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다우닝가에 입성한 '북부의 왕', 그는 영국을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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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7일 영국 켄트주 그레이브젠드 -영국 노동당의 당수로 선출된 앤디 버넘이 당수 취임 후 첫 공식 일정을 마친 뒤, 그레이브젠드 타운 피어(Gravesend Town Pier)를 떠나고 있다. 로이터/연합] 


10년 사이 총리 7명 

2016년 EU(유럽연합)를 떠날까 말까 논쟁으로 보수당 내 집안싸움이 극심해지자 당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그럼 국민에게 직접 묻자"며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자신은 'EU에 남자'는 쪽이었고 승리도 자신했다. 그러나 투표 후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떠나자'가 승리했다. 자신이 고안한 투표에 자기가 당한 케머런은 다음 날 사임했다. 브렉시트(Brexit) 투표 실시 이후 10년, 영국은 이번 주 일곱 번째 총리를 맞이하게 된다.       

영국은 지금 다시 활력을 되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경제는 부진하고, 공공서비스는 한계에 다다랐으며,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은 지난 수십 년간 거의 멈춰 섰다. 정치적 불안정은 이제 일상이 되었고 국민들의 분위기 역시 침체돼 있다.

캐머런의 사퇴로 시작된 총리 회전문은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낵, 키어 스타머를 거쳐 이제 앤디 버넘에게 이어진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총리는 '안정'을 약속했지만 브렉시트의 후유증과 코로나19 팬데믹, 생활비 위기,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이라는 파도는 누구도 잠재우지 못했다. 지난달  전격 사임한 스타머 역시 2024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잦은 정책 철회와 국정 비전 부재, 인사 오판 속에 지지율이 급락했고 지방선거에서 영국개혁당에마저 밀리며 결국 1년여 만에 자리를 내놓았다.


노동당이 차기 지도자로 낙점한 인물은 '북부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앤디 버넘(56)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치인이 아니다. 리버풀 교외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언론계를 거쳐 2001년 서른한 살 나이로 하원에 진출했다. 이후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정부에서 재무부 수석 부장관, 문화·미디어·체육부 장관, 보건장관을 지내며 중앙정부 요직을 두루 경험했다. 그러나 2010년과 2015년 두 차례 당대표 경선에 도전했다가 모두 낙마했고, 2017년에는 아예 하원의원직을 내려놓고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례적인 선택을 했다. 중앙 정치의 실패자가 지방 행정가로 변신해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북부의 왕'이 만들어진 순간들

버넘이 전국적 인지도를 얻은 결정적 계기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당시 보리스 존슨 정부가 맨체스터 지역에 강력한 봉쇄 조치를 내리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재정 지원은 인색하게 책정하자 버넘은 런던 중앙정부를 향해 정면으로 맞섰다. 런던의 결정이 북부 노동자들 생계를 희생시키려 한다는 그의 항변은 카메라 앞에서의 격정적인 연설과 함께 전국에 방송됐고,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북부의 왕(King of the North)'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해프닝이 아니라 그가 이후 줄곧 밀고 나갈 정치적 정체성의 원형이 됐다. 잉글랜드 북부와 남동부 수도권 간 뿌리 깊은 경제·정치적 불균형, 그리고 그 불균형에 대한 북부 시민들의 소외감을 대변하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다.

시장으로서 실적도 그 이미지를 뒷받침했다. 그는 버스 노선을 민간에서 공공 소유 체제로 되돌리고 단일 요금을 2파운드로 묶는 등 대중교통 개혁을 밀어붙였고, 전국 평균을 웃도는 지역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달 메이커필드 보궐선거에서 극우 성향인 영국개혁당 후보를 큰 격차로 꺾으며 정치적 경쟁력을 입증한 것도 결정적이었다. 노동당 내부는 스타머 체제가 흔들리자 빠르게 버넘을 대안으로 낙점했고, 그는 결국 단독 후보로 당대표 경선에 나서 소속 하원의원 403명 가운데 379명의 지지를 얻어 선출됐다. 지방정치를 떠난 지 불과 한 달 만에 총리 관저 입성을 눈앞에 둔, 영국 정치사에서도 보기 드문 초스피드 귀환이다.

좌우 어느 쪽도 아닌 '맨체스터리즘'

버넘의 정치적 위치는 노동당 내에서 흥미로운 좌표를 그린다. 그는 중도 실용주의를 표방했던 스타머보다는 왼쪽에 서 있지만 강경 좌파로 분류됐던 제러미 코빈 전 대표보다는 오른쪽, 즉 '온건 좌파'로 평가받는다. 그는 지난주 취임 연설에서 노동당이 좌파 성향인 녹색당보다 더 급진적일 필요도, 우익 영국개혁당 논리를 따라갈 필요도 없으며 과거처럼 보수당 정책을 모방하지도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전임자인 스타머가 카리스마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과 달리 버넘은 타고난 소통 능력을 지녔다는 평가다. 편안한 분위기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능력이 뛰어나며, 친근하고 유머 감각도 있다. 이른바 '아빠 농담(dad jokes)'을 즐기는 스타일이고, 격식을 차리되 지나치게 딱딱하지 않은 복장 덕분에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간다.

