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싱가포르 ISEAS–Yusof Ishak 연구소에서는 매년 ‘동남아시아의 상황(The State of Southeast Asia)'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한다. 2019년 처음 출간된 이 보고서는 대학과 싱크탱크 소속 학자, 기업인, 비정부기구 활동가, 언론인, 정부 관료, 국제기구 관계자 등 동남아 각국의 여론 주도층을 대상으로 설문을 시행하고 그 결과를 분석한다.
이 보고서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주제 중 하나는 외교 문제로, 동남아 여론 주도층이 외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위해 동남아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세력이 누구인지 규정하게 되는데, 지난 7차례 설문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동남아가 고려해야 할 대상에 미국, 중국, 일본, EU, 영국, 인도, 호주 등과 함께 한국이 포함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을 응답 대상으로 선택한 비율은 높지 않다. 예를 들어 미국과 중국 간 대립 국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제3의 전략적 파트너를 묻는 질문에 대해 한국을 지목한 비율은 2025년 4.7%에 그쳤다. 이는 EU에 대한 응답률 36.3%, 일본에 대한 응답률 29.6%보다 현저히 낮은 수치이다. 그러나 이러한 낮은 응답률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동남아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외부 세력 중 하나로 선정된 사실은 우리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반영한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이 가져온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은 동남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외부 세력으로 간주된다. 보고서에서는 이 두 나라 중 어느 쪽을 전략적 파트너로 삼아야 할지를 묻고 있는데, 2025년 설문 결과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각각 52.3%, 47.7%를 기록해 의견이 대략 반반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국가별 응답 결과를 보면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필리핀과 베트남에서는 미국을 선택한 비율이 70%를 넘을 정도로 높았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중국 선택 비율이 70%를 넘었고, 인도네시아에서도 응답자의 72.2%가 중국을 지목했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 중 하나는 미국의 친이스라엘적 중동 정책이다. 인도네시아에 강하게 자리 잡은 친팔레스타인 정서와 충돌하면서 미국의 행보는 전략적 파트너 위상을 약화시켰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적극적인 외교 행보와 양국 간 긴밀해지는 경제 관계가 우호적 인식 강화에 일조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외교적으로 인도네시아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지 않으며, 양국 간 경제 관계 역시 최근 뚜렷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우호적 인식이 강화되는 흐름 속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월 초 인도네시아산 제품에 대해 32%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이는 동남아 국가 중 중간 수준에 해당하는 수준이며 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미얀마는 40%대, 필리핀·싱가포르·동티모르는 10%대 관세율을 적용받았다. 태국은 36%, 말레이시아는 24%였다.
관세 정책이 발표된 초기에 인도네시아에서는 다양한 입장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트럼프의 일방적 정책 추진을 비판하면서 관세 산정 방식과 부과 근거의 불명확함을 지적했다. 특히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에 언급된 인도네시아의 불공정 무역 관행이 도마에 올랐다. 보고서에서 거론한 자카르타 한 쇼핑 구역의 지식재산권 침해 사례에 대응하여 실제로는 해적판 소프트웨어나 불법 전자제품을 더 이상 찾기 어렵다는 르포 기사가 이어졌다.
이슬람 단체는 할랄 인증제를 비관세 무역장벽으로 분류한 데 대해 강력히 반발하며 인도네시아가 종교 정책을 시행할 주권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관세 조치를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도 나왔으며, 대미 교역 비중이 인도네시아 GDP의 2%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정부의 강경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등장했다. 동남아 국가들과 공동 대응해 미국의 관세 정책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견해 역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보다 신중하고 타협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여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추가 관세가 인도네시아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근거를 두었다. 전자제품, 신발, 섬유 등 대미 수출의 주요 품목이 대부분 노동집약적 산업이라는 점에서 수출 감소가 곧바로 고용 축소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특히 지난 2~3년간 섬유업계에서 대규모 해고가 이어진 상황에서 수출 위축은 심각한 사회경제적 타격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되었다.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목표치를 밑도는 4.8%에 머물렀고, 루피아화 가치 급락으로 인해 자본 유출 등 거시경제적 불안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 역시 타협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유화적 입장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대미 무역에서 꾸준히 이어진 흑자 기조를 논거로 들기도 했다. 2024년 기준 미국은 인도네시아 전체 수출의 9.7%를 차지했는데 이는 대중 수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인도네시아의 무역수지 흑자 310억 달러 중 절반가량이 대미 교역에서 발생했으며, 대중국 교역에서는 오히려 100억 달러의 적자가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은 2000년대 이후 지속되어서 인도네시아는 대중 무역에서 대부분 적자를 기록한 반면 대미 무역에서는 단 한 차례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이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무역 불균형을 시정하려는 미국의 입장을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가 대두했다.
