다 평론가의 숨은 동기를 먼저 추궁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번에는 영화 '호프'였다. 이동진은 '호프'에 별점 4점을 주고 "기괴한 난장판 속에서 대담하게 질주하는, 영화 전체가 거대한 크레센도"라고 평했다. 이후 '호프'에 대한 관객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면서, 이동진이 왜 이 작품에 높은 점수를 줬는지 의심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나홍진 감독과 친분이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부터 감독의 명성에 눌렸다는 추측, 침체된 한국 영화계를 의식해 점수를 후하게 줬다는 의혹까지 나왔다. 결국 이동진은 나홍진 감독과 사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고, 전화번호조차 모른다고 밝혔다. 한국 영화계의 사정이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평가에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자신에게 '호프'는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강하게 다가온 영화였다는 설명이다. 평론가의 평가에 반론을 제기할 순 있다. 별점의 근거가 설득력 있는지, 장면에 대한 해석이 타당한지 물을 수 있다. 평론 역시 비평의 대상이다. 이상한 건 사람들이 이동진의 분석을 반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의 배경까지 의심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영화가 별로였다'는 감상이 '그 영화를 좋게 평가한 사람은 정직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쉽게 넘어간다. '호프'를 둘러싼 논쟁은 영화의 완성도만을 따지는 게 아니다. 그 밑에는 누가 영화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인지 가려내려는 경쟁이 흐른다. 취향이 의견에 머물지 않고 안목과 지능, 교양의 등급표로 바뀌면서 싸움이 벌어진다. ▲ 취향은 자아다 조나 버거와 칩 히스는 사람들이 음악이나 헤어스타일처럼 정체성과 밀접한 영역에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려는 경향을 확인했다. 특히 실용적인 물건보다 문화적 취향에서 차별화 욕구가 강하게 나타났다. 취향이 선호를 넘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메시지로 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는 정체성을 담기 쉬운 대상이다. 내가 어떤 서사를 가치 있게 여기고, 얼마나 복잡한 표현을 즐기며, 어떤 감독과 장르에 관심을 두는지 보여준다. '호프'처럼 해석이 여러 방향으로 갈리고 감독의 전작까지 소환되는 작품에서는 이 기능이 더욱 강해진다. 누군가에게 '호프'는 대담하고 독창적인 장르영화고, 누군가에게는 과잉과 허술함을 거대한 규모로 가린 영화다. 갈등은 감상을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작품의 객관적 실체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리 로스와 앤드루 워드는 자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는 경향을 '소박한 실재론'으로 설명했다. 나와 다른 판단을 내린 사람을 보면 그가 다른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편향됐다고 추정하기 쉽다. 이러한 경향은 의견 차이를 불신과 상대 진영에 대한 악마화로 키울 수 있다. '호프'가 재미없었다는 사람에게 영화의 산만함은 취향이 아니라 눈앞에 놓인 결함처럼 느껴진다. 자신에겐 너무나 명백한 단점을 유명 평론가가 지적하지 않으면 이유가 필요하다. '나와 중요하게 보는 기준이 다르구나'보다 '감독 눈치를 봤나'라는 설명이 더 쉽게 떠오른다. 반대편도 다르지 않다.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은 작품의 의미와 장점을 알아본 자신을 통찰력 있는 관객으로 여길 수 있다. 혹평한 사람에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상징을 읽지 못했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의 감상 역시 객관적 진실이 된다. 한쪽은 상대가 영화에 속았다고 믿고, 다른 한쪽은 상대가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믿는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 서로 다른 요소에 무게를 둔 것이다. 하지만 감상이 자아와 결합하면 차이는 곧 위협이 된다. ▲ 재미없게 본 사람은 왜 호평을 공격할까 '호프'를 호평하는 관객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두고, 타인의 취향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이 호평에 더 날카롭게 반응할 수 있는 상황은 생각해볼 수 있다. 이동진의 평론을 예로 들면 그의 해설은 복잡한 상징과 신화, 장르의 역사, 감독의 세계관을 동반한다. 이런 설명은 작품을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돕기도 하지만, 혹평한 관객에게는 다른 메시지로 다가올 수 있다. '당신이 재미없었던 건 이 의미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해석의 언어가 감상 능력의 서열처럼 유통된다면, 영화를 싫어한 사람은 자신의 취향뿐 아니라 이해력까지 평가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면 공격은 선제적인 지위 방어가 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너희가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붙이고 있다.' '내가 영화의 가치를 놓친 게 아니라, 너희가 유명 감독과 평론가의 권위에 속고 있다.' '내가 교양이 부족한 게 아니라, 너희가 문화적 허영에 빠져 있다.' 