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Indonesia Story] 크레텍 불피운 K-커머스

  • KT&G, 철저한 현지화로 '흡연 대국' 인니 시장 돌풍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흡연과 관련하여 인도네시아는 종종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국가로 지목된다. 15세 이상 남성 중 약 70%, 대략 7000만명이 흡연자라는 자료를 접하면 그 심각성에 쉽게 공감하게 된다. 우리 언론을 통해 간간이 보도되는 초등학생이나 유아의 흡연 기사는 인도네시아 사회가 흡연 문제에 대해 전근대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세계 최고의 흡연 천국이라는 명성에 대해 인도네시아의 흡연자는 다소 상이한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성인 흡연율이 약 28%이고 남성 흡연율이 50%를 약간 웃도는 수준으로 세계 최상위권이라 보기는 어렵다. 일부 지역에서 청소년이나 아동의 흡연에 대해 관대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관행은 아니다. 또한 청소년 대상 담배 판매를 금지하는 법규가 강화되면서 10대 흡연율은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흡연과 관련된 국가 이미지가 일정 정도 왜곡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인도네시아 흡연자라면 담배를 둘러싼 긍정적인 면을 강조할 듯하다. 담배가 인도네시아 전통문화의 일부이자 국가적 유산이며 국가 경제에도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담배를 전통 유산으로 바라보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담배 원산지가 아메리카 대륙이며, 유럽 열강에 의해 인도네시아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인도네시아어로 담배를 뜻하는 ‘텀바카우(tembakau)'는 ‘토바코(tobacco)'에서 유래했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 담배의 특성을 고려하면 전통이라는 표현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담배는 우리가 아는 보통 담배가 아니라 담뱃잎에 20~40% 정향을 혼합해 만든 제품이다. ‘크레텍(kretek)'이라 불리는 이 담배는 인도네시아에서 개발된 고유의 것이며, 소비 또한 인도네시아에 한정된다.
크레텍 담배의 기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만성적인 가슴 통증에 시달리던 한 남성이 민간요법에 따라 정향 기름을 가슴에 발라 증상을 완화하려 했다. 정향의 효과를 더욱 직접적으로 느끼고자 그는 담뱃잎과 정향을 혼합해 옥수수 껍질에 말아 피우기 시작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방식을 통해 그는 천식과 가슴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기적 같은 이야기는 빠르게 입소문을 탔고, 짧은 시간 안에 정향 담배를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크레텍이라는 명칭은 담배가 탈 때 나는 특유의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로, 이후 정향이 섞인 담배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크레텍이 널리 애용되자 그것은 곧 일상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 한 문헌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에서 친구를 사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크레텍을 권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크레텍의 흡연 방식과 관련이 있다. 일반 담배는 보통 5분 내외로 피울 수 있지만 크레텍 한 개비를 태우는 데 15~20분가량 소요된다. 게다가 시가와 마찬가지로 피우던 담배를 잠시 놔두면 그 불씨가 꺼진다. 꺼진 담배를 다시 태우는 게 일반적이기에 크레텍 한 개비를 피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크레텍을 함께 피우는 행위는 단순한 흡연을 넘어서 수십 분간 시간을 공유하며 사회적 관계를 맺을 기회를 제공한다.
크레텍은 전통 의례에도 스며들어 조상이나 지역 신에게 바치는 제물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초월적 존재에게 기도하며 크레텍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크레텍 한 보루는 종교의식에 참여할 때 가져가는 선물 중 하나가 되었다.
크레텍을 태울 때 퍼지는 짙은 정향의 향은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향기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외국을 방문한 후 귀국한 인도네시아인이 크레텍 냄새를 맡고서야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음을 실감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크레텍의 친숙함 덕분인지 넷플릭스가 지원한 인도네시아 최초의 드라마 제목은 ‘크레텍 소녀’였다. 2024년 서울드라마어워즈 미니시리즈 부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이 드라마는 50여 년에 걸친 러브스토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랑했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연인, 그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 이들이 각자 결혼하여 낳은 자녀들의 만남, 그리고 죽은 연인과 살아남은 연인의 재회 등 모든 핵심 서사는 크레텍을 매개로 얽혀 있다.
