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고인이 국립서울현충원에 도착하면 오후 4시 30분부터 고 박병선 박사의 안장식이 거행된다. 추도사는 고인과 인연이 깊은 역사학자인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할 예정이다. 안장식을 마치면 고 박병선 박사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내 충혼당으로 봉송되어 국가사회공헌자 권역에 안치된다.
◇다음은 최광식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추도사 전문
故 박병선 박사님
멀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다시는 멀고 힘든 길 가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이 박사님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대한민국입니다.
지난 6월 서울에서 열린 외규장각 환영행사에서 예쁜 한복에 조바위 쓰고 말없이 눈시울을 붉히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가을에 연구차 한국에 오면 다시 보자고 하셨는데 가을의 마지막 날인 오늘, 이렇게 태극기보에 싸여 돌아오셨습니다.
고 박병선 박사님!
당신은 이 나라 역사와 진실을 위해 88년의 인생여정을 촛불처럼 태우셨습니다.
청춘의 나이에 누구나 부러워하는 프랑스 유학을 떠났지만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투쟁하듯 살아오셨습니다. 우리는 해 드린 것이 없는데 박사님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박사님!
당신이 20년을 찾아 헤매다 먼지더미에서 발견한 외규장각 도서 297권 모두가 지난 5월 이 땅에 돌아왔습니다. 박사님은 의궤를 찾으신 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0년을 하루같이 “파란 책 속에 묻혀 사는 여인”이셨습니다. 마음이 급하고 책을 반납하라 할까봐 밥도 못 먹고 빵과 커피로 식사를 대신 하셨습니다. 일터에서도 쫓겨나시고 돈이 없어 골동품을 팔아 연구하실 때 서럽고 나라가 원망스럽지는 않으셨습니까?
박사님께서는 도서관 한 구석에 있던 직지를 발견하고 그것이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임을 세상에 밝히셨습니다. 그전까지 세상 사람들은 구텐베르크의 성서를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5년의 세월을 밤새워 연구하고 이국 땅 대장간을 돌며 바로 잡은 역사입니다.
김규식 박사일행이 파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차리고 독립을 호소했던 그곳에는 이제 독립운동의 행적을 알리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모두 박사님이 해내신 일들입니다
작고 가냘픈 체구였지만 박사님은 진정 “작은 거인”이셨습니다.
박사님!
그 많은 일을 혼자 해내시느라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결혼도 마다하고 조국의 부름도 거부한 채
숙명처럼 힘든 길을 껴안고 사셨습니까?
그저 외면하고 모른 척했어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병인양요 때 빼앗긴 고문서를 찾아보라는 스승님의 부탁쯤은 그저 몇 년 찾아보고 말았어도 될 일이었습니다.
프랑스로 유학 간 최초의 여성으로 화려한 삶을 살다 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박사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 일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의사가 생명이 끝났다고 말한 뒤에도 박사님은 정신력으로 한달을 넘겨 버티셨습니다.
장기능이 정지되어 아무것도 드실 수 없는데도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밥을 달라 하셨습니다.
무슨 미련이 있어 그렇게 삶의 끈을 놓지 못하셨습니까?
아프신 후에도 계속해 오신 병인양요, 독립운동사 정리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셨습니까?
좀 쉬시지 그랬습니까?
단 1년만이라도 박사님이 해놓으신 일들을 베개 삼아 편히 쉬시지 그랬습니까?
우리 후학들은 염치없어 어떻게 하라고 그러셨습니까?
박사님! 하지만 이제 모든 끈을 놓고 편히 쉬십시오.
이제 우리 모두가 또 다른 박병선 되어 마무리 지을 테니 모든 설움, 미련 다 버리고 편히 쉬십시오.
박사님! 이곳이 당신이 노르망디 해변에 뿌려지면 바닷물에 실려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조국, 대한민국입니다.
당신이 어릴 때 뛰놀던 이곳에서 부디 영면하소서!
당신의 이름은 우리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 영원할 것입니다.
2011. 11. 30.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최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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