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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 관장은 박원순시장의 진취적이고 창의성을 존경한다며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서울이 미술문화가 살아서 숨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박현주기자 |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공부를 좋아하는 모범생이었다. 4명의 남자는 인생역전의 키(key)가 됐다. 남편(천호선·전 별옥션 대표)은 그를 '미술의 길'로 안내했다. 79년 당시 뉴욕 총영사관 한국문화원 문정관이던 남편을 따라간 뉴욕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주말마다 미술관에서 남편과 잭슨폴록 앤디워홀등의 현대미술을 보며 '무지의 충격'을 받았다. 남편은 화가가 되길 원했지만, 공부에 자신있던 그는 미술사를 택했다. 1980년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만났다. 백남준은 그를 '큐레이터'로 이끌었다.이후 백남준 전문가, 미디어 전문가 큐레이터로 광주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서녀를 거쳐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큐레이터에서 미술관장으로 진입은 우연이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그를 특채로 미술관장(2006년)으로 만들었다. 4년간 미술관장직을 역임한후 다시 지난 1년간 '돌큐'(돌아온 큐레이터)간 된 그는 서울시립미술관에 입성했다. 지난 12일 서울시립미술관장직에 취임한 김홍희(64)관장이다. 김 관장은 "나는 미술의 진보, 아방가르드다"며 "진취적인 박원순시장 때문에 서울시립미술관에 공모했다"고 말했다. 그는 17대1의 경쟁률을 뚫고 첫 여성미술관장이 됐다. 올해는 "가슴 부푼해"라는 김 관장을 취임식이 하루 지난 지난 13일 만났다.
-서울시립미술관 운영방침은.
▲조직과 전시 모두 혁신하겠다. 내가 설정한 목표는 미술관의 관행을 깨는 일탈, 퍼스트 뮤지엄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의 미술관이라는 시간적 개념과 미술관 자체가 갖고 있는 관행과 관례를 벗어나서 새로운 대안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관의 새 패러다임을 만들어나가는게 목표다. 이를 통해 서울시립미술관을 세계적인 뮤지엄으로 육성하겠다. 하이엔드(최첨단 현대미술)와 소통이라는 두 바퀴로 운영할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예산(120억원)은 지자체 예산 최고수준이다. 서울은 국제도시다. 메트로폴리스이고 대 대한민국의 수도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상징이다. 미술관은 서울의 상징성을 대변해야 한다. 이 서울의 장소 특정성을 기반으로 600년 역사를 현대미술과 어떻게 접목시키면서 현재속에서 재탄생시키느냐가 미술의 주제가 될 수있다. 서울이 미술문화가 살아서 숨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겠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목표설정을 그렇게 하면 언제가는 분명히 이뤄질 것이다. 나는 그런 시간을 단축하겠다는 것이다.
-시립미술관은 블록버스트전시장 이미지가 강하다.
▲그렇다. 그동안 블록버스트전시로 관객집객수는 많았지만 미술관자체 기획력은 부족했다. 올해도 한국 브라질 이주 50주년을 기념한 상파울로미술관 특별교류전(5월), 11월 개최되는 에곤 실레와 12월 클림트 특별전이 예정되어 있다. 클림트전의 경우 이미 전시가 열린바 있어 전체 전시를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다. 위탁기획전으로는 성공하기 힘들다. 올해 잡힌 블록버스터급 전시라고 할지라도 직접 기획에 참여해 새로운 각도로 다시 모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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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있어 진보, 아방가르드라고 말하는 김홍희 관장./박현주기자 |
-시립미술관은 올드한 분위기다.
▲앞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의 현대적 성격을 보여주기위해 노력하겠다. 근대 대가전보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를 불러 동시대적으로 호흡을 같이하는 첨단적인 작가들의 전시를 하겠다. 또 그런 미술을 시민들이 알게해주는 방법론을 찾아주고 싶다. 미술판이 세계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미술개념의 감을 갖게하겠다. 미감을 높여주고 저변을 확대하고 누구나 서울시립미술관을 자랑스럽게 찾아오는, 국내외 미술인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찾아오게 하고 싶다.
-큐레이터 확충을 하겠다는 건가.
▲요소요소 직책에 맞는 능력 있는 큐레이터가 많을 수록 좋다. 기존에 큐레이터를 학습을 시켜서 유능한 큐레이터로 만드는 것도 과제이고 계약만료가 끝나 새로 올 후임은 국제적으로 경쟁력있는 큐레이터를 뽑겠다. '전시쟁이' 같은 소문난, 큐레이터,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큐레이터를 영입할 생각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는 작가는 스타작가가 많은데 미술관에 스타 큐레이터가 없다. 어느 미술관하면, "아, 그 유명한 큐레이터~'가 있어야 하는데 큐레이터를 못 키웠다. 큐레이터 출신관장으로 작가도 키워야 하지만 큐레이터 인프라를 만들겠다. 국제적인 시각에 비해 독립큐레이터는 있지만 조직의 큐레이터 풀이 낙후되어 있다. 나는 전체적인 방향은 제안하겠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큐레이터, 일꾼이 필요하다.
-관장으로 선임배경은. 박 시장과 인연은.
