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 호주국립대학 박사
-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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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소프트 파워 시대 인도네시아 한국어 열풍
몇 달 전 인도네시아와 이웃한 동티모르(Timor-Leste)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 선생님과 대화하던 중, 학생들의 가장 큰 꿈이 한국에 가서 일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2002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이후 뚜렷한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한 동티모르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한 희망이었다. 동티모르에서 만난 한국인을 통해 한국 취업과 관련된 흥미로운 소식을 접했다. 매년 몇 만명의 청년이 한국 취업을 원하지만, 동티모르에 배정된 약 1500명의 산업연수생 쿼터조차 채우지 못할 정도로 소수만이 취업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한국어가 지목되었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일할 자격을 얻기 위한 첫 관문은 한국어이다. 고용허가제 틀 속에서 한국어 능력시험(EPS-TOPIK) 통과는 필수 요건으로 자리 잡았는데, 2000년대에 도입된 이 제도의 목적은 외국인 노동자의 한국 적응을 돕고 산업재해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일하려는 외국인에게 기본적인 한국어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 무리한 일이 아니다. 미국 취업을 원하는 이에게 영어를 배우라고 조언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율적 학습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조건은 일종의 취업 장벽으로 여겨질 수 있다. 통계 자료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2023년 자료를 보면, 약 1만3000명의 동티모르 사람이 한국어 시험에 응시해 약 1700명만이 통과했다. 합격률이 15%로, 동티모르 청년들에게 한국어 능력을 선망의 대상으로 만들 만큼 어려운 시험이었다. 동티모르의 이웃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상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2023년 약 3만8000명이 한국어 능력시험에 응시해서 2만3000여 명이 합격했다. 이 시험이 치러진 16개 국가 중 미얀마에 이어 둘째로 높은 합격률이었다. 동티모르와 유사한 언어적 배경을 공유함에도, 인도네시아에서 나타난 높은 합격률은 한국어 관련 교육 인프라 차이에서 비롯된 듯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어 학습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제도적으로는 제2외국어 과목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가 증가했으며, 한국어 강좌를 개설한 대학도 꾸준히 늘어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설 학원의 확산이다. 자카르타에만 백여 개의 한국어 학원이 있다는 보도가 있을 정도다. 한류에 빠져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도 있지만, 이보다 더욱 주요한 학습 대상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서 일하려는 현지인이다. 매년 수만명에 이르는 이들은 한국어 학원의 든든한 배후로 작용한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 학원은 주요 사업 아이템으로 부상했고, 상당한 규모의 한국어 교습자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의 높은 인기를 떠올리다 보면, ‘문화제국주의’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이 개념은 학계에서 최근 거의 활용되지 않지만, 2000년대를 전후해서는 자주 이용되었다. 이 용어는 정치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국가가 문화적으로도 지배력을 행사해 그 패권을 유지하려는 방식을 설명한다. 탈식민지 시대 이후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문화제국주의의 하위 영역으로 언어, 특히 영어가 자주 언급된다. 영어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비영어권 화자에게 언어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불평등한 상황을 영어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불평등을 형성하고 고착화한 데에는 영국문화원, IMF, 세계은행과 같은 기관의 적극적인 영어 확산 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어 제국주의의 결과, 영어 교육을 매개로 한 대규모 경제적 이익을 영국과 미국 같은 영어권 국가들이 얻어왔다는 주장 역시 제기된다. 세계 여러 곳에서 영어에 대한 선호가 확산하여 있음은 부정될 수 없지만, 이를 영어 제국주의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어왔다. 무엇보다, 영어에 대한 선호가 개인의 필요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영어에 대한 선호가 개인적 선택의 결과일 뿐, 제국주의가 내포하는 강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언어 제국주의 논쟁을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어 위상에 대입해 볼 수 있다. 한국어에 대한 수요와 한국어 교육 기관의 확대는 한국에서 일하려는 현지인의 필요에 기인한 것이다. 한류에 대한 열광이 한국어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현상 역시 한국 정부나 관련 단체의 한국어 확산 정책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어 열풍을 언어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와 유사한 욕망이 표출된 사례가 있었다. 약 10년 전, 우리 사회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이후 초중등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했던 한글 수출이 그것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인도네시아 술라웨시(Sulawesi)섬 변방에 거주하는 찌아찌아(Cia-Cia)족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의 언어를 표기하는 수단으로 한글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은 훈민정음학회 임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찌아찌아어가 한국어 발음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들은 현지어를 한글로 표기하자는 제안을 던졌다. 찌아찌아족이 속한 지방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자 한글 수출의 길이 열렸다. 마을 표지판에 한글을 병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초등학교 수업에 한글 교육이 추가되었다. 비록 한글 표기 작업이 더이상 진척되지 않았지만, 이 소식은 국내에 알려져 큰 화제를 모았다. 찌아찌아의 한글 도입이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으로 해석됨에 따라, 우리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찌아찌아의 한글 도입은 그들의 거주지뿐만 아니라 인근 도시 바우바우(Bau-Bau)에도 큰 혜택을 가져왔다. 한국인의 방문이 이어졌고, 여러 한국 단체와 기업, 중앙정부 및 지자체가 다양한 지원을 약속했다. 인도네시아 변방에 있던 바우바우시는 한국과의 문화 교류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방문했던 바우바우시의 중고등학교에는 한국에서 지원받은 전자제품이 창고 가득 쌓여 있었고, 학생들은 한국과의 교류를 기대하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찌아찌아의 한글 도입은 명확한 실체가 없는 하나의 해프닝 정도라 평가될 수 있다. 우리를 흥분시켰던 한글 도입은 지속되지 않았고, 지방 정부와 체결한 양해각서도 유야무야한 약속으로 남았다. 찌아찌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사라졌고, 한국의 지원이 축소됨에 따라 현지인들도 이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상황을 고려하면, 한글 수출은 애초에 해프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찌아찌아의 한글 도입은 한국의 지자체가 한글 외에 영어를 공식 표기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정책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언어 정책이 중앙정부의 권한이고, 국민 정서상 외국어 병기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은 인도네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찌아찌아의 적극적 태도는 바우바우 시장의 정치적 필요에 기인한 것으로, 지방 정부 조례와 같은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없이 진행된 일회성 정책에 불과했다. 찌아찌아로의 한글 수출은 우리의 집단적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이 사건이 우리의 언어 제국주의적 욕망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다.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던 우리에게, 언어를 통한 제국주의적 팽창은 꿈꾸어볼 만한 희망이었고, 이는 찌아찌아로의 한글 수출의 의미를 객관적이고 균형 있게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찌아찌아의 한글 도입과 비교할 때, 인도네시아의 한국어 열풍은 성격이 다르다. 무엇보다 그것은 한국어를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 현지인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외부의 강제와는 무관하다. 한국에서 혹은 인도네시아 내의 한국 기업에서 일하기 위해, 한류 콘텐츠를 한국어로 즐기기 위해, 한국인과 교류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려는 인도네시아인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에 대한 수요도 확대된 것이다. 최근 국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주 쓰는 표현은 ‘소프트 파워’(soft power), 즉 강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다. 대중문화를 넘어서서 한국어와 한글이 소프트 파워의 한 축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문화제국주의적 정책이 아닌 현지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한국에 관한 관심과 필요가 핵심적이다. 다시 말해, 우리 경제가 더욱 발전하고, 우리 정치가 더욱 민주화되고, 우리 사회가 더욱 다원화되고, 우리 문화가 더욱 창의적으로 발현될 때, 한국어를 포함한 우리 문화의 세계적 확산은 가속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인도네시아, 나아가 동남아시아에서 K-문학 확산의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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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공급자 중심 시각에 소외받는 디지털 문맹