상대를 허영에 빠진 사람으로 규정하면 자신이 아래에 놓일 가능성을 피할 수 있다. 호평자의 감상을 무효화함으로써 자신의 안목을 지키는 것이다. 호평자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반격할 수 있다. '싫어하는 건 자유지만, 이해도 못하고 욕한다.' 이 말은 작품에 대한 반론처럼 보이지만 상대의 능력을 심판한다. 한쪽은 허세를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무지를 공격한다. 영화에 대한 말은 사라지고 사람에 대한 평가만 남는다. 둘 다 상대가 말한 감상을 믿지 않는다. 상대의 마음속에 더 비열하거나 부족한 동기가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 이동진의 무게 이동진의 별점은 개인의 감상이면서도 개인의 감상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언론은 그의 별점을 기사로 만들고, 팬들은 한 줄 평을 공유하고, 영화 커뮤니티는 그의 평가를 작품의 위치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이동진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평가는 사회적으로 큰 무게를 가진다. 권위가 생기면 편리함과 불편함이 함께 생긴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서 전문가의 판단을 참고하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직접 검토할 시간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위신 편향은 이를 잘 설명한다. 사람들이 특정 정보, 제품, 의견 등을 평가할 때 객관적인 내용보다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나 출처의 사회적 지위, 평판, 인지도에 더 큰 영향을 받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인지적 편향이다. 이는 시행착오의 비용을 줄이는 효율적 전략이다. 이동진의 평을 참고하는 것도 내가 놓친 장면을 발견하고, 흐릿했던 감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동진의 해석을 읽고 내 생각이 넓어졌다'와 '이동진이 4점을 줬으니 좋은 영화다'는 다르다. 해석을 빌리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감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까지 빌린다. 모호한 작품은 판단하기 어렵다. 재미는 있었지만 결말이 납득되지 않을 수 있고, 장점은 분명하지만 좋은 영화라고 말해도 되는지 망설여질 수 있다. 이때 유명 평론가의 높은 별점은 불확실성을 빠르게 없애준다. '역시 좋은 영화였어.' 별점은 판단을 돕는 참고 자료가 아니라 판단을 보증하는 인증서가 된다. 이런 추종이 늘어날수록 반대쪽의 반발도 강해진다.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에게 이동진의 별점은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감상을 수정하라고 요구하는 문화적 압력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때 심리적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선택과 판단의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그 자유를 되찾기 위해 저항하려는 동기다. 물론 이동진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평가를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별점 4점은 명령이 아니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평론가의 평가가 기사와 커뮤니티, 팬들의 언어를 거치며 사실상의 정답처럼 자리할 경우 일부 관객은 감상의 자유를 침해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영화가 재미없었다는 자신의 경험보다 전문가의 분석이 우위에 놓인다고 느끼는 것이다. 가장 쉬운 자유 회복 방법은 평론가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저 사람도 객관적이지 않다.' '친분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저런 평가를 했다.' '감독의 이름값에 눌렸다.' 평론가의 동기를 의심하면 그의 판단을 검토할 필요가 사라진다. 자신의 감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권위의 압력만 제거할 수 있다. 출처 폄하의 장점이다. 반대 의견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하지 않아도 된다. 말한 사람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면 메시지 전체를 기각할 수 있다. 이동진이 나홍진 감독과 커피를 마신 적이 있는지, 전화번호를 아는지까지 해명해야 했던 이유다. 논쟁의 중심이 영화의 장단점에서 평가자의 순수성으로 옮겨갔다. ▲ 이동진을 공격하는 사람과 추앙하는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한쪽은 이동진의 권위를 부정하고, 다른 한쪽은 이동진의 권위에 기댄다. 행동만 보면 정반대지만, 둘은 같은 불편함에서 출발할 수 있다. 내 감상이 틀릴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렵다는 점이다. 공격하는 사람은 평론가의 신뢰성을 떨어뜨려 자신의 판단을 지킨다. 추앙하는 사람은 평론가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판단을 확정한다. 