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차 수요 둔화와 트럼프발(發) 고율 관세 악재에 시달리는 국내 배터리 업계에 또 다른 실체적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 현대차를 비롯한 주요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들이 배터리 설계와 생산을 분리하는 '파운드리(위탁생산)' 모델 도입을 서두르면서 단순 생산만 담당하는 하청 업체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납품 단가 절감에 몰두할 수밖에 없어 기술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1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완성차 업체 스스로 전기차 배터리 개발과 생산을 내재화하는 전략이 본격화하고 있다. 현대차는 2026년 말까지 경기 안성에 배터리 연구개발(R&D) 시설을 준공하고 양산 라인도 갖출 계획이다. 가동 시점은 2028~2029년이다.
테슬라는 2030년까지 3TWh 규모로 배터리 생산 설비 구축을 추진 중이다. 도요타도 2027년 전고체 배터리 탑재 전기차 출시를 목표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전기차 생산 단가에서 40% 안팎을 차지하는 배터리를 자체 개발·생산해 가격과 기술 경쟁력을 동시에 제고하겠다는 복안이다. 성공 모델이 있다. 중국 비야디(BYD)는 이런 방식으로 중국을 포함한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 1위, 배터리 판매량 2위를 질주 중이다.
배터리 분야 파운드리 모델이 정착하면 국내 배터리 업체는 주문에 따라 생산만 하게 된다. 대량생산과 원가 절감에 집중하다 보면 신기술 개발 등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그동안 독자적인 기술력과 차별화된 제품 경쟁력을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해 왔다"며 "전기차 제조사들이 배터리 설계·생산을 분리하고 내재화를 강화하면 배터리 업체는 위탁생산 업체로 전락해 시장 주도권을 점점 잃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과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전기차 확대 저지 정책이 맞물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국내 배터리 업계로서는 상상하기 싫은 전개다. 전문가들은 차세대 기술 선점과 공급망 다변화로 완성차 업체가 따라오기 힘든 격차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주문한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완성차 업체들이 내재화 전략을 가속화할수록 배터리 기업의 가격 협상력은 위축될 것"이라며 "차세대 배터리 기술을 선도하고 완성차 업계와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게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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