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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근의 아주경제적 시선] 한국경제, 재도약 위해 규제 고삐 풀어라
2026년은 병오(丙午)년이다. 병(丙)은 불(火)과 붉은색을, 오(午)는 말을 상징해 병오년은 양의 기운이 강하게 겹치는 해로, 정열과 활력이 넘치는 기운이 지배하는 붉은 말의 해이다. 지난 한 해 대한민국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온 해로 평가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훼손되면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백척간두로 밀려나고 있는 형국이다. 경제적으로도 난제가 한둘이 아니다. 우선 확장재정 기조로 인해 재정적자가 늘어나고 국채발행이 늘어나면서 국가채무가 증가하고 있다. 재정증가분의 상당부분이 성장동력 확충보다는 민생지원 기본소득 등에 사용되고 있어 더욱 문제다. 포퓰리즘 정책에 대한 재정지출 확대로 늘어나는 국가채무는 미래세대가 감당해야 할 빚만 늘리는 꼴이다. 팔리지 않는 국채를 한국은행이 통화를 발행해 사주는 등 통화량이 급등하며 원·달러 환율도 위험수위에 육박하고 있다. 부동산은 공급보다는 규제위주 정책으로 집값 전세값 월세가 치솟으면서 민생에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잠재성장률은 추락을 지속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제15차 대통령실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규제, 금융, 공공, 연금, 교육, 노동 등 6대 핵심 분야의 구조 개혁을 통해 잠재성장률을 반드시 반등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취임 5개월 만에 하락하는 잠재성장률을 반전시키고 경제 체질을 강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구조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별다른 후속조치는 보이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오히려 규제는 많아지고 노동시장은 더욱 불안해지고 금융과 연금에 대한 압박 강도도 높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 하락추세는 심각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최근 연구를 보면 2023~24년 경제성장률이 평균 1.7%에 불과한 가운데, 다수의 전망기관에서 금년 성장률을 1% 내외로 전망하고 있어 경제성장세가 장기간 둔화되어 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낮은 성장세에는 경기 순환적 요인과 함께 잠재성장률 하락도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잠재성장률은 흔히 인플레이션을 수반하지 않는 경제성장률로 정의되는데 경기 순환적 요인이 배제된 중장기적 성장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금년에는 1%대 후반으로 추정되며, 2030년에는 1%대 초반으로 예상되고 하락세를 지속하며 2040년대에는 0% 내외로 전망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향후 잠재성장률 하락은 인구구조 변화가 주요 요인이며, 생산연령인구가 빠르게 감소함에 따라 노동투입의 기여도가 2030년 전후에 마이너스로 전환될 전망이다. 과거에 비해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하락한 가운데 노동투입도 감소함에 따라, 자본 수익성이 하락하면서 자본투입 증가세도 둔화될 전망이다. 특히 기업을 옥죄고 있는 각종 규제가 더욱 심화되면서 기업들의 해외 탈출이 가속되고 있어 우려가 크다. 심지어 노동투입 감소가 심화되면서 2040년대 후반에는 소폭의 역성장도 예상되고 있어 설상가상이다. 경제 구조개혁이 지체되는 비관 시나리오에서는 역성장 시점이 2040년대 초반으로 앞당겨질 전망이어서 구조개혁이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지금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회복이 힘든 골든타임에 직면한 것이다. 경제 구조개혁을 통한 총요소생산성 개선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번에 6대 구조개혁이 강조된 것이다. 경제성장의 항등식을 보면 경제성장률은 노동투입증가율 자본투입증가율 총요소생산성증가율의 합이다. 현재 한국에서 노동투입증가율을 보면 합계출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최근 출산율이 일부 반등조짐을 보여 다행이지만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생산연령인구(15~64세)는 빠르게 감소하고 고령인구(65세 이상)는 급증하면서 저출생⋅고령화의 영향이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생산연령인구는 2019년(3763만명)을 정점으로 2021~30년에 320만명, 2031~40년에 510만명, 2041~50년에 460만명 정도 추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70%대 초반을 유지하던 생산연령인구 비중이 2025년(69.5%)에 70%를 하회한 후 2050년에는 51.9%까지 하락하는 반면, 고령인구는 2025년(20.3%)에 20%를 넘어선 후 2050년에 40.1%까지 상승할 전망이다. 지역균형발전이 중요하게 강조되는 배경이다. 지방의 청년들이 주거비용이 비싼 수도권으로 유입되지 않아도 지방에서도 양질의 직장을 구하고 정주환경도 좋아 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서 출산율을 높이자는 정책이다. 아울러 노동생산성 증가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유연성 제고가 시급하다. 지금 노동개혁은 노란봉투법 등 거꾸로 가고 있어 걱정이다. 고용 유연화가 핵심 과제이지만 양대 노총은 ‘유연화=자유로운 해고’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허들을 넘어야 한다. 노동개혁의 방향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노동생산성을 높이려면 노동의 질도 높아져야 하는데 교육이 중요하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특히 교육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 그러려면 장기간 지속되어 온 이념편향적 평준화교육부터 지양되어야 한다. 특히 대학은 20여년 가까운 반값 등록금 정책 지속으로 대학 재정은 실험실습기자재 구입이나 우수교원 확보는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 실정이다. 대통령은 자본투입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기업을 옥죄고 있는 각종 규제를 과감히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낙하산을 없애야 규제혁파가 가능할 것이다. 공직자들이 퇴직 후 내려갈 자리를 염두에 두는데 그 자리를 가지고 있는 산하기관들에 대한 규제를 혁파할 리 없다. 규제를 쥐고 있어야 내려갈 자리가 보전되는 것이다. 정권마다 규제혁파를 강조하고 규제개혁위원회를 가동하고 있지만 곁가지만 건드리고 규제개혁이 실패하고 마는 배경에는 바로 이 문제가 암처럼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개혁이 가능하려면 공직자들도 정무직을 제외하고는 정년까지 근무하는 근무환경의 혁신이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낙하산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규제로 산하기관이나 기업들을 쥐고 있으면 오히려 부담만 되므로 스스로 규제를 혁파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수년 전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의 업무가 비슷하므로 통폐합이 바람직하다는 안이 추진되었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이유는 관리하는 주무 부처가 달라서 서로 자기 부처 관리 은행으로 일원화하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조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낙하산 자리가 하나 없어지는 데 강력 반발한 것이다. 결국 규제혁파는 방만한 공기업 개혁과도 연관이 되어 있다. 공직자는 물론 물러난 정치인들도 다시는 낙하산을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경천동지할 정도의 강력한 규제혁파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 규제혁파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금융은 과도하게 생산적 금융이나 포용적 금융을 강조한 나머지 금융의 논리를 넘어서면 잘못하면 과도한 위험대출로 금융기관 자체가 부실화되어 금융위기를 초래할 우려가 있으므로 금융의 논리를 넘어서지 않는 적정한 수준의 유지가 중요하다. 생산연령인구 감소, 교육의 질 하락, 노동생산성 하락, 규제증가와 투자위축, 금융 압박 증가에 따른 중개기능 약화 등 노동투입증가율 자본투입증가율 총요소생산성증가율의 합으로 구성되는 경제성장률의 변수 거의 모든 항목에서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이 커지고 있으니 잠재성장률이 상승할 수 없다. 그리고는 대책을 강구하기보다는 경제가 성장하면 으레 잠재성장률이 하락한다고 단정 짓기조차 한다. 그러나 미국 경제를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025년에는 8만9105달러 2026년에는 9만2096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국이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거의 세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미국의 성장은 눈부시다. 공화 민주를 불문하고 자국 중심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소득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GDP)은 2020년 코로나 기간을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GDP)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소득이 증가하면 하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잠재성장률이 미국은 트럼프가 집권을 시작한 2016년 1.8%에서 2024년 중 2.1%까지 상승하고 있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의 분석이다. 영국·독일 등의 국가도 잠재성장률이 반등하는 추세다. 독일은 2020년 0.7%에서 2024년 0.8%로 소폭 올랐다. 영국은 2020년 0.9%에서 2023년 1.2%, 2024년 1.1% 수준으로 집계됐다. 반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하락일변도인 것은 구조적인 변화 없이는 선진국보다 더 빠르게 퇴보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리쇼어링’으로 불리는 기업 복귀 정책이 효과를 발휘해 매년 평균 300곳 이상의 자국 기업들이 돌아오고 있다. 일본의 유턴 기업도 연평균 600곳을 넘는다. 반면 한국은 지난 5년간 유턴 기업 수가 총 108곳에 그쳤다. 그중 대기업은 4곳에 불과하다. 자동차 산업만 봐도 일본 도요타·혼다·닛산 등은 미국과 멕시코 공장을 자국 내로 옮기거나 해외 생산 물량의 일정 비율을 국내 생산으로 돌리는 등 리쇼어링 성과가 뚜렷하다. 반면 현대차는 우크라이나 전쟁 등 돌발 악재 탓에 러시아·중국 공장을 폐쇄하면서도 리쇼어링 대신 인도에 새 공장을 짓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한국과 경쟁국의 기업 투자 여건이 천양지차인 데서 비롯된다. 한번 고용하면 사실상 해고가 불가능한 낡은 노동법, 최저임금 과속 인상에 따른 과도한 인건비, 세계에서 가장 경직적이라는 주 52시간제, 산업재해 사망 때 최고경영자가 감옥행을 감수해야 하는 중대재해처벌법, 수도권 공장 입지 규제 등 이중 삼중의 규제가 주는 공포가 기업들을 해외로 내몰고 있다. 무역투자진흥공사 조사에 따르면, 해외 진출 기업의 95%는 “국내 유턴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직원 비중이 높은 제조기업일수록 한국을 떠날 가능성이 커진다는 학술 논문도 나오고 있다. 노조 가입자 비중이 25~50%인 제조업체는 0~25%인 기업에 비해 해외 진출 가능성이 2.1배 높았다. 노조 권한이 강한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해외 이탈 가능성이 1.5배, 노사 관계가 대립적인 기업은 1.6배 높다는 진단이다. 강성 노조의 과도한 요구로 기업이 골머리를 앓고, 신규 공장을 노동 환경이 한국보다 훨씬 유연한 외국에 세운 사례는 숱하게 많다. 현대차는 1996년 충남 아산 공장 이후, 기아는 1997년 경기 화성 3공장 이후 새 공장을 전부 해외에 세웠다. 기업의 국내 투자를 위해선 정부가 노조의 불법 파업에 엄정 대처하는 한편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 제도적 측면에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획일적인 주 52시간 근로제를 탄력 적용으로 바꾸는 일이다. 반도체업계는 연구개발(R&D) 분야에도 주 52시간제가 일률 적용되다 보니, 연구원들이 새벽까지 일하는 엔비디아나 주 7일 근무도 마다하지 않는 TSMC에 밀릴 수밖에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여야 민생공통공약추진협의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반도체산업은 안보면에서도 중요한 전략산업이지만 각종 주민들의 민원, 전기 용수 문제도 발목을 잡고 있다. 480조원의 생산유발효과와 직간접 고용효과도 192만명으로 추정되는 용인 반도체 산단도 수년째 첫 삽도 못 뜨고 있고 전기 용수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미국의 막대한 보조금 지급, 일본 구마모토 반도체 산단의 속전속결 건설과는 너무나 안이하고 차원이 다른 문제들이 한국 기업들을 해외로 내쫓고 있다. 노동생산성도 우선 우수인재가 양성되어야 하는데 40여 년째 이어지고 있는 평준화교육은 수학포기자를 양산하고 19년째 이어지고 있는 대학반값등록금으로 전국 대학들은 인재양성은커녕 재정이 피폐해 존속 자체를 걱정하고 있는 지경이다. 노동 자본투자 저출산 문제가 해결되어야 경제의 역동성이 살아난다. 지금 상태와 같은 미봉책으로는 한국 경제는 선진국 문턱에서 추락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경제의 역동성을 살릴 수 있는 규제혁파 세제개혁 노동개혁 교육개혁을 강도높게 추진해야 한다. 새해는 한국 경제가 반등할 것인가 이대로 추락할 것인가 기로의 해다. 병오년의 용약하는 붉은 말처럼 추락하는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반등하는 원년이 되어 이제 문턱에 다다른 선진국에 안착하자.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경제학과 ▷맨체스터대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통화연구실장 ▷금융경제연구원 부원장 ▷한국국제금융학회장 ▷고려대 경제학과·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 ▷자유시장연구원장 ▷서울지방시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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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석유의 저주' 100년 … 머나먼 '베네수엘라의 봄'