한쪽은 '이동진이 틀렸으니 내가 맞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은 '이동진과 같으니 내가 맞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영화와 자신의 관계보다 이동진과 자신의 거리가 판단의 근거가 된다. ▲ 시네필의 허영과 시네필을 조롱하는 허영 영화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는 문화적 구별 짓기도 숨어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취향이 개인의 순수한 선호만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 지위와 집단의 경계를 구분하는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적 자본뿐만 아니라 내면화된 문화적 취향(아비투스)와 교육이 문화 자본으로 작용해 기득권을 세습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어려운 영화를 즐기고 복잡한 상징을 해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허영이 아니다. 영화에서 발견한 의미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해석이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봤다'는 자기 증명으로 바뀌면 문제가 달라진다. 상징과 신화, 영화사의 맥락을 설명하는 언어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관객을 나누는 자격증이 된다. '호프'를 좋아했다는 말보다 '호프'를 이해했다는 말이 앞에 놓인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점차 자신이 평범한 관객과 다르다는 증거로 쓰인다. 거들먹거리는 시네필의 모습을 과장한 조롱 밈이 반복해서 만들어지는 이유도 이 이미지 때문이다. 영화를 즐기는 사람보다 어려운 용어와 감독의 이름을 이용해 우월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네필을 조롱하는 쪽에 허영이 없는 건 아니다. '재미없는 건 그냥 재미없는 것이다.' '나는 어려운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 '유명 감독이 찍었다고 무조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 말에는 문화 엘리트의 권위에 속지 않는 현실적이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자기상이 담길 수 있다. 복잡한 해석을 허세로 규정하면서 자신은 본질을 꿰뚫어 보는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다. 한쪽은 '나는 이 영화를 이해했다'며 우월감을 얻고, 다른 한쪽은 '나는 이 영화의 허세를 간파했다'며 우월감을 얻는다. 하나는 문화적 속물주의고 다른 하나는 반속물주의처럼 보이지만, 상대를 발판 삼아 자신의 안목을 증명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이속에서 '호프' 논쟁은 '호프를 좋아하는 사람'과 '호프에 속지 않은 사람'이라는 집단정체성으로 번졌다. 영화를 평가하는 일이 어느 순간 자신이 속할 집단을 고르는 일이 된 것이다. ▲ 영화는 해석해도 타인의 마음까지 해석할 수는 없다 "나는 재미있었다"는 말은 반박하기 어렵다. 그 관객이 실제로 느낀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재미없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논쟁거리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은 어떤 장면이 왜 효과적이었는지, 서사의 빈틈이 의도된 모호함인지 설명 부족인지, 상징이 작품 안에서 충분히 뒷받침되는지 등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작품에 대한 논쟁을 건너뛰고 상대의 마음부터 해석한다. '호프'를 둘러싼 논쟁에서 사람들이 지키려 한 건 영화에 대한 의견만이 아닐 수 있다. 자신이 영화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믿음, 유명한 권위에 속지 않는 사람이라는 믿음, 남들이 놓친 의미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평론도 정답을 배급하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영화를 본 방식과 근거를 전해 다른 관객의 감상을 넓히는 일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되고, 반박해도 된다. 다만 별점에 반대하기 위해 평론가의 인격과 동기까지 발명할 필요는 없다.
이동건 기자 -
박위, KTX 낙상사고 CCTV 공개 후폭풍…왜 그랬을까?박위를 돕던 사회복무요원의 발에 휠체어 바퀴가 걸렸다. 휠체어를 탄 박위는 KTX에서 내리다 넘어졌다. 자칫 크게 다칠 수 있는 사고였다. 논란은 사고 이후 시작됐다. 박위가 낙상사고 당시 상황이 담긴 CCTV를 확보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것. 사회복무요원이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며 현장에서 사과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러면서도 "발을 경사로 위에 올려놓은 것 자체로 화가 났다"고 회상했다.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자신을 도와주다 실수한 사람을 수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 공개할 필요까지 있었느냐는 지적이다. 논란이 커지자 박위는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했다. 박위는 왜 CCTV까지 공개하며 이번 일을 공론화했을까. 박위 자신이 아닌 이상 정확한 속마음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가 그동안 해온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몇 가지 심리는 짐작해볼 수 있다. ▲ 내가 겪은 세상이 진짜라는 믿음 박위에게 이 사건은 '누군가 나를 돕다 실수했다'는 사고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해석한다. 