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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공청단파면서 당•정•군 고위직 인사의 자제를 일컫는 태자당 출신이다. 부친 류루이룽(劉瑞龍)은 어릴 때부터 중국 공산당의 혁명운동에 참가한 혁명 원로였다. 항일전쟁 때는 대장정에 직접 참여했고 인민해방군 제3야전사령군 후근사령원(사령관) 겸 정치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건국 뒤엔 상하이시 당 위원회 비서장과 농업부 부부장을 지냈다.
류옌둥은 30년에 달하는 공직생활 대부분을 공청단과 중앙통일전선공작부에서 보냈다. 특히 중앙통전부에서는 1991년 부비서장을 시작으로 부부장과 부장직까지 올랐으며 중앙통전부 부장 자리를 두칭린(杜靑林) 당시 쓰촨(四川)성 당 서기에게 물려줄 때까지 17년간 근무했다.
원적이 장쑤(江蘇)성 난퉁(南通)인 류옌둥은 1945년 11월 화이안(淮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류루이룽(劉瑞龍)이고, 어머니는 장퉁(江通)이다. 항일전쟁 시기에 류루이룽은 신사군(新四軍)에서 화이베이쑤환변구(淮北蘇?邊區) 행정공서(行政公署) 주임 등의 요직을 맡았다.
류옌둥의 남동생인 류옌선(劉延申)은 현재 홍콩에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류루이룽은 자녀들에게 엄격했다. 밥그릇에 있는 밥알은 남기지 말도록 했고, 관용차는 가족들을 태우지 않았다.
류옌둥은 1964년 칭화대학 공정화학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류루이룽은 상하이 감옥에 구금돼 5년을 복역한다. 부모와 연좌된 류옌둥은 박해를 받다가 1970년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 카이핑(開平)화학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1976년 문혁이 끝난 후 류루이룽은 다시 정계로 복귀했고 류옌둥은 1980년 중국공산당 베이징시위원회 조직부 간사를 맡았고, 이듬해 베이징 차오양(朝陽)구 위원회 부서기로 승진했다.
◆9년여 공청단 생활
1982년말 류옌둥은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당선되는 일을 시작으로 9년여의 공청단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제1서기는 왕자오궈(王兆國) 현 전인대 부위원장이었고 상무서기는 후진타오였다. 2년후 후진타오는 공청단 제1서기로 승진했고, 류옌둥은 상무서기로 올라서 후진타오의 유능한 조수가 됐다.
류옌둥은 공청단에서 미성년자보호법 제정을 주도했다. 그는 전문가, 유명인사들과의 토론과 협의를 통해 5년여 법안을 준비했고 법안을 완성해 1991년 공포 시행시켰다. 이로써 중국에는 소년법정이 생겼고, 소년범은 소년형무소에서 구금됐으며, 아동착취, 아동인신매매 등의 문제도 이 법으로 다뤄지게 됐다.
순탄한 길을 걷던 그는 1989년 톈안먼사태때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공청단 제1서기였던 쑹더푸(宋德福)가 병으로 인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상무서기이던 류옌둥이 공청단을 이끌게 됐다.
공산당 원로들은 공청단이 학생운동을 가라앉혀 주길 종용했고, 류옌둥은 사태를 최대한 대화로 해결하길 원했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시위는 확산일로를 걸었고 결국 인민해방군이 투입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톈안먼사태 이후 통전부로
류옌둥과 리위안차오(李源朝, 현 중앙조직부장) 등 공청단 고위층은 톈안먼 사건동안 태도가 충분히 강경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좌천을 당하게 된다. 1990년 리위안차오는 중앙 대외선전소조 1국 국장으로, 1991년 류옌둥은 공산당 중앙통일전선공작부(통전부) 부비서장으로 옮겨간다.
통전부는 중국의 계층, 계급, 정당, 집단, 민족, 국가, 종교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작업을 하며 구체적 업무에는 소수민족과 종교계의 대표인물들과 관계를 맺거나, 대만과의 통일이나 홍콩, 마카오와의 통합등에 대한 정책을 입안하는 곳이다.
통전부 부비서장은 공청단 중앙서기처 상무서기가 가기에는 다소 빈약해 보이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반년후 장쩌민(江澤民)의 도움을 받아 류옌둥은 통전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녀는 2002년까지 11년동안 통전부 부부장을 맡았다. 류옌둥이 주로 했던 업무는 민주당파 고위층 및 당외 고급지식인들과의 교류와 통합작업이었다. 또 다른 주요업무는 홍콩, 마카오, 타이완의 유명인사와의 교류였다. 그는 홍콩반환작업에 참가했고, 일찍이 전국인민대표 홍콩특구 준비위원회에도 참여하면서 홍콩친구들이 많고, 홍콩사무에 정통했다.
그는 2002년 11월 그는 통전부장에 보임된다. 동시에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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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홍콩방문, 인민에 각인
류옌둥이 중국 인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통전부장으로서 홍콩을 방문하면서다. 2003년 7월1일 50만명의 홍콩 시민들이 대규모 가두시위에 나서 둥젠화(董建華) 행정장관의 해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여론이 가라앉나 싶더니 이듬해인 2004년 경제불황 중에 홍콩시민들은 둥젠화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중국공산당은 행정장관 직선제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홍콩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은 통전부장인 류옌둥을 5월 홍콩으로 급파한다.
그는 그곳에서 4일간의 일정에 30여차례의 각종 활동에 참석했고, 일정은 조찬시간부터 심야시간까지 꽉 찼다. 하지만 류옌둥은 처음부터 끝까지 활기차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정치,경제계 요인을 만났고 금융계, 종교계, 청년계, 언론계의 대표인사들을 두루 만나 홍콩 각계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사람 한사람과의 대화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고, 연설을 할때마다 화합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홍콩언론들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문회보는 “류윈동의 매력이 홍콩을 경탄시켰다”라는 평론을 실었다. 홍콩신보는 “류옌둥의 부드러운 태도와 온화한 언변은 홍콩에 화합의 바람을 불게 했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그녀는 화합을 강조했으면서도 홍콩의 민주당파 인사들을 만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딸이 이미지메이킹 전담
류옌둥과 그의 남편인 양위안싱(楊元惺)은 어린 시절 친구였다. 양위안싱의 아버지는 미국 코넬대학의 농학박사출신이다. 양위안싱은 1980년대에 중국과학기술협회 부동산건설 판공실 주임을 맡으면서 부동산개발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전국 각지에 있는 중국과학기술협회의 과학기술회당, 회의센터, 부속 휴양시설등의 건설을 담당했다.
이후 관직을 벗어나 루이부동산개발유한공사(魯藝房地産開發有限公司) 이사장을 맡고 있다. 루이부동산공사는 루이문화원(魯藝)을 조성하기도 했다.
류옌둥과 양위안싱은 딸 한명이 있다. 딸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가 패션디자인 공부를 했고 어머니의 이미지메이킹에 관한 컨설턴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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