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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푸른 산 맑은 물은 보석보다 더 귀중하다
몇 달 전부터 주변에 광고를 통해 장강(長江 중국 양쯔강)답사에 관심있는 이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했다. 하지만 마감까지 결국 두 명만 남았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주일간 개인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출발을 앞두고 여행사에서 문자가 왔다. 출발날짜를 일주일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마지막까지 참여하겠다는 인원 가운데 일부가 또 빠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1팀과 2팀을 합친 것이였다. 생각보다 모객이 저조했던 까닭이다. 그렇게 인기있는 여행상품은 아닌 모양이다. 몇 년 전에도 신청했을 때 일정이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이유를 이번에 확인한 것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8월 초에 출발할 수 있었다. 장강여행의 출발지 중경(重慶 충칭)의 도시 브랜드 구호는 ‘아재중경(我在重慶 나는 중경에 있다)’이다. 공항에서 가장 먼저 만난 로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꼰대의 해석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아재들은 중경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ㅋㅋ)” 낮에는 묵직(重)했던 도시 분위기가 밤이 되니 완전히 달라진다. 야경은 화려(慶)했다. 도시이름을 중후(重厚)와 경희(慶喜 경사스럽게 여겨 기뻐하다)가 함께 한다는 의미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해석은 어차피 하는 사람의 몫이다. 또 ‘중경삼림’이라는 청춘영화 때문에 청년세대에게도 잘 알려진 도시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홍콩의 중경빌딩이 배경이지만 그 건물이름도 중경에서 왔기 때문에 그게 그거다. 배 안에서 보는 다양한 모습의 야경은 시가지를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삼천만명이 산다는 세계최대의 인구를 가진 도시답게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도 엄청 길었다. 물론 천천히 달리는 관광선 덕분이긴 하지만. 중경에서 출발하여 삼협 댐까지 도착하는 일정만 해도 3박4일이다. 배 안에서 숙식하는 덕분에 캐리어를 열고 닫는 일을 할 필요가 없는지라 동작이 꿈뜰 수 밖에 없는 중장년세대에게 안성맞춤 여행이다. 객실마다 베란다가 있어 빨래를 말리기도 좋다. 인근 지역 관광을 마친 후 여름 맹더위에 흠뻑 젖은 옷은 돌아와서 가벼운 손 세탁 후 널면 된다. 두 벌만 있으면 전일정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었다. 4~5백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는 큰 배는 정박지가 수심이 깊은 강 가운데에 둘 수 밖에 없다. 하선 뒤에는 몇 백m의 부교(浮橋)를 건넌 뒤 가파른 시멘트 계단을 일백개 이상을 밟아야만 관광버스를 탈 수 있다는 것도 이색적인 경험이다. 장강 리버 크루즈를 가능하게 한 현대중국의 삼협(중국발음:샨샤)댐 건설은 강 하류 지역의 홍수방지가 주목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홍수를 다스리는 일은 정치의 시작이요 끝이다. 요순시대를 지나 왕위를 물려받은 우(禹)임금의 가장 큰 업적은 치수(治水)사업이었다. 홍수는 주민들에게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대혼동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우 임금의 홍수조절 무대는 황하(黃河)였다. 황하는 ‘누런 강’이다. 장강(長江)은 ‘긴 강’이다. 누런 물, 긴 물이라는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된 경우라 하겠다. 수(隨)나라 문제(文帝541~604)와 양제(煬帝569~618)는 홍수를 막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류와 운송까지 염두에 둔 운하를 기획하고 만들다가 사십여년 만에 나라가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규모 토목사업은 국고를 탕진했고 급기야 민심이반을 불렀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모든 왕조는 경항(京杭 북경과 항주를 연결)운하를 건설하고 수리하는 일에 하나같이 진심이었다. 치수가 곧 정치생명과 연결된 까닭이다. 장강 본류는 말할 것도 없고 강 주변에 있는 도시에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또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천만관객을 동원한 우리나라 영화 ‘신과 함께’의 원저자가 줄거리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귀성(鬼城)’을 찾았다. 또 이 지역 출신인 소설 삼국지의 관운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봉연삼국(烽烟三國)’은 무대와 좌석이 동시에 이동하면서 장면의 극전전환을 유도함은 물론 관중의 눈과 귀를 압도하는 대형공연이었다. 강 저편 멀리 있는 백제성(白帝城)도 보았다. 유비가 이릉전투에서 패한 뒤 제갈공명에게 뒷일을 맡기고 임종을 맞이한 곳이다. 원경으로 감상하면서 산 언저리에 새겨진 ‘백제성’이란 흰 글자 옆에 있는 건물 몇 채를 실눈으로 바라보면서 당시의 비장함과 함께하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선상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장강삼협(三峽 무협 구당협 서릉협)이다. 