지난 10여 년 동안 디지털화는 인도네시아 사회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우리 사회도 비슷한 추세를 보였지만, 인도네시아의 변화는 그 속도와 규모 면에서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혁명적이었다. 2010년대 초 인도네시아의 인터넷 이용자는 전체 인구의 10%에 불과했으나 2020년대 초에는 그 비율이 80%에 이르렀다. 디지털 세계에 새로 진입한 인구 규모뿐만 아니라 이들의 인터넷 활용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2023년 인도네시아 사람의 하루 평균 인터넷 이용 시간은 7시간 38분으로, 우리의 5시간 19분보다 2시간 이상 길었다. 2010년대 후반 이후, 특히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거치며 저렴해진 인터넷 접근 비용은 디지털화를 가속했다. 10만원 내외의 비용으로 중국산 저가폰을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저소득층 역시 부담 없이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 통신기업의 독점으로 인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던 데이터 가격 역시 정부의 강력한 규제 덕분에 급격히 낮아졌다. 최근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3000원 정도로 8GB의 데이터를 구매할 수 있었음을 보면 데이터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재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디지털화는 삶의 모든 영역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측면은 사람들 간 연결성의 향상이다. 디지털화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유선전화 보급률이 10% 미만이었을 정도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전화 이용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SNS 사용이 일상화되고 이를 통해 통화가 가능해지면서 이전에 연결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네트워크에 편입되었다. 디지털을 통한 연결성 확대는 새로운 경제 활동을 촉진했다. 그중 가장 주목받은 부문은 스마트폰으로 오토바이나 승용차를 호출해 이용하는 승차공유 서비스였다. 토착 기업 고젝(Gojek)은 다국적 기업 우버(Uber)의 인도네시아 시장 진입을 저지할 정도로 성공적인 사업을 운용하며, 인도네시아의 첫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했다. 고젝의 특징적 사업 전략 중 하나는 다양한 영역으로의 서비스 확장이었는데 한때 음식 배달, 마트 구매 대행, 택배, 마사지사와 청소업자 중개 등 10개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고젝은 최근 2조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며 인도네시아 제1의 디지털 기업으로서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고젝 사업을 뒷받침한 또 다른 변화는 핀테크의 급속한 확장이었다. 201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신용카드 사용자가 6%에 불과해 이커머스를 뒷받침할 생태계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력한 핀테크 지원 정책이 추진되면서 수십 개의 핀테크 업체가 출현했다. 2016년부터 2022년 사이 핀테크 거래는 매년 32% 성장했고, 이용자도 20%씩 증가했다. 특히 코로나 기간 중 정부 주도의 QR코드 결제 방식이 보급되면서 대다수 소매점에서 QR 결제가 가능해졌고 디지털 인프라가 더욱 공고해졌다. 한 달 전 인도네시아 방문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디지털화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접한 상황은 입국 비자 신청 때였다. 공항에 도착해 긴 줄을 서야만 받을 수 있었던 도착 비자를 이제는 인터넷으로 신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 국내선 철도 역시 스마트폰 앱을 통해 예약이 가능해졌다. 이민청 직원과의 실랑이나 철도 역사에서의 긴 줄은 내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인도네시아의 모습이었는데, 디지털화는 이를 단번에 바꾸어 놓았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후 디지털화의 영향을 더욱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공항에서 고젝 앱으로 승용차를 부를 수 있게 되면서 요금을 둘러싼 택시 운전사와의 흥정, 먼 길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과거의 추억이 되었다. 자정이 지나 도착한 호텔에서는 룸서비스를 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고젝 앱을 켜자 수십 개의 음식 배달 옵션이 나타났고, 주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배달되었다. 며칠을 현지에서 지내면서 디지털화가 먼저 시작된 우리나라와 별 차이 없는 편리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3차 산업혁명 이후 오랫동안 존속해왔던 선진국과 인도네시아 사이의 넘을 수 없던 격차가 4차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축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디지털화가 가져온 긍정적 변화를 느끼고 이용하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그 이면에 있는 어두운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실마리를 제공한 사건은 호텔에서 벌어졌다. 내가 묵던 곳은 비즈니스급 호텔이었는데 객실에는 전화기 대신 태블릿이 비치되어 있었다. 처음 객실에 들어섰을 때 이 태블릿을 보며 인도네시아 서비스 업계의 빠른 디지털 전환 속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호텔 프런트에 연락할 일이 생겼다. 태블릿의 첫 화면에는 QR코드를 스캔한 후 “구글, 프런트에 연결해 줘”라고 영어로 말하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설명에 따라 스캔하고, 스마트폰을 향해 프런트에 연락해 달라고 말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내 영어 발음이 나빠서 구글이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또박또박 다시 말해봤다. 몇 차례 시도했지만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하게 되자 짜증이 몰려왔다. 그러나 상황을 해결할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10여 분간 태블릿과 씨름한 끝에 결국 선택한 해결책은 프런트에 직접 찾아가는 것이었다. 복도를 걸어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디지털 리터러시가 부족한 나 자신이 문제인 듯도 했고, 전화기를 없애버려 불편을 초래한 호텔이 문제인 듯도 했다. 디지털화의 문제점을 더욱 명확하게 인지하게 된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철도청 앱을 통해 기차를 예약한 후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출발 날짜를 잘못 선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예약을 취소하고 환불을 받고자 앱을 살펴보았지만 관련 버튼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디지털 활용에 익숙하지 않은 나 자신을 탓해야 하는 순간이 다시 온 듯했다. 주의 깊게 앱을 살펴보아도 환불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직관적으로 문제 해결 방식을 찾는 대신 작은 글씨로 쓰인 글을 읽기 시작했고 마침내 환불 규정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앱에는 환불 기능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차역을 직접 방문해야 했다. 우리의 코레일 앱에 비견될 정도로 사용자 친화적으로 만들어진 인도네시아 철도청 앱에 환불 기능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술적 문제로 치부될 수 없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일정한 의도성이 개입되어 있음이 확실했다. 즉, 환불을 어렵게 만들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자 귀찮음을 무릅쓰고라도 이 문제를 파헤쳐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기차역 창구에서 예매 취소 사실을 알리고 환불을 요청하자 역무원은 흔쾌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그가 건넨 서류를 창구 한 귀퉁이에 서서 채워나갔다. 환불이라는 행위와 비교해보면 과도할 정도로 큰 노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서류를 제출하자 역무원은 빈칸을 지적하며 이를 채우도록 요구했다. 환불받을 계좌 정보였다. 그러나 현지 은행 계좌가 없는 나로서는 이는 채우고 싶어도 채울 수 없는 항목이었다. 사정을 말하자 그는 전자 지갑을 언급했지만 이 역시 계좌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외국인임을 뻔히 알면서도 규정을 읊어대는 역무원의 태도가 곱게 비칠 리 없었다. 하소연하듯 시작한 내 말은 점점 공격적으로 변했고, 목소리 톤 역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자 내가 소란을 마다하지 않는 외국인임을 인식하게 된 역무원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현금 환불 가능성을 알아볼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창구 뒤편 보이지 않는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돌아온 그는 25%에 달하는 수수료를 공제한 현금을 내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현금 환불이 나를 불쌍히 여겨 그가 제공해 준 호의이며, 앞으로는 앱 사용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환불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현지어를 구사하고 현지 상황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는 훨씬 더 괴롭고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지난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외국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데 디지털화가 시작되기 전 인도네시아의 모습은 이를 예시한다. 인도네시아 공공기관의 민원 처리 방식은 거의 전적으로 공급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민원인에게 여러 서류를 제출하게 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함으로써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현지인들은 담당자에게 호의를 구걸하듯 요청하거나, 인맥을 이용하거나, 급행료를 내야만 민원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환불 과정 하나만으로 전체를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이 경험은 공급자 중심의 편의주의적 경향이 디지털화 방향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앱의 구성이 사용자보다 공급자의 이익과 편의에 맞춰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조금 더 확대하면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인도네시아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이 디지털 세계에 적용되고 있다는 해석을 도출할 수 있다. 일반인을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이들 위에 군림하려는 경향이 디지털 환경에서도 일정한 변형을 거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수 없으면 서비스를 이용하지 말라는 식의 접근은 비단 인도네시아만의 상황이 아니며 우리를 포함한 다른 국가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디지털 격차를 무시하고 소외 집단에 대한 배려를 간과한 결과이며 공급자 중심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찾을 수 있던 이러한 모습은 권위주의적 성격의 정부를 상기시켜 주었다. 디지털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그 활용 방식은 사회의 민주화 정도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음을 인도네시아 사례는 보여주었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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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할랄 인증…득일까 독일까
인도네시아 농촌에서 조사할 때였다. 모스크에서 마을 젊은이들과 한담을 나누던 중, 한 친구가 논에서 잡은 뱀장어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를 듣던 다른 친구가 종교적으로 허용된 음식에 뱀장어가 포함되는지를 묻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친구는 뱀장어가 뱀과 비슷하고, 뱀이 종교적으로 금지된 음식임을 지적하며 질문의 배경을 설명했다.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상황은 쉽게 종료되었겠지만, 당시는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기 훨씬 전이었다. 한동안 논의가 이어진 후, 이웃 마을에 사는 이슬람 지도자에게 이 문제를 확인해보기로 하면서 대화는 끝이 났다. 며칠 후 그 자리에 있던 친구가 답을 전해주었다. 생김새나 행동은 비슷해 보이지만, 뱀과 달리 아가미를 가진 뱀장어는 어류에 속하기에 식용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끌었던 사실은 젊은이들이 보인 태도였다. 외부인에게는 별것 아닐 수 있을 문제에 관해 말하면서 이들은 상당히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을 취했다. 뱀장어 이야기를 처음 꺼낸 친구는 일시적이었지만 죄를 지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처신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뱀장어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종교 교리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동식물의 활용은 특정한 규칙을 따르도록 정해 있는데, 우리에게도 조금은 친숙해진 아랍어 표현인 할랄(halal)은 종교적으로 허용된 대상을, 하람(haram)은 금지된 대상을 일컫는다. 돼지고기와 술은 금지된 범주에 속하는 대표적인 대상이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으로, 모든 동물이 할랄과 하람이라는 틀 내에서 평가되며, 금기시되는 동물 역시 상당수에 이른다. 개, 고양이, 사자, 원숭이, 뱀, 개구리, 쥐, 개미, 전갈, 독수리 등은 금지된 동물의 예이다. 특정 동물을 먹지 않도록 하는 규정에 추가하여 재료 준비 과정에도 일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허용된 동물이 살아 있을 때 도축해야 하고, 도축 역시 정해진 방식에 맞추어 진행해야 하는데, 이를 위반할 때 할랄 재료로 인정받지 못한다. 음식과 관련된 포괄적 규칙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Quran)에 기반을 두지만, 특정 동물의 허용·금지 여부는 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에 기초한다. 