똑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과거 경험에 따라 무엇을 중요하게 보는지가 달라진다. 박위는 2014년 사고 이후 휠체어를 타고 생활해왔다. 이후 유튜브 채널 '위라클'을 통해 장애인의 일상을 보여주고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사회 구성원이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했다. 서울시는 이러한 활동을 장애 인식 개선과 인권 증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해 2022년 서울시 복지상 장애인 인권 분야 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박위에게는 비장애인이 쉽게 알지 못하는 위험이 수없이 보였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발 하나 잘못 디딘 실수지만,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사고가 된다. 박위는 CCTV를 보며 바로 이 장면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말로 해서는 모른다. 직접 봐야 안다.' CCTV는 누군가를 망신주기 위한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이야기해온 현실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 돌봄 윤리와 '내가 알려야 한다'는 책무 여기에 일종의 책무감도 더해졌을 수 있다. 돌봄 윤리는 인간을 홀로 완결된 존재로 보기보다 서로 의존하고 돌보는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누군가의 취약함을 알아차리고, 필요한 돌봄에 응답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박위에게 장애인의 안전 문제 역시 이런 관계의 문제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장애인 유튜버로 살아온 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일로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알리지 않으면 다른 휠체어 이용자도 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 문제가 개인의 불쾌함이 아니라 장애인의 안전이라고 받아들였다면, 공론화는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 선의가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여기서 선의가 뜻밖의 함정이 된다. 도덕적 확신이 강해지면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도 강해지고,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질 수 있다. '다른 장애인이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 목적만 놓고 보면 반박하기 어렵지만, 자신의 목적이 옳다는 확신 때문에 다른 문제에 대한 생각은 흐려질 수 있다. 사회복무요원은 박위를 도우려고 그 자리에 있었다. 사고는 고의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사과까지 했다. 박위는 수많은 구독자를 가진 유명인이고, 사회복무요원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개인이다. 사고 순간에는 박위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였다. 하지만 CCTV를 유튜브에 올리는 순간 두 사람의 힘은 뒤집힌다. 신체적으로 약한 사람과 사회적으로 강한 사람이 같은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약자와 강자는 사람에게 영원히 붙어 있는 명찰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박위가 자신의 취약함에 집중하는 동안 자신이 상대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까지는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 같은 CCTV, 전혀 다른 장면 박위와 대중은 똑같은 CCTV를 보고 전혀 다른 장면을 봤다. 박위가 본 건 어쩌면 '작은 실수가 장애인을 얼마나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가'였을 것이다. 반대로 많은 사람은 '장애인을 돕는 사람이 얼마나 쉽게 곤욕을 치를 수 있는지'를 봤다. 이후 사과문에서 박위는 "저를 돕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를 제가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며 "생각이 짧았다"고 밝혔다. 이번 일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도 박위의 이 문장일지 모른다. ▲ 공감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박위는 오랫동안 비장애인에게 자신의 자리에서 세상을 한번 바라봐달라고 이야기해왔다. 계단과 문턱, 경사로가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해달라는 요구였다. 필요한 이야기다. 하지만 공감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봐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자리로 건너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동건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