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위안화 절상을 통한 무역불균형 해소, 금융시장 개방, 지적재산권 보호. 경제분야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세계가 중국을 공격하는 세가지 단골메뉴다. 중국의 막대한 무역흑자는 중국당국의 저환율정책에서 비롯됐으니 이를 조정해야 하며, 금융시장을 개방해 자유로운 자본투자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중국에서 범람하고 있는 짝퉁제품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라는 것이 요지다.
한창 경제성장중인 중국으로서는 이에 대한 획기적인 자세전환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또한 서구세계의 주장에는 무리가 적지 않아 억울하다는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이 같은 서구세계의 압박에 대응해 앞장서서 중국의 방패역할을 하는 관료로는 왕치산(王岐山) 국무원 부총리, 천더밍(陳德銘) 상무부장, 저우샤오촨(周小川) 인민은행장 등 세명이 꼽힌다.
왕치산 부총리는 역사학도 출신인 점을 살려 미국과 중국의 역사적인 흐름을 강조하며 능수능란한 화술로 적극 대응하고 있으며, 저우샤오촨은 중국의 대표적인 금융통인만큼 전문성을 내세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천더밍 상무부장 역시 박사출신으로 전문성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그의 강점은 단연 부드럽고 편안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있다.
통상문제를 총괄하는 상무부장으로서 그는 무역불균형 문제와 덤핑문제로 인한 무역마찰, 지재권문제 등에 대해 최일선에서 중국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자연스레 강한 비판을 해야 할 상황이 많지만, 날카로운 칼날을 머금고 있는 발언이더라도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면 부드러운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이웃집 동네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을 지니고 있는 천더밍은 온문이야(溫文爾雅, 태도가 온화하고 행동거지가 우아하다), 화풍세우(和風細雨, 산들바람과 보슬비처럼 온유하고 부드럽다)의 성격의 소유자로 곧잘 평가되곤 한다. 화려한 미사여구는 아니지만 온화하고 품위 있는 말씨에서 책 향기가 풍긴다.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며,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을 궂이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소통의 능력을 지닌 것이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항상 마음의 중심을 잡고 있으면서도 대세를 파악하고 기다릴 줄 아는 인생의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여가시간을 활용하는 데에서도 그의 개성은 묻어 나온다. 그는 주말이면 홀로 독서를 하거나 산책을 한다. 부인과 함께 조용히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경치를 구경하고 돌아올 때도 많다. 화훼에 조예가 깊은 부인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한주의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의 온화한 풍모는 곧잘 전임자인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서기와 비교된다. 2004년 상무부장에 오른 보시라이는 직선적이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당시 철낭자로 불리며 강한 톤으로 중국의 이익을 적극 대변하던 우이(吳議) 부총리와 함께 보시라이 전 상무부장은 때로는 서구사회를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때문에 치밀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표현방식에 있어서 서구의 불필요한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우려도 낳았다. 때문에 2007년 보시라이의 후임자로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천더밍을 임명한 중공중앙의 인사의도는 서방세계와의 마찰에서 완충역할을 해달라는 것으로 해석됐다.
천더밍은 온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만큼 언론플레이에 약하고 자신을 드러내는데 소극적인 면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그는 출중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7년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야 후보위원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올해 62세인 그에게 2012년에 있을 18대 전국대표대회는 정치국위원에 오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상무부장으로 과오가 없었으며 중국인민들과 관료들에게 상당한 안정감을 보여준 만큼 그는 정치국위원으로 승진할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FTA, 북중교역으로 친숙
무역통상을 총괄하고 있는 천더밍 부장이기에 중국과 교류협력이 활발한 우리나라의 언론에도 자주 등장한다. 우선 그는 한중FTA와 한중일FTA 협상을 책임지고 있다. 천 부장은 지난 4월 열린 보아오(博鰲)포럼에서 “한중 양국은 모두 FTA 체결을 희망하고 있지만 쌍방에 모두 민감한 제품과 문제가 있다”면서 “양국 FTA 협상은 양국 경제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으로 우리는 양국 국민의 지지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과 중국이 지난 6월8일 가진 압록강의 섬 황금평과 위화도 경제 지구에 대한 합작개발 착공식에 중국측 대표로 참석한 것도 천더밍 상무부장이었다. 당시 북한 대표로는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노동당 행정부장과 리수영 합영투자위원장이 참석했다.

◆기계분야에서 탁월한 재능
1949년 3월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난 천더밍은 어려서부터 기계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동네의 고장난 라디오는 모두 그의 몫이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스스로 TV를 조립할 정도였다.