이로 인해 이슬람 학파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는데, 담배를 예로 들면, 해석에 따라 때로 금지 대상으로, 때로 주의 대상으로 규정된다. 음식 금기가 존재하기에, 이슬람 교리를 철저히 지키려 하는 무슬림에게 있어 동물 성분이 함유된 음식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대상이다. 일상적으로 접해 온 음식은 큰 문제가 있지 않겠지만, 뱀장어 사례와 같이 그 허용 여부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새로 접하는 음식에 대해서는 할랄 여부에 대해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무슬림의 식생활이 힘들고 복잡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견 타당한 지적이지만, 현실의 일부만을 부각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는 사전 인지 여부를 중시하는 교리 해석 때문이다. 즉, 금지된 음식임을 알지 못한 채 먹는다면, 종교적 죄를 범한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무슬림은 조심스럽게 음식을 선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긴장 상태로 음식물에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 사회에서 인도네시아 무슬림은 음식 소비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생활할 수 있었다. 돼지고기 회피 정도가 일상에서 지켜지는 금기였고 다른 음식과 관련해서는 개인적 선택이 중시되었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과 별 차이 없이 이루어지던 이들의 식생활은 1990년대를 전후하여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사람이 즐겨 먹는 면 요리의 재료인 완자에 돼지고기 성분이 섞여 있다는 보도가 대중적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믿고 먹던 음식에 금지된 성분이 포함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졌다. 이에 정부는 식음료의 성분을 검사하는 기관 설립을 약속했는데, 이것이 할랄 법제화의 시발점이었다. 할랄 여부를 검증하는 기관은 주요 이슬람 단체 지도자들이 구성한 연합체 산하에 만들어졌지만,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음으로써 반관반민의 성격을 띠었다. 설립 후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었던 이 기관은 2000년대에 접어들어 할랄 인증제 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행하기 시작했다. 할랄 인증기관의 위상을 강화했던 요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금지된 성분이 포함된 음식 재료 관련 보도였다. 소규모 상인이나 식당에서 금지된 재료를 사용했다는 보도가 언론을 통해 꾸준히 기사화되었고, 드물지만 외국 기업 제품 역시 위반 대상에 포함되기까지 했다. 일본의 조미료 제품인 아지노모토는 돼지고기 성분 검출로 인해 대규모 항의와 불매의 대상이 되었으며, 병행 수입된 한국산 라면이 할랄을 어겼다는 소문이 돌아, 한국산 라면 전체가 소매점 매대에서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할랄 규정을 위반했다는 보도가 나올 때마다, 먹거리의 안전성에 대한 무슬림 대중의 경각심은 배가되었다. 이는 할랄 식품 보장을 위한 정부의 강력한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졌고, 그 최종 결과물로 2014년 할랄제품보장법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할랄 문제를 체계적으로 관리, 대응, 처벌하려는 목적을 가진 할랄제품보장법은 무슬림이 다수를 구성하는 국가에서 제정된 첫 번째 통합 법안이었다. 전통적으로 이들 국가 대다수에서는 할랄 문제를 민간의 자율에 맡기는 경향을 보였고, 말레이시아와 같이 정부가 강하게 관여하는 곳에서도 기존 식품 관련 규정을 통해 규제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국가법을 제정하여 할랄 문제에 대처하려 한 인도네시아의 시도는 유례없는 행보라 평가될 수 있다. 참고할 만한 선례 없이 야심 차게 시작했기 때문에, 할랄제품보장법에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무엇보다 이 법의 대상이 되는 제품에 대한 정의를 식료품, 화장품, 의약품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유통되는 모든 상품으로 확대했다. 가죽 제품을 예로 들면, 가죽 소파나 가죽점퍼처럼 가죽을 주재료로 쓰는 제품에 더해 가죽이 극히 일부 사용된 제품 역시 인증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이처럼 과도할 정도로 포괄적인 규정으로 인해 5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 후 2019년 법안이 제대로 발효될 수 있으리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수천만명에 달하는 소상공인의 제품이나 소규모 식당에 할랄 인증을 제공할 인프라 구축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2019년이 다가오자 할랄제품보장법을 시행할 환경이 구축되지 않았음에 다수가 공감했고, 법안 시행은 유예되었다. 이후 법안의 실행 가능성을 높일 몇몇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식물성 재료만을 사용하거나 화학 제품의 경우 할랄 인증이 면제되었고, 제품에 따라 시행 시기가 조정되었다. 식품의 경우 2024년 10월로 그 시기가 정해졌고, 화장품과 의약품은 2024년부터 1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추진하리라 결정되었다. 할랄제품보장법 시행을 5개월여 앞둔 지난 5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중소기업 제품을 대상으로 한 법 적용을 또다시 2년 연기했다. 제품에 대한 자가 검증을 허용하고, 등록 비용을 무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당한 중소기업이 할랄 인증을 획득하지 않았다는 현실을 수용한 것이다. 그 대신 정부는 대기업 제품을 대상으로 한 인증 정책은 계획대로 올 10월에 시작하리라 엄포를 놓았지만, 중소기업 제품에 대한 유예는 법 적용이 엄격하게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예상할 수 있도록 한다. 법안 집행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고 판단될 때 인도네시아 정부는 보통 그 시행을 유예한다. 이러한 유연한 법 적용은 일반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법안 자체의 철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할랄제품보장법이 2년 후는 아닐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시행될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에게 있어 할랄 인증제는 비관세 무역장벽의 좋은 예이다. 인증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상당한 비용과 시간뿐 아니라 행정력이 요구되며, 인증이 불가능한 제품이라면 인도네시아 시장 진입이 어렵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K-푸드의 위상이 높아져 가는 상황에서, 할랄 인증은 이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럼에도 종교에 기반을 둔 장벽을 받아들이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가 존재한다. 무엇보다, 할랄 인증은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무슬림이 다수를 구성하는 국가에도 향후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전 세계 인구의 24%, 대략 19억명이 무슬림임을 고려해보면, 할랄 인증 포기는 잠재력 높은 시장에서 철수하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고려할 측면은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 충족이 기업의 책무로서 더욱더 중시되는 최근 상황이다. 안전한 먹거리의 주요 기준으로 종교가 이용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럼에도, 무슬림이 소비자의 일원이 되었을 때, 이들의 입장을 존중하려는 노력은 기업의 책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관련 기관의 노력을 통해 국내에서도 할랄 인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추가적 비용, 시간, 행정력의 투입은 여전히 요구되지만, 무슬림 소비자의 입장을 고려하고 이에 대처하려고 노력할 때, 이는 무슬림 소비자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어 K-푸드의 글로벌 확산을 위한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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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Story] 인도네시아선, 가방끈 길면 이름도 길다
문서에 쓰인 인도네시아 사람 이름을 보면 그 사람의 교육 배경을 알 수 있다. 이름 앞뒤로 개인의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부가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라면 보통 ‘교수, 박사, 이름, 학사, 석사’ 등 5가지 정보가 포함된다. 이름에 부가된 정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인의 학위뿐 아니라 전공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정부에서 전공 표기 방식을 표준화하여 정했기 때문이다. 처음 20~30개로 시작한 전공 표기 약자는 이후 전공 세분화 추이를 반영하여 100개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학부에서 인류학을 전공했다면 학사를 의미하는 S와 인류학을 의미하는 Ant가 합쳐져 S.Ant.라는 학위명을 쓴다. 산림학 분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면 석사를 의미하는 M과 산림학을 가리키는 Hut가 합쳐져 M.Hut.라는 학위명을 사용한다. 이름과 학위를 함께 적는 관행이 일반적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뿌리 깊게 일상에 파고들었는지를 최근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친구에게서 은행 통장 사본을 받았을 때였다. 통장에 쓰인 예금주를 보자. 이름 뒤에 그 친구의 석사와 박사 학위명이 첨가되어 있었다. 이는 통장을 개설할 때조차 예금주의 학력을 묻고 적어야 함을 의미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같이 쓰인 문서를 보면 학력 병기의 효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은 여러 학위가 추가되어 길게 표기되지만, 다른 사람은 이름만으로 짧게 소개하고 끝나버리는 상황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이름을 통한 구별 짓기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공식적 자리에서 개인을 소개할 때도 이름에 더해 학력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학력은 개인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핵심 기제로 기능하게 된다. 이름에 학력을 병기하는 관행은 인도네시아 사람의 학력 선호를 반영한다. 대학 졸업자가 많지 않던 상황에서 높은 학력은 높은 사회적 지위로 전환되었고, 높은 사회적 평가를 뒷받침하는 자산으로 활용되었다. 인도네시아 농촌에서 조사할 때 나 역시 학력 선호의 이점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대졸자조차 많지 않은 상황에서, 박사 과정이라는 학력은 높은 가치재로 인정되었다. 공식적 성격의 모임에 초대받으면 학사와 석사 학위에 더해 박사 후보라는 공인되지 않는 학력과 함께 소개되었고, 상석에 자리하도록 요청되는 황송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 모두 학력 선호가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고학력자에 대한 높은 평가가 당연시되는 환경에서 조사하면서 가졌던 의문 중 하나는 학력의 중요성과 달리 그것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뿐 아니라 자녀에게 학업을 독려하는 학부모를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농촌이라는 조사지 배경을 고려하면 일견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녀를 대학에 보낼 경제적 능력을 갖춘 가정에서조차 자녀 교육에 크게 신경 쓰는 경우를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고학력을 좋아하지만 이를 얻고자 애쓰지 않는 모습은 자녀 교육에 올인하는 우리 현실과 대비되어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에 대해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학 진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모습은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내가 만난 초·중·고교 학생은 방과 후 시간을 여유 있게 보내는 데 익숙했고,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학부모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대 후반부터 변화의 흐름을 조금씩 감지할 수 있었다. 자녀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학부모를 접할 수 있었고, 대학 교육을 당연시하며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 역시 많아진 듯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경제적으로 본다면 2010년을 전후하여 인도네시아가 꾸준하게 5%대 성장을 이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급속한 소득 증가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시기를 거치며 고학력에 대한 선호가 실천으로 이어진 양상은 통계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10%에 불과하던 대학진학률은 2017년 20%, 2022년 30%로 수직 상승했다. 