▲박시장과 안면은 있지만 친분은 없다. 아름다운 가게, 희망제작소를 운영하는 것 보면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창의성을 존경했다. 박시장은 그전에 해오던 것을 보면 발상만 창의적인게 아니라 실행능력도 갖췄다. 내가 지향하는 예술과 박시장의 창의적인 부분이 잘 맞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조용히 원서를 냈는데 누군가 '코드인사'가 들린다며 걱정해줬다. 하지만 나는 관장으로서의 경쟁력이 높다고 생각했다. 또 박시장은 능력과 자질위주로 뽑지 않을까 기대했다. 나는 미술에 진보다. 아방가르다. 지금 시정정책과 부합이 될 수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관장직에 임명되어 상당히 의욕적이고 고무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취적인 박시장의 마인드와 내가 추구하는 예술적 방향, 하이엔드적이고 소통적인게 시정방향과 같은 것 같아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백남준 전문가다. 인연은.
▲대학을 졸업하고 선을 봐서 결혼했다. 아이들(1남1녀)을 키우다 뉴욕에 가서 30세에 늦깍이로 처음 미술공부했다. 그때그때 공부가 재미있어서 열심히 했고 석사박사하면서 '붙박이장' 별명을 얻었다. 하다보니 기회가 왔다, 기회의 물꼬를 터준 분이 백남준 선생이다. 80년에 머스커밍햄(전위무용)후원회장인 바바라툴을 외교단에서 만났다. 그가 어느날 키친(뉴욕 전위예술최고 공연장)에 너희나라 유명한 사람이 공연하는데 보러가자며 우리부부를 초대했다. 그때 처음으로 백남준 공연을 봤다. 충격이었다. 레코드판과 바이올린을 때려 부수는 퍼포먼스였다.비디오로 공연장면을 보여주고 다시 뒤로 틀고 시간을 거꾸로 가는 영상은 대단했다. 바바라툴이 백 선생에게 우리부부를 소개했다. 당시 백남준은 한국 공무원들은 경계했는데 거물이 소개시켜주니까 마지못해 인사를 한 것 같았다. 인사를 하기전 나는 깨진 레코드판과 바이올린 조각을 일일이 주워 모아 한웅큼 손바닥에 들고 사인을 부탁했다. 백남준은 스튜디오에 가져오라고 했다. 찾아간 작업실에서 백남준은 "사인은 공짜니까"라며 조각조각마다 사인을 해주며 “이것을 골동품 보석함에 넣어두라”고 말했다. 이건 지금 우리집의 가보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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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덕분에 미술의 길로 입문하게 됐다는 김홍희관장./박현주기자 |
1979년 남편을 따라 뉴욕에 갔던 김 관장은 이후 본격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했다.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지 10년이 되던 그해 맨해튼의 헌터칼리지에 입학했다. 이후 덴마크 코펜하겐대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고, 캐나다 몬트리올 콘코디어대에서 미술사학과 석사 과정을, 다시 홍익대에서 서양미술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남편은 두차례 국립현대미술관장직에 공모한 바 있고 현재 컬쳐리더인스티튜트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예술가집안이다. 딸은 최근 성곡미술관에서 '폴리팝'전을 열고 있다. 동생은 제일기획 마스터 김홍탁씨다. 며느리는 재불화가 고 신성희씨의 딸로 패션디자이너다.
-큐레이터 입문은.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인포아트(InfoART)’다. 백남준을 도와 우리나라에서 처음 선보인 미디어아트 기획전이다. 인터랙티브 멀티미디어 아트는 화단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백 선생이 이끌어줘서 처음부터 '뚝' 소리나는 일을 하게됐다. 시기도 질투도 받았지만 그런 기회를 준거에 누가 안되게 참 열심히 했다. 지금도 나는 최선을 다하고 앞으로도 일할 수 있을때까지는 '공익마인드'(공무원인 남편한테 많이 배웠다고 했다)로 최선을 다해서 일할 것이다. '일희일비' 안하는게 신조이고 나를 버텨주는 힘이다. 이후 2000년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를 거쳐 2006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다. 나는 주변부였던 테크놀러지미술과 페미니즘미술을 확장했다고 자부한다.
-관장 출신 큐레이터, 큐레이터들이 긴장하겠다.
▲나는 "큐레이터로 일할려고 태어났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경기도미술관장을 역임하고 지난 1년간 놀면서 참 많이 생각했다. 일하는 신성함과 큐레이터가 얼마나 나한테 재미있고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청주 우민아트센터 개관전에 참여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가 돌큐의 희열을 맛보는 시기였다. 뒤를 돌아보면 남보다 특출한 것도 없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왔다. 장점은 남들이 생각안하는 아이디어가 많다는 것. 끈질기고 몰입이 잘돼 몰두력이 상당하다. 지금도 미술관 전시아이디어가 만발한다. 하지만 큐레이터가 아니니까 잘 전달해서 큐레이터들이 받아 일할수 있도록 하겠다. 미디어아트비엔날레 등 외부총감독이 정해졌지만 알아서 잘해라가 아니라, '큐레이터 관장'으로서 잘 될 수 있도록 풀 서포트를 해주고 싶다.
-큐레이터란
▲그림만 건다고 큐레이터가 아니다. 전시는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구정이후 '큐레이터 본색'이라는 책이 나온다. 나와 10명의 큐레이터가 쓴 책이다. 큐레이터라는 달콤한 환상을 깨는 책이다. 출판사나 큐레이터들이 너무 정직하다며 우려했지만, '지성은 비판'이다. 10명의 큐레이터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에서 활동하는 젊은 큐레이터들이다.
큐레이터 출신관장으로 작가도 키워야 하지만 큐레이터 인프라를 만들겠다. 국제적인 시각에 비해 독립큐레이터는 있지만 조직의 큐레이터 풀이 낙후되어 있다. 공부하는 큐레이터, 이론이 있는 큐레이터, 네트워크가 있는 큐레이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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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일을 하려고 태어났나 할 정도로 큐레이터직이 재미있다는 김홍희 관장./박현주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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