1922년 12월 14일 베네수엘라 북서부 카비마스의 라 로사 마을에서 60여 m 높이로 치솟은 검은 액체는 한 나라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로열 더치 셸이 시추하던 로스 바로소스-2 유정에서 9일간 분출된 엄청난 양의 원유는 환경 재앙이었지만 동시에 베네수엘라가 세계 최대 석유 부국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베네수엘라 석유는 다시 한번 역사의 중심에 섰다. 이번에는 미 육군 최정예 부대 델타포스를 동원한 마두로 대통령 체포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개입은 21세기 국제질서에서 전례 없는 도박이다. 현직 국가원수를 군사작전으로 체포한 이 사건은 20세기 초 미국의 대포함 외교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과연 이 도박은 성공할 수 있을까?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의 100년 역사와 현재 상황을 들여다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야심 찬 계획이 왜 '위험한 도박'인지 명확해진다. 영광의 시대: 석유가 가져온 번영 가난한 농업국이던 베네수엘라는 1929년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석유 생산국으로 급부상했다. 스탠더드 오일, 셸, 걸프 같은 거대 석유 기업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베네수엘라는 대미 주요 석유 공급국이자 남미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로물로 베탄쿠르트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양국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베네수엘라 원유의 특별함은 그 성질에 있다. 초중질유라 불리는 베네수엘라 원유는 점성이 매우 강해 정제가 어렵지만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유가 상승과 정제 기술 발전으로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갖게 되었다. 디젤, 아스팔트, 벙커C유 같은 다양한 산업용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멕시코만의 미국 정유시설 70%는 이 중질유를 처리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1990년대 후반 베네수엘라는 하루 350만배럴을 생산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몰락의 20년: 차베스와 마두로가 남긴 폐허 1999년 우고 차베스의 집권은 모든 것을 바꿨다.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한 차베스 정권은 모든 석유 자산을 국유화하고 엑손모빌과 코노코필립스 등 외국 소유 자산을 몰수했다. 숙련된 기술자들이 베네수엘라를 대거 떠났고, 국영 석유공사 PDVSA는 군대가 장악했다. 권력 유지를 위해 석유라는 자원에만 의지한 채 복지정책을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국가부채와 경제 상황이 악화됐다. 2005년 미국은 보복 조치로 베네수엘라산 석유에 제제를 가했고 양국 관계는 완전히 깨져 버렸다. 마두로 정권하에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014년 유가 폭락은 베네수엘라를 초인플레이션으로 몰아넣었고 780만명이 조국을 떠났다. 2019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제재로 미국에 대한 수출이 사실상 차단되면서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은 붕괴 직전까지 갔다. 파이프라인은 50년간 방치되어 기름이 새고, 정유시설은 부식되어 무너졌다. 결과는 참담했다. 3030억배럴이라는 세계 최대 확인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현재 일일 생산량은 100만배럴 아래로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의 0.8% 정도에 불과하다. 트럼프의 석유 제국 야심 마두로 체포 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는 '석유'라는 단어를 스무 번이나 언급했다. 베네수엘라 침공이 석유 때문이었음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석유에 집착하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미국 정유업계의 수익성 회복이다. 미국은 셰일 혁명으로 세계 1위 산유국이 되었지만 셰일 오일은 경질유라서 휘발유 생산에는 적합하지만 다른 용도에는 한계가 있다. 반면 베네수엘라 초중질유는 다양한 산업용 제품 생산이 가능하다. 게다가 미국 정유사들은 이미 베네수엘라 원유 전용 정제 설비를 보유하고 있어 신규 투자 없이 기존 시설을 활용할 수 있다. 캐나다산 중질유가 베네수엘라산 석유를 일부 대체했지만 가격이 비싸다. 게다가 트럼프의 관세 공세로 캐나다가 수출 다변화를 추진 중이라 베네수엘라 석유는 미국 정유업계에 단비와 같다. 둘째, 더 큰 그림은 국제 유가 지배권 장악이다. 북미와 남미의 석유 자원을 장악하면 미국은 사실상 국제 유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유가를 배럴당 50달러 이하로 유지하면 러시아와 이란 같은 적대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도 낮아져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도 확대할 수 있다. 지정학적 판도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전환점인 것이다. 재건? 극과 극으로 갈린 전망 문제는 실행 가능성이다. 트럼프는 "18개월 안에 베네수엘라 석유 인프라를 완전 재가동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전문가들의 전망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비관론의 대표 주자인 에너지 컨설팅 업체 리스타드 에너지(Rystard Energy)는 현재 생산량을 유지하는 데만 15년간 530억 달러, 전성기인 하루 300만배럴로 회복하려면 2040년까지 183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추산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트럼프의 공언을 "위대한 도박"이라고 평하며 인프라가 너무 심각하게 파괴되어 복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우드 매켄지(Wood Mackenzie)는 낙관적이다. 소규모 투자만으로 1~2년 내 하루 200만배럴까지 회복 가능하다고 본다. 유전 지도가 이미 완성되어 탐사 관련 위험이 없고, 모든 유전이 얕은 수역에 있어 채굴 비용이 저렴하다는 논리다. 같은 산업을 보면서 전문가들의 견해가 이토록 다르다는 것은 베네수엘라 유전의 실태를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방증이다. 다섯 가지 장벽 트럼프의 열정과 달리 석유업계는 무덤덤한 분위기다. 주요 외신들은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 장악 계획과 관련해 "대통령의 바람은 업계의 바람과 다르다"며 그 몇 가지 걸림돌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정치적 불확실성이다.석유 투자는 수십 년을 내다보는 장기 프로젝트인데 몇 주 후의 베네수엘라 정세도 예측할 수 없다. 트럼프가 마두로 정권 2인자인 델시 로드리게스를 지지한 것도 불안 요소다. 민주화를 외치던 야권 지도자 마차도를 제쳐두고 독재정권 핵심 인물을 선택한 것은 트럼프가 민주주의보다 석유 사업 추진 능력을 우선시한다는 뜻이다. '온건한 독재체제'가 얼마나 안정적일지 아무도 모른다. 둘째, 천문학적 비용이다. 최소 수백억에서 최대 1830억 달러라는 추산은 2024년 미국 주요 석유회사 투자비의 두 배에 달한다. 이는 한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셋째, 유가가 너무 낮다. 배럴당 60달러 미만의 저유가 환경에서 위험한 프로젝트에 거액을 투자할 CEO는 없다. 게다가 글로벌 원유 공급은 늘고 전기차 보급으로 수요 증가는 둔화되어 유가 급등 가능성도 낮다. 넷째, 자산 압류 트라우마다. 코노코필립스는 120억 달러, 엑손모빌은 베네수엘라에서 20억 달러를 아직도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 차베스 정권의 국유화로 입은 손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다섯째, 대안이 있다. 셰브론이나 엑손모빌은 인근 가이아나에서 이미 대규모 해상 유전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 굳이 위험한 베네수엘라에 뛰어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설득력 없는 논리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석유 논리가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2003년 미국은 원유 순수입국이었고 이라크는 세계 4위 석유 매장량을 보유해 나름의 경제적 논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20년 사이 석유 산업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셰일 혁명으로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되었고, 2002년 하루 6580만배럴이던 전 세계 생산량은 2024년 7660만배럴로 증가했다. 전기차 보급으로 석유 수요 증가는 둔화되고 있다. OPEC조차 생산량을 줄여 가격을 유지하는 전략을 포기하고 저가 공급 전략을 고려할 정도다. 더구나 베네수엘라 원유는 황 함량이 높아 정제가 어렵고 장기 집권한 사회주의 정권 아래 인프라가 크게 붕괴된 상태이다. 이를 회복하려면 막대한 설비 투자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석유를 호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워싱턴포스트의 표현대로 "OPEC이 시장을 지배하고 석유가 희소 자원이었으며 주유소 앞에 긴 줄이 늘어서던 젊은 시절의 인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경고 미국의 정권 교체 개입은 단기적 성공이 장기적 실패로 이어진 사례로 가득하다. 1953년 이란, 1954년 과테말라, 1973년 칠레에 대한 개입은 수십 년간 지역 불안을 야기했다. 전문가들은 정권 교체가 목표를 달성하는 비율이 50% 정도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베네수엘라 사태는 여러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민주적 과도정부 수립이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이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최악에는 권력 공백으로 내전이 발생하거나 미국의 직접 통치가 장기화되며 반미 감정이 폭발할 수 있다. 쿠바, 콜롬비아, 멕시코 등 주변국에 대한 트럼프의 경고는 이미 지역 전체를 긴장시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쿠바 이민자 가정 출신인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에게 마두로 제거는 미국의 최종 목표인 쿠바 정권 교체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라고 분석했다. 석유 이익과 개인적 정치 목표가 얽힌 복잡한 구도이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석유 자원과 중남미 지역 지배권을 노리고 있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자유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야당 지도자들이 통치할 능력이 없다며 독재정권을 그대로 둔 채 수장만 제거한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석유의 저주 1922년 라 로사에서 분출된 석유는 베네수엘라에 영광과 저주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이제 베네수엘라는 다시 한번 기로에 섰다. 하지만 트럼프의 야심 찬 계획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전문가들조차 석유 인프라 재건 비용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미국 석유회사들은 눈치를 살피며 투자를 망설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치적 불확실성은 마두로가 사라졌음에도 여전하다. 100년간 '석유의 저주'에 시달린 베네수엘라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외세 개입이라는 또 다른 저주를 맞이하게 되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명확하다. 자원만으로는 국가의 번영을 보장할 수 없으며, 외세의 개입은 단기적 이익을 위해 장기적 불안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위험한 도박이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리고 국제질서에 어떤 선례를 남길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봄은 아직도 요원하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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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삼중주
트럼프 행정부가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좌파 정권을 향해 전방위 압박을 가하고 있다. 제럴드 R. 포드 핵추진 항공모함을 포함한 병력 1만5000명을 카리브해에 배치하고, 대형 유조선을 나포하며, 마두로 정권을 '해외 테러조직'으로 지정하는 등 그 수위는 1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마약 카르텔 척결을 내세우지만 이면에는 석유 패권 확보와 중국 견제라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전략은 세 가지 층위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군사 개입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마약 전쟁'이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마약 카르텔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며 미국으로 유입되는 펜타닐과 코카인 차단을 강조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베네수엘라가 마약 생산국이 아니라 단순 경유지에 불과하며, 미국으로 유입되는 코카인의 4분의 3이 태평양을 통해 들어온다고 지적한다. 카리브해에서의 고속정 밀수는 극히 일부다. 즉 마약 전쟁은 군사 개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에 가깝다. 둘째, '실질적 목표로서의 석유 지배권'이다. 베네수엘라는 3030억 배럴이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원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넘어서는 양이다. 원유 수출은 베네수엘라 정부 예산의 58%를 차지하는 마두로 정권의 생명줄이다. 트럼프는 2023년 노스캐롤라이나 연설에서 자신의 1기 임기가 끝나갈 때 베네수엘라는 붕괴 직전이었다며 자신이 연임했더라면 "베네수엘라를 장악하고 모든 석유를 손에 넣었을 것"이라고 노골적 야망을 드러낸 바 있다. 베네수엘라산 중질유는 정제가 어렵지만 디젤, 아스팔트, 중장비용 연료 생산에 활용도가 높아 경질유 중심인 미국 에너지 산업의 빈틈을 메울 수 있다. 셋째, '지정학적 차원의 중국 견제'이다. 베네수엘라 원유 수출의 80%가 중국으로 향하고 있다. 중국은 차베스 집권 시절부터 65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며 '미국의 앞마당'인 중남미에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미국이 중국행 유조선을 집중 나포한다면 마두로 정권뿐 아니라 중국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트럼프 1기 베네수엘라 특사였던 엘리엇 에이브럼스가 "마두로를 그대로 두는 것은 중국, 쿠바, 이란, 러시아와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라며 군사 개입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트럼프 코롤러리: 서반구 패권의 재확인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5일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먼로 독트린에 따른 트럼프 코롤러리(Trump Corollary)'를 제시했다. 보고서는 “서반구에서 먼로 독트린을 재확인하고 강화해 미국 우위를 회복하고 미국 본토와 역내 지리적 요충지에 대한 접근권을 확충할 것”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선언한 '미주 대륙에 대한 유럽의 불간섭' 원칙을 재확인하되 21세기 버전으로 업데이트한 것이다. 이는 1904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남미 국가들이 불안정할 경우 미국이 간섭할 권리가 있다"며 도미니카, 쿠바, 니카라과, 아이티에 군사 개입한 '루스벨트 코롤러리'의 재판으로 볼 수 있다. 베네수엘라는 이 '트럼프 코롤러리'의 첫 시험대다. 콜롬비아에는 마약 밀매 퇴치 예산 지원을 중단했고, 멕시코에는 30% 관세를, 브라질에는 50% 관세를 부과하며 좌파 정권들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의 전략은 명확하다. 