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이란 말이 있다. 뭐 여러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말이다. 토끼가 죽고 나면 토끼 사냥에 쓰던 사냥개마저 주인이 삶아 먹는다는 옛말이다. 다시 말해 필요할 때는 온갖 아첨과 비굴함을 보이지만 정작 쓸모가 없게 된 후에는 뒤도 안돌아보고 버린다는 야박한 인심을 말한다.
21세기, 초단위의 변화가 일상생활이 된 지금의 경쟁 시대에서 토사구팽이란 어쩌면 자신의 삶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수단일지 모른다. 점점 인심이란 말이 사라지고, 인간관계를 이어주던 도구도 텍스트에서 전파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변화되고 있다. 편지가 이메일로 대체되고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돌리던 전화기가 이젠 ‘목소리’로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편리한 세상 아닌가.
자,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지금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영화계라고 별수는 없을 것이다. 본 코너의 각주를 통해 밝힌 바와 같이 신생매체 영화기자로서 현장에서 느낀 소회와 감정은 매번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한다. 빠르게 솟구치는 속도만큼 떨어지는 속도 또한 마찬가지다. 매번 웃을 수 만 없고, 또 매번 인상 찌푸리는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게 인간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최근 개봉해 승승장구를 펼치는 한 영화의 제작사 대표 전화를 받고 ‘기자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해당 영화에 대한 개인적 관심도 있었지만 대중들의 니즈(needs)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기사를 생산해 냈다. 영화란 콘텐츠 상품을 만든 공장장 입장에서야 해당 상품을 다각도로 분석해 대중들에게 알려주니 ‘엎드려 절 받기’나 다름없는 일 아니겠나. 물론 기자가 해당 공장장님과의 개인적 친분을 이유로 저지른 일은 아님을 먼저 밝힌다.
기자 본인이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공장장님 입장에선 말라비틀어진 논바닥에 쏟아지는 단비였던 모양이다. 글자로 옮기기에 민망할 정도의 칭찬 세례를 듣고 있자니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였다. 독자로부터 이런 전화만 받는다면, 기자도 꽤 할 만한 직업일 것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인연이 이어지는구나’란 생각에 뿌듯한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다시 한 번 기자란 직업에 나름의 자부심도 느껴본다. 자화자찬이자 자기만족이다. 뭐 그래도 어떠랴. 이 정도 맛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글을 쓰는 지금도 자위 중이다.
자위, 다시 말해 맘속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다. 문제는 이 자위가 기자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최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 그 분께서 배가 많이 고프셨는지….
무관심은 그 어떤 폭력보다도 잔인하다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인연이라 생각한 끈이 혼자만의 착각 속에서만 매어진 썩은 동아줄이었단 사실에 씁쓸함을 넘어 인간적 배신감마저 느낀다.
누런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황망한 돛단배처럼 외로움도 잊은 채 기자는 오늘도 현장을 누빌 뿐이다. 다만 이젠 눈만큼은 똑바로 뜨고 다녀야겠다. 양지바른 평탄한 육지로 끌어줄 든든한 줄이 썩은 놈인지 아니면 곯아 터진 놈인지는 확실히 구분해 잡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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