이는 대학생 수 증가를 초래해서 2010년 300만여 명이던 대학생은 2017년 690만명으로, 2022년에는 930만명으로 늘어났다. 고등교육 이수자가 급증했지만, 15세 이상 인구에서 대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2010년 6%에서 2022년 10%로 올랐을 뿐이다. 우리는 1985년 10%에 머물던 대졸자 비중이 2000년 24%, 2022년 53%로 꾸준히 증가했음을 고려해보면 인도네시아의 고등교육 확대는 아직 시작 단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학력자에게 높은 사회적 지위가 부여되고, 교육에 대한 투자가 점점 더 당연시되는 현재 상황을 고려해보면 고등교육의 팽창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되리라 예상된다. 대학 진학자 증가는 인도네시아 사회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먼저 거론할 점은 고등교육 공급자인 대학과 관련된다. 교육 수요 확대는 고등교육기관 증가를 낳았다. 2012년 476개였던 종합대학은 2022년 785개로 증가했으며 단과대학, 전문대학 등을 포함한 전체 고등교육기관은 3100여 개에서 4500여 개로 늘어났다. 가히 고등교육의 전성기가 도래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확장세에도 불구하고, 고등교육기관의 성장이 대학생 수 증가를 밑도는 추이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격차는 기존 고등교육기관의 거대화를 통해 채워지는 경향을 보였다. 내 경험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알고 지내던 사립대학 교수의 학교에서 2010년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방문한 캠퍼스에서 왜인지 활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 교수는 원인 중 하나로 학생 수 감소를 들었다. 신입생이 1000명 이하로 줄어들면서 학교 운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나 그 학교를 다시 방문했을 때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캠퍼스 곳곳에는 새로운 건물이 건축되고 있었고, 인근 부지에 새로운 캠퍼스를 추가로 조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급속한 학생 수 확대에 뒷받침되어서 한때 1000명에도 미치지 못하던 신입생은 10여 년 만에 7000~8000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대학 진학자와 졸업생 증가가 가져온 또 다른 변화는 고학력자의 성향을 갖춘 젊은 세대의 급격한 팽창이다. 대졸자와 대졸 이하 학력 보유자의 차이는 인터넷 이용률을 통해 예시될 수 있다. 최근 자료를 보면 대졸자의 인터넷 이용률은 85%에 이르렀지만 고졸자는 65%, 중졸자는 30%, 중졸 이하는 20%였다. 이 자료는 학력에 따라 삶의 지향과 목표, 행동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학력에 따른 지향과 행동 차이는 ‘월드 밸류 서베이’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과 비교할 때 대졸자는 국내외 뉴스를 훨씬 많이 소비하고 유통했으며, 새로운 기술 변화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일과 관련해서도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대졸자에게서는 일하지 않으면 게을러진다거나 휴식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는 노동관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대졸자의 행동과 가치관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고등교육의 팽창이 인도네시아 사회를 변화시킬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요인임을 시사한다. 독립 직후 7000만명으로 세계 7위에 랭크됐던 인도네시아 인구는 1965년 1억명을 넘어서며 5위에 진입했고, 1980년에는 1억5000만명으로 4위로 올라섰다. 인구 증가세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1996년 2억명, 2012년 2억5000만명을 기록함으로써 인도네시아는 인도, 중국, 미국에 이어 4위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세계 4위 인구 대국이라는 표현은 인도네시아를 묘사하는 핵심 키워드로 자리매김했지만, 그것이 항상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이전까지 2억명이라는 인구는 인도네시아가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짐으로 여겨졌고, 산아제한 정책을 통해 인구 증가세를 막아보려는 노력이 진행되기도 했다. 연간 인구 증가율이 1%대 미만으로 감소한 2010년대 중반 이후 인구 통제의 시급성은 완화되었지만 인구 증가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우려는 과도한 인구 규모로 인해 모든 국민이 양질의 삶을 누릴 환경을 만들기 어렵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설정한 빈곤선 아래에 놓인 인구 규모가 최근까지도 전체 인구의 10%에 이르고 있음은 인구 증가에 대한 두려움이 쉽게 사라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등교육의 급속한 확대는 2억8000만명에 이르는 인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의 증가는 이들의 개방적이고 도전적이며 세계화된 가치관과 행동이 사회의 여러 영역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등교육의 확대는 4위의 인구 대국이라는 말에 부여되었던 자조적 평가를 넘어서서, 그것을 인도네시아의 강점으로 바꿀 잠재력을 내포한다. 현재 10%에 머무는 대졸자 비율이 두 배로 늘어날 때, 이는 단순 수치상의 증가가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변화의 힘으로 작용할 것이며, 인도네시아를 인구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차원의 강국으로 전환시킬 원동력이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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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천문학적 비용' 무상급식 도입 …복지 국가 질주하는 인도네시아
복지 정책의 확장은 혜택을 받는 대상의 확대로 이어졌다. 2023년 자료를 보면, 10㎏의 쌀을 지원받는 가구는 2200만 가구, 인구 규모로는 8900만명에 달했고, 생필품 지원 수혜 가구는 1800만 가구에 이르렀다. 현금 지원을 받는 대상 역시 대략 2000만 가구로 추산되었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현금과 생필품 수혜 가구 중 임신부, 유아, 장애인, 노인, 학생이 있는 천만 가구를 선별하여 추가 현금을 지원했고, 저소득층 학생 1700만명을 대상으로 연간 백만 루피아까지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코로나 팬데믹 국면을 거치며 실업자, 노인, 중소 상공인을 대상으로 시행된 보조금이 이후에도 지속되었기에 현재 15종 내외의 복지 관련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급격한 예산 증가를 필요로 한다는 면에서 복지 확대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이는 복지 국가 건설에 대한 조코위의 단호한 태도를 반영했다. 이러한 조코위의 행보는 정부 지원의 직접 수혜자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도 뚜렷하게 각인되었고, 과거 어떤 대통령보다 국민의 복지 향상에 진정성을 가진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그에게 부여했다. 대통령 임기 말임에도 조코위의 정치적 영향력은 강력하게 지속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일부를 제외하고 그에 대한 지지율은 70~80%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지지율 저변에는 복지 정책 실현이라는 그의 업적이 놓여 있다. 9000만명에 달하는 국민이 난생 처음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복지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이들은 조코위의 강력한 지지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조코위의 성공은 프라보워의 무료 급식 정책 입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조코위의 정책과 달리 무료 급식은 보편 복지의 성격을 가진다. 조코위 정부에서 복지를 체감하지 못한 중산층까지 거의 모든 국민이 정부 지원의 혜택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선택을 통해 프라보워 역시 조코위가 누려온 높은 대중적 지지와 2029년 재선을 기대할 수 있다. 복지 국가를 향한 인도네시아의 질주는 앞으로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물론 걸림돌도 있다. 조코위 정부에서의 복지 예산 확대, 다른 식으로 말하면, 다른 부문에서의 예산 축소가 초래한 긴장과 불만은 5% 이상의 경제 성장이 계속되고 예산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상당 부분 완화될 수 있었다. 이는 앞으로의 복지 정책 역시 경제 성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지난 10년 동안 지속된 경제 성장 추세가 앞으로도 이어질 때, 프라보워가 꿈꾸는 재선의 길은 복지 국가 건설의 꿈과 함께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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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준비된 대통령' 프라보워 …연대와 타협이냐 권력독점이냐
지난 2월 14일,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 국회의원, 지역대표의원, 지방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가 끝나고 20여 일이 지난 현재까지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식 개표율은 대통령 선거의 경우 대략 78%, 국회의원 선거는 65%에 머물러 있다. 82만여 개 투표소에서 전체 유권자의 85%인 1억7000여 만명이 참여한 투표 결과 집계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됨은 당연하지만, 선거 종료 후 하루가 지나지 않아 개표가 종결되는 우리의 상황과 비교할 때, 인도네시아의 개표 과정은 경이로운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더딘 집계 과정은 인도네시아에서 이미 예견된 바로, 선관위의 공식 개표 결과 발표는 선거가 끝나고 한 달여가 지난 3월 20일로 예정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선거 과정에서 주목받은 문제 중 하나는 선거 관리원의 대규모 과로사였다. 특히 5년 전 치러진 선거에서 이 문제가 두드러져서, 공식 사망자 수가 9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선관위에서는 신체검사를 통해 선거 관리원을 선발하고 관리 인원을 보강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사망자 수가 대폭 감소했지만, 여전히 그 규모는 100여 명에 이르렀다. 더딘 개표율과 선거 관리원의 과로사는 선거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선거는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축제’라 불려왔다. 민주적 관행이 일상에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선거가 민주주의의 축제임을 보여줄 방식은 개표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이었다. 따라서, 개표는 과도하게 여겨질 정도로 세심하고 꼼꼼한 절차를 거쳐 진행되었다. 투표가 끝난 후 곧바로 해당 투표소에서 진행되는 개표 과정은 유권자들의 직접적인 참여 아래 이루어진다. 개표한 투표용지를 선거 관리원이 양손에 펼쳐 든 채 기표된 후보나 정당의 이름을 거명하고 이를 유권자에게 보여주며 확인받으면, 다른 선거 관리원이 커다란 게시판에 부착된 집계표에 그 결과를 일일이 기록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몇 백명이 투표한 투표소에서 개표 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절차적 투명성에 대한 강조는 개표뿐만 아니라 집계 과정에도 적용된다. 컴퓨터로 최종 집계가 이루어지지만, 개표 결과를 컴퓨터에 입력하기 전까지 투표소에서 집계한 결과는 여러 단계의 검토 과정을 거치게 된다. 투명성 확보를 위해 이 과정 역시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되며, 확인과 재확인을 거쳐 최종 결과가 선관위에 등록된다. 누구나 쉽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 인도네시아에 정착된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수작업에 의존한 개표 절차는 쉽게 변화될 수 없는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개표 과정이 취급됨으로써 선거 관리원의 과로사나 지연된 개표 결과 발표와 같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관행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선관위의 공식 발표가 예정되어 있음에도 프라보워 수비안토 후보의 대통령 선거 승리는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선거 직후 십여 개의 여론조사기관에서 발표한 출구조사에서 프라보워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으며, 현재까지 선관위의 공식 집계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프라보워 후보의 득표율은 약 58%로, 다른 두 후보의 득표율인 25%와 17%를 크게 상회했다. 