추가 관세에 대한 수용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대응 과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트럼프가 얼마의 관세율을 부과하든지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지로 중국을 택하고 올해 초 브릭스(BRICS)에 가입하는 등 친중 행보를 이어가던 그가 미국의 추가 관세를 커다란 비판 없이 수용한 모습은 의외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프라보워의 유화적 자세는 인도네시아의 대응 방향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4월 중순 경제조정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포함한 정부 대표단이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재무부 장관, 상무부 장관, 무역대표부 대표 등과 협상에 나섰다. 이들은 미국의 주요 경제단체 및 기업인들과도 면담을 진행했다. 이후 협상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경제조정부 장관은 인도네시아가 제안한 대책에 대해 미국 측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는 무역 불균형 해소 방안으로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하, 비관세 장벽 완화 등을 포함한 여러 방안을 전달했으며 20억 달러 규모의 인도네시아 기업의 미국 직접 투자 계획도 제시했다고 언급했다.
양국 간 협상 결과는 비공개 조건에 따라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협상 이후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협상 카드로 활용했을 방안을 국내에서 선제적으로 공론화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는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한 직접적인 조치였다. 정부는 석유와 가스의 수입처를 미국으로 전환해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를 대폭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수년간 인도네시아는 석유 수입의 절반가량을 싱가포르에서, 나머지를 말레이시아·중국·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조달해 왔다. 정부는 이러한 수입 물량의 상당 부분을 미국산으로 전환해 대미 수입을 190억 달러 증가시키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기존의 대미 무역흑자를 상쇄하고도 남을 규모였다. 곧이어 국영 석유공사가 미국산 석유 수입 확대를 위한 대형 선박 도입과 항만 시설 개선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수입국 전환이 단순한 구상에 그치지 않고 즉각 현실화할 수 있는 방안임을 뒷받침했다.
두 번째는 미국의 주요 수출품인 휴대전화, 노트북 등 전자제품과 철강·광산업 제품, 의료기기 등에 대한 관세를 선제적으로 인하하는 조치였다. 전자제품은 관세율이 기존 2.5%에서 0.5%로 조정되었다.
세 번째는 ‘국산 부품 사용 요건’ 완화였다. 이는 수입 제품에 대해 인도네시아 현지 기자재나 서비스를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하도록 의무화한 제도로, 미국 무역대표부가 오랫동안 비관세 장벽으로 지적한 문제였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 규정을 근거로 2024년 말 애플의 신제품 출시를 저지한 바 있다.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던 이 조항을 조정하여 정부는 미국산 제품의 국산 부품 사용 기준을 기존 40%에서 25%로 낮추었고,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더 낮은 비율을 적용하리라는 전향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대미 협상이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정부가 협상안을 먼저 구체화하여 공개한 것은 이례적이다. 통상적인 협상 관례에서 벗어난 이러한 선제적 행보는 협상안이 단순한 립서비스 수준이 아닌 즉각적으로 실행 가능한 방안임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추가 관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프라보워는 그에게 자주 따라붙던 국수적 민족주의자라는 이미지와는 다른 유연함을 갖춘 실용주의자 면모를 드러냈다. 이러한 유화적 행보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고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향후 미·중 외교에서 그가 어떤 균형점을 찾으려 할지를 가늠할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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