넓은 강과 높은 협곡이 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낸 비경이 압권인 지역이다. 중국 10위안 화폐도안의 배경으로 나올만큼 유명한 관광지인지라 여행상품 명칭마저 ‘장강삼협 크루즈’라고 붙일 정도였다. 관광객들은 화폐를 손에 들고서 인증샷을 날리느라고 모두가 바쁘다. 우리라고 빠질 수는 없다. 10위안 지폐를 잠시 임대하여 한 컷 찰칵. 뿌연 물안개로 가려진 방향 저멀리 삼협댐이 보인다. 드디어 종점에 도착한 것이다. 댐에 딸려있는 운하를 통과하려면 작은 배로 갈아타야 한다. 매우 단단한 느낌의 시멘트 벽과 엄청나게 강해 보이는 철끈이 손에 닿을 듯 말듯한 틈새 사이로 배가 들어가는가 싶더니 곧 이어 100m 가량 엘리베이트를 탄 것처럼 하강하면서 댐 아랫강에 관광객을 내려 놓는 것으로써 여행일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관광버스 차창 밖으로 고대의 전설적 시인 굴원(屈原 BC343~278)의 연고지인 ‘굴원고리(屈原故里)환승처‘라는 안내판을 스치며 지나간 뒤 중경행 고속철을 탔다. 4시간이 소요된다. 한국행 비행기도 4시간이 걸렸다. 서울 종로에서 합천 가야산까지 4시간 걸려 운전하던 오랜 내공이 쌓인 덕분에 4시간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을 통해 확인한 것이 부수적으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하겠다. 가장 큰 소득은 강물에 비친 명문장을 손 그물을 힘차게 던져 건져올린 일이라 하겠다. “녹수청산(綠水靑山) 취시금산은산(就是金山銀山) 맑은 물과 푸른 산, 그것이 바로 금은으로 만든 산이다.” 미래에는 맑은 물과 푸른 산이 금과 은보다 더 높은 가치와 혜택을 인간에게 제공할 것이라는 뜻이다. 장강여행에서 자연환경 보존의 중요성을 10자로 압축한 산 중턱에 써놓은 훈계성(?) 말씀을 달리는 선박 안에서 순간포착 후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한 것은 일주일의 여정 속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자화자찬 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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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제발 송현공원을 있는 그대로 두시라
종로구 송현공원의 존재는 인근 주민과 직장인·자영업자들에게 자연이 주는 더없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공원이다. 수시로 산책하면서 들꽃이 뿜어내는 풀향기와 계절마다 바뀌는 꽃나무들이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른 바 공세권(공원혜택지역)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에서 살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공사로 인하여 난장판이 되어버린 ‘공세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습도 높은 더운 여름 날, 그 앞을 지나갈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쳐다보기만 해도 불쾌지수가 급속도로 상승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린송현 녹지광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하늘도 산도 열려있고 푸른 광장이 눈맛을 상쾌하게 했다. 공원이 만들어질 때부터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지켜보면서 애용하는 지역민의 한 사람으로서 행정관료들의 자연친화적 안목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건너편에는 빽빽한 빌딩들이 도열했고 뒤편에는 북촌의 기와집 단지와 이어지는 절묘한 자리에 인공구조물 없는 빈공간이 주는 ‘텅 빈 충만’은 비싼 터 값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배같은 무형의 정신적 상쾌지수를 매일매일 선사했다. 어떤 때는 녹지공원에 어울리지도 않는 뜬금없는 미술작품들이 잠시 서 있다가 없어질 때도 있었다. “그럴려니!” 하고 지나갔다. 눈에 거슬리긴 해도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소품인지라 ‘말 못할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라고 하면서 이해했다. 한 때는 어떤 정치인의 기념관이 들어온다고 애드벌륜을 띄우다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슬그머니 물러섰던 기억도 새롭다. 텅 빈 공간이 주는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 개발만능시대의 사고방식은 이제 버릴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망령처럼 공무원 사회 주변을 떠돌고 있는 모양이다. 이른 아침 포클레인이 넓은 면적의 땅을 깊숙하게 파고 있었다. 한 곳도 아니고 두 곳이다. 며칠 지나더니 레미콘 차량이 와서 철근 사이로 콘크리트 타설을 해댄다. 굳기가 무섭게 10개도 넘는 둥근 배관같이 생긴 거대한 쇠기둥과 철제로 된 계단 그리고 대형 하수관 같은 것을 서로 연결한다고 크레인이 굉음을 내며 이미 황토뻘이 되어버린 마당을 다시 짓이기고 있다. 게다가 직사각형 액자처럼 커다란 목재 대문형 구조물 수십 개가 여기저기 줄지어 서 있다. 공원 가운데를 중심으로 빙 둘러 파란 비닐로 담장을 쳤다. 분명 임시로 만들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철거할 구조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원의 가장자리 주변부 혹은 구석자리에 배치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지만 산책하는 주민·직장인·자영업자들과 방문하는 관광객의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배려심은 두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넉 달을 공사한다고 막아놓겠다는 그 두둑한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대단한 강심장들이다. 