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베네수엘라, 이란 다음은 쿠바? — 카리브해의 마지막 도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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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사진: 라울 카스트로 전 쿠바 대통령이 2025년 5월 1일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메이데이 집회를 지켜보고 있다. 2025년 5월 1일 촬영. 로이터/연합] 

 

정전 속 일상, 무너지는 시민들의 삶

수일 전 쿠바 수도 아바나의 한 건물 관리인이 CNN 지국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다급해 보였지만 부탁은 단순했다. '미제국주의의 공격'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건물 대피 계획을 세워야 하니 기자들이 그 상황에서도 정상 출근할 예정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CNN 등 외신이 전하는 오늘날 쿠바의 서민들의 일상은 참담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정전으로 냉장고 속 음식은 쉽게 상하고, 병원에는 기본적인 의약품조차 부족하다. 화장실에서는 휴지 한 장 구하기 어렵고, 로비 한쪽에는 아무도 치울 여력이 없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5월이 되도록 그대로 서 있다. 그런 가운데 정부는 시민들에게 전쟁 상황에 대비한 비상 배낭을 준비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국제 정치의 거대한 대립과 공방이 이어지는 사이 정작 섬 안의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최근 미국의 석유 봉쇄로 쿠바의 에너지 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연료 부족으로 발전기를 돌리지 못해 정전이 반복되고, 쓰레기 수거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거리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간다. 발전기를 돌릴 연료가 없어 전기가 끊기면 건물 전체가 순식간에 암흑 속에 잠긴다.

아바나에서 냄비를 두드리며 정전 항의 시위를 벌이던 한 여성은 최근 CNN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절반이 죽더라도, 나머지 절반이라도 평화 속에 살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 그 말은 결연한 의지처럼 들리기도 했고, 동시에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절망의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격렬했던 시위의 흔적은 오래 두드려 움푹 파인 강철 냄비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난 5년 사이 이미 2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쿠바를 탈출했다. 그러나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노후한 화력발전과 부족한 전력에 의존한 채 불안정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쿠바 정부는 시민들에게 ‘인도주의적 군사 공격 대비 가이드’를 배포하고 군사 훈련 영상도 공개했다. 영상에는 소들이 오래된 소련제 대공포를 끌고 이동하는 장면까지 담겨 있었다. 이는 현재 쿠바 군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병들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소련제 무기를 들고 훈련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는 여전하지만 방어 수단은 너무 낡아버린 나라 쿠바는 지금 미국의 거대한 압박과 마주하고 있다.

 왜 하필 지금인가: 트럼프의 '먼로 독트린' 재발동

미국과 쿠바의 갈등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해 1월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기습 체포해 미국으로 압송한 이후 더욱 격화된 상황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압박 대상으로 쿠바를 거론하며 군사적 정권 교체 가능성까지 시사한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쿠바를 겨냥한 데는 단순한 이념적 반감 이상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현재 쿠바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약해져 있으며, 미국 입장에서는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최적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마두로 정권은 하루 수만 배럴의 원유를 쿠바에 무상에 가깝게 공급하며 쿠바의 든든한 핏줄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마두로 정권이 축출된 이후 이 공급선이 끊기자 쿠바 경제는 사실상 자유낙하 상태에 빠졌다. 

여기에 쐐기를 박듯 트럼프 행정부는 쿠바에 대한 '에너지 봉쇄'를 공식 선언하고, 쿠바에 원유를 공급하는 제3국의 기업들까지 추가 제재하겠다며 압박했다.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던 멕시코 등 주변국들이 원유 공급을 줄이자 쿠바의 에너지 비축량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취재진 앞에서 거침없이 쿠바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쿠바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릴 것으로 확신한다. 해방하든 차지하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지금 그들은 매우 약해진 상태다."

이어 플로리다 마이애미 행사에서는 베네수엘라와 이란에서의 군사작전 성과를 과시하며 "나는 이 위대한 군대를 건설했다. 다음은 쿠바"라고 못 박았다. 심지어 이란에서 복귀하는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를 쿠바 해안 고작 100야드 앞에 배치하기만 해도 "그들은 즉시 항복할 것"이라며 구체적인 군사 시나리오까지 흘렸다.

미국은 쿠바가 섬 내부에 중국과 러시아의 도청 기지를 허용하고 있으며, 러시아군의 카리브해 진출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강한 의혹을 품고 있다. 지난주 존 랫클리프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미합중국(USA) 문양이 선명한 공식 전용기를 타고 아바나를 비공개 방문해 경제와 안보 현안을 논의했다. 그는 쿠바 측에 중·러 청음시설 철거와 미국 이익 저해 행위 중단을 거칠게 요구했다. 특히 미국 측은 쿠바가 서반구에서 미국의 적대 세력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력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이냐 협상이냐

그러나 트럼프의 행보가 오직 강경 일변도인 것만은 아니다. 베네수엘라와 이란에서 보여주었던 패턴, 즉 '극한의 압박 후 대화 시도'라는 특유의 양면전술이 쿠바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쿠바는 실패한 국가이며 몰락하고 있다"고 맹비난하면서도 동시에 "쿠바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니 우리는 대화할 것"이라며 협상의 여지를 남겼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 역시 지난 7일 워싱턴 정상회담 후 "트럼프가 쿠바를 실제로 침공할 계획은 없다고 직접 말했다"고 전했다. 쿠바 정부 또한 미국이 제안한 1억 달러 규모의 인도주의적 지원책에 대해 "경청할 의향이 있다"며 한발 물러선 상태다.