크레텍은 인도네시아 경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전체 흡연 인구는 감소 추세지만 담뱃세는 꾸준히 증가하여 2024년 기준 그 규모가 약 20조원에 달하며 전체 세입에서 10% 정도를 차지했다. 담배 산업 종사자는 6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기계화된 생산뿐 아니라 손으로 담배를 직접 말아 만드는 노동집약적 방식이 활용되어서 크레텍 제조는 많은 고용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
경제사적 관점에서 볼 때 담배 산업은 인도네시아 경제 발전 과정과 특성을 보여준다. 크레텍이 처음 도입된 시기 토착 자바인이 제조를 주도했으나 1930년대를 전후하여 중국계 이주민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후 크레텍 산업은 중국계 이주민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토착민은 지역 기반 소규모 업체로 명맥을 이어갔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네시아 경제 전반에서 나타나는 패턴과 유사하다.
1960~1970년대를 거치며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운영하는 네 개 기업이 담배 업계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구도는 현재까지 이어지지만 2000년대 들어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이들 네 업체 중 두 곳이 다국적 담배 회사에 인수된 것이다.
다국적 기업은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일반 담배를 판매해 왔다. 크레텍과 대비되어 ‘흰색 담배’라 불리는 이 제품은 크레텍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이들은 점유율 확대를 위해 크레텍 제조업체를 인수하는 전략을 택했다.
말보로로 유명한 필립 모리스 인터내셔널은 현지 업체 인수 후 시장점유율을 30%까지 끌어올리며 인도네시아 최대 담배회사로 부상했다. 던힐 브랜드를 보유한 브리티시 아메리칸 타바코는 인수 후 상당 기간 적자를 기록했으나 현재까지도 두 자릿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안정적 매출과 충성도 높은 소비자층을 보유했던 토착 회사가 다국적 기업의 인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회사를 운영하던 창업자의 후손에게 있어 각각 50억 달러와 6억 달러에 이르는 인수 대금은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담배 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는 점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 들어 정부는 흡연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담뱃세 인상 정책은 담배 산업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상황은 매각을 결정한 이들의 선택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의문을 갖도록 한다. 담뱃세 인상과 규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담배 판매량은 소폭이지만 꾸준히 증가했고, 담배 산업은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했다. 이는 다국적 기업에 인수되지 않은 두 개 토착 기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24년 ‘포천(Fortune)'이 발표한 매출액 기준 인도네시아 10대 기업 가운데 6곳은 국영기업, 4곳은 민간기업이었는데 민간기업 중 두 곳이 크레텍 제조사였다. 담배는 여전히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소비재인 셈이다.
다국적 기업의 사례에서 보듯 외국 회사가 인도네시아 담배 시장에 진입하는 하나의 방법은 토착 기업 인수이다. 한국 KT&G 역시 이런 전략을 택해서 2011년 토착 크레텍 회사를 1억3000만 달러에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입했다. 인수 초기 이 선택이 성공적인 전략이었는지 불분명했다. 인수 후 5년 동안 회사 매출과 수익이 뚜렷하게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수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2010년대 후반까지도 관련 논란이 한국에서 이어졌다.
최적의 회사를 적절한 가격에 인수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인도네시아 시장 진출 이후 KT&G 행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점은 현지화를 위한 적극적인 도전이었다. 다른 다국적 기업이 인수 업체 제품을 그대로 유지한 데 반해 KT&G는 신제품을 과감하게 개발하여 출시했다.
정향을 혼합해 크레텍이 만들어졌다는 점에 착안하여 KT&G는 담배 필터에 다양한 향의 캡슐을 삽입하거나 이색적인 맛과 향을 첨가한 새로운 제품을 선보였다. 이러한 시도가 계속됨에 따라 그 수가 얼마인지 쉽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제품이 잇따라 시장에 나왔다. 애플민트 맛, 캐러멜민트 맛, 베리민트 맛, 오렌지민트 맛, 망고민트 맛, 잠부(jambu) 맛, 포도 맛, 꿀 맛, 망고스틴 맛, 홍차 맛, 커피 맛 등 다채로운 크레텍 제품이 만들어졌다.
KT&G의 현지화 노력은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졌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KT&G는 인도네시아 담배 시장에서 4.4% 점유율을 기록했으며, 10여 년 사이 판매량은 150배 가까이 증가했다. KT&G 제품을 인도네시아 내 거의 모든 편의점에서 접할 수 있고, 일부 제품을 한국 가격에 근접한 높은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사실, 그리고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공장을 현재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 등은 KT&G의 성공적인 시장 안착을 예시한다.
담배는 흔히 ‘죄악 산업’으로 분류되어 긍정적 논의 대상이 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크레텍이 주도하는 인도네시아 담배 시장에서 KT&G가 보여준 성공적인 사업 운영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KT&G의 현지화 전략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수반되었는지에 대한 심층적 분석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전략 수립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를 추가해 줄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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