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그대는 말했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맞서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는 것이라고, 살아서 신이 되지 못할 바에는 조금 비겁해지고 더럽게 살아야 한다는 것, 전부가 아니면 전멸이 되는 것.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 대한문에 퍼지는 슬픔의 눈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나흘째인 26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부터 덕수궁 대한문까지 이어지는 돌담길에는 서거를 애도하는 검은 리본과 노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뒤섞여 매어 있었다. 시민들은 애잔함이 느껴질 만큼 리본 하나하나에 마음을 남겼다.
“사랑합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편히 가세요. 죄송하고 사랑해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글귀에는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회한이 담겨있었다.
돌담길 한 켠에는 생전에 대통령이 좋아했다는 담배와 수백송이의 국화꽃, 막걸리 한 병이 놓여있었다. 대통령의 사진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는 노사모 회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노사모 회원 여태식(69) 씨는 “안됐지. 안됐어. 너무 슬퍼”라며 안타까워했다.
한 할머니는 기자의 질문에도 아무 말 없이 서럽게 울었다. 한참동안 눈물 흘리던 할머니는 뭔가를 종이에 고이 적어 벽 한 켠에 붙이고 자리를 떠났다. 그는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당신은 훌륭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한문 분향소 조문행렬은 시청역 입구를 지나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한 할아버지는 줄 서있는 사람들에게 “있을 때 잘하지!”라며 호통을 쳤다.
익명을 요구한 젊은 남성은 분향을 마치는 순간부터 돌담길을 끼고 걸어가면서 연신 눈물을 훔쳤다.그는 슬퍼서 할 말이 없다면서도 “대통령이 그렇게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하셨기 때문에 남은 우리가 대한민국을 지킬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허름한 차림의 한 남성은 긴 추모행렬 옆에 주저앉아 있었다. 휴지 한 움큼과 막걸리 세 병을 옆에 가지런히 두고 미동도 없이 신문 속 대통령의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얼마나 운 것인지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을 대로 부어있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아픔이 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눈물을 흘리며 리본 하나하나의 글귀를 읽던 학생 박소영(26) 씨도 “왜 진작 그분의 진가를 알지 못했는지 화가 난다. 역사가 평가해주실 것”이라고 말하곤 리본이 길게 늘어선 돌담길을 따라 걸어갔다.
◆ 시종일관 엄숙한 분위기의 서울역사박물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역사박물관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향냄새가 온몸을 휘감았다.
제단에는 하얀 국화 무더기와 노 전 대통령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그는 영정 속에서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분향소 안은 담담하고 엄숙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제단 앞에서 절을 했다.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는 사람, 일터에서 바로 온 듯 허겁지겁 분향소로 들어오는 사람 등 조문객 모두 각각의 사연과 아픔을 가슴 한 켠에 두고 조문을 마쳤다.
대학원생 이도형(25)씨는 “분향하러 오기 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봤다”며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똑같이 마음이 착잡하다”고 말했다.
한 아이는 분향소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도 ‘슬픔’의 의미를 알고 있는 걸까. 기자가 말을 걸자 아이의 엄마는 이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양재동에서 사는 주부 김혜영(33) 씨. 그는 “원래부터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고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도 함께 했다. 너무 슬프다”며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썼다.
젊은 세대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교복을 입고 조문을 온 한 무리의 학생들도 눈에 들어왔다.
대학교 2년생인 이윤영 씨는 “정치에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 같다”며 “추모와 함께 젊은 세대로서 책임을 느끼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백재예 씨는 “너무 엄숙해서 인간 노무현이 아니라 대통령 노무현의 모습을 느끼고 돌아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허영환 서울역사박물관 자문위원장은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참 걱정스럽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조위록에 노 전 대통령을 향한 마음을 담았다.
“당신은 독수리같은 큰 새였습니다. 거센바람이 불어도 하늘 높이 날았고, 물살이 센 물결은 헤치고 등용문에 올라가 용이 된 분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이보람 기자 boram@ajnews.co.kr
('아주경제=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