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은행은 경제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면 하루빨리 부실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데는 같은 의견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구조조정 방식 등을 둘러싸고 서로에 대한 불만이 심각한 수준이다.
은행들은 정부가 겉으로는 자율을 내세우면서 뒤에서 지나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부가 전면에 나서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은행이 못마땅하다. 구조조정의 칼자루를 내줬지만 제 앞가림에만 몰두해 지나치게 몸을 사리고 있다는 판단이다.
정부와 은행간 불신이 심각하다 보니 부실징후 기업을 솎아내는 잣대가 정부 입김 등에 따라 달라지는 데다 은행들의 자본을 늘려주기 위한 자본확충펀드 역시 출범 전부터 삐걱대고 있다.
◆정부-은행 서로 `부글부글'
최근 은행권은 시공능력 상위 100위 권의 92개 건설사와 19개 중소 조선사의 신용위험을 평가해 대주건설과 C&중공업을 퇴출 대상인 D등급, 건설사 11곳과 조선사 3곳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인 C등급으로 분류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모 건설사의 경우 은행 자체적으로 판단할 때 큰 문제가 없던 곳인데, 막판에 C등급으로 분류돼 은행 내부에서조차 의아해했다"고 토로했다.
금감원은 등급 분류 마감을 앞두고 A, B 등급으로 분류한 기업이 부도날 경우 해당 은행에 책임을 묻겠다고 엄포를 놓은 바 있다.
은행들의 불만은 대체로 "정부가 은행 자율이라고 말하면서 자꾸 보이지 않는 손을 쓰니까 헷갈린다.", "정부가 속도만 강조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 "채권은행과 기업 간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무 자르듯 자르라고 한다" 등이다.
모 은행 관계자는 "차라리 부실기업 판단을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은행이 주거래 기업에 `레드 카드(C 또는 D등급)'를 꺼내들기가 쉽지 않고, 부실 판정 잣대 역시 자의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해당 기업들의 거센 반발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또 부실기업이 늘어나면 은행 건전성과 순이익에도 영향을 미쳐 금융기관 자율 구조조정 작업은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은행 담당자는 "은행들이 자체적으로 선별해 지원하거나, 지원하지 않으면 자율적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질텐데 굳이 A~D등급으로 분류해 요란하게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모 은행권 인사는 "민간 금융회사에 구조조정을 강요하지 말고 국책은행에 공적 자금 투입을 늘려 기업을 지원토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정부도 은행에 대해 불만이 많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융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은행들의 몸부림은 이해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은 국가 경제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의 다른 관계자는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 결국에는 은행들의 건전성을 높이는 방법이 될 것"이라면서 "지금 당장 고통스럽다고 해서 부실 처리를 미루면 더 큰 부담을 떠안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본확충펀드 '갈짓자'
정부와 은행간 엇박자는 자본확충펀드에서도 드러난다. 정부는 당초 이달 중 20조 원 규모의 자본확충펀드를 출범시킬 예정이었으나 세부 운영 방안을 마련하는데 진통을 겪으면서 다음 달로 늦춰졌다.
운영 방안도 애초 구상과는 달라졌다. 정부는 은행들이 구조조정과 중소기업 대출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자본을 늘려주기 위해 이 펀드로 은행의 우선주나 상환 우선주, 신종자본증권, 후순위채를 사들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선주 등 주식은 사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경영권 간섭에 대한 은행들의 우려를 불식하고 기존 주주들의 이익 침해 등을 고려한 조치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우선주 등 주식은 매입하지 않고 주로 신종자본증권과 일부 후순위채를 사들일 예정"이라며 "이달 말 또는 내달 초 운영계획을 발표하고 작년 말 기준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이 나오는 2월 중순부터 신청을 받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은행들은 이 펀드를 이용하기가 여전히 부담스럽다는 입장이다. 현재 신청 의사를 밝힌 곳은 우리은행과 기업은행, 광주은행, 전남은행, 전북은행, 농협, 수협 등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1차 펀드 규모는 5조 원 안팎으로 예상된다.
모 은행 관계자는 "주식이 아닌 채권만 매입하면 은행들이 펀드를 받을 유인이 있지만 정부가 은행들에 어떤 양해각서를 요구할지 지켜본 뒤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은행들이 국민 혈세를 받는데 `무임승차' 하도록 정부나 시민단체가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 담당자도 "이 펀드를 이용하면 BIS 비율은 올라가겠지만 정부가 이를 빌미로 발목을 잡고 여러가지를 요구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전문가 "정부 제한된 범위에서 관여해야"
전문가들은 정부와 은행간 갈등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실물경제 추락 속도가 예상보다 가파른 상황에서 양측의 엇박자가 지속될 경우 구조조정 작업이 늦어지고 결국 경제 회복도 늦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한계기업이 무너지면 은행의 손실로 잡히기 때문에 은행들은 구조조정을 꺼리고, 정부는 전체 경제 측면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배 연구원은 "은행은 사기업이지만 공적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며 "외환위기 때처럼 정부가 직접 개입할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시장, 은행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하되 제한된 범위에서 정부가 관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앞으로 실물 경제침체로 은행의 부실규모가 커지고 한은의 추가적인 금리 인하로 수익창출이 줄어 들면 은행들도 결국 정부의 정책 방향에 동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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