비교적 평안하게 지내던 그는 1968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지식청년으로 하방된다. 그는 산간 오지인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현 셰팡(謝坊)진으로 하방됐다. 5년간 농사일을 한 그는 1974년 장시 공산주의노동대학(현 장시 농업대학) 농기계과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한 뒤 장시성 농업기계국에 배치됐다.
이후 1980년 11월 장쑤성 식품공사 가공냉장과로 자리를 옮겼다. 기계에 익숙한 만큼 가공냉장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2년후 장쑤성 타이저우(泰州) 육련창(肉聯廠, 식품가공공장) 부공장장으로 이동해 간다. 또다시 2년후에는 장쑤성 상업청 판공실 부주임으로 승진했다. 이듬해인 1985년 그는 장수성 상업청 부청장에 올라섰고 이 곳에서 1993년까지 근무한다. 1993년에는 장쑤성 정부 부비서장 겸 판공청 주임에 올랐고 1997년에는 장쑤성 쑤저우(蘇州)시 대리시장으로 옮겨간다.
◆난징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3년 그는 난징(南京)대 국제상학원에서 수량경제 석사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96년 석사학위를 딴 그는 곧바로 난징대학 국제상학원에서 관리학 박사과정을 밟아 1999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를 지도했던 은사는 저명한 경제학자 저우싼둬(周三多)교수였다. 저우싼둬 교수는 “당시 장쑤(江蘇)성정부 부비서장이어서 업무로 매우 바빴지만 공부도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중소기업 경쟁력 연구’라는 책도 썼다”고 회상했다.
천더밍은 이 기간동안 영어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난징대학 중미문화센터에 눌러앉아 매일 외국학생과 회화 연습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쑤저우공업원구 혁혁한 기여
천더밍은 1998년 쑤저우시 시장에 올랐고 2000년에는 쑤저우공업원구 서기직을 겸임했다. 쑤저우시는 1992년 서부에 국가급 개발구를 설치했다. 이어 1994년 5월부터는 싱가포르 정부와 합작으로 동부에 쑤저우공업원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시에 2개의 개발구가 존재하다 보니 기업과 자금의 유치경쟁이 불붙었고 크고 작은 마찰이 계속되자 싱가포르는 1997년 12월 철수를 선언했다.
당시 쑤저우시장이던 천더밍은 양측의 협상이 1년을 끌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직접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천 부장의 줄기찬 설득에 싱가포르는 결국 철수 의사를 접었고 쑤저우공업원구는 다시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는 쑤저우공업원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쑤저우시 당 서기이면서 동시에 쑤저우공업원구 당 서기와 중신(中新•중국과 싱가포르)쑤저우공업원구개발유한공사 이사장을 1년6개월가량 직접 맡기도 했다.
그는 2000년 쑤저우시 서기에 올랐으며 2002년 쑤저우시 서기직을 왕민(王珉) 현재 랴오닝성 서기에게 물려준다. 왕민은 2004년까지 쑤저우 서기를 지냈다.
◆장쑤, 산시에 이어 중앙진출
경제가 가장 발달한 동부 연해지역인 장쑤(江蘇)성에서 21년 남짓 일했던 그는 2002년 5월 중국 서부인 산시(陝西)성의 상무 부(副)성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산시성의 투자환경을 개선하고 정부의 투명도를 높이는 일도 병행했다. 이러한 변화를 지켜본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는 2006년 5월 시안(西安)에 2억5000만달러를 들여 반도체 공장을 설립했다. 영국의 엔진 생산 업체인 커민스는 2005년 12월 산시(陝西)자동차그룹과 합작으로 산시성에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했다. 2005년에는 산시성 성장으로 승진한다.
이후 2006년 당시 57세인 천더밍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부주임(장관급)으로 발령받아 에너지 및 경제체제 개혁 업무를 맡았다. 1년 남짓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에 대한 외부 평가는 높았다.
천더밍과 발개위에서 함께 일했던 한 직원은 “천 부주임은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국내외 참고자료를 검토했다”며 “하루는 피드백이 왔는데 보고서 공백 곳곳에 글자가 빽빽하게 쓰여 있었고 ‘일단은 동의하나 다른 대안을 제안한다’는 식의 의견이 붙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예리한 지적들에 동료들은 그를 다시 보게 됐다고 한다.
2007년 12월 상무부장으로 발렸났을 때 중국인민대학 경영대학원 황궈슝(黃國雄) 교수는 “연안지역에서 오랬동안 근무한 그는 산시(陝西)성에서 4년간 일하고 난 후 경험과 지식이 더한층 균형 잡혔다”며 “이런 의미에서 상무부에는 동부연해, 내륙, 대외무역 분야 경력을 두루 갖춘 지도자가 한 명 더 늘어난 셈”이라고 평가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