그는 또 스스로를 "확실하게 친기업적인 지도자"로 규정하며 맨체스터 시장 시절의 친기업 행보를 총리직에서도 이어가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버넘의 정치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이른바 '맨체스터리즘(Manchesterism)'이다. 기업 활동을 존중하고 협력하되 주택·상하수도·에너지·교통 같은 필수 인프라에 대해서는 공공 통제를 강화하고, 그 권한을 중앙정부가 아닌 지역 공동체로 대폭 이양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그는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정부 시절 정치 권력은 중앙집권화하면서 경제 권력, 즉 필수재에 대한 통제권은 민영화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규정한다. 그 결과 국민은 더 높은 비용을 떠안았고, 부와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됐다는 주장을 펼친다. 

과거 총리들과 무엇이 다른가

역대 영국 총리들도 지역 불균형 해소를 외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데이비드 캐머런은 '노던 파워하우스' 정책으로 훗날 버넘이 맡게 될 광역시장 제도의 틀을 만들었고, 보리스 존슨은 '레벨링 업'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러나 두 정책 모두 상징적 구호에 그쳤을 뿐이며 재무부를 비롯한 중앙정부 부처들은 지방 재정의 취약성과 책임성 부재를 이유로 실질적인 예산 통제권을 끝내 내놓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에 자치의회가 설치된 지 30년이 다 됐지만 세 지역 모두 실질적인 조세·차입 권한이 없는 탓에 1990년대 후반 이후 영국 내 지역별 경제성장률 순위에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버넘은 중앙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이력에 더해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 경험 덕분에 지방이 실제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다른 총리들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버넘이 9년 동안 이끌었던 그레이터맨체스터의 경제성장률은 영국 평균 대비 약 두 배에 달했다. 그는 맨체스터에 총리실 기능 일부를 이전하는 '넘버 10 노스' 구상까지 내놓았다. 단순한 상징적 조치가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와 화이트홀 중심인 통치 구조 자체를 재설계하겠다는 선언이다. 즉 영국의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 개혁을 통해 영국의 고질적인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구상이 실제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지는 별개 문제다. 영국은 선진 민주국가 가운데서도 가장 중앙집권적인 재정 구조를 가진 나라로 꼽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영국에서 지방정부가 직접 징수하는 세수 비중은 전체 중 6% 안팎에 불과해 프랑스의 20%나 독일·미국의 절반 수준에도 크게 못 미친다. 전문가들은 이 낮은 재정 자율성이 영국의 지역 격차를 유럽 내에서도 유독 심각한 수준, 심지어 동·서독이나 이탈리아 남북 격차보다도 크게 만든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버넘에게 주어진 시간과 과제

버넘에게 주어진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다음 총선까지 최대 3년, 어쩌면 그보다 짧을 수도 있는 시간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이미 걸려 있다. 지역 불균형 해소는 본질적으로 장기 과제인데, 유권자들은 이미 여러 차례 변화를 약속하고 지키지 못한 총리들을 냉정하게 심판해 온 전례가 있다. 취임 초기 시험대로 거론되는 사안 중 하나가 북해 석유·가스 개발 문제다. 노동당은 2024년 총선에서 신규 시추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공약했지만 기존 해상 시설에 파이프라인을 연결해 사실상 새 유전을 개발하는 '타이백' 방식이 공약 위반 없이도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버넘이 취임 직후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기후 진영과 에너지 안보 진영 양쪽에서 평가받을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당내 결속 역시 관건이다. 버넘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당원을 징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스타머 시절의 경직된 통제 문화와 선을 그었고, 다우닝가 특유의 비공식 언론 브리핑을 통한 정치 공작 문화를 끝내겠다고도 공언했다. 이는 스타머 체제 말기 노동당 내부에서 터져 나온 불만, 즉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의사결정 문화에 대한 반성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정적들 사이에서 그가 입장을 자주 바꾼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온 점, 그리고 냉혹한 권력 설계자라는 상반된 평판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은 그의 리더십 스타일에 대한 불확실성을 남긴다.

실험이자 도박

앤디 버넘의 총리 취임은 영국 정치에 던지는 하나의 실험이다. 웨스트민스터 엘리트 코스가 아니라 지방 행정 현장에서 검증된 인물을 국정의 정점에 세움으로써 브렉시트 이후 반복돼 온 '중앙정치 실패→새 얼굴 등장→다시 실패'라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그가 내세우는 지방분권과 친기업 노선의 결합은 이념적으로는 신선하지만 정작 그것을 뒷받침할 영국의 재정 구조와 행정 역량은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눈앞의 현실이다. 리시 수낵 전 총리가 최근 한 기고에서 지적했듯이 버넘이 '지방분권 총리'로 남고 싶어해도 현실은 국제 정세, 경기 침체, 재정 압박 같은 다른 문제들을 끊임없이 그의 책상에 올려놓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다른 총리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은 있다. 캐머런에서 스타머까지 이어진 여섯 명의 총리는 모두 위기에 떠밀려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과정에서 영국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계속 깎여 나갔다. 버넘은 이 흐름 속에서 처음으로 '중앙에서 실패한 뒤 지방에서 검증받고 돌아온' 이력을 가진 총리다. 그의 성패는 결국 구호가 아니라 웨스트민스터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권한과 재원을 내려놓을 용의가 있는지, 그리고 지역 정부들이 그 권한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달려 있다. '북부의 왕'이 다우닝가의 주인이 된 지금, 그 답은 앞으로 3년 안에 드러날 것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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