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스님]
억새꽃이 제철이다. 낙동강변을 따라 길게 군락을 이루고 가을바람과 저녁햇살이 교차하면서 더욱 아름다운 자태로 반짝이며 흔들리고 있다.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입구에는 규모가 엄청난 은행나무 몇 그루가 앞마당 한 켠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 단(壇)을 설치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이 나무는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유교를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서원 언덕에 있는 한 그루는 제 힘으로 서 있지만 평지의 두 그루는 서로 의지하면서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지라 가지보호를 위해 인공기둥 몇 개를 받쳐 놓았다. 그럼에도 그 가지에 달려있는 잎들은 여전히 기운차게 무성하다. 이상기온 탓인지 10월 하순인데도 끝여름처럼 푸릇푸릇하다. 누런 황금색 잎들이 가을바람에 쏟아지듯 흩날리는 풍광을 상상하면서 서원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이층누각 정면에는 ‘수월문(水月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낙동강물(水)에 비친 보름달(月)을 바라보면서 그 감흥을 이기지 못한 순간을 포착하여 문자화한 것일까? 그것은 누각마루에 서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절집에서도 수월은 익숙하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고 했다. 하늘의 달은 한 개이지만 일천 강물에 비친다. 그래서 모든 물의 달을 하늘의 한 달이 포섭한다(一切水月 一月攝)고 했다.
자연스럽게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이끼 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두 번 째 관문인 환주문(喚主門)이 나타난다. 주인공을 부르는 문이다.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른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주인공은 물론 나 자신을 가르킨다. 불교입문서인 야운(野雲)비구의〈발심장(發心章)〉글머리에 “주인공아! 청아언(聽我言 내 말을 들어보라)하라”고 하면서 시작된다. 내가 나에게 묻는 문답형식의 글이다.
사당에 배향된 인물은 김굉필(金宏弼 1454~1504)선생(이하 등장인물 존칭 생략)이다. 현재 건물은 선생의 외증손자인 정구(鄭逑1543~1620)가 중건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심은 나무가 현재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라고 전한다. 담장과 건물 등이 나라에서 1963년 보물급으로 지정했으며 2007년에는 서원 전역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홉 개 서원 묶음 가운데 하나다. 조선시대 서원의 원형과 정신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도동(道東)’라는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퇴계 이황(1502~1571)께서 김굉필을 가르켜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 조선 주자학계의 으뜸가는 인물)’이라는 천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더 넓게 의미를 확장하면 도동(道東)는 송나라 주자학이 해동(海東 우리나라)으로 전해진 후 우리나라가 주자학의 종주국이 되었다는 자부심의 반영이기도 했다.
도동설(道東說)은 조선의 주자학계 뿐만 아니다. 선종의 동도설(東道說)은 이미 신라 말에 등장했다. 당나라 백장(749~814 마조의 제자)선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개산조 도의(道義)에게 “강서(江西)지방 마조(馬祖709~788)의 법(法)이 이 모두 동국의 승려에게 넘어가는구나?”라고 칭찬하면서 수행의 깊이를 인정했다. 어쨋거나 주자학과 선종은 중국에서 꽃을 피우고 한반도에서 열매를 맺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낙동강변 지역이라 그런지 물 수(水)가 들어간 당우가 많다. 중앙의 수월문을 포함하여 서원 서쪽에는 관수정(觀水亭)이 있으며 동쪽에는 정수암(淨水庵)이 있다. 관수정은 김대진(金大振 1571~1644)이 지은 정자다. 김굉필의 5대손이며 임진란 때 곽재우(1552~1617)와 함께 의병장 활동을 했다. 서원의 권역에서 낙동강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논어》에는 ‘지자요수(知者樂水)’라 했다.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 《노자도덕경》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흐르는 물처럼 쉼없이 노력하며, 물처럼 장애물과 다투지 않으며, 또 맑은 물처럼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했다. 정수암은 물 맑은 샘을 가진 암자이다. 김굉필의 집안에서 대대로 조상께 정수(淨水)를 올리며 여묘(廬墓)살이를 하던 초막이 세월이 흐르면서 사찰로 바뀌었다.
묘역은 서원 동편에서 산길을 따라 460m 지점에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숨을 몰아쉬며 등산 아닌 등산을 했다. 등줄기에 땀이 주루룩 흐를 즈음 큰 봉분 두 개가 나타난다. 넷째아들 부부의 묘라고 했다. 다시 80m를 가르킨다. 셋째딸 무덤을 지나간다. 셋째딸은 어머니가 병환일 때 시댁 성주에서 수십차례 미음을 끓여 백여리를 걸어 왔다고 하는데 그 때까지 죽이 식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 때문에 이 자리에 묻히게 되었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다시 직각으로 구부러지면서 손자 묘 위에 김굉필 묘 그리고 그 뒤편에 부인 박씨 묘 3기가 나란히 일렬로 자리잡고 있다. 김굉필 묘 앞에 있는 장명등인 쌍사자 석등은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총 6기의 기역(ㄱ)자형 가족묘역이다.
그리고 보니 김굉필은 인근의 명산인 가야산과 인연이 많다. 처가가 합천 가야산 입구 동네인 야로면이다. 19세 때 순천 박씨부인 집으로 장가를 든 후 동네 주변에 작은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란 글씨(현재 한훤당 종택은 현풍에 있다)를 달았다. 가까운 해인사 절에도 자주 왕래하면서 승려들과 이런저런 도담(道談)도 나누었을 것이다. 한훤(寒暄 차고 더움)은 외형은 차갑도록 엄격하지만 속마음은 항상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양변을 동시에 포함한 중도(中道)적인 이름이라 하겠다. 수월문 환주문도 불교적 관점으로 재해석이 가능한 편액이다. 서원 중창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가야산 뒷자락 고을인 성주 출신이다. 수륜면에 당신을 배향한 사당인 회연서원이 있다. 효심이 지극했다는 셋째딸의 시댁도 성주다. 스승인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종택은 가야산 앞줄기가 길게 뻗어내린 고령군 쌍림면에 있다. 그러고보니 도동서원은 가야산 문화권이 배출한 수많은 인물들이 사방에 포진한 형국인 셈이다. 답사를 마친 후 그러한 토지인연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해가 지는 가야산을 향해 갈 길을 재촉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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