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황희정승의 마지막 은거지 반구정 정자에 오르다

원철 스님
[원철 스님]

 
별로 잘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팔순이 넘어서야 세종임금께 겨우 퇴임을 허락받았다. 수십년을 살았던 한양을 떠나 연고지 파주로 가는 길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쉬엄쉬엄 가더라도 이틀이면 될 것이다. 말등에 올라앉아 가는 길을 산천유람 삼아 천천히 몸을 옮기다보니 지난 팔십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제 나, 황희(黃喜 1363~1452)는 모두 들으라고 이렇게 독백(獨白)하노라.
 
고려 공민왕 때 개경(개성)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고려왕조가 문을 닫았다.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지조있는 구시대의 인물들과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 빗장을 걸어 잠근 채 동구 밖을 나가지 않았다. 이를 보고서 남들은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미화했다.
 
하지만 새 왕조는 인재난에 시달렸다. 그래서 두문동으로 사람을 보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발탁되면서 하산해야 했다. 왕조는 바뀌어도 백성은 바뀌지 않았으니 그들을 위해 일할 젊은 인재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변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동료 정건천(程巾川)은 이를 애석히 여기면서 “그대는 청운(靑雲)에 올라 떠나가고 나는 청산(靑山)을 향해 돌아가네. 청운과 청산이 이에 갈라서니 눈물이 옷(碧羅衣)을 적시는구나”라는 이별사를 접할 때는 가슴이 찢어졌다. 하지만 은거할 사람은 은거할 몫이 있고 출사(出仕)할 사람은 출사할 몫이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위로 하면서 은둔지를 빠져 나왔다.
 
이왕 세상으로 나왔으니 최선의 삶을 살아야 했다. 태종 임금은 “하루 이틀 눈 앞에 없으면 바로 불렀고 하루라도 곁에서 떠나지를 못하게 했다”고 말씀하실 할 정도로 과분한 신임을 받았다. 세종이 소현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궁중에 설치한 내불당(內佛堂)문제로 신하들과 격한 갈등이 생겼을 때 이를 중재하다가 오히려 눈 밖에 날 뻔 했지만 이후에도 임금께서 끝까지 아껴주신 큰 은혜는 어찌 가히 말로써 다할 수 있으랴.
 
1423년 영동지방에 큰 흉년으로 인하여 민심이 흉흉하다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한양에서 동쪽으로 가장 먼 거리인 삼척으로 발령이 났다. 관찰사로 파견되었을 때 최선을 다해 백성을 보살폈고 사재까지 털어 기근을 극복했다. 그 덕분에 지역주민들은 소공대(召公臺)라는 단(壇)을 만들고 공덕비까지 세워 주었다. 소공대비(召公臺碑)가 바로 그것이다. 내려다보이는 동해바다가 일품인 와현(瓦峴)고개는 내가 머리를 식힐 때마다 산책삼아 와서 쉬던 곳이다. 이후 지역주민들은 소공령(召公嶺)으로 바꿔 불렀다. 당치도 않는 말이지만 주나라 공신인 소공(召公)의 덕(德)에 비견할만한 인물이라는 과찬이 뒤따랐다. 제일 힘들었던 시기는 전라도 남원에서 5년(1418~1422)간 유배생활을 한 일이라 하겠다. 그 때 뭐라도 해야될 것 같아 누각인 광통루(廣通樓)를 건립했다. 현재 광한루(廣寒樓)의 전신으로 《춘향전》의 무대가 되었다. 이처럼 오지 근무와 유배생활을 통해 관료로써 내공을 더욱 단단하게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양으로 복귀했다. 수십년 벼슬살이를 하다보니 태조에서 문종까지 다섯임금을 섬기면서 6조판서와 3정승 그리고 모든 요직을 두루 거쳤다. 임명장을 모아 여덟 폭 병풍을 만든다면 앞뒤를 꽉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걸어다니는 조선정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어쨋거나 관운이 좋았던 덕분에 여말선초의 혼란기와 세종의 태평성대까지 관료로써 복무할 수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영원히 나를 ‘황희정승’이라고 불러 주었으니 이런 영광이 또 어디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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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 언덕아래 임진강이 유장하게 흐른다, 사진 원철스님 제공] 


 
장거리 이동으로 인하여 마부와 시종마저 지칠 무렵 드디어 임진강이 보인다. 그동안 한강물을 먹었는데 이제부터 임진강물로 바꾸어 마셔야 한다. 노구인지라 혹여 물갈이로 인하여 생기는 속탈은 없기를 바랬다. 낙하진(洛河津) 포구에 있는 낙하정(洛河亭) 정자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저멀리 젊은 시절 은둔지 였던 개경의 두문동도 보인다. 이제 여기에서 갈매기와 벗하며 은거하겠다는 의미로 반구정(伴鷗亭)으로 바꾼 현판을 달았다.
 
뒷날 조선의 제일 문장가요 명필로 이름을 떨치던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6~1682)후학이 나를 대신하여 〈반구정기(伴鷗亭記) 〉를 통해 주변까지 잘 묘사해 주었다. “반구정은 파주 읍내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임진강 하류에 있는데 썰물이 되어 갯펄이 드러날 때 마다 갈매기(白鷗)들이 강가로 날아든다. 잡초가 우거진 넓은 벌판이 있고 모래톱에는 강물이 넘실거려 9월이면 기러기(陽鳥)가 찾아온다. 서쪽으로 바다 어귀까지 20리이다.” 
팔순 중반에 퇴직한 뒤 90살에 세상인연이 다할 때까지 반구정 인근에서 유유자적하며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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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 정자는 날아갈듯이 훤출하다, 사진, 원철 스님]

 
생각해보니 참 오래도 살았다. 그럼에도 은거터에 대한 집착은 사후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질겼다. 무덤에 누워서도 늘 반구정을 향해 눈과 귀가 저절로 쫑곳하게 세워진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자와 후손들이 힘을 합해 낡은 반구정을 헐고 새로 크게 짓는다고 했다. 조금 아래쪽에 넓고 평평한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 쪽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평수를 넓히고 더 좋은 자리로 옮겨 주는 것이 고맙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내가 골랐던 터에 대한 미련은 남을 수 밖에 없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본래 자리에 다시 앙지대(仰止臺)를 건립했다. 앙지는 《시경(詩經)》〈소아(小雅)〉편에 나오는 “고산앙지(高山仰止) 경행행지(景行行止) 높은 산을 우러러 보고 큰 길을 따라 걸으니 그 덕행을 본받는다”에 근거했다. 안심에 더하여 흐믓한 마음까지 겹쳐진다. 반구정 한 채 밖에 없던 언덕에 양지대 정자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졸지에 두 채의 집이 생겼다. 어쨋거나 청백리가 사후에 설사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손가락질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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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소공대비 유적,  사진 원철 스님]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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