문제는 서로가 생각하는 '조건'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미국은 미켈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의 사임, 정치범 석방, 다당제 선거 도입, 언론과 노동조합의 자유 보장 등 체제 전반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쿠바 측은 "정치 체제나 헌법 질서는 결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과거 오바마 행정부와의 국교 정상화 당시 쿠바가 고수했던 전략, 즉 '경제는 열되 정치는 통제한다'는 경계선을 사수하려는 것이다.

지정학 전문가들은 실제 전쟁보다는 외교적 타결 가능성을 조금 더 높게 점친다. 쿠바는 지형적으로 게릴라전에 매우 유리할 뿐만 아니라 인구의 상당수가 오랜 기간 무장 저항 훈련을 받아왔다. 비록 소련제 구식 장비일지라도 미국을 상대로 뼈아픈 소모전을 강요할 역량이 있다는 뜻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쿠바군은 인력 동원력과 조직력이 탁월해 미국으로서도 지상전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자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가장 큰 변수는 중동 정세다. 이란 상황이 완전히 종결되는 순간 중동으로 집중되었던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이 다시 서반구의 쿠바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20일 쿠바 독립기념일을 극도의 긴장감 속에 주목하는 이유다.

 라울 카스트로 기소,  협상 테이블을 폭파할 시한폭탄

외교적 협상이나 군사 침공보다 훨씬 더 즉각적이고 치명적인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휘발성 높은 변수가 존재한다. 바로 쿠바의 실권자이자 쿠바 혁명 지도자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로 꼽히는 라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에 대한 미국 연방 검찰의 기소 추진 소식이다.

존 랫클리프 미국 CIA 국장이 아바나를 떠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주요 외신들이 소식통들을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미 법무부는 1996년 쿠바 공군이 미국 망명자 단체의 민간 항공기를 격추해 4명을 숨지게 한 사건의 배후로 라울 카스트로를 지목하고 기소를 검토 중이다.

올해 95세인 라울 카스트로는 비록 공식 직함을 넘겨주고 거동이 불편한 상태지만 여전히 쿠바 군부와 권력의 핵심을 통제하는 실질적 수장이다. 만약 미국이 그의 기소를 강행한다면 이는 단순한 사법 조치로 끝나지 않는다. 쿠바는 즉각 협상 테이블을 걷어찰 것이며, 이미 쿠바의 여러 관리들은 "그 순간 협상은 끝이고 오직 군사적 충돌만 남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즉 카스트로에 대한 기소는 협상의 카드가 아니라 전쟁의 방아쇠가 될 확률이 높다.

미국 국내 정치 상황도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마이애미의 쿠바 망명자 사회와 격추 사건 피해자 가족들은 이번 기소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특히 쿠바계 이민자의 아들이자 강경파인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공산주의자보다 더 나쁜 것은 무능한 공산주의자"라며 쿠바 정권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어 국내 정치적 결단이 외교적 파국으로 이어질 위험을 고조시키고 있다.

고립된 섬과 침묵하는 세계

쿠바 위기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중재자를 자처하며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미국을 직접 저지할 실질적인 카드는 없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압박을 비판하지만 철저히 자국의 실리 계산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권들은 베네수엘라 마두로 생포 사건 이후 다음 표적이 자신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으나 미국의 독주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결국 역사는 잔인하게 반복된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에서 쿠바를 '해방'시킨 후 수십 년간 내정을 지배했고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은 그 지배를 뒤집었다. 그리고 60년이 넘는 봉쇄와 대립, 오바마 시절의 짧은 해빙기를 거쳐 쿠바는 다시 거대한 분기점에 섰다.

트럼프의 전략은 명확하다. 서반구에서 반미 정권들을 차례로 무력화해 현대판 '먼로 독트린'을 완성하는 것이며 쿠바는 그 구도의 마지막 도미노다. 그러나 쿠바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60년을 버텨온 내성이 있고 전 국민이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이 거대한 지정학적 체스판의 말판 위에 실제 '사람들의 삶'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썩어가는 냉장고, 약이 없는 병원, 암흑 속에서 냄비를 두드리는 서민들. 그들에게 "다음은 쿠바"라는 미국의 선언은 세련된 외교 수사가 아니다. 오늘 밤 불이 들어올지, 내일 아침 아이에게 빵을 먹일 수 있을지를 가르는 가혹한 현실이다.

쿠바의 결말이 어떻게 쓰이든, 그 잔인한 대가를 가장 무겁게 치러야 할 이들은 권력자들이 아닌 지금도 어둠 속에서 마른 냄비를 두드리고 있는 바로 그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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