절반을 넘어선 프라보워의 득표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이변이라 평가될 수 있다. 작년 10월까지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다른 후보자와 비슷하거나 약간 앞서는 수준이었다. 선거 캠페인 동안 그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며 선거 직전 50%에 육박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지만, 그가 절반을 크게 넘는 지지를 얻어 1차 선거에서 승리하리라고는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짧은 기간 동안 전개된 급격한 지지율 상승에는 프라보워의 부통령 후보 선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직 조코위 대통령의 장남 기브란(Gibran)을 부통령에 지명함으로써, 프라보워는 80%의 지지율을 넘나드는 조코위의 인기를 등에 업고 선거 캠페인을 펼칠 수 있었다. 선거 중립을 유지해야 했던 조코위는 프라보워를 직접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선거 기간 중 다양한 방식으로 프라보워가 자신의 후계자임을 드러냈다. 프라보워의 승리는 기브란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이번 선거의 최대 수혜자가 조코위이며,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새로운 정권에서도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제기되었다. 큰 무리가 없어 보이는 설명인 듯하지만, 그 실현 가능성을 균형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프라보워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를 단순히 조코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정치인으로 속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라보워에 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키워드는 특전사와 수하르토이다. 그는 1998년까지 30년 이상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였으며, 수하르토 정권 말기 특전사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수하르토 퇴진을 촉발한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그는 민간인을 납치하여 살해한 인물로 지목되었고, 수하르토 퇴진 후 발생한 폭동과 극심한 사회적 혼란의 배후로도 알려져 있다. 수하르토 퇴진 후 불명예 제대한 프라보워는 동생의 도움을 받아 농업과 광산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몇 년 만에 놀라운 부를 축적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정계에 입문했으며, 자신이 설립한 정당을 통해 2009년 부통령 후보에 선임되었다. 2014년과 2019년, 조코위와 일대일로 맞붙은 대선 2차 선거에서 프라보워는 40%가 넘는 득표율을 얻을 정도로 높은 대중적 지지를 끌어냈다. 이러한 경력을 고려하면 그는 인도네시아의 어느 정치인보다 오랫동안 대통령 자리를 꿈꾸고 준비해 온 인물이라 평가될 수 있다. 군 경력과 수하르토와의 연관성은 부정적 꼬리표로서 프라보워를 항상 쫓아다녔다. 하지만, 2009년 이후 네 차례의 대선 과정을 거치며 이런 이미지는 상당 부분 희석되었을 뿐 아니라 긍정적으로 전환되기까지 했다. 그의 경력이 민간인 출신 후보자들이 내세우지 못하는 강력한 지도자라는 이미지 구축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 캠페인에서 프라보워는 자신의 강경한 이미지를 완화하려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대규모 대중 유세 중 연단에 선 그는 거리낌 없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귀여운 춤’이라 불린 그의 비디오 클립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확산하며 젊은 세대의 큰 관심을 끌어냈다.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그는 ‘옆집 아저씨’와 같은 친근함을 부각하고자 했다. 다른 후보자의 의견에 반박하기보다는 이를 수용하려는 태도를 과할 정도로 취했고, 자신의 경력에 대한 날 선 비판을 엉뚱한 대화로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프라보워의 캠페인 과정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예술인 그림자극을 연상시킨다. 인도의 서사시를 기본 줄거리로 하는 그림자극에는 토착적 성격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기이한 외모를 지닌 이들은 우스꽝스럽고 때로 천박하기까지 한 언행으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광대 역할을 하지만, 실상 이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토착 신이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희화화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프라보워의 캠페인 방식은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닌 이상적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 이번 선거에서 조코위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에 기반하여 프라보워가 승리했음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앞으로 출범할 프라보워 정권을 단순히 조코위 정권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무엇보다 대중적 영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 프라보워가 자신만의 독자적 세력을 견고하게 구축해 왔고, 오랫동안 자신만의 정책과 통치 방법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앞으로 보여줄 독립적 행보를 뒷받침할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할 것이다. 프라보워의 독자적 행보를 예상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코위와 연관된다. 장남인 기브란이 부통령이 됨으로써 조코위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갈 발판을 마련했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소속한 정당을 배신하는 선택을 했다. 그가 등을 돌린 인도네시아 투쟁민주당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다수당의 위상을 유지한 반면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이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조코위의 정치적 행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대통령 선거 결과는 유력 인사를 중심으로 한 정치 왕조가 인도네시아 사회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재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전망과 관련해서 더욱 중요한 사실은 프라보워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많은 비판을 받아 왔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절차적 수준의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유력 정치 세력 간 연대와 타협이었으며, 이는 어떤 정치 세력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프라보워의 개인적·정치적 배경은 그가 기존의 정치적 균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독점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형성될 프라보워와 기존 정치 세력 간 역학 관계는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지을 핵심 요인이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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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신이 창조할 때 미소를 지은 나라 .. 印尼의 '자원 민족주의'
인도네시아 자바의 농촌을 처음 방문했을 때 목격한 모습은 매우 낯설었다. 벼의 성장주기에 맞춰 단일한 색으로 채워진 들녘에 익숙한 나에게, 다양한 색채가 공존하는 풍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추수가 끝난 논 바로 옆에서 갓 심은 벼가 자라고 있었고, 그 옆에는 초록과 노란빛으로 물든 논이 위치했다. 이런 상황은 열대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녹색 혁명 이후 벼 성장주기가 4개월 이내로 단축되면서 1년에 세 번의 수확이 가능해졌고, 이는 농촌의 모습을 변모시켰다. 1년 이모작, 그것도 쌀과 보리의 이모작에 만족해야 했던 우리에게 1년 삼모작은 인도네시아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몇몇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인도네시아는 쌀 자급자족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는 과도한 인구 증가, 물과 경작지 부족, 소비자 취향 변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세 번의 수확이 가능한 인도네시아에서 쌀을 오랫동안 수입해야 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인도네시아의 풍요로움은 농작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셋째로 큰 산림면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군도라는 특성으로 인해 넓은 해양을 가지고 있다. 지하자원 역시 풍요의 원천이다. 금, 구리, 가스, 석유, 니켈, 석탄, 희토류, 보크사이트 등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며, 주석의 경우 전 세계 매장량의 17%를 차지한다. 이로 인해 “신이 인도네시아를 창조할 때 미소를 지었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풍요로운 자연이라는 수사는 오랫동안 거론되었지만, 그것이 긍정적 의미로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제 상황이 자연적 풍요로움을 반영할 만큼 좋은 상태에 놓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재력과 현실 사이의 격차에 관해 말하면서 인도네시아 사람이 자주 지적한 측면은 관리의 문제였다. 태생적 풍요로움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함으로써 인도네시아가 저개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근원은 자원 관리의 주체인 정치인과 관료로 귀착되었다. 이러한 자조적 분위기는 최근 들어 급속히 변화했고, 자원 관리에 대한 호의적 평가로 대체되었다. 변화의 중심에는 니켈 원광 수출금지 정책과 같은 조코위(Jokowi) 정부의 단호한 조치가 있었다. 이 정책은 정부가 자원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확산시킴으로써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광물 원광 수출금지 조치는 자원 민족주의의 한 형태이다. 이 용어가 내포한 국수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는 ‘후방화’(hilirisasi)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적 원자재 개발에서 가치 사슬의 후방을 지향하는 전략으로 이를 설명한다. 어떤 말이 사용되든, 자원 활용에 있어 정부의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간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유주의 정책과 대조된다.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인도네시아에서 자원 민족주의가 부상할 수 있음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것이 왜 최근에야 주목받게 되었는지는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자원 민족주의가 처음 표출된 시기는 1980년대였다. 정부는 국내 목재 산업 육성과 산림 자원의 부가가치 제고를 위해 원목 수출을 금지하고 가공 후 수출만을 허용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1985년에 원목 수출이, 이어서 제재목 수출이 금지되자, 한국을 포함한 외국기업의 철수가 이어졌고, 이는 목재 수출 급감과 고용 축소라는 부작용을 결과했다. 그럼에도 이 정책은 외국기업의 직접 투자를 유도하고 목재 산업의 생산성 향상을 촉진하는 등 장기적으로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평가되었다. 원목 수출금지는 정부가 자원 관리를 제고할 정책적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예시했지만, 자원 민족주의적 접근은 그 후 다른 자원으로 확대적용되지 않았다. 이는 자원 개발을 매개로 구축된 정경 유착 고리, 정치인과 군부 카르텔의 이권을 보호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특히, 수하르토 대통령의 가족이 이 카르텔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자원 민족주의 정책은 쉽게 확장될 수 없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수하르토 독재의 종말과 함께 시작된 민주화 과정에서 자원 관리 문제는 중요한 이슈로 부상했다. 