중남미의 반미 좌파 정권을 와해시키고 친미 우파로 교체함으로써 서반구 패권을 재확립하겠다는 것이다. 마두로 정권의 생존 전략과 한계 그렇다면 왜 마두로는 트럼프 1기의 압박과 경제 붕괴, 800만명의 국민 엑소더스, 국제사회의 퇴진 압력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을까? 핵심은 '군부 장악'이다. 군 출신이 아닌 마두로는 집권 후 군을 돈으로 회유해 사조직화했고, 여러 조각으로 분열시켜 단결된 반란을 어렵게 만들었다. 2019년 트럼프 1기 때 야당 지도자 후안 과이도를 내세운 쿠데타 시도가 실패한 것도 군부가 마두로를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마두로는 차베스타(차베스 지지자)들의 향수를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우고 차베스 집권기(1999~2013)의 무상 복지 정책으로 빈곤율이 49%에서 25%로 감소한 '황금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여전히 마두로를 지지한다. 비록 유가 하락과 부정부패로 경제가 파탄났지만 미국의 개입을 '제국주의 침략'으로 규정하며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는 전략은 일정 부분 먹혀들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러시아, 중국, 북한 등 전통 우방국과의 협력 강화'로 버텼다. 중국은 650억 달러 차관 상환을 위해서라도 마두로 정권의 붕괴를 원치 않으며 러시아는 미국의 뒷마당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한다. 이란과 쿠바 역시 반미 연대 차원에서 마두로를 지지한다. 베네수엘라 위기는 단순한 독재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중국-러시아의 지정학적 각축장이 된 것이다. 군사 개입 가능성과 위험성 트럼프는 지난 11월 마두로와의 통화에서 '일주일 내 망명'이라는 최후통첩을 전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베네수엘라 영공 폐쇄를 선언하고 카리브해에 1989년 파나마 침공 이후 최대 규모의 해군력을 배치했다. 백악관은 지상군 투입 등 군사 옵션에 대해 "의회 승인이 필요하다"고 선을 그었지만 트럼프는 CIA에 비밀 작전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 개입에 대한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국제위기그룹의 필 건슨 수석분석가는 "무력 전복이 곧 민주주의 이행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가정은 위험하다"며 "베네수엘라는 장기 저강도 전쟁에 적합한 환경"이라고 경고했다. 마두로의 권력 기반인 군부, 콜롬비아 민족해방군 등 무장단체, 민간 폭력조직 등이 봉기할 경우 리비아나 시리아와 같은 내전에 빠질 위험이 크다. 더구나 현재 조치는 엄격한 의미의 '해상 봉쇄'가 아니다. 군사력을 이용한 해상 봉쇄는 국제법상 전쟁 행위로 안보리 승인이나 교전 상태가 요구된다. 미국의 마지막 해상 봉쇄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였다. 현재 조치는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 PDVSA 관련 제재 선박에 대한 선별적 차단이며, 셰브론 같은 미국 기업의 활동은 제외된다. 이는 베네수엘라 원유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미국 기업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봉쇄라고 할 수 있다. . 마두로 이후의 시나리오 '빈민의 영웅'이라 불리는 우고 차베스(Hugo Chavez) 대통령 집권(1999년 2월~2013년 3월) 당시 베네수엘라의 기세는 의기양양했다. 세계 최강국 미국에 반기를 들고 막대한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무상 복지 정책과 부(富)의 재분배를 밀어붙이던 카리스마 넘치는 열정적인 지도자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암투병 중이던 차베스는 2013년 자신의 꿈인 '베네수엘라식 사회주의'를 완성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사망하기 전 버스 운전기사이자 노조 위원장 출신으로 부통령에 오른 마두로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차베스와 마두로가 집권한 26년 동안 그들의 집권당인 통합사회주의당(PSUV)은 국회와 사법부, 선거관리위원회 등 주요 기관을 장악했다. 2024년 대선에서 마두로는 야당이 집계한 개표 결과 에드문도 곤살레스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선자로 선언되었다. 곤살레스는 출마 자격을 박탈당한 주요 야당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를 대신하여 후보로 나섰다. 미국이 세계 최대 핵추진 항공모함과 특수부대를 투입해 베네수엘라 대형 유조선을 나포한 날 민주화 운동으로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마차도는 정부의 감시를 피해 노르웨이에 도착했다. 현재 미국은 마두로의 사임과 망명, 이후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2024년 대선에 출마했던 곤살레스나 노벨평화상을 받은 마차도가 그 대안이다. 마차도는 오슬로에서 "질서 있고 평화로운 전환"을 강조하며 "군대와 경찰은 국민이 선출한 민간 정부에 복종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마두로가 요구한 '글로벌 사면'과 '군부 통제권'을 미국이 거부한 상황에서 평화적 정권 교체는 요원해 보인다. 마두로 측근들은 권력을 내려놓는 순간 국제형사재판소 등에서 인도에 반한 죄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끝까지 저항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그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엄포를 놓지만 마두로 정권의 붕괴는 쉽지 않아 보인다. 만약 미국이 군사 개입으로 마두로를 축출한다면 그 이후는 더 복잡하다. 베네수엘라 전문가들은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2019년 트럼프 행정부의 모의 전쟁 게임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마두로 이후 베네수엘라의 혼란은 오히려 미국 기업들의 진출을 방해할 수 있다. 월 최저임금이 1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국민의 80%가 빈곤층인 상황에서 물가 상승률이 700%에 달하는 경제를 재건하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다. 베네수엘라의 운명은 누가 결정하는가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전략은 마약 전쟁이라는 명분, 석유 지배권이라는 실리, 중국 견제라는 지정학이 결합된 다층적 게임이다. '트럼프 코롤러리'는 20세기 초 루스벨트의 중남미 군사 개입을 21세기에 재현하려는 시도로, 베네수엘라는 그 첫 시험대다. 하지만 역사는 외부 세력의 군사 개입이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교훈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베네수엘라의 진정한 문제는 마두로 개인이 아니라 차베스-마두로 집권기 26년 동안 고착화된 제도적 부패, 군부의 사조직화, 포퓰리즘의 유산이다. 외부에서 정권을 갈아치운다고 해서 이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베네수엘라에서 독재자를 몰아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문제는 베네수엘라 국민 자신들이 결정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인도주의적 지원과 민주적 전환을 위한 대화를 촉진할 수는 있지만 군사력으로 해결책을 강제할 수는 없다. '바람 속 촛불' 같은 베네수엘라가 또다시 강대국 정치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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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중국몽(中國夢)은 회색코뿔소를 타고온다
중국심서(中國心書) 2025 ⑪ 중국몽(中國夢)과 '중국제조 2025' 2049년은 중국에게 매우 특별한 기념비적 해이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톈안먼 성루에 올라 신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새 국가(國歌)가 울렸고 새 깃발이 게양되었다. 중국 국치(國恥)의 세기가 끝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건국 100주년인 2049년이면 중국이 모든 면에서 미국을 추월해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이자 '세계의 중심나라'라는 한자 그대로의 중국(中國)이 돌아오는 꿈과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소위 중국몽(中國夢)이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이전 패권국가였던 중국을 원형으로 간주한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 중국은 대수학과 삼각법을 포함한 수학 분야에서 선진적 발전을 이루고 나침반과 화약 같은 항해와 군사 혁신을 이끈 발명품도 내놓았다. 19세기 바야흐로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동양 지배)에 중국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때 제국주의 열강 세력으로부터 중국이 온갖 시련을 당하고 왕좌를 잃어버리게 된 큰 원인으로 삼는 게 과학기술이다. 신중국이 과학기술 자력갱생에 매진하는 이유이다. 마오쩌둥은 일치감치 1950년대부터 원자탄과 인공위성을 개발하는 양탄일성(兩彈一星)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과학기술이 진정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시기가 지금의 시진핑 집권기이다. 시진핑 시대 중국은 이미 여러 분야에서 미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에서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중국은 더 나아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에서 선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중국몽은 2012년 출범해 2022년 집권 3기에 들어간 시진핑 체제의 핵심 어젠다로 자리 잡았다. 1단계로 2021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샤오캉 사회’를 건설하고, 2단계로 2035년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건설하며, 마지막으로 건국 100주년인 2049년 경제·군사·외교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최강인 미국을 뛰어넘는 '전면적인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세계는 지금 어떤 시각으로 중국몽을 바라보고 있을까? 2015년 시진핑 국가주석은 제조업 혁신 글로벌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비전 ‘중국 제조 2025'를 내걸었다. 이 비전의 발표 당시만 해도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기술 강국이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러나 중국은 10년 사이에 ‘저가 생산 공장’에서 ‘최강의 제조 강국’으로 환골탈태 했다. 정부 주도의 공급망 생태계를 혁신하고 기술 자립도와 수출 경쟁력을 크게 높였다. 중국의 제조업 수출액은 작년도 기준 3조6000억 달러로 미국의 1조4400억 달러 대비 2.5배 정도이다. 중국과 미국의 격차가 10년 만에 3배 정도 늘어난 것이다. 중국은 전기차·로봇·드론· 배터리 등 여러 분야에서 이미 압도적으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 첨단 반도체 칩과 소프트웨어 수출 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바이오테크·반도체·양자기술 등 핵심 첨단 분야에서 약진은 연일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우주항공 분야에서는 우주정거장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달 뒷면에 세계 최초로 착륙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중국이 이처럼 기술력이 강한 제조업 강국으로 환골탈태한 비결은 뭘까? 무엇보다도 천문학적 연구개발(R&D) 투자와 과학기술 인재 육성을 꼽을 수 있다. 신한투자증권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중국 R&D 지출이 3.6조 위안(약 720조원)으로, 대한민국 1년 예산(657조원)을 웃돈다. 화웨이, 텐센트, 알리바바, BYD 등 대형 민간기업들은 R&D 투자를 선도했다. 중국 기술굴기의 또 다른 원동력은 인적 자원이다. 최상위 인재들이 의대로 몰리는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 대학의 인기학과는 전기공학·전자공학·기계·컴퓨터공학 등 공학 분야이다. 또 하나는 공산당 국가 권력의 전폭적인 지원이다. 정부와 민간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효율성과 창의성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팍스 시니카' 시대 열리나 '중국 제조 2025'로 상징되는 중국의 산업굴기에 맞서 미국은 공급망 다변화를 모색하고 대중 기술통제와 함께 미 국내로 동맹국들의 반도체 배터리 투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대표 정책인 ‘중국제조 2025'의 다음 버전을 마련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서방국가의 오해나 비판을 피하기 위해 ‘중국제조 2035’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향후 10년의 정책을 구체화하고 반도체 제조 장비 등 미래먹거리인 첨단분야 기술자립에 한 걸음 더 다가설 것으로 보인다. 최근 중국 싱크탱크인 사회과학원은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계속 낮아진다고 해도 향후 20년간 중국의 평균 성장률은 4% 후반대에 이를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는 같은 기간 미국은 평균 2.1%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보이고, 이렇게 되면 중국은 2028~ 2030년 경제규모에서 미국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 2차 대전 종전 이후 초강대국 미국은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 질서를 유지했다. 그러나 스스로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무너뜨리며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의 등장으로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25년 시간은 중국의 편일까? 과연 21세기 중반에는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 즉 팍스 시니카 시대가 열릴까? 중국에서 나오는 경제 전망 수치나 보고서들이 다소 장밋빛 전망에 치우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예측이 완전 빗나가는 경우도 드물다. 이에 비해 우리 사회에 상당히 뿌리를 내린 혐중 정서에 기댄 극우세력의 일부 주장을 보면 중국 경제가 곧 붕괴하거나 시진핑 실각설 등 공산당 체제가 혼란에 빠질 것처럼 호도하는 사례가 적지않다. 여기서 우리가 현실로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중국이 서방의 압력과 견제에도 불구하고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자신감을 계속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전혀 굴복하지 않고 지금 중국은 오히려 자유 무역을 외치고 있다. 그만큼 경제 맷집이 세진 것이다. 일부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며 일방주의에 치우치는 미국을 떠나 중국 편에 서는 현상도 중국의 전략적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지난 25년, 미국은 중국이라는 ‘호랑이’를 키운 셈이다. 