주민주권시대에 오만한 행정력의 횡포를 맘껏 과시하고 있다. 서울시청 미래공간 기획실 명의로 ‘도시건축 비엔날레 주제전 작품설치’를 한다고 둘러 친 비닐벽에 써두었다. 공사기간 4개월 동안 불편함이 예상되니 양해를 바란다는 상투적인 면피용 문자도 빠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엇을 감추려는지) 완공 후 조감도는 아예 게시하지도 않았다. 이런 일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송현공원에 설치하게 되었는지도 역시 알 수 없다. 짐작컨대, 결정권자의 개취(개인취향)와 ㅇㅇ위원회의 요식행위와 실무자의 ‘쉬운 장소’ 찾기가 어우러진 합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사전에 인근 주민들과 공원 이용도가 높은 직장인·자영업자들의 의견 수렴절차는 어떤 식으로 밟았는지 묻고 싶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열린송현 녹지광장’이라는 공원명칭에 반하는 조치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수십 개의 거대한 쇠기둥이 북한산과 인왕산을 가릴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가리고 있다. (보나마나 앞으로 번쩍번쩍한 구조물이 덧입혀질 것이다.) 열린 공원이 아니라 가려진 공원이 되었다. 녹지광장은 가운데를 무참하게 잠식당한 채 구멍난 도넛을 연상시키는 모양새로 바뀌었다. 남은 땅은 광장이라기보다는 아예 자투리 땅이라고 부르는 게 옳겠다. 작은 지방도시도 공터만 생기면 공원을 만드는 추세인데 특별시가 틈만 있으면 있는 공원도 야금야금 잠식하는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도리어 위압적인 자세로 자연공원을 훼손하는 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무거움으로 닿아온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상황이라고나 할까. 하나마나한 말이겠지만 시크하게 한 마디 보태야겠다. 도시건축으로 주제전을 하겠다면 차라리 시청 앞 광장에 설치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결정권자와 실무자가 수시로 사무실 창문을 통해 하루하루 진척도를 확인할 수 있고 매일 매일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비타민C 노릇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산책하는 주민도 별로 없는 곳이니 민원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공사기간과 전시기간 중 일어나는 민폐도 줄일 수 있는 대안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미 높다란 빌딩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주변과의 조화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겠다. 단언컨대 인공미는 절대로 자연미를 대체할 수 없다. 현재까지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앞으로 경복궁에서 인사동으로 가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고개를 돌리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발걸음마저 끊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육백년 역사의 전통적 동네 분위기에 어울리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거대한 구조물 관광을 ‘강요’하는 일이 될까봐 적이 걱정스럽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인사동 북촌주민들의 불만도 차곡차곡 누적될 것이다. 언젠가는 일인시위 또는 서명운동을 하다가 급기야 동네사람들까지 손팻말을 들고서 아래 위로 흔들면서 “제발 송현공원을 자연 그대로 둬라”며 화가 잔뜩 난 목소리를 외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 그 즉시 넥타이 부대까지 가세할 것이다. 큰 기와집 높은 담장에는 시커먼 고딕체 큰 글씨로 쓴 ‘송현공원 보존위원회’가 발족될 날도 멀지 않았다. 어쩌다보니 송현공원 탄생부터 오늘까지 가까이에서 살게 되었다. 24시간을 함께 지내다보니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소나무 언덕’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에 어울릴법한 하늘과 산이 훤히 보이는 열린 송현공원 그리고 녹지광장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걸리적거리는 것 없는 지평선 같은 시원한 풍광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길 바랄 뿐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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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밤나무골 정기 받아 아홉 번 수석을 차지하다