자원 개발을 매개로 한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인해 큰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푸아 지역의 그레스버그(Gresberg) 광산이 대중적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 이 광산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금광 중 하나이자 주요 구리 생산지였다. 수하르토 정부에서 첫 외국인 직접 투자 사례로 개발된 이 광산은 미국의 프리포트(Freeport) 회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지속적인 인프라 투자를 통해 생산이 안정되자 이 회사의 수익은 꾸준히 증가했고, 특히 구리 가격이 급등한 2000년대 중반 그 순수익이 매년 수십억 달러에 이르리라 추정되었다. 수하르토 정권에서 시작했고, 심각한 환경 파괴, 오염, 인권 침해 문제에도 사업이 계속될 수 있었음은 부패한 정치인과의 유착에 기대어 프리포트가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공식 회계에서조차 프리포트의 수익이 인도네시아 정부가 받는 세금과 로열티 수입을 크게 초과한다는 보도는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정치권에 대한 압력이 가중되자, 국회는 2009년 광산업에 관한 법을 제정했다. 이 법안의 핵심은 국내에서 가공하지 않은 광물 수출을 금지하는 것이었고, 제련 시설 부재라는 현실을 참작하여 5년의 유예 기간을 두었다. 자원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제정된 이 법안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으리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는 광산 업체에도 적용되어서, 유예 기간이 끝난 2014년 제련 시설을 마련한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유예 기간이 연장되거나 다른 형태의 타협안이 제시될 것이라 예상했다. 이런 기대는 2014년 일부 현실화해서, 정부는 수출금지 대신 추가 관세 부과와 같은 유화책을 제시했다. 이런 타협적 행보는 인도네시아 행정의 일상적 운용 방식에 부합했지만, 조코위 대통령의 당선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반영하지 못했다. 자원 민족주의에 대한 조코위 정부의 접근은 광산업에 투자한 외국기업이 과반의 주식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를 강하게 밀어붙임으로써 명확해졌다. 이 정책은 광산법에 근거를 두고 있었지만, 법안에 명시된 10년의 유예 기간을 단축하여 적용한 것이었다. 자원 민족주의 정책의 강력한 추진 의지를 표명하고자 했던 조코위 정부는 그 대상으로 프리포트를 지목했다. 정부의 압력에 맞서 프리포트는 강력한 대응 전략을 펼쳤다. 광산 활동을 중단했고, 현지 고용인을 대규모로 해고했다. 이러한 행보는 파푸아 지역의 안정을 훼손하고, 나아가 분리주의 운동을 자극해 정부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리라 우려되었다. 국제재판소에 제소할 것이라는 프리포트의 위협 후 일년여에 걸쳐 진행된 협상에서 조코위 정부는 승리를 거두었다. 프리포트는 90%에 이르던 지분을 49%로 축소하고 이를 인도네시아 정부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는데, 그에 대한 대가로 2041년까지 채굴 허가 연장을 얻어냈을 뿐이다. 프리포트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조코위 정부의 다음 목표는 니켈이었다. 전기차 산업 확대에 따라 니켈의 전략적 가치가 증가하자 정부는 2019년 원광 수출금지라는 광산법을 실행에 옮겼다. 이는 곧바로 무역 마찰을 일으켜 유럽연합은 이 정책을 WTO에 제소했다. WTO는 인도네시아의 광물 수출 규제가 국제 무역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시했으며, IMF 역시 수출 제한 조치의 단계적 폐지를 권고했다. 이에 굴하지 않은 채, 조코위 정부는 분쟁 소송의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수출 제한 정책을 철회하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천명했다. 여기에는 정부의 행보에 대한 국내의 강력한 지지가 한몫을 했다. 소송을 통해 시간을 끌면서 국내에 제련 시설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전략적 고려 역시 작용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단호한 태도에 놀란 외국기업이 인도네시아에 전기 배터리 공장 건설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자원 민족주의 정책의 효과에 대한 확신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조코위 정부는 석탄, 보크사이트, 구리 등 다른 자원에 대한 수출금지 정책을 추진할 계획을 발표했다. 조코위 정부의 강력한 자원 민족주의 정책은 풍부한 자원을 활용한 경제 개발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는 인식을 확대했다. 또한, 자원에 대한 주권적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국가적 자긍심과 경제 발전에 대한 자신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시각을 바꾸면 다른 해석 역시 가능하다. 우리를 포함한 외국기업의 관점에서 볼 때, 인도네시아의 자원 민족주의 정책은 법적, 제도적 불확실성을 증가시키고 불공정한 경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제대로 된 투자와 사업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자의적인 정책 변화는 현지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부과함으로써, 경영상의 어려움을 가중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도네시아의 최근 정책은 자유주의 무역 질서를 위협하는 행보라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외부 압력에 대해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내세우며 당당하게 대응하는 인도네시아의 모습에서 어떤 부러움을 느끼게 됨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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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히잡 쓴 배구선수 …한류, 지속가능성을 엿보다
몇 주 전, 인도네시아 지인이 소셜 미디어인 왓츠앱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메시지를 열자 흥미로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유튜브에서 지금 메가와티(Megawati)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 인도네시아의 전 대통령으로 현재에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Soekarnoputri)가 떠올랐고, 그녀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발표하고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유튜브 채널을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를 묻는 다급한 질문에 그는 예상치 못한 사진과 함께 인터넷 주소를 보내주었다. 사진에는 배구 경기장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유튜브 채널에서는 배구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고 그 배경은 한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경기를 친구가 언급한 것도, 메가와티를 거론한 것도 언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영상을 계속 보자 히잡을 쓴 선수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 V리그에 등장한 인도네시아 선수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이날 메가와티 퍼르티위(Pertiwi) 선수가 소속한 정관장 레드스파크스 팀은 세트스코어 2:3으로 승리하지 못했다. 경기 실황을 전달해주던 인도네시아 친구는 자기 팀이 패배하자 눈물을 흘리는 아이콘을 보냈지만, 경기 중간중간의 메시지를 통해 그가 메가와티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는 선수로서 메가와티의 활약이 큰 몫을 했지만, 그녀가 활동하는 곳이 한국이라는 사실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한국 여자 배구가 세계 정상을 다툴 정도로 높은 수준에 있지 않음에도, 메가와티에 열광하고 나아가 그녀의 활약에 자긍심을 느끼는 친구의 모습은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이 가진 긍정적 이미지를 투영하지 않고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이미지는 지난 20여 년 동안 급격히 변화했다. 과거 인도네시아 사람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국가에서 한국은 누구나 단편적이지만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고 호감을 표명하는 국가로 전환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한류가 놓여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조사했던 1990년대 초중반, 한국인이라는 소개를 들은 대다수 현지인은 인삼을 언급했다. 우리나라가 인삼의 나라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백여 년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전후하여 한국인 보부상이 동남아 곳곳에서 인삼을 팔며 돌아다녔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인삼의 나라라는 정체성은 동남아 여러 지역으로 퍼졌고, 인도네시아 농촌 주민에게까지 각인될 수 있었다. 백여 년이나 지속된 인삼의 나라 이미지는 ‘윈터 소나타’로 알려진 겨울연가가 2000년대 중반 현지 방송을 타며 변화의 흐름에 놓이게 되었다. 이 드라마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면, 곧이어 방영된 대장금은 한국 드라마에 관한 관심을 중장년층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당시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장금이’라는 말을 인사말처럼 건넬 정도로 그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인도네시아에서 한류의 흐름을 직접 경험했지만, 한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내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인도네시아를 연구하면서, 한국 드라마에 내재한 우리의 정서와 행동 양식이 인도네시아 문화와 친화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년 뒤, 이 예상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드라마에 관한 관심은 영화, 음악, 게임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고, 모든 연령층을 한류 소비자로 포섭할 수 있었다. 한류의 장점 중 하나는 그것이 한국적인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류의 유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적인 것에 관한 관심과 호감으로 전환했다. 한국 라면과 화장품이 인기를 끈 후 인도네시아 사람의 관심은 한류 속 콘텐츠로 익숙해진 한국 음식으로 이어졌다. 대도시 쇼핑몰을 중심으로 한국 음식점이 우후죽순 세워졌고, 곧이어 거리의 일반 음식점에서도 우리 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한국 음식 확산은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듯했지만, 그 열기를 억누르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대도시가 아닌 중소 도시로 한국 음식점 확산이 가속화되어서, 자바의 경우 인구 10만명의 소도시에서도 한국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한국에 관한 관심은 인도네시아 사람의 관광 욕구 역시 자극했다. 2019년 사상 최대인 27만명에 달했던 방한 인도네시아 관광객은 코로나 국면을 벗어난 올해 1~10월 사이 19만명으로 급속히 회복하는 추세를 보였다. 같은 기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한국 관광객이 28만명임을 고려해보면, 양국의 관광객 규모는 흥미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위해 몇몇 동남아 국가의 자료를 살펴보기로 한다. 올 1~10월 사이 태국 방문 한국 관광객은 130만명, 한국 방문 태국 관광객은 31만명이었고, 베트남 방문 한국 관광객은 290만명, 한국 방문 베트남 관광객은 35만명이었으며, 필리핀 방문 한국 관광객은 110만명, 한국 방문 필리핀 관광객은 35만명이었다. 이 자료와 비교해보면, 인도네시아 관광객과 한국 관광객 사이의 편차가 훨씬 작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관광 분야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가 상당히 호혜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호혜적 관광 활동은 여행지로서의 한국에 대한 인도네시아 사람의 높은 선호도에 기인했다. 2022년 인도네시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전체 해외 방문자 중 한국 방문자 수는 상위권에 속했고, 인도네시아 사람의 전통적 선호 관광지인 일본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 자료는 한류의 힘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류 콘텐츠의 선정성을 문제 삼아 보수적 이슬람 집단이 때로 반한류 정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인도네시아 사회 일반에서 한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표출되지 않았다. 