공교롭게도 '중국 제조 2025'를 내세운 해인 2015년은 중국 경제가 뉴노멀(새로운 정상상태)로 접어들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즉 과거의 두 자릿수 고성장에서 7% 미만의 중속 성장으로 전환된 것이다. 어떤 경제도 7% 이상의 고성장을 영원히 지속할 수 없기에 이 전환은 불가피했다. 2019년 시 주석은 중국 경제가 당장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위험을 인정했다. 그는 수백 명의 공산당 고위 간부들에게 중국은 ‘검은 백조'와 ‘회색 코뿔소’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색 코뿔소(gray rhino)라 함은 이미 누구나가 다 문제라 인식하고 있으나 그 규모가 지나치게 큰 나머지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경제 문제를 일컫는다. 검은 백조(black swan)처럼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갑자기 발생해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는 ‘블랙 스완’과는 다른 개념이다. 중국 경제의 ‘회색 코뿔소’ 일반적으로, 중국이 키우고 있는 ‘회색 코뿔소’로 꼽히는 문제로 출산율 급락으로 인한 인구 위기, 탈동조화(미국 등 주요국과의 기술·산업·공급망에서 분리되는 현상)와 공공 부채 등이 꼽힌다. 장기적으로 저출산에 의한 급격한 인구 구조 변화는 중국 경제 성장과 활력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가통계국은 지난해 말 기준 중국 인구가 14억1175만명으로 전년 대비 85만명 줄었다고 발표했다. 경제 침체와 고용불안으로 출산과 양육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큰 젊은 층의 출산 기피 현상 심화가 인구감소로 이어진 것이다. 생산가능인구도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중국의 생산가능인구는 2011년 약 70%를 기록한 후 지속적으로 줄어들다 지난해 62%까지 내려왔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일부 지방정부 부채도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 특히 중국 국영기업은 그동안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에도 무리한 투자로 몸집을 키우면서 부채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진 상황이다. 제2금융권 등에서 이뤄져 제대로 관리가 안되는 기업대출, 소위 '그림자 금융'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정부가 잘 알고 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분야이다. 지난 5년 동안 중국은 세계 경제 성장에서 평균적으로 30% 정도의 기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경기 침체가 곧바로 세계 경제의 침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올해 들어 3분기까지 중국 경제는 장기화된 부동산 시장 침체와 내수 부진과 미국과의 무역 갈등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순항 중이다. 올해 3분기 성장률은 4.8%로 예상치에 부합하고 올해 목표치인 약 5% 달성 경로는 유지되고 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미국과의 첨예한 무역 긴장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의 수출주도 성장 모델이 과연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은 제기되고 있다. 중국 산둥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힙자다 M. 우스만 (Sahibzada M. Usman) 박사는 '모던 디플로머시' 기고문에서 "수억 명을 빈곤에서 구해낸 중국의 성장 모델은 기로에 서 있다"며 중국 경제의 과감한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가 만만찮은 도전이지만, 이를 중국 성장의 유일한 장애물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부진한 소비, 흔들리는 부동산 시장, 감소하는 외국인 투자 등이 복합적으로 경제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며 "이러한 도전을 헤쳐 나가려면 중국은 과감한 개혁을 통해 부동산 부문을 안정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기업과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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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MAGA? 美는 더이상 '영원한 제국' 아니다
반이민 정책은 자기파괴적 선택 올해 초 4년 만에 백악관에 복귀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미국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위대하고, 더 강하고, 훨씬 더 특별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이 순간부터 미국의 쇠퇴(America’s decline)는 끝났고, 미국의 황금기(The golden age of America)가 시작된다”고 호언했다. 선거 승리 수개월 전 펜실베이니아 야외 유세장에서 총기에 피습됐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일을 언급하며 “저는 하나님께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라고 살려주셨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그에게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신이 내린 명령에 가까운 소명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그의 핵심 지지층인 공화당 내 강경파와 MAGA 세력의 최우선 과제는 반이민 정책으로 보인다. 그는 취임 당일 이민 문제 해결을 명목으로 멕시코 남부 국경 지역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장벽 건설을 재개했다. 또 “미국인을 침략으로부터 보호”한다며 다수의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군 병력 투입과 함께 미등록 이민자 추방 절차에 착수했다. 미등록 이민자 추방과 군 병력 투입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일상적 공간에서의 불심검문과 단속이 광범위해졌고, 이에 맞선 대도시의 대규모 항의 시위와 주 방위군 투입이 겹치며 사회적 긴장은 상수로 굳어졌다. 현재 미국에는 1100만~1200만명의 무자격 체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 다수는 불법 월경자가 아니라 합법 입국 후 체류 기간이 만료되었거나 체류 목적이 달라진 이들이다. 행정부 내 강경파는 하루 3000명, 연간 100만명 추방 목표를 거론한다. 조지아주 현대·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급습으로 한국인 근로자 300여 명을 포함해 500명을 체포하고, 대도시에서 동시다발적 단속을 벌인 것도 ‘할당량 채우기식’ 무리수라는 비판이 나온다. 반면 농장·호텔·식당 등 저임금 노동 현장에 대한 단속은 주춤한데, 해당 분야의 인력 부족이 실물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최근에는 H-1B 전문직 비자 수수료를 현행 1000달러에서 10만 달러로 대폭 인상해 진입 장벽을 크게 높이고 있다. 외국 전문 인력 유입을 줄여 국내 일자리를 늘리고 수수료 수입을 올리겠다는 계산이지만, 빅테크와 첨단 산업을 뒷받침해온 글로벌 인재 풀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역효과가 불가피하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는 통제되지 않는 이민”이라 규정하며, 유럽을 향해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민자)의 유입을 막지 못하면 여러분 나라는 망한다”고 경고했다. 트럼프도 오늘날 미국의 번영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의 꿈에서 출발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행정부가 폭력적이며 인종주의적인 반이민 정책을 강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경 이민 정책은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MAGA 진영과 공화당 내 강경파의 정체성 이슈다. 트럼프는 무엇보다 이들을 결집시켜 민주당과 선명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구도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동시에 경기 침체와 제조업 일자리 감소의 책임을 ‘외부자’에게 전가하는 전형적 스케이프고팅(scapegoating) 전략이기도 하다. 미국의 개방적 이민정책은 저비용·고효율의 노동력,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교육 생태계, 실리콘밸리의 창업 역동성, 내수와 서비스 수요의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떠받쳐왔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나 미국은 저출산과 다인종 사회의 조정 비용이라는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출산율(2023년 1.66명)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미국에게 이민은 그 취약성을 보완하는 핵심 자원이다. 이런 맥락에서 폭력적이고 배제적인 반이민 정책은 미국 미래 성장의 토대를 스스로 허무는 자기파괴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로마 제국의 길로 가나 역사학자들은 미국과 고대 로마 제국을 자주 비교한다. 두 나라는 광대한 영토와 다민족 구성이라는 점에서 유사하고, 미국의 건국자들은 민주적 로마 공화국을 이상으로 삼아 나라를 세웠다.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는 로마의 군기에서 유래했고, 상원(Senate) 역시 로마의 원로원(Senatus)에서 명칭을 따왔다.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 밖 엘리트를 적극 포용해 시민권을 부여하고 행정·군사·정치 참여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충성심을 확보했다. 이러한 개방과 통합은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지역 갈등을 줄이며 결속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3세기 이후 정치적 혼란과 부패, 과도한 세금과 인플레이션으로 경제 기반이 무너지고 군사력이 약화되면서 로마는 쇠퇴했다. 내부적으로 계층 간 격차가 심화되며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도 붕괴되었다. 오늘의 미국이 직면한 문제는 로마 제국 붕괴를 초래한 요인들과 겹친다. 미국의 힘은 오랫동안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기반해 왔지만, 그 질서가 트럼프 재집권 이후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민주주의와 동맹의 가치를 훼손하는 즉흥적이고 위험한 정책들이 연이어 나오며 대내외적 혼란이 가중되고, 전통적으로 대통령 권력을 견제하던 의회·사법부·내부 통제 장치도 사실상 무력화되고 있다. 특히 강경 이민 정책은 인권 논란과 노동시장 불안정까지 촉발하고 있다. 대통령직을 헌법에 의해 제약되는 국가적 책무가 아니라 개인 권력의 도구로 여기는 듯한 통치는 법원과 군, 사법, 교육, 언론을 공격하는 파괴적 행정으로 이어진다. 제조업 부흥을 내세운 고율 관세와 보호무역 정책은 오히려 공급망 불안과 글로벌 무역 전쟁을 촉발해 세계 경제 질서 속 미국의 리더십을 후퇴시키고 있다. 트럼프 재집권 후 미국의 국제적 호감도는 크게 하락하고 있다. 미국이 자랑하던 소프트파워의 약화는 더 치명적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사력이나 경제력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학은 세계 인재들의 꿈의 무대였고, 할리우드와 팝음악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인재 유입의 위축과 문화적 흡인력의 감소가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군사·경제력만으로 미국의 제국적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구촌의 많은 나라들은 미국을 더 이상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이미지 훼손을 넘어, 미국 패권을 떠받쳐 온 소중한 전략적 자산을 소진시키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국제정치에서 ‘신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핵심 자산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바뀌는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태도, 국제기구와 다자 협정 탈퇴는 미국의 신뢰를 급격히 훼손했다. 이는 서로마 제국 말기 황제 교체기의 혼란을 떠올리게 한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정책과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속주와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제국은 내부 분열을 감당하지 못했다. 오늘날 나토 동맹국들은 미국이 집단방위 약속을 진정으로 지킬지 불안해하고, 아시아의 파트너들도 워싱턴의 전략적 방향성에 회의적 시선을 보낸다. 초강대국의 신뢰 붕괴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앞서 제국적 위상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요인이다. 트럼프의 가장 큰 적은 트럼프 자신 최근 기고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미국의 핵심은 1945년 이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동맹 체계를 유지해왔다는 데 있다”며 이 동맹 체계가 “미국의 경제적 가능성과 전략적 가능성을 엄청나게 증폭시켰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가디언의 국제문제 칼럼니스트 사이먼 티스달(Simon Tisdall)은 지난 4월 ‘트럼프와 같은 폭군은 항상 몰락한다’라는 칼럼에서 “트럼프는 탄핵되거나 수정헌법 25조 4항에 따라 직무불능 판정을 받지 않는 한 2029년까지 권력을 쥔다. 예스맨 부통령 JD 밴스가 오벌오피스 문지기를 자처하고, 의회가 MAGA 지지자들로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런 절차적 축출은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트럼프의 가장 큰 적은 트럼프 자신”이라며 “미국과 스스로를 구하려는 이들은 국내외에서 모든 민주적 수단을 동원해 그를 억제하고, 저지하며, 무력화하고, 퇴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가장 밝고도 큰 희망은, 오만에 빠져 허우적대는 트럼프가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라고 결론지었다. 미국은 더 이상 ‘영원한 제국’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신뢰 붕괴, 경제적 기반 약화, 인재 유입 차단, 동맹 체제의 균열, 외부 압력과 내부 혼란의 동시 발생 등은 역사 속 로마와 같은 제국의 몰락을 이끌었던 전형적 징후다. 물론 미국은 여전히 압도적 군사력과 경제 규모를 보유하며 단기간 몰락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제국의 쇠퇴는 대개 내부 균열에서 서서히 진행되다 어느 순간 급격한 전환을 맞는다. 로마 제국이 수세기 동안 약화되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붕괴로 치달았듯, 미국도 트럼프 이후의 시대를 기점으로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섰다고 기록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방향을 바꿀 수 있음을 가르친다. 트럼프가 취임사에서 약속한 ‘황금기’를 현실로 만들려면 경계와 장벽이 아니라 규범과 신뢰, 동맹과 개방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미국을 다시 매력적인 나라로, 그리고 오래 지속 가능한 초강대국으로 만드는 길일 것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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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트럼프, 달러의 심장을 겨누다