종각역을 2분거리에 둔 청진동 가게입구에는 새끼로 묶은 쌀가마니 몇 개를 내동댕이 치듯 세워놓은 과도한 설정을 콘셉트로 삼은 작은 빵집이 있다. 입구의 좁은 문 한 칸이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도록 만들었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홍보라고 하겠다. 주력상품인 소금빵과 밤파이도 ‘소금해 밤파희’라는 한글 문법체계를 염두에 두지않는 과장된 어투로써 낡은 이층 창문에 검은글씨로 써놓았다. 뜬금없이 글자앞에 붙어있는 ‘마롱리’ 역시 ‘마카롱을 비틀어 놓은 말인가’보다 하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폈다. 알고보니 마롱리는 본점이 위치한 파주의 어느 동네의 지명이었다. 궁금증이 발동하여 장맛비가 잠시 그친 주말을 이용하여 임진강변을 달렸다. 요즘 어딜가나 유행하는 베이커리 커피집 간판이 멀리 보인다. 입구에는 ‘마롱리 면사무소 카페 since1958’이라는 광고 겸 안내를 위한 그림판이 붙어있다. 1958년부터 파평면 사무소가 오랜 세월 머물렀던 곳으로 3300평의 넓은 대지 위에 본관인 면사무소 보건소 대서소 등 근현대의 옛 건축물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리뉴얼한 공간이라고 했다. 본관 아랫부분 주초석에는 준공년도가 새겨진 기록문자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화강암 벽돌로 지은 창고같은 건물이 세월의 더께와 무게를 안고서 멀리서 찾아 온 이들에 달콤함과 씁쓰레함이 조화된 맛을 제공하고 있었다. 곁에는 율곡수목원이 있다. 율곡은 밤나무가 가득한 골짜기를 말한다. 밤파이 안에 들어가는 밤의 이미지가 오버랩 된다.(광고판에는 공주 정안밤이라고 굳이 밝혔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이율곡(李栗谷1536~1584)선생의 부친인 이원수 공은 아들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밤나무 일천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그 공덕은 자식의 이름을 만세토록 빛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율곡의 별명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다. 과거시험에 아홉 번 수석(장원)을 했기 때문이다. 이퇴계(李退溪1502~1571)선생이 어린 율곡을 만난 뒤 후생가외(後生可畏 후학을 만나고서 경외감이 들었다)라는 인물평을 남길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수목원 안의 둘레길은 ‘구도장원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시험을 앞둔 이들이 합격을 기원하면서 잠시 한숨을 고르면서 마음 안정을 되찾는 힐링처로 손색이 없겠다. 율곡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놓은 인근의 자운서원(紫雲書院)으로 갔다. 진입로 한 켠의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 사당 곁의 큰 밤나무에는 (그 때 남편이 심은 밤나무는 아니겠지만)밤꽃향기가 주변을 진동시킨다. 사임(師任)이라는 별호자체가 태교의 일환이었다. 현숙한 부인인 주(周)나라 성군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妊)을 본받는다(師)는 뜻이었다. 율곡 아버지와 어머니 합장묘를 비롯하여 율곡의 직계가족 3대 무덤 10여기가 모여있는 곳이다. 어머니는 강릉출신이고 아버지는 파주가 본관이다. 아내는 황해도 해주사람이다. 그 시절에는 신부가 신랑집인 시댁으로 가서 사는 것을 ‘시집간다’고 했다. 신랑이 신부집인 장인댁으로 가서 사는 것을 ‘장가간다’고 했다. 율곡은 외가와 본가와 처가를 가리지 않고 인연따라 두루 살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킬레스근은 있었다. 16세 때 모친사별 후 3년상을 치루었다. 계모와의 불화 끝에 가출했다. 외가인 강릉에서 마음을 추스린 후에 금강산까지 발을 디디게 되었다. 불가(佛家)에서는 ‘금강산에서 누구나 발심(發心)한다’고 했다. 금강산에 가면 누구나 수행하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명산이다. 내친 김에 모친의 죽음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19세 때 출가를 결행했다. 그 때 법명은 의암(義菴)이었다. 일년 만에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이치를 깨닫고 하산(下山)하면서 선시(禪詩) 한편을 남겼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요 세속과 출가가 둘이 아닌 경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20세 때 일이다. 물고기 뛰고 솔개 날아도 위 아래 하나이니(鳶飛魚躍上下同) 그것은 공(空)도 아니요 색(色)도 아니로다(這般非色亦非空) 스스로 웃음 지으며 나 자신을 바라보니(等閑一笑看身世) 홀로 서 있는 숲 속에 해는 이미 기울었네(獨立斜陽萬木中) 하지만 조선 유교사회에서 불가에서 수행한 이력은 성리학 원리주의자에겐 늘 정치적 시비거리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굳이 그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금강산 답사기〉까지 남겼다. 모친사별에서 하산까지 4년 기간은 그를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한 차원 더 승화시킨 의미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난까지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심심하면 불거지는 시시비비에 대하여 제자 김장생(金長生1548~1631)이 심각한 표정으로 금강산 시절의 삭발여부를 묻자 율곡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산에 들어갔는데 외양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들, 이미 마음이 불교에 빠져 있다면 외양을 따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전을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능엄경은 ‘차돌 능엄’이었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차돌멩이처럼 잇발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하기(어렵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그는 천재답게 능엄경(楞嚴經)을 좋아했다. 