내가 만난 공무원, 정치인, 학자에게서도 같은 태도가 나타났지만, 이들과의 대화 중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이 있었다. 이들은 한류 확산에 비견되는 상황이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달리 말해 ‘인도네시아류’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거나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인도네시아 문화 중 세계적으로 관심받는 대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독특한 제조 방식, 다양한 색채와 문양으로 유명한 바틱(batik), 셀 수 없는 열대의 향신료가 가미된 음식 른당(rendang), 인도·아랍풍과 말레이풍이 조화롭게 혼합된 대중음악 당둣(dangdut), 공연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림자극 와양(wayang) 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 요소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친숙하지는 않다. 한국의 대형마트에서 인도네시아산 라면인 미고랭(mie goreng)을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입맛을 사로잡는 대중 음식으로 자리 잡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한국 내 ‘인도네시아류’ 가능성에 관한 질문에 나는 얼버무리듯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두 국가 간 문화 교류가 일방향적으로 전개되었고, 앞으로도 그 추이가 크게 변하지 않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배구선수 메가와티의 한국 리그 참여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녀의 활약상은 인도네시아 미디어의 주목을 받아서, 소속팀 경기 결과는 신문과 방송의 주요 기사로 보도되었다. 소셜 미디어에는 그녀를 응원하는 수많은 채널과 계정이 만들어졌고, 많은 현지인이 경기를 시청하고 있다. 현지 보도에서 강조되는 측면 중 하나는 그녀가 온몸을 가리는 복장과 히잡을 고수한다는 점이다. 이는 비이슬람권 지역인 한국에서 자신의 종교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당당한 무슬림으로서의 모습을 부각함으로써,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인도네시아 사람에게 자긍심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또 다른 측면은 그녀의 활약이 한국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점이다. 일정 정도의 과장이 포함되었지만, 미디어 보도에서는 메가와티의 활약상에 대해 한국의 배구 팬 역시 열광하고 있으며, 이들이 그녀의 종교적, 종족적 차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메가와티는 한국에서의 ‘인도네시아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다. 메가와티가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배구연맹이 올해 처음 도입한 ‘아시아 쿼터제’이다. 여자 배구만을 놓고 본다면, 이 제도를 통해 태국, 인도네시아, 일본, 필리핀 국적 선수가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모두가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것은 아니지만, 메가와티 사례처럼 이들의 한국 리그 참여가 가진 긍정적 영향은 명확하다. 이들의 한국 활동은 이들이 속한 국가 국민에게 자긍심을 가져다줄 수 있으며, 이는 한류가 가진 문제점인 일방향성을 완화할 잠재력을 내포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스포츠계의 아시아 쿼터제 도입은 한류에 대해 고민해온 정부나 학계에서 고려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아시아권 선수의 한국 활동이 한류의 일방향성을 완화함으로써, 그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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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부통령 후보가 된 조코위 장남 …印尼 대선 불안한 그림자
“정치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 정치인이 자주 언급하는 말로서, 정당 간 합종연횡이 빈번하고 개인의 소속 정당 교체가 자주 이루어지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이는 정치적 이념, 도의, 충성보다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정치인의 행보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십여 개의 정당이 경합하는 다당제 체제에서 정당과 정치인 간 연합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그 결합과 분리의 양상은 외부인이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게 전개되어왔다. 특히, 2024년 2월 대선에 참가할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 등록을 목전에 둔 지난 10월의 상황은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치의 본질일 수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정당 간 합종연횡은 첫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치러진 2004년을 기점으로 하여 인도네시아 정치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1998년 경제 위기로 인해 수하르토 독재 정권이 와해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에는 세 개의 정당만이 활동했다. 이후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수십 개의 정당이 출현했고, 2004년 대선에 출마한 5명의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 선정 과정에서 정당 간 연합이 가시화되었다. 이런 정치적 현실은 선거법 개정에도 영향을 미쳐서, 후보 난립이 가져올 부정적 영향의 축소라는 명분으로 국회 의석수의 20% 혹은 직전 총선 득표율 25% 이상을 획득한 정당이나 정당 연합만이 대통령 후보를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한 9개 정당 중 하나만이 20% 이상의 의석을 획득했다는 현실을 고려해보면, 개정 선거법은 대선 후보 배출을 위한 정당 간 연합을 필수적 정치 과정으로 바꿔놨다. 2024년 대선에 참가할 세 명의 대통령 후보는 극적인 장면 없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첫 번째는 대통령 후보를 단독으로 지명할 자격을 충족하고 있으며 현 조코위 대통령이 소속한 정당인 ‘인도네시아 투쟁민주당’(PDI-P)의 후보, 간자르 프라노워(Ganjar Pranowo)이다. 유권자의 14% 정도가 속한 중부 자바 주지사를 두 차례 역임한 그는 풍부한 행정 경험과 대중적 인기를 지닌 무리 없는 후보라 평가되었다. 두 번째는 2014년과 2019년 두 차례 대선에서 조코위 대통령과 경쟁한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이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코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활동했고,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세운 정당이 독자적으로 후보를 지명할 수 없었기에, 그는 세 개의 중소 정당과 연대하여 대통령 후보 자격을 얻어냈다. 세 번째 후보는 2017-22년 사이 자카르타 주지사를 지낸 아니스 바스웨단(Anies Baswedan)이다. 다른 후보와 비교할 때, 그의 정치적 정체성은 모호한데, 이는 세 정당의 지지를 통해 대선 후보가 된 현재에도 그의 소속 정당이 없음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그는 무소속 정치인으로 여러 정당의 활동에 간여하고 여러 정당의 지지를 받아 출마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가 가진 높은 개인적 역량과 대중적 지지에 기반을 둔 것으로서, 인도네시아의 독특한 정치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내 준다. 높은 인기를 가진 지도자가 없지만 대통령 후보 배출을 통해 정치적 존재감을 확보해야 하는 정당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식으로 외부 인물을 수혈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명의 대통령 후보가 상대적으로 큰 무리 없이 등장했던 것과 달리, 이들의 러닝메이트가 될 부통령 선임 과정은 정치적 합종연횡에 익숙한 이들조차 쉽게 상상할 수 없던 상황을 연출했다. 먼저, 집권 여당의 간자르 후보 러닝메이트 선임 과정은 극적인 장면을 기대했던 이들을 실망하게 할 정도로 밋밋하게 진행되었다. 같은 당 소속이면서 부통령감이라는 평가를 오랫동안 받아 온 현직 장관이 후보로 선임되었기 때문이다. 돌발적 상황을 기대하던 이들에게 아니스 후보의 러닝메이트 선택 과정은 만족스러울 만했다. 선정된 인물이 프라보워 후보를 추대한 정당 연합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자기 정당이 지지하는 후보가 아닌 경쟁 후보의 러닝메이트 자리를 꿰찬 것이다. 이 행보는 아니스 후보의 러닝메이트 자리를 노리며 그를 지지하던 ‘민주당’(Partai Demokrat)을 격분시켰다. 민주당은 곧바로 아니스 후보 지지를 철회하고 프라보워 후보 지지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 결과 프라보워 후보를 지지했던 정당과 아니스 후보를 지지했던 정당이 각기 입장을 전환하여 상대방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짧은 기간 내에 진행된 이 변화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정치적 논리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예시했다. 민주당이 재빨리 프라보워 후보 지지로 선회한 데에는 그의 러닝메이트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달리 프라보워 후보는 부통령 지명을 계속 연기했고, 후보 등록 직전에야 중부 자바 수라카르타(Surakarta)의 시장인 36살의 기브란 라카부밍(Gibran Rakabuming)을 러닝메이트로 선정했다. 물론 그의 경력보다 훨씬 중요한 점은 그가 조코위 대통령의 맏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족벌 정치는 인도네시아의 최근 정치를 특징짓는 요소라 거론되어왔다. 민주화 국면 이후 대통령 자리에 오른 5명의 전·현직 대통령 중 한 명을 제외한 네 명의 자녀들이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만을 고려한다면 조코위 대통령 아들의 지명 역시 어떤 일도 가능하다는 정치적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지명은 이전의 합종연횡과는 상이한 평가를 받으며 시민 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부통령 후보 지명 직전까지 그가 후보 자격을 완전히 갖추었다고 평가될 수 없었던 상황에 기인했다. 인도네시아 선거법에는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의 연령 제한 조항이 포함되어서, 40세 이상의 사람만이 입후보할 수 있었다. 이 기준에서 볼 때, 기브란 후보는 출마 자격을 충족하지 못했고, 이런 이유로 그는 대선 레이스의 주요 구성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그가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후보자 연령 제한을 문제시하는 헌법소원이 제기되었고, 대선 후보 등록을 앞두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정치평론가는 이 헌법소원이 기각되고 40세 연령 제한이 존치될 것이라 예상했다. 이는 족벌 정치의 논리를 역으로 적용한 결과였다. 조코위 대통령의 매제라는 친족 관계로 인해 헌재 소장이 자신의 조카인 기브란 후보를 편파적으로 편드는 판결을 내리기 쉽지 않으리라 판단되었다. 상식에 맞아 보였던 이 시각은 결과적으로 정치 논리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헌재는 40세 연령 제한을 합헌이라 판단했지만, 직접 선거를 통해 지자체장으로 선출된 경험이 있는 인물에게 이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예외 규정을 추가했다. 헌재 결정이 발표되자마자 프라보워 후보는 인도네시아 투쟁민주당을 탈당할 여유조차 없던 기브란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했다.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논리의 적용 범위가 무한대일 수 있음을 단정적으로 보여주는 행보였다. 정당 간 합종연횡에 대한 불만이 강하게 제기되지 않던 이전과 달리 기브란 후보의 선임은 시민 사회의 광범위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기브란의 고모부가 헌재 협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유도했다는 고백이 헌재 재판관에 의해 제기되면서 비판적 시각에 기름을 부었다. 시민들의 잇따른 제소에 헌재는 윤리위를 소집하여 헌재 소장의 심의 참여가 이해충돌 방지라는 윤리 강령을 위반했는지 검토하기로 했다. 족벌 정치에 대한 관용적 분위기가 기브란에게 적용되지 않은 핵심 이유는 이 문제가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고 법의 영역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라도 정치에서 벌어질 수 있다면, 정치 외적 영역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정서가 힘을 받았으며, 이는 정치 영역으로 환류되어 정치적 공모와 결탁, 족벌 정치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수하르토 퇴진 이후 전개된 민주화 과정에 대해 정치 분석가들은 한동안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민주주의가 절차적으로만 실행될 뿐 실질적 진전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차적 차원의 민주주의가 20여 년 동안 이어지고, 평화적 정권 교체가 계속됨에 따라, 인도네시아 정치를 보는 시각 역시 조금씩 변화했고, 동남아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는 평가가 제시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하르토 퇴진 당시 제기된 정치적 담합과 족벌 정치 반대라는 구호가 25년이 지난 현재 다시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은 그동안 진전되고 있다고 믿어졌던 민주주의의 기반이 여전히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국가의 폭력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시민 사회의 불만이 대규모로 표출되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화의 진전을 의미한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향후 대선 레이스 과정은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역동성을 파악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프라보워-기브란 후보의 대선 가도 성공 여부는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정치적 논리가 유효한지를 확인해 줌으로써 인도네시아 민주화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지시계로 작용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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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의 Indonesia 스토리] '항공기 생산국' 인도네시아의 딜레마