지난달 22일(이하 현지시간) 세계 금융 시장은 미국 와이오밍주의 휴양지 잭슨홀 경제정책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에 나선 제롬 파월 연준 의장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이날 시장의 예상보다 훨씬 비둘기파적인(통화 완화 선호) 발언을 내놓았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따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은 단기적일 가능성이 높은 반면, 이민 억제 정책으로 인한 고용 악화 위험은 크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연준 의장이 마침내 미국의 경기 둔화를 인정하며 '9월 금리 인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파월 의장의 발언은 미국의 대내외적 경제 상황, 특히 물가와 고용 지표를 바탕으로 깔고 있지만,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의 고유권한인 통화정책과 금융규제 정책을 직접 통제하려는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줄기찬 연준 흔들기와 친(親) 가상화폐 정책과 연계해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잭슨 레이크 로지(Jackson Lake Lodge)에서 열리는 잭슨홀 연례 경제정책 심포지엄은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캔자스시티 연준이 낚시광이었던 폴 볼커 연준 의장을 송어 낚시로 유명한 호수가 있던 잭슨홀로 초청하면서 현재의 위치에서 개최되어 왔다. 올해 잭슨홀 회의장의 분위기는 유난히 긴장감이 넘쳤던 듯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압박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잭슨홀 미팅을 앞두고 연방주택금융청이 바이든 행정부에서 임명된 최초 흑인 연준 이사인 리사 쿡을 '주택담보대출 사기' 혐의로 법무부에 수사 의뢰했다. (트럼프는 지난 25일 쿡 이사를 해임한 후 "아주 훌륭한 인물들"을 후임으로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전통 금융 vs 디지털 금융 흥미롭게도 인근 1시간 거리의 잭슨홀 포시즌 호텔에서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끈 또 다른 굵직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차남 에릭 트럼프(41) 등 가상자산업계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참가한 와이오밍 블록체인 심포지엄이다. 확대 일로의 디지털 자산 시장 투자전략과 디지털 금융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에릭 트럼프는 장남인 형 트럼프 주니어(47)와 함께 가상화폐 채굴업체 '아메리칸 비트코인'의 설립자이자 투자가로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구식이며 가상자산과 블록체인 기술이 곧 이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주장해온 인물이다. 최근 트럼프 가문은 가상자산 사업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가상자산 업계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대통령 가족이 전례 없이 대규모의 사업 확장에 나서고 있는 것은 공직자 이해충돌 논란을 제기할 뿐 아니라 미국 공공정책 결정의 객관성과 투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다. 같은 시기 잭슨홀의 두 행사는 가상자산과 전통 금융이 미래 금융의 주도권 싸움에 본격 돌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블록체인 심포지엄에 참석한 미셸 보먼 연준 부의장은 "미국은 지금 돈과 가치, 금융시스템의 구조 자체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 거대한 지각 변동의 초입에 있다"고 주장했다. 보먼은 이날 함께 블록체인 행사에 참석한 크리스토퍼 월러 연준 이사와 함께 내년 5월 임기가 끝나는 파월 의장의 후임으로 거론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점에서는, 블록체인 심포지엄이 열린 화려한 포시즌 호텔에 비해 훨씬 소박한 잭슨 레이크 로지에 모인 파월 의장을 비롯한 세계 중앙은행 관계자들과 경제학자들은 그야말로 구시대의 수호자들이며, 그가 전복시키려고 하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준 이사 해고 파월 의장은 트럼프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이후 금리 인하에 소극적이라며 전례 없는 비난과 공격을 받아왔다. 직접적인 압박이 효과가 없자, 트럼프는 전략을 바꿨다. 바로 7명의 연준 이사회 자리를 대부분 '트럼프의 사람들'로 채우는 것이다. 연준 이사회 구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꿔 금리와 금융규제 정책을 직접 통제하려는 의도이다. 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연준 이사들과 지역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들 5명을 더해 총 12명으로 구성된다. 연은 위원 12명 중에서 뉴욕 총재는 당연직이고 4명이 돌아가면서 FOMC를 구성한다. 현재 이사회에서 2명의 이사(미셸 보먼, 크리스토퍼 월러)가 트럼프가 지명한 인물로 금리 인하 정책에 동조하고 있다. 7명의 이사 중 현재 1석이 공석으로 있고 트럼프가 해임한 리사 쿡 이사에 대한 법적 정당성 공방이 현재 이어지고 있다. 만약 두 사람 모두 친(親)트럼프 인사들로 채워지게 되면 트럼프는 4명의 다수를 확보하게 된다. 이럴 경우 지역 총재들도 트럼프 정책에 우호적인 인물로 교체될 가능성이 크고, 이는 미국 경제정책 패러다임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 파월 의장의 경우, 의장 임기는 내년 5월에 끝나지만 2028년까지 이어지는 별도의 연준 이사 임기를 보유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의장 임기를 앞당겨 후임을 지명할 것으로 보인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27일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차기 연준 의장 지명 시점에 대해 "가을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도 파월 의장은 잭슨홀 미팅에서 정제된 언어로 미국 경제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강조했다. 지난달까지 5회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근거로 들었던 관세에 따른 물가 불안정성에 대해서는 "관세 인상으로 인해 일부 품목의 상품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소비자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이제 명확하게 드러났다"면서도 "합리적인 기본 시나리오는 그 효과가 상대적으로 단기적이고 일회성 변화에 그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 압력이 보다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수도 있으나 임금과 관련한 고용 시장에 하방 위험이 증가하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한 결과는 불가능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파월은 백악관의 금리 인하 압박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연준의 독립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연준 위원들은 데이터와 경제 전망, 위험 균형에 기반해 독립적으로 판단할 것"이라며 "그 원칙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연설은 예년보다 다소 방어적이고 신중한 톤이 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리사 쿡 연준 이사는 트럼프의 해고 조치가 법적인 근거가 없다며 사임을 거부하고 있다. 이번 사안이 대법원까지 갈 수 있지만, 트럼프의 쿡 해임은 연준의 미래를 극도의 불확실성으로 몰아넣고 있다. 연방법상 연준 이사는 14년 임기를 보장받으며 대통령이 임의로 해임할 수 없고, '정당한 사유'(for cause)가 있을 경우에만 해임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어떤 대통령도 이를 실제로 집행한 적은 없었다. 대통령이 연준 이사를 해임 대상으로 삼은 것은 1913년 연준 설립 이래 처음이다. 통계청장 해고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일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7월의 부진한 고용지표가 발표된 직후 이를 총괄하던 통계 책임자인 에리카 맥엔터퍼 노동통계청(BLS) 청장을 전격 해고했다. 미국의 경제통계는 전 세계 경제의 나침반 역할을 해왔다. 월가의 투자자부터 개발도상국의 정책입안자까지, 모든 경제 주체들이 미국 노동통계청의 고용지표와 인플레이션 데이터를 바탕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이번 해고 사건은 쿡 연준 이사의 해임과 더불어 단순한 인사 조치를 넘어서는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백악관은 "코로나19 이후 비정상적인 데이터 수정으로 인해 BLS의 정확성과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됐다"고 해명했지만, 시장은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실망스러운 고용지표 발표 직후 청장이 해고됐다는 '타이밍의 우연'이 너무나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현재 관심의 초점은 '데이터 조작 가능성' 그 자체보다는, 통계청의 정치적 독립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신호다. 역사는 '정부 통계 조작의 참담한 결과'를 여러 차례 보여줬다. 2004년 그리스는 유로존 가입을 위해 재정적자 수치를 조작했다고 시인했고, 이후 지속된 숫자 조작으로 2010년 경제위기 때 투자자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채권 금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결국 가혹한 긴축정책과 사회적 혼란이 뒤따랐다. 아르헨티나 역시 마찬가지다. 부정확한 통계로 인해 국제금융시장에서 '신뢰할 수 없는 국가'라는 낙인이 찍혔고, 현재까지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번 잃은 통계의 신뢰성을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이다.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에서 통계의 신뢰성 훼손은 전 지구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 만약 시장이 미국 통계청의 독립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연준의 통화정책 결정부터 글로벌 투자 흐름까지 모든 것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연준은 인플레이션 목표 달성과 경기 안정이라는 이중 과제를 수행함과 동시에, 외부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제도적 신뢰를 지켜야 하는 매우 도전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만약 정치적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연준은 데이터가 아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수 있고, 이는 시장의 신뢰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해 잭슨홀 미팅에서 감지된 미묘한 긴장감은 단순한 금리 전망을 넘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통령의 정치적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고 있는 트럼프호(號)의 각종 경제정책은 뇌관이 언제 터질지 위험천만해 보인다. 단기적인 정치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인 경제 신뢰성을 담보로 잡는 것은 결코 현명한 전략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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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트럼프 2기 6개월….경제가 그의 운명을 바꾼다
'트럼프 스톰' 트럼프 대통령의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지도 어느덧 6개월. 예상대로 1기보다 더욱 강력하고 동시다발적인 ‘트럼프 스톰’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트럼프발 '상호관세' 공세로 국제 무역 질서는 대혼란에 빠졌고 '이익이 없으면 우방도 없다'는 트럼프식 접근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전후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체제를 함께 수호해온 동맹국들과의 신뢰 관계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과연 미국 스스로 만들어낸 지금의 세계 질서를 뒤흔드는 트럼프의 속내는 무엇인가? 아마도 우리는 그 단초를 2011년 대통령 출마를 꿈꾸며 펴낸 저서 'Time to Get Tough: Making America #1 Again'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 책에서 미국이 "the greatest country the world has ever known(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이지만 "온갖 국가에 바보처럼 당하는 모습을 보며 세계의 호구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이 "물렁한 태도를 버리고 강경하게 나가면 다시 부국이 될 수 있다”며 “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큰 거래가 성사되도록 만드는 유능한 협상가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트럼프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른바 ''미치광이 이론(madman theory)'을 활용해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고 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신의 예측불허한 성격상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게 만들어 협상 상대에게서 항복이나 양보를 얻어낸다는 전략이다. 트럼프는 지난달 이란과 핵 협상을 위해 2주간 공격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세상을 믿게 만든 뒤 불과 이틀 만에 폭격을 감행했다. 그는 자신의 '말 뒤집기'와 '예측 불가능성'을 무기로 삼아 동맹국을 코너에 몰고 있다. 트럼프의 일관성 없는 관세정책을 비꼬는 신조어로 트럼프 타코(TACO)가 있다. 'Trump Always Chickens Out'의 약자로 트럼프가 강경한 협박 후 시장 불안이나 반발에 직면해 정책을 철회하거나 연기하는 패턴을 조롱하는 표현이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 4월 '해방의 날' 을 선포하며 전 세계를 상대로 부과했던 상호관세에 대해 일주일 후 90일 유예 처분 결정이 나왔다. 미 국채 금리 급등으로 금융시장이 요동치자 트럼프가 겁이 나 뒤로 물러선 것이다. 