그 영향으로 능엄경의 문체인 4글자로 이루어진 문장 짓기를 선호했다. 사서삼경만 공부하기에도 버겁다고 여기던 시절에 능엄경까지 섭렵했다는 점에서 당신의 실용주의적 통섭능력을 가늠할 수 있겠다. 율곡이 8세 때 지은 시(詩)가 남아있는 화석정(花石亭)을 찾았다. 정자 곁에서 유장한 곡선으로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보는 것으로써 일정을 마무리 했다. 돌아와서 보니 ‘율곡’이 결코 멀리 있는게 아니였다. 광화문에서 조계사 방향으로 가는 도로명이 ‘율곡로’다. 종로 안국동 사거리에서 율곡로를 가로질러 송현공원과 북촌으로 가는 건널목을 하루에도 몇 번씩 이용하면서 생활하는 곳이 아닌가.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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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이타미 준 -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집을 짓다
제주공항에 내리니 지인이 마중을 나왔다. 오다가다 육지에서 만난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섬에서 마중까지 받은 것은 처음이다. 뒷좌석에는 손자용 안전의자가 장착되어 있었다. 손자사랑은 함께 나온 친구가 더 ‘갑(甲)’이라고 추켜 세운다. 이제 아들자랑이 아니라 손자자랑을 들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취미가 건축감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현지인의 안내를 따라 간 곳은 유동룡(이타미 준 1937~2011)미술관이다. 5월이 만든 그늘 길을 천천히 달리며 그의 작품 포도호텔이 무대로 등장했던 드라마 ‘협상의 기술’이 자연스레 화제에 올랐다. 호텔식당의 시그니처 메뉴 우동이야기도 빠질 수는 없다. 또 수도인 도쿄보다는 수도권의 작은 도시인 시즈오카 시미즈에 거주하는 이들(정확히는 그들의 역할을 맡은 배우)의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에 엄청 감동을 받았다는 말에 “동감!”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모르긴해도 제주도민의 진한 애향심이 공감지수를 더욱 높였으리라. 시즈오카(靜岡)는 후지산과 녹차로 유명한 동네다. 이타미 준은 시미즈(淸水)지역의 검푸른 거친 바다와 노란 귤과 하얗게 눈 덮힌 후지산의 대비감이 도드라진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높은 한라산을 등 뒤로 하고 넓은 바다를 앞마당으로 삼아 지은 포도호텔 자리가 그 지역 분위기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곳이다. 건축가로써 제주도를 제2의 고향으로 인연을 맺게 된 저변에는 이런 개인적 사연이 묻혀 있었다. 육지이야기도 빠질 수는 없다. ‘경주타워’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경주엑스포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세우기 위한 설계공모가 2004년 실시되었다. 이타미 준의 작품은 우수상(2등)을 받았고 약간의 상금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2007년 완공된 건물은 누가 봐도 그의 디자인을 모방한 것이였다. 몇 번의 재판 끝에 202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저작권을 회복했다. 무려 13년이나 걸렸다. 공공건물 디자인 표절에 대한 사과가 이어졌고 또 저작권에 대한 경종을 울린 사건인지라 언론매체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이후 방문객의 접근이 쉬운 자리에 원저자의 이름을 명시한 제대로 된 안내표지판을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딸인 유이화 건축가도 두 발로 뛰었다. 유동룡 미술관(이타미 준 갤러리, 2022년 개원)은 유이화 건축가가 아버지의 건축세계를 주변에 널리 알리기 위한 거점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구석구석 묻어있는 공간을 찬찬히 살폈다. 평소에 사용하던 생활 소품들도 벽면 한 켠을 책꽃이처럼 칸을 나누어 진열했다. 늘 영감을 받았다는 조선 백자도 보인다. 건물을 짓기 위한 아이디어를 그린 갖가지 드로잉과 설계도 그리고 건축물 사진과 모형 등 작품을 전체적으로 일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모든 내용을 한 권으로 묶은 책《손의 흔적》역시 따님이 편집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생애를 간결하게 정리한 다큐멘타리였다. 영상실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할 만큼 흡입력이 강한 장면이 이어졌다. 제주도를 좋아하는 이유와 자기족보는 물론 현재의 이름까지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울러 건축관도 피력했다. 집을 짓기 전에 그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듣는 일이 가장 먼저라는 소신을 고수해 왔다. 그렇게 할 때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 그리고 새로운 공간이 보인다고 했다. 삼다도인 제주섬을 ‘수(水)·풍(風)·석(石) 박물관’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재해석 과정을 거친 결과물인 셈이다. 유(庾 곳집 유)씨는 한국에서도 흔한 성은 아니다. 부친은 무송 유씨 후손임을 늘 강조했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고려 건국 때 태조 왕건을 도와 활약한 유금필(庾黔弼)선생을 시조로 하는 집안이었다. 본관인 무송(茂松)은 전북 고창의 작은 마을 옛지명이다. 일본에 살면서도 한국국적을 끝까지 유지한 것은 ‘숫자가 얼마되지 않는 드문 성씨이니 씨족을 잘 보존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받았던 것도 포함된다 하겠다. 