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1-09-14 14:33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아주경제 최종복 기자)한국광복군 창설의 숨은 주역 나태섭(羅泰燮)

-의정부보훈지청 보훈과 강웅모-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당시 군사특파단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창군을 준비하고, 광복군 제2지대 간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총무과장,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광복군의 군사 활동을 지원한 나태섭 선생을 2011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01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중동학교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참여 후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에 뜻을 품게 되었고 이듬해 졸업하여 안악군 봉삼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인재 양성에 전력을 다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 모금운동과 더불어 동지 포섭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3년 선생의 활동이 발각되어 원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더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자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7년 5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 독립운동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34년 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독립운동 간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1934년 8월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재학 중 1934년 12월 한국특무대독립군 제1대장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6월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 보병과 졸업 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지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보궐 선출된 선생은 같은 해 7월 한국국민당 청년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주변의 각 독립운동 단체의 단원들에 대한 보호 및 대일정보 수집, 동지 규합, 인쇄물 등 선전활동, 친일분자 및 일본 정보원 처단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임시정부는 전시체제에 대한 대비와, 보다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로 군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선생은 군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군사활동에 관한 종합적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군사특파단의 일원으로 최전선인 서안에 파견되어 활동을 하는 등 광복군 창설의 실질적 준비 작업을 전개하였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및 서안총사령부 부관으로 활동한 선생은 1944년 군무부 산하의 군사학 편찬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의 각종 군사학 서적을 편찬하고, 군사법규를 기초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군사위원회 측의 일방적인 통보로 제정된 예속적인 내용의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準繩)”을 취소하고 1945년 4월 “원조한국광복군판법(判法)”을 마련하기까지 광복군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1945년 9월 화중한교선무단에서 활동하며 화중지역 한인들의 생명보호와 안전한 귀국, 구호활동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5월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환국하여,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국군으로 복무하다 1956년 예편하였고, 1989년 5월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일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생과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현재의 우리가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