관세든 안보든 모든 것을 거래로 생각하는 트럼프의 철저한 '거래주의(transactional approach)'에 최근 일본까지 반발하면서 트럼프 1기 때 유난히도 굳건했던 미·일 동맹까지도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는 미·중 무역갈등과 중국의 군사적 팽창 속에서 한반도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철저한 사업가인 트럼프의 거래주의는 그의 환심을 얻기 위한 '글로벌 입찰 경쟁'을 유도해 미국이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하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북한 비핵화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이 복잡다단한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국제 전문가들의 지배적 의견이다. 트럼프 2기 집권 이후 예측불허의 대외정책은 전 세계를 혼란과 불안에 빠트리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 사회 내부도 결코 평온치도 않다. 급진적인 이민·세제 정책의 변화로 사회적 갈등이 표면화되고 연방정부 지출 감축과 복지 축소는 저소득·취약 계층의 불만을 폭발시키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의 밑바탕에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 현상이 있다. 지난 7월 4일 미국은 독립 250주년을 맞았다. 초창기 13개 주가 영국 군주에 저항해 독립을 쟁취했던 그 이상을 되새기며 전국 곳곳에서 축제가 열렸으나 이번에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공존했다. 트럼프 집권 이후 대통령의 권력 팽창이 민주공화국의 근본적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는 우려이다. 확대일로의 대통령 고유 권한 행사와 '정치적인 힘'은 트럼프 2기 논란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는 백악관 복귀 즉시 행정명령을 남발했다. 대통령 권력을 견제해는 의회, 사법부, 내부통제장치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있다. 그는 의회 승인 없이 이란을 공격하라는 명령까지 내리며 공화당 내부에서까지 헌법 논쟁을 촉발시켰다. 주(州) 방위군을 동원해 반(反)이민 시위에도 무력을 투입하는 등 자신이 통제하는 모든 국가 자원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함께 법무부의 독립성마저 위협당하고 있다. 대통령 관련 수사를 무마하고, 반대파를 조사·처벌하라는 식의 직접적인 대통령의 개입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인들은 점점 이런 트럼프에 둔감해지고 있다. BBC 보도에 따르면 런던정치경제대의 피터 트루보위츠 교수는 최근 "(트럼프가) 적어도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리처드 닉슨 이후 가장 중앙집권적인 정책 결정 체제를 구축하고 했다"며 "이로 인해 정책 결정이 트럼프의 성격과 우선권 그리고 기질에 더욱 의존하게 됬다"고 진단했다. 지난 5월 트럼프는 대놓고 카타르 정부로부터 보잉 757 비행기를 선물로 받았다. 최근에는 엡스타인 성 추문사건 관련 음모론이 다시 수면 위에 오르면서 지지율이 트럼프 2기 출범 후 최저치로 내려갔다. 대통령직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그의 친암호화폐정책도 미국 사회에서 다양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하버드에 대한 연방정부 지원 중단 조치는 '공공기금'이라는 명분으로 대학의 운영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로, 트럼프식 권력 사용이 민주적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현재 대통령을 견제할 의회는 명목상의 저항만 할 뿐인 상황이다.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가운데 트럼프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거나 벌벌 떨고 있기 때문이다.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 이러한 권력 집중의 상징적 결과물이 바로 지난 3일 수많은 논란과 우려 속에 공화당 주도로 상·하원을 모두 통과한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이다. 이 법안은 트럼프 2기 출범 후 자신의 가장 큰 국내 정치적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1기 때 주요 법안이 좌초되며 무력감을 맛봤던 트럼프는 이번에는 달랐다. 극소수만 반대표를 던지게 할 정도로 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사회안전망을 약화시키고, 수조 달러의 국가 재정적자를 유발할 것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독립기념일(7월 4일)을 이번 법안 처리 마감일로 내세우며 강력하게 밀어붙여 통과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정책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올해 말 종료될 예정이었던 개인 소득세율 인하,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주·지방세(SALT) 공제 한도 인상 등 광범위한 감세 조치가 영구화된다. 강경 이민책을 뒷받침할 예산도 대거 책정됐다. 국경 안보에 170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으로 미국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에 465억 달러, 구금시설 10만개 확충에 45억 달러 등이 배정됐다. 복지 삭감 조치에도 연방 적자는 2034년까지 3조3000억 달러 이상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흥미로운 점은 감세 효과는 빠르게 체감될 수 있도록 설계한 반면 논란이 큰 복지 삭감 등은 내년 선거나 2028년 이후로 본격적인 시행 시기를 미뤘다는 것이다. 이는 표심 이탈을 최소화하려는 정치적 계산으로 보인다. 공화당은 이번 법안의 조기 통과를 내년 중간선거 전략의 발판으로 여기며 '경제 성장, 소득 증대, 국가안보 강화'를 주요 메시지로 삼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부자 감세, 서민 증세'를 내세우며 복지 삭감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핵심 쟁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공화당 입장에서 '반란표'가 원천 봉쇄된 이번 법안 처리는 향후 정국에서 반드시 플러스 요인은 아니다. 당내 다양성이 실종되고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며 공화당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도 법안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코노미스트와 유고브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3%가 법안에 반대하며 지지한다는 비율은 35%에 그쳤다. 일론 머스크 등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사들도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하며 새로운 정당 창당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경제가 트럼프 운명을 바꾼다 트럼프는 지난해 높은 물가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를 등에 업고 당선되었다. 그는 “취임 첫날부터 즉시 물가를 낮추겠다”고 약속하고 관세 정책에 대해선 미국을 “지독하게 부유하게 만들 것”이고 “떠난 기업들을 다시 불러와 투자와 고용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 역시 주택 가격을 낮추고 미국 태생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1월 20일 취임식 날 백악관 성명에서도 “진정한 미국의 황금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사실 트럼프 2기 집권 이후 미국 경제는 '트럼프 스톰'에 의해 엄청난 변화가 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현재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재집권한 이후 지난 6개월간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수치상 미국 경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실업률은 4.2%로 지난 1년간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트럼프 취임 이후 인플레이션은 약간 하락했지만 지난해 9월 수준인 2.4%에 머물고 있다. 올해 1분기 경제는 소폭 위축됐으나 2분기에는 연율 약 2.5% 성장한 것으로 추정돼 상반기 전체 성장률은 1~2% 사이, 연간으로 예상되는 성장률은 약 1.4%이다. 이는 지난해(2.8%)보다 느리지만 극적인 변화라고 보기 어렵다. 실질 임금과 가계 소득은 모두 전년 대비 소폭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으나 그 속도는 다소 느려졌다. 트럼프와 참모진은 경제 상황의 답보 상태를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 탓으로 돌리며 정책 효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향후 정국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이 마주할 최대 변수는 명백히 ‘경제’일 것이다. 만약 감세와 정부지출 삭감, 그리고 대외관세 정책(트럼프는 이를 ‘3각 성장론’이라 부른다)이 단기간에 고용·경제성장·가계 실질소득 증가로 이어진다면 공화당의 선거 구도는 탄탄해질 수 있다. 반면 인플레이션 재등장, 실업률 상승, 복지 삭감으로 인한 사회적 불만이 확산된다면 '크고 아름다운 법안'은 트럼프와 공화당에 ‘아킬레스건’으로 변모할 수 있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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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네타냐후의 위험한 도박…트럼프식 외교 해법의 한계
'레드 라인'을 넘은 이란? 베냐민 '비비'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연설이나 기자회견에서 각종 소품을 활용해 이목을 집중시키는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으로 유명하다. 2012년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그는 퓨즈에 불이 붙은 폭탄을 그린 도표(diagram)를 들고 나와 청중에게 물었다. "핵폭탄을 만들려면 고농축 우라늄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리고 이란은 그 선에 얼마나 가까이 왔습니까? 자, 보여드리겠습니다." 네타냐후는 매직펜으로 이스라엘이 용납할 수 없는 우라늄 농축도 90%에 해당하는 붉은 선(red line)을 그리며 이란이 그 경계에 다가서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방 언론은 이를 '와일 E. 코요테 만화 같은 핵폭탄'이라며 조롱했지만 이 순간부터 이란 핵문제는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이란 정부는 네타냐후의 주장을 '근거 없는 연극'이라 일축하며 오히려 이스라엘에 자국의 비공개 핵무기를 해소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할 것을 촉구했다. 현재 이스라엘은 핵탄두를 80~200기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모호성 정책(Policy of Ambiguity)'을 유지하며 핵무기 보유 여부에 대해 명확히 인정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있다. 세월이 흘러 2025년, 네타냐후는 마침내 "이란이 이미 선을 넘었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은 이달 13일 전폭기를 동원해 이란 핵시설 공격에 나섰고, 이란도 보복 공격에 나서면서 5차 중동전쟁으로 확전될 위험이 고조되고 있다. 우방국 미국이 이란과 핵협상에서 이견을 좁혀가는 상황에서 감행된 이번 공격은 중동을 둘러싼 복잡한 국제 정치와 핵 비확산 체제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네타냐후의 리더십과 정치적 상황 이스라엘 역사상 최장수 총리인 네타냐후(75)는 강경 보수주의자이자 탁월한 소통 전략가로, 그의 리더십 아래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와 금융 투자가들에게 경제 선진국 지위를 확고히 인정받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 통합 측면에서는 전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지난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과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다. 대내적으로 네타냐후 정부는 우파 리쿠드당을 중심으로 극우 성향의 종교 정당, 초정통파, 민족주의 정당 등과 연정으로 겨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정부의 사법부 권한 약화 시도는 대규모 시민 시위로 이어졌고, 국론 분열과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고 있다. 지난 12일 야권이 발의한 연립정부 해산안은 가까스로 부결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네타냐후의 정치적 위기 탈출용이라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대한 초기 대응 실패도 도마에 오르며, 네타냐후 총리가 이란 핵시설 공격이라는 도발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네타냐후는 이란 핵문제와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일관된 강경책을 펼쳤다. 미국, 특히 트럼프 행정부와의 긴밀한 관계 구축과 아랍 국가들과의 수교(아브라함 협약)로 이스라엘의 외교적 지평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유럽과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의 최대 걸림돌로 비판받고 있다. 그의 '폭탄 도표' 같은 상징적 시각자료를 활용한 연설은 과장과 선동이라는 비판과 함께 이스라엘의 안보 우려를 국제적 의제로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는 평가가 공존한다. 이란의 핵 개발 현황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현재 핵탄두 9개를 제조할 수 있는 408㎏ 상당의 고농축 우라늄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주장과 달리 IAEA와 미국 정보기관은 이란이 아직 핵무기 제조 결정을 내렸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국제사회는 이란을 '잠재적 핵무장국(threshold state)'으로는 보지만 실질적 무기화 판단에는 명확한 선을 긋고 있다. 이란 정부는 자국 핵 프로그램이 평화적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2015년 체결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은 이란의 우라늄 농축 농도와 재고를 제한하고 국제적 감시체제를 확립했다. IAEA는 오랫동안 이란의 합의 이행을 공식 인정해왔으나 2018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핵합의를 탈퇴하고 경제제재와 외교적 압박을 재개하면서 상황이 변화했다. 이에 대응해 이란도 우라늄 농축 농도와 핵활동을 강화하고 국제사회의 감시를 축소했다. 현재 이란은 준무기급인 60% 농도까지 우라늄을 농축하며, 단기간에 무기급(90%) 고농축 우라늄 생산 능력을 갖춰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고농축 우라늄이 실제 핵무기로 전환됐다는 물증은 아직 없다. 이스라엘의 기드온 사르 외교장관은 21일 독일 빌트지와 인터뷰하면서 이스라엘의 이란 핵시설 공격 이후 "우리는 그들(이란)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을 최소 2~3년 지연시켰다고 평가한다"고 말했다. 포르도 연료농축시설의 전략적 중요성 이란의 포르도 연료농축시설은 2009년 국제사회에 공식 발견된 이래 논란의 중심에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런 깊숙이 매설된 핵시설을 심각하게 파괴할 수 있는 3만 파운드(1만3500㎏) 벙커버스터 폭탄이나 B-2 스텔스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란 핵 프로그램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군사력은 미국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미국에 군사적 개입을 지속적으로 촉구했다. 