어쨋거나 ‘자이니치(在日)’로 산다는 것은 서민층이건 엘리트층이건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엄청난 사회적 불이익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건축가로 활동할 수 있는 예명(藝名)은 필요했다. 김유신(金庾信)의 이름자에서나 볼 수 있는 ‘유(庾)’는 일본한자에는 아예 없는 글자라고 했다. 적당한 이름을 찾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어느 날 한국과 일본을 오갈 때 늘 이용하는 오사카 이타미 공항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이타미(伊丹)는 두 나라를 이어주는 관문이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활동 공간은 일본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1994년 간사이(關西)공항이 생기기 전에는 국제선까지 운항했던 곳이다. 오래된 이타미 공항의 흑백사진도 영상 속에 등장했다. 준(潤)은 절친인 작곡가 길옥윤(吉玉潤) 선생이 자기이름의 끝자인 ‘윤(일본발음 준)’으로 하면 어떠냐는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준(潤)은 어감도 좋다. 그리고 한문 발음 그대로 ‘준(俊)’으로 치환한다면 ‘뛰어나다’는 의미가 되니 ‘이타미 공항을 통해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모두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뛰어난 건축가’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한 셈이다. 양국을 동시에 보면서 세계를 향한 중도(中道)적 안목을 바탕에 둔 작명실력도 이 정도라면 수준급이라 하겠다. ‘이타미 준의 바다’ 영상관람을 마치고 휴식을 위해 카페에 앉아서 창문너머 빌레(용암이 흐르는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암반)를 바라보며 차를 한 잔 나누었다. 유 선생 역시 손님이 찾아오면 으레이 차를 내놓았다고 한다. 그런 일상생활까지 계승한 ‘바람의 노래’라는 차(유기농 녹차·청보리·조릿대·박하를 브랜딩한 것)가 나왔다.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에 집중하면 형상이 드러난다”는 이타미 준의 건축관까지 반영한 마실거리라는 스토리텔링이 적힌 쪽지도 찬찬이 읽었다. 찻자리를 파할 무렵 다시 탐라국을 찾을 수 있는 초청장을 구두로 전달 받았다. “다음에는 수풍석박물관에 가요. 하루 방문인원을 제한하기 때문에 반드시 예약이 필수이니 미리 말씀해 주세요.”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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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벽돌은 탑이 되고 쇠는 기둥이 되고
결론삼아 종합평가를 해야겠다. 검은 쇠기둥과 붉은 벽돌탑이 주는 대비감도 너무 좋았다. 미완성 탑과 화려한 완성탑이 주는 비교감도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하지만 원래 터에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사를 왔고, 얼마 후에 또 주인이 바뀌는 황당함을 감내하고서도 오늘까지 꿋꿋하게 버틴 쇠기둥의 독자적 고고함 앞에 더욱 후한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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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인도 보드가야, 핸드폰과 신발까지 버려야 갈 수 있는 성지
출발 전에 테러 때문에 핸드폰은 지참할 수 없다고 여행사에서 미리 알려 주었다. 하긴 중동에서는 얼마 전에 (없어진 줄 알았던) ‘삐삐’까지도 테러도구가 되는 시대에 살다보니 이해를 못할 바도 아니다. 오래 전에 사용했던 디지털 카메라를 장롱 서랍 구석에서 찾아냈다. 휴대용 예비전지까지도 충전을 마쳤다. 출발 전에 제일 신경썼던 부분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행이 작동에는 별 다른 문제가 없는 덕분에 기념사진 몇십 장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대표사진은 현장에 근무하는 공식지정 사진사에게 부탁했다. A4 용지 크기로 인화한 후 코팅까지 해준다. 대탑을 배경으로 신발까지 벗고서(인도 주요 종교성지는 방문시 신발을 신을 수 없다) 정장(가사 장삼)차림에 엄근진(엄숙 근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서 있다. 귀국 후 사진은 책상머리에 붙여두고서 수시로 바라보며 한동안 ‘자뻑(?)’에 빠지곤 했다. 14년 만의 재방문이다. 그 때는 성지순례팀의 일원으로써 다녀왔다. 첫 순례의 그 희열과 감동은 지금까지도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어려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보드가야를 찾아 절을 하면서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도 주변에서 여럿 보았다. 일년에 한번 씩 무조건 찾아가 수행으로 기(氣)를 재충전한다는 수행자들도 더러 만났다. 이번에도 분황사를 숙식의 근거지로 삼아 매일 대탑을 오가면서 90일 겨울 안거를 하는 스님과 차 한잔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성도지 보드가야 분황사 한글 주련은 붓다가 깨친 내용을 여섯줄로 요약한 것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으니 인연따라 생긴 모든 것은 / 인연따라 모두 사라진다. 새벽 별 보고 깨달으시니 / 나와 저 별이 둘이 아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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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필경재(必敬齋)-항상 주변사람을 배려하며 사는 집