인도네시아 도심의 거리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가득 차 있다. 교통 체증 속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려는 차량이 뒤엉켜 연출하는 혼돈의 모습은 인도네시아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관련 통계를 보면, 교통지옥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100만 인구의 자카르타를 예로 들면, 2022년 등록 자동차 수가 360만대, 등록 오토바이가 1700만대 정도였다. 자동차만 놓고 볼 때 320만대가 등록된 서울과 큰 차이가 없지만, 여기에 다섯 배나 많은 오토바이를 추가하면, 주민 수의 두 배에 육박하는 차량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오토바이는 인도네시아인이 선호하는 교통수단이다. 승용차보다 가격과 운행비가 저렴하고 교통 체증에서도 재빠르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1억3000만대의 오토바이가 등록된 최근 상황은 그리 오래된 모습이 아니다. 소득 증가에 비례하여 오토바이 역시 증가했기에 20여 년 전에는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2000만대 정도만이 등록되었을 뿐이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오토바이가 부의 과시 수단이던 1990년대, 도로를 보며 떠올린 궁금증은 오토바이의 절대다수가 일본 제품이라는 점이었다. 혼다, 스즈키, 야마하 오토바이로 가득 채워진 도로의 모습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수입대체 산업화라는 경제발전 모델에 익숙한 내게 있어 오토바이 국산화가 진행되지 않았음은 인도네시아 경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듯했다. 국산 오토바이가 부재한 상황에 관해 현지인들은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 일본산 오토바이의 품질이 뛰어나기에 국산 오토바이를 고집하기보다는 수입하는 편이 낫다는 식의 설명을 가장 많이 들었다. 여기에서는 선진국과의 기술력 차이를 쿨하게 인정하는 듯한 현실 안주적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이에 국산 오토바이의 부재가 기술적 후진성이나 종속성과 연결되지 않느냐는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듣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항공기를 자체 제작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비행기를 인도네시아에서 자체 제작한다고? 자전거에서 시작하여 오토바이, 자동차 순으로 차근차근 축적한 기술력에 기반하여 항공기 생산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내게 현지인의 주장은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이들의 답변은 터무니없었지만, 이들이 제시한 근거는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유학 후 독일에서 일하던 천재 엔지니어인 하비비(Habibie)를 당시 대통령 수하르토가 귀국시켰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가 항공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 정보를 조금 찾아보자 이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이 드러났다. 또한, 1995년 N250으로 명명된 비행기가 시험운항에 성공함으로써 인도네시아는 항공기 생산국 반열에 올랐다. 이런 이유로 항공기 제작은 인도네시아인에게 있어 국가적 자긍심의 원천이었고, 오토바이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공했다. 야심 차게 시작한 인도네시아의 항공 산업은 1997년 경제위기라는 복병을 만났다. IMF의 요구에 맞추어, 항공 사업을 전담하던 국영기업은 예산 낭비의 전형이라는 불명예를 받으며 해체되었고, 관련 전문인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이런 절망적 상황이 항공 산업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2000년대 초 경제 상황이 조금 호전되자 정부는 해체된 기업을 ‘인도네시아 항공회사’(Dirgantara Indonesia)로 재편하여 출범시킴으로써, 항공 산업에 대한 의지를 재천명했다. 인도네시아 항공회사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모습을 접하게 된다. 수송기와 여객기 등 다목적으로 활용되는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 4종의 사진이 첫 화면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품 섹션에는 4종의 헬리콥터가 추가로 소개되어 있다. 일반적인 상품 카탈로그와 달리 그 가격이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언론 보도를 통해 주력 판매 기종인 N219의 가격이 미화 6~800만 달러, 이보다 사양이 좋은 CN-235가 2500만 달러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적 자긍심의 원천으로서 현지 언론은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에 많은 관심을 드러냈고, 특히 그 수출 현황을 자주 기사화했다. 보도에 따르면, 2022년을 기준으로 286대의 CN-235가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베네수엘라, 세네갈, 아랍에미리트, 파키스탄, 터키, 네팔, 말레이시아, 태국, 브루나이 그리고 한국에서 운용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항공회사 홈페이지에서 한국은 단순한 항공기 수입국 정도가 아니라 CN235 기종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도입한 나라로 소개되어 있다. 자국 항공기에 대한 자부심을 언론 보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의 전망이 그리 밝은 것은 아니다. 자료를 보면, 설립 후 2020년까지 축적된 손실 규모가 약 18조 루피아(1조5000억여 원)에 이르렀고, 설립 후 단 한 차례 1000만 달러 정도의 이익을 냈을 뿐이다. 막대한 적자는 최근 항공회사 사장의 갑작스러운 해임의 원인이 된 듯하다. 뇌물과 같은 뚜렷한 근거 없이 공기업 사장을 해임하는 일이 극히 이례적임을 고려해보면,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에 대한 정부의 부정적 시각이 여기에 투영된 것처럼 보인다. 한 일간지 기사는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을 ‘살리기에도 내키지 않고,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이라는 현지 속담에 빗대어 설명했다. 계속된 적자에 시달리고, 급속한 경쟁력 제고가 불가능하며, 내수 판매 증가를 위해 필요한 소형 기종이 부재하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으며, 항공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이 축소되고 정책 지향점이 드론 개발로 전환되고 있다는 설명이 부가되었다. 반면, 항공기 제작 역량을 오랫동안 축적해왔고, 항공 산업이 기술 혁신의 파급력이 큰 전략 산업이며, 소형 항공기에 대한 국내 수요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는 점은 이를 쉽게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여기에 국가적 자긍심과 항공 산업의 긴밀한 관련성을 추가하면, 순수한 경제적 관점만으로 항공 산업을 바라볼 수 없는 인도네시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도네시아가 항공기 생산국이라는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에 인도네시아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언론 보도를 정리하면, 인도네시아는 전체 개발비의 20%인 1조7000억원을 투자하고 우리의 기술을 이전받아 현지에서 전투기를 생산하기로 2016년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이후 자신의 책무를 충족하지 못했다. 2019년까지 약 2000억원을 지급한 후 납부를 멈췄고, 작년과 올해 500억원 정도만을 지불하는 생색을 냈을 뿐이다. 항공기 공동 생산이 국가 간 협약에 기초하기에, 분담금 미납은 국제관례에 어긋날 뿐 아니라 상도의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 비쳤다. 이에 인도네시아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비등해졌고, 인도네시아를 배제한 채 우리의 예산만으로 전투기 사업을 완결짓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분담금 유예의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 팬데믹으로 인한 예산상의 어려움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인도네시아의 경제회복은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분담금 유예 상황에서도 인도네시아는 미국과 프랑스 전투기 구매를 위한 양해 각서를 체결하기까지 했다. 무언가 일이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지 않음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도네시아 정부가 우리와의 계약을 파기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2021년 개최된 KF-21 보라매 출고식에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영상 축사를 전달했고,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국방부 장관이 조속한 문제 해결을 약속했음은 계약 파기를 의도한다고 판단하기 어렵게 한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국 항공 산업에 대한 ‘살리기에도 내키지 않고,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을 빼기를 원치 않는 모습이 우리와의 협약을 바라보는 주도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갈지자 행보는 우리에게 있어 당혹스러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단순화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또한, 이 문제를 바라볼 때 잊지 않아야 할 측면은 정해진 계약이라도 상황변화에 따라 재협상이 가능하다는 인도네시아식 행동 양식이 외교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지속적 협의를 중시하는 인도네시아의 전략을 염두에 둘 때, 우리가 먼저 나서서 명확한 행보를 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국형 전투기 개발 일정이 구체화할수록 더욱더 애가 타는 측은 인도네시아이기 때문이다. 항공 산업 발전에 대한 관심이 깊고, 항공 산업이 국가적 자긍심으로 자리 잡은 인도네시아에서 전투기 제작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사업일 수밖에 없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홈페이지를 보면, 우리 항공 산업에서 인도네시아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처음 개발한 국산 훈련기 KT1, 그리고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의 첫 수출 대상국이 인도네시아였기 때문이다. 우리 항공 산업의 역사와 발을 맞추어 왔다는 사실에 더해 인도네시아가 커다란 시장 잠재력을 가진 곳이라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최선의 대응책은 여유를 가지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참여를 독려하는 방식일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 (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 (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