트럼프의 딜레마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과 중동 전쟁 개입 사이에서 고심을 거듭하다가 21일(현지시간) B-2 폭격기와 미사일을 동원해 포르도를 포함한 이란 내 핵시설 3곳을 직접 타격했다. 지난 19일 이란에 최종 시한으로 2주를 부여한 트럼프 대통령이 불과 이틀 만에 기습공격을 단행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우리는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등 이란의 3개 핵 시설에 대한 매우 성공적인 공격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특히 "폭탄의 전체 탑재량이 주요 지점인 포르도에 투하됐다"며 "이제는 평화의 시간"이고 "이란은 이제 이 전쟁을 끝내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폭스뉴스는 미국이 포르도 핵시설에 벙커버스트 6개를 투하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익명을 요구한 미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포르도에 다수의 벙커버스터가 투하됐고, 초기 피해 평가 결과 해당 시설은 무력화됐다"는 판단이 내려졌다고 전했다. 이란원자력위원회는 미국의 공습에도 핵활동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공격 결단이 "역사를 바꿀 대담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이란과 협상 가능성을 내비치던 트럼프 대통령이 갑작스레 이란을 직접 타격함에 따라 중동의 불안한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미국 대통령이 공군을 동원해 이란의 주요 시설을 타격한 것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처음이다. 특히 포르도 핵시설을 타격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희망했던 외교를 통한 해법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평가이다. 트럼프가 제시한 '2주 시한'을 이용해 유럽과 중동의 중재국들이 긴박하게 협상 테이블을 오갔지만 외교적 해법의 돌파구는 마련되지 못했다. 미국은 이란과 핵 협상에서 이란이 민간 사용 목적을 포함해 모든 핵 프로그램을 전면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이란은 민간 원자력 발전소에 사용할 수준은 허용돼야 한다고 맞섰다. 트럼프는 20일 이란에 일부 우랴늄 농축을 허용할 수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란은 세계 주요 산유국인데 "왜 민간용으로 그런 것이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지상군 파견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고 있다"며 "가장 원치 않는 것이 지상군(파병)"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핵심 지지층의 분열 미국이 이란을 직접 공격한다면 이란은 미군기지, 동맹국, 유류선박에 대한 공격과 사이버전까지 전방위적 반격을 예고했다. 이란의 대반격으로 미국이 지상군 파견까지 고려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는 미국이 과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경험한 수렁에 다시 빠질 위험성을 내포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의 이란 핵시설 공습에 대해 "이미 벼랑 끝에 내몰린 지역에서의 위험한 확전이며 국제 평화 및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우려했다. 또 "이 분쟁이 급속히 통제 불능 상태로 빠질 위험이 커지고 있다"며 "이는 민간인은 물론 해당 지역과 나아가 전 세계에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이란 군사 개입과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 내 분열이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지지자들은 해외 군사 개입에 반대하는 반면 국가안보 보수파들은 이란에 대한 강경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이 균열은 단순한 이란 문제를 넘어 트럼프의 외교 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트럼프식 외교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단기적 성과에 집중하는 그의 접근 방식은 복잡한 국제 분쟁에서 일관된 전략을 구사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더불어 동맹국을 배제한 일방적 의사 결정 스타일은 이란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앞으로 트럼프가 국내 지지층의 균열을 최소화하면서도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한다. 그의 결정은 단순히 이란 핵 문제를 넘어 앞으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과 중동 정책의 향방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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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아무리 트럼프라도 시장을 마음대로 못한다
제네바 합의 관세 전면전을 벌이던 미국과 중국이 지난 10~1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극적인 합의를 도출하면서 글로벌 금융 시장이 안정을 찾고 있다. 회담 직전까지 양국 모두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회담 결과에 대한 시장의 기대치는 크지 않았으나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63)과 허리펑 중국 국무원 부총리가 이끄는 양국 대표단은 5월 14일부터 8월 12일까지 90일간 서로에게 부과한 보복관세를 115%포인트 낮추고 이 기간 동안 무역협상을 계속하기로 했다. 미·중 관세 전쟁이 이젠 휴전이자 재협상의 숨 고르기 단계에 진입한 모습이다. 양국간 합의 자체에 의미가 있지만, 이번 회담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끈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의 부상은 미국 행정부 내 권력지형 변화의 신호탄으로 주목받고 있다. 즉,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상대방을 지나치게 강경하게 밀어붙이던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들어 동맹국과의 관계 악화와 일방적 관세 정책의 역풍 등으로 정책 노선과 내부 권력 구도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실용적이고 국제 협력을 중시하는 이들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베선트 vs 나바로 미 언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백악관은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75)의 '보호무역' 진영과 베선트 재무장관의 '공정 무역' 진영이 주도권 싸움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두 진영 모두 미 우선주의룰 전면에 내세우지만 나바로는 대규모 관세 부과와 수입 규제 등 직접적인 압박 카드를 주저하지 않는 초강경파이다. 대외 협상보다는 신속하고 단호하고 일방적 조치를 통해 단기적인 성과를 선호한다. 협상보다는 ‘먼저 조이고 나중에 풀라’는 식의 접근 방식이다.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의 평범한 경제학 교수였던 나바로 고문은 2016년 트럼프 캠페인에 합류한 이후 대중국 강경책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다. <중국에 의한 죽음(Death By China)> 등 저서를 통해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적극적으로 비판해온 나바로는 트럼프 행정부 1기부터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을 맡으며 미국의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주도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그의 조언을 바탕으로 철강, 알루미늄 등 주요 산업에 대한 관세를 도입했고, 미·중 무역전쟁의 중심에는 항상 나바로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전직 헤지펀드 매니저인 베선트 장관은 ‘공정한 조건’에서의 무역을 강조한다. 그는 일방적인 고율 관세 부과 대신, 미국에 불리한 무역관행(지재권 침해·보조금 등)을 겨냥해 상대국과의 협상과 합의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로벌 공급망 안정과 동맹과의 협조, 국제 신뢰의 유지 등도 배려하며 정책을 펼치는 그 노선을 두고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비교적 ‘온건하고 실용적’으로 평가하는 인물이다. 그는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후 40년에 걸쳐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은 국제금융통이다. 특히 통화와 채권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아온 그는 60개국 이상을 방문하며 국제 지도자들과 중앙은행 관계자들과 폭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해왔다. 소로스 펀드의 창립자 조지 소로스의 최측근으로 일하다가 2015년에는 글로벌 매크로 투자에 중점을 둔 헤지펀드 '키 스퀘어 캐피털 매니지먼트'를 설립해 CEO와 CIO를 겸임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그를 재무장관에 지명하면서 내년 미국 건국 250주년을 앞두고 "세계 최고의 경제, 혁신과 기업가 중심지, 자본의 목적지로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하고 동시에 미국 달러를 세계 기축 통화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황금기를 여는 걸 도와줄 것이다"라고 기대감을 표명했다. 미 언론은 베선트 장관이 트럼프 행정부 입각 후 한때 '핵심' 의사결정할 때 소외돼 그의 입지가 약한 것으로 보였지만 '실세'로 꼽혔던 인물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어른의 축'으로 위상을 키우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는 정부효율부 수장을 맡고 있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국세청장 인선을 두고 벌인 알력 다툼에서 승리했다. 머스크는 트럼프 행정부가 재무장관을 인선할 당시 베선트 장관 지명에 공개적으로 반대해온 인물이다. 이어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을 총괄하는 피터 나바로 고문을 제치고 상호관세 유예 결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전해지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실세'로 부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 제네바 합의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90일간 잠정 유예 조치이지만, 그동안 '치킨 게임'으로 치닫던 양국간 무역 갈등이 크게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세계 주식시장은 급반등 했다. 베선트 장관은 회담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양국 대표단이 어느 쪽도 '디커플링'을 원하지 않고 앞으로 몇 주 안에 더 큰 합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했다. 외신들은 세계 금융시장의 투심을 안정시킨 요소의 하나로 강경론자인 나바로의 역할이 축소되고 대신 합리적인 무역정책을 주장하는 베선트 재무장관이 무역 협상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를 “어른이 방에 들어왔다”고 평가했다. 즉, 충동적이고 단기 성과에 집중했던 이전과 달리,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합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해방의날 vs 국채투매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둘러싼 금융시장의 혼란은 그가 지난 4월 2일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을 선포하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무차별 관세를 선포한 이후 극대화 되었다. 미국은 모든 교역국에 10% 기본 관세를 적용하고 중국 (34%), 대만(32%), EU (20%), 인도(26%), 일본 (24%), 한국(25%) 영국(10%) 등 주요 무역 상대 57개국에 추가로 상호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글로벌 주식시장은 큰 폭으로 하락하며 투자가들의 불안감을 반영했다. 특히 최고의 안전자산인 10년물 미국 국채의 투매로 채권시장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통해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를 해결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미 국채시장에서 투자가들이 돈을 대거 빼가며 미 금리를 상승시키고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위상을 크게 흔드는 거센 역풍이 몰려 온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트럼프였지만, 금융시장은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미 국채 금리의 급등과 달러화의 강세 등 시장의 자율적 움직임이 현실화되며,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비판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금융시장이 심각하게 요동치자, 베선트 재무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9일 백악관으로 급히 들어갔다.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면담 약속도 없이 서둘러 백악관으로 달려간 이유는 이날 아침 트럼프 주위를 맴돌며 온건 정책을 차단해온 나바로 고문이 백악관의 다른 장소에서 케빈 해셋 경제고문과 만남이 예정됐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베선트와 러트닉 장관이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설득한 결과, 대중국 관세는 145%까지 대폭 올라가고 대신 다른 국가들의 상호관세는 90일간 전격 보류되었다. 베선트 장관이 나바로 고문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트럼프를 만나 상호관세 보류를 이끌어 낸 이후 전 세계 금융시장은 안정세로 돌아섰다. 미 정치 전문 일간지 폴리티코는 트럼프가 '해방의 날'을 선포하고 금융시장이 대혼란을 겪은 후 강경파인 나바로의 역할이 축소되고 베선트 장관이 옹호해 온 '공정 무역 (fair trade)' 정책으로의 전환이 힘을 얻고 있다고 보도했다. 백악관 대변인은 나바로 고문이 여전히 “무역 논의에 매우 깊이 관여 중”이며 “모든 인사가 한 팀으로 일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으나, 사실상 베선트가 정책의 리더십을 쥔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 백악관 인사들은 나바로가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지만, 실질적인 정책 결정권이나 내부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바로의 역할 축소가 트럼프 행정부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이르다. 여전히 '미국 우선주의'는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기조이며, 대중 견제 정책의 큰 틀은 유지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당분간 극단적 보호무역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으로의 전환이 예상된다. 