광평대군은 세종대왕의 다섯 번 째 아들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왕자들에 대한 기사 가운데 그 내용이 가장 길며 매우 긍정적인 내용으로 빼곡하다. 하지만 그는 20살에 요절했다. 그의 아들도 30살에 사망했다. 왕자로써 누려야 할 복을 후손에게 넘긴 탓인지 이후 그들의 자손은 대대손손 번창했고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로써 가문은 날로 융성했다. 당시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두 왕자의 비(妃)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고 수행했던 견성사(見性寺)는 뒷날 강남 봉은사(奉恩寺)의 전신이 되었다. 아마도 대를 이은 두 왕비의 기도 힘도 가문의 창성에 커다란 몫을 했을 것이다.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전국 비구니 회관’ 도로명 주소가 ‘광평로’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본래 무덤자리는 여기가 아니였다.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 자리였다. 왕자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왕까지 이길 수는 없다. 왕릉터로 지정되면서 왕자묘는 당연히 옮겨가야 했다. 하지만 이장한 자리가 원래 터보다도 훨씬 더 나은 명당이었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안택이 아니라 후손들까지 함께 할 수 있는 크고 넓고 복된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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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실눈을 뜨고서 한강과 임진강을 조망하다
경기도 김포는 또다른 의미에서 반도였다. 한강이 동쪽구역으로 흘러 북쪽구역을 감고서 돌다가 서해바다로 빠져 나간다. 강화섬과 김포 땅 사이에는 강 같은 바다가 서쪽구역으로 쭉 이어진다. 바다폭과 강폭이 별로 차이가 없다. 아니 강이 바다보다 훨씬 더 폭이 넓다. 그래서 그 강은 단순히 한강(큰강)이란 이름으로는 부족했다. 북쪽에서 흘러오는 임진강과 남쪽에서 흘러오는 한강이 합수하고 개성을 지난 예성강도 강화섬 들머리에서 물의 양을 더 보태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의 지류까지 합해지면서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강(祖江 祖:할아버지 조)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강의 민물이 아니라 서해바다의 짠물에다 방점을 찍으면 조강(潮江 潮:밀물썰물 조)이 될 터이다. 조강포에는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100여호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특산물인 황대어(黃大漁)가 유명했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중국사신들까지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육이오 이후 철책선이 지나가면서 주민들은 이주하게 되었고 타지의 일반인은 그 강을 바라볼 수 조차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그렇게 조강이란 이름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차츰차츰 사라져 갔다. 조강전망대는 관람절차가 한 단계 더 있는 불편함 때문에 다소 한적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는 달리 설을 앞둔 연휴 첫날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붐볐다. 입장을 위해 예약은 물론 결재까지 완료했음에도 불구하고 방문입장권 교환을 위해 긴 줄까지 서야했다. 넓은 강을 조망하기 위한 수업료라 생각하고 마음을 바꿔 먹으니 이내 내 차례가 돌아왔다. 입구에서 셔틀버스에 올라 인원 수를 체크하는 청년군인들의 검문모습까지도 색다른 문화상품(?)으로 닿아왔다.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다 입구에는 ‘스벅로그’ 안내판이 가장 먼저 반겨준다. 잊혀져 가던 조강을 다시 대중의 기억 속으로 소환한 것은 ‘스타벅스’ 공로가 적지않다.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에서 넓다란 조강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마실 수 있는 커피 한 잔이 주는 문화의 힘은 컸다. 작년(2024년) 늦가을 ‘김포애기봉생태공원점’의 개점은 호사가들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대기시간도 엄청 길었지만 모두 그 정도의 수고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드디어 조강전망대에 도착했다. 멀리 임진강과 한강이 합수하는 지역을 안내판을 통해 그 위치를 가늠하고서야 동북쪽 방향으로 가늘게 실눈을 뜨고서 지그시 응시했다. 몇달 전에 들렀던 파주 오두산 전망대 부근이었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예성강까지 보려고 한다면 강화도 북쪽 해안가 전망대까지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렇게 호수같이 잔잔한 강물인데 옛선비들은 물살이 굉장히 거세고 파도까지 치는 강물로 묘사했다.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과 강물 위에 조각배를 띄우고서 건너가야 하는 사람간의 차이라고나 할까. 정두경(鄭斗卿1597~1673)선생은 ‘주과장단(舟過長湍 배를 타고 장단지역을 지나다. 