그렇지만 트럼프 특유의 ‘혼란-진정’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트럼프는 종종 일부러 혼란을 유발해 외부 혼선과 내부 파워게임을 동시에 관리하는 타입이다. 이번 베선트의 부상 역시 급박한 경제상황과 대외 신뢰 위기 속, 신속한 의사결정과 혼선 최소화를 위해 필연적으로 이뤄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관세 정책의 역풍으로 미국 경제 성장이 흔들리자 제롬 파월 연준 의장에게 금리인하를 요구하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파월을 '미스터 투 레이트 (Mr Too Late)"라며 당장 금리인하를 하지 않으면 해임을 추진하겠다고 시사했다. 이에 투자가들은 미국 자산 투매로 대응했다. 이후 달러화 인덱스는 한때 3년 만에 최저선인 99를 밑돌기도 했다. 베선트 재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변동성이 커진 국제금융 시장의 주된 소통창구이자, 대통령과 행정부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현재까지 영국과의 관세협상을 마무리하고 일본, 한국, 인도 등 주요 교역국들과의 협상을 진행 중이다. 이 시점에서,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처럼, “어른이 방에 들어온” 무역정책 변화만으로도 시장에는 긍정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파워 게임이 어떤 변화를 보일지는 예상하기 힘들다. 상황에 따라 행정부 내 강경파가 온건파를 다시 누르고 주도권을 쥘 수 있다. 23일 갑자기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협상이 난항인 EU에 대해 50% 관세 부과를 위협한 것도 행정부 내 강경파의 목소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은 그 누구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이다. 트럼프가 아무리 통제불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다 해도 시장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시장은 ‘정치인의 꿈’이 아니라 ‘투자자의 이성’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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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의 월드비전] 100년 전 대공황의 유령이 깨어난다
'광란의 20년대'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 독감 유행이 잦아들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종료된 후 약 10년 정도 미국이 누렸던 풍요와 번영의 시대를 일컫는다.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초토화시켰다. 미국은 유럽에 식량과 군수 물자를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공산품을 대규모로 수출하며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비약적으로 성장한 산업은 대규모의 고용을 창출하고 자동차가 중산층에 대대적으로 보급되며 미국에서는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전쟁과 팬데믹으로 그간 억눌렸던 소비와 쾌락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했다.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9% 이상을 유지하며 중산층과 신흥 부유층이 크게 늘어났다. 자유분방한 재즈 음악과 현란한 춤, 그리고 사치와 향락의 문화가 극에 이른 시대였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했고 도덕적 퇴폐가 만연했던 당시의 시대상은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원작 소설 '위대한 개츠비'(1925)와 이를 바탕으로 재창작된 여려 편의 영화와 뮤지컬에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당시 미국은 제조업 황금기로 전 세계 생산능력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특히 컨베이너 벨트에 의한 대량생산 체제 구축으로 미국은 세계 자동차의 80%를 생산했다. 자동차뿐 아니라 세탁기, 냉장고, 청소기, 라디오 등 과거에는 사치품이었던 제품들이 미국 가정에 널리 보급되었다. 저금리와 감세 정책으로 풍부한 유동성은 기업과 투자가들을 뉴욕증권거래소로 몰리게 했다. 투기 열풍으로 다우지수는 1921년 8월부터 1929년 정점이던 8월까지 466% 수익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식의 광풍은 다가오고 있는 대공황의 그림자를 인지하지 못했다. 1929년에 들어서자 미국 경제는 겉으로는 호황으로 보였지만 자동차·가전·건축·철강 분야는 이미 과잉생산 상태였다. 때마침 농산물 가격도 폭락하며 농민들의 구매력 감소가 전반적인 소비 위축으로 이어졌다. 주식시장의 거품은 어느새 종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20년대 주가 폭등의 이면에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들이 널려 있었다. 우선, 투기적 거래의 만연에도 자유방임주의 체체하의 미 정부는 이를 그대로 방치했다. 투자금의 10배까지 대출해주는 은행들의 무분별한 신용 공여로 '마진 거래'(증거금 거래)가 급증했다. 소득 불평등 문제도 심각했다. 상위 5%가 전체 저축의 3분의 1을 보유하는 극심한 부의 편중은 실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았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드디어 거품이 터졌다. 주식시장은 곤두박질쳤고, 10월 29일 '검은 화요일'에는 하루 만에 160억 달러의 시장가치가 증발했다. 이는 당시 미국 연방정부의 1년 예산을 웃도는 규모였다. 월스트리트의 증권맨들은 건물에서 투신했고, 수많은 투자자들이 하루아침에 파산했다. 월가의 대폭락(Wall Street Crash of 1929)을 계기로 광란의 20년대는 막을 내리고 미증유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은 시작된다. 미국의 대공황은 단일 국가의 위기를 넘어 전 세계 경제를 깊은 수렁 속에 빠지게 했다. 주식시장 폭락은 전면적인 실물경제 위기로 발전했다. 은행 시스템 붕괴 조짐에도 미국 정부는 낙관론에 기대어 머뭇거리다 금융시장 개입의 골든 타임을 놓쳤다. 1929년부터 1933년 사이 미국에서 약 9000개 은행이 파산했다. 예금자들의 뱅크런으로 통화량은 급격히 감소하고 미 경제는 심각한 경기 침체로 빠지게 된다. 디플레이션의 악순환 속에서 물가는 계속 하락했고, 이는 다시 기업의 수익성 악화와 대량 해고로 이어졌다. 1933년 실직자는 약 1200만명에 이르러 실업률은 25%까지 치솟았다. 미국은 대공황 초기인 1930년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2만여 개의 수입품목에 대해 평균 40%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는 스무트 홀리 관세법안을 제정했다. 발의를 담당한 오리건주의 공화당 하원의원 윌리스 홀리(Willis Hawely)와 유타주의 공화당 상원의원 리드 스무트(Reed Smoot)의 이름을 딴 이 법안은 지금까지도 보호무역주의를 상징하는 수식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발효 즉시 영국 등 미국과 교역하는 다른 나라들이 대규모 보복관세로 대응했다. 그 결과 1933년까지 국제 교역량이 65% 이상 감소했다. 스무트 홀리 관세법과 대공황 그렇다고 스무트 홀리 관세법이 대공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대공황의 시발점인 주식 대폭락은 스무트 홀리 관세 제정 이전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은 국제 무역전쟁을 촉발하고 미국 내 수입품 가격 상승과 이로 인한 소비자 구매력 감소로 나타났다. 국제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세계 경제의 블록화와 경제적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즉 대공황 초기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장기화된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발 경제위기는 보호무역주의 확대와 당시 금본위제의 경직성으로 인해 전 세계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대공황의 긴 터널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신뢰는 뿌리째 흔들렸다. 1933년 취임한 프랭크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새로운 경제정책, 즉 뉴딜(New Deal)을 통한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으로 대공황의 늪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금본위제도 중단을 통해 금의 유출을 막아 통화 안정과 유동성을 확보하고, 금융시장의 널뛰기를 방지하기 위한 제동장치인 증권법도 통과시켰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 등 수많은 국토 개발 사업을 국가가 주도해 소득과 일자리를 창출했다. 하지만 미국을 대공황의 경제위기에서 진정 벗어나게 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발발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방비 지출을 늘리기 위한 대규모 재정 확대가 유효 수요를 창출했고, 파병과 군수 산업 호황으로 실업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새로운 국제 무역질서 구축에 나섰다. 1930년대 각국이 채택했던 보호무역주의와 근린궁핍화 정책은 세계 경제를 침체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토대로 전후 국제 경제 질서는 자유무역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달러화는 세계 기축통화로 등장했다. 1947 GATT(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가 창설되어 다자간 무역 자유화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 체제는 국제 무역량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개발도상국들의 수출 주도형 경제모델이 등장했고 국제 분업이 심화되며 생산성도 크개 향상되었다. GATT는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로 발전하며 더욱 포괄적인 다자간 무역 체제로 진화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랜 기간 미국이 주도한 자유국제시장질서는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해체되고 있다. 올해 1월 트럼프 2기 출범과 함께 국내 산업 보호와 제조업 부활을 내세우며 관세전쟁을 벌이고 있다. 1930년대처럼 상대 국가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은 지난 16일 시카고 경제클럽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미국 경제에 장기적인 경제적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경제가 성장 둔화, 실업률 상승, 인플레이션 가속화라는 악순환에 빠져 지난 반세기 동안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준은 고용을 최대로 유지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둔화하면 물가도 낮아지고 실업률이 올라가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지만, 관세는 물가와 실업률을 둘 다 높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파월 의장의 인식이다. 트럼프는 파월이 자신의 요구대로 기준금리를 인하하기는커녕 관세 정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를 경고하자 112년 연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중도 해임’ 카드까지 꺼내 보이고 있다. 2018년 연준 의장에 취임한 파월의 임기(연임 가능)는 내년 5월까지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을 중도에 해임하면 법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글로벌 금융시장은 수습 불가능의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참모들의 조언도 듣고 있다고 미국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 기간 1930년대 대공황과 같은 끔찍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2일 상호 관세 발표 이후 주가가 폭락하고 국채 금리가 급등하며 금융시장이 '발작'하자 트럼프는 일단 중국을 제외하고 관세 협상을 요청한 국가들과 협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90일간 상호관세를 유예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가 지금 대공황 직전? 경제위기의 주기와 사례를 분석한 '경제병리학'(2024) 저자이자 'IMF 위기를 예측한 경제학자'로 알려진 최용식 21세기경제학연구소 소장은 최근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미국의 자충수로 전 세계가 지금 대공황 직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주식시장이 심각한 거품 상태라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미국에서 주식 투자하는 가구가 60%를 넘는다. 이는 대공황 때 비율보다 높다는 것이다. 둘째는 미국 경제는 전 세계 경제 규모에서 4분의 1밖에 안 되는데 시가총액은 4분의3으로 경제 규모에 비해 시가총액이 세 배나 더 크다. 이는 일본이 1980년대 말 거품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을 때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테슬라나 엔비디아 같은 미국 주식의 주가 수익률이 100배를 넘는 게 많고 심지어 600배를 넘는 등 거품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것이다. 넷째는 미국 소득 상위계층 10%가 주식 총액의 무려 93%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소득과 국부가 소득 최상위 계층으로 더욱 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소득과 국부가 최상위 계층으로 집중되면 유효수요가 낮아지고 그렇게 되면 경기 침체가 반드시 찾아오고,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 금융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과거 역사를 보면 글로벌 경제위기는 국제적 협력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미 패권의 붕괴를 우려하는 트럼프는 전 세계를 상대로 미치광이 전략으로 대하고 있다. 그의 경제정책은 미래지향적이 아닌 19세기적 산업관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지속된 미국 제조업의 쇠퇴는 단순한 무역 불균형 때문이 아닌 자동화와 글로벌 경쟁 심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 미국 일자리의 80%는 현재 서비스 산업에 집중되어 있는 현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AI 혁명 시대이다. 세계경제포럼이 지적한 바와 같이 미래 일자리는 AI 등 기술 혁신 분야에서 창출될 전망이다. 게다가 오바마 행정부에서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낸 제이슨 퍼먼이 지적했듯이 트럼프 취임 후 지난 3개월간 전통 우방국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미국을 '세계 어느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만들었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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