장단콩이 특히 유명한 곳)’이란 글 속에서 “조수가 조강으로 밀려오는 모습이 마치 산과 같은 파도가 바위를 치면서 올라 온다”고 했다.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다보니 밀물 때는 강물과 바닷물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풍광이었다. 하지만 밀물을 제대로 이용하는 능숙한 뱃사공도 있기 마련이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6~1682)선생은 ‘무술주행기(戊戌舟行記 무술년에 배를 타고 가며 남긴 여행기)’에서 “황포돗배는 조강포에서 만조를 기다렸다가 단숨에 밀물을 타고 한양(현재 서울)까지 내달렸다”고 했다. 밀물로 인한 파도 때문에 고생한 이가 있는가 하면 밀물을 이용하여 물류시간을 줄이는 찬스에 강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조강의 두 얼굴이라 하겠다. 임진강 한강을 동시에 살핀 후 고개를 돌리니 뒤편 광장에는 ‘평화의 종’이 몇 가지 중첩된 사연을 안고서 매달려 있다. un(유엔)이란 글자를 형상화한 웅장한 철 구조물이 종루를 대신했다. 아널드 슈워츠만 선생에게 재능기부를 받은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88서울올림픽 디자인 자문위원을 지낸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종을 제작한 이는 주철장(鑄鐵匠) 국가무형유산 기능 보유자(112호) 원광식(元光植)선생이다. 몇 군데 광고모델로 나올만큼 ‘혼을 담은 집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쇳물이 눈에 튀어 한 쪽 눈을 잃고도 가업으로 이어오는 종 만들기에 평생을 바친 어른이다. 평화의 종은 동양의 종 장인과 서양 디자이너 합작품인 셈이다. 종 재료에는 더많은 사연이 함께 녹아 있다. DMZ 녹슨 철조망과 유해 발굴현장에서 나온 탄피 그리고 철거된 애기봉 점등 철탑의 파편 등이 함께 들어간 합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겨울 낮은 짧다. 저녁 해를 뒤로 하고서 서둘러 길을 나섰다. 한강을 옆에 끼고 달리며 그동안 다녔던 민통선 안의 유적답사 일정을 되돌아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안보관광’이란 이름으로 민간인 통제선은 역사성을 지닌 관광지 중심으로 일부 개방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연천 장남면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도 들를 수 있었고, 철원 월정리 역에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 외치며 포격에 부서져 잔해만 남은 기차도 만날 수 있었다. 연천 왕징면에 있는 조선의 명필이요 대학자인 허목 선생 묘역도 찾았다. 예약이 필수인지라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덕분에 오히려 관광 뒤에 오는 만족도가 훨씬 높았다. 또 종로 조계사에서 거리가 가깝고 교통체증으로 인한 부담도 없이 가볍게 다녀올 수 있으며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한적함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나의 여행취향과 잘 맞아떨어졌다. 김포의 조강전망대도 그랬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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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다사다난'이라는 인사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
국사 사후에 때 왕은 원주에 소재한 국가관리 창고에서 장례식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토록 했다.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이 지역은 예로부터 물길교통이 편리하여 인근 지역에서 세금으로 거둔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지금도 흥원창(興元創)이란 창고 터가 남아있다. 이제 그 자리는 두 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로써 저녁노을의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우리 답사팀 일행도 노을이 지는 시간에 맞추어 그 자리를 함께 했다. 그렇게 다사다난 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통과의례를 치루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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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물, 빛, 바람이 머문 '붓다의 언덕'
본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비와 바람을 막고 햇빛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로 지어졌다. 또 보온과 안전을 위하여 문의 크기는 최소화 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단열기술이 발달하면서 창문의 크기는 넓어졌고 자연채광을 통해 실내를 환하게 만드는 것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바깥의 바람 그리고 눈·비와 단절되면서 완전히 자연과 격리된 공간에 대한 심리적 불만층도 늘어갔다. 뺨에는 바람이 스쳐가고 마당에는 눈이 쌓이고 처마에는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그리워하는 자연주의자들을 위한 집들도 등장했다. 안도 다다오는 공공건물에 빛과 바람과 눈비를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건축계의 선구자로 불리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