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차이나리포트> 한중수교 '동해작전'의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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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8-1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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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년 단절의 벽을 허문 주역들

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한중수교20주년을 맞아 당시 주역들이 지난 6월 3일 오후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재회했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 황병태 제2대 주중대사, 펑춘타이 주한중국대사관 정치참사, 쉬둔신 중국 외교부 외교정책자문위원, 이상옥 전 외무장관, 장팅옌 초대 주한 중국대사 (현 중한우호협회 부회장), 곽영길 아주뉴스코퍼레이션 대표이사, 문대근 통일부 상근회담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다. 남궁진웅 timeid@
지난 1992년 8월 24일 한국 시간 오전 10시(현지시각 9시) 정각. 중국 베이징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 팡페이위안(芳菲苑)에서 각국 언론 매체들의 플래쉬 세례 속에 한중 양국 간 역사적인 한중 수교협약 체결이 이뤄졌다. 양국 외무장관인 이상옥과 첸치천(錢其琛)은 이날 공동서명문에 교환서명을 마친 뒤 악수를 나누며 샴페인을 들어 양국 수교를 위한 축배를 들었다.

한중 수교식은 별도의 발표 없이 10분도 채 안돼 끝났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의 한중 수교 체결식을 통해 양국은 과거 40여년에 걸친 단절의 벽을 뛰어넘고 미래를 향한 도약의 첫 발을 내디딤으로써 오늘 날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외교는 총성없는 전쟁’이란 말도 있듯이 20세기 한중 외교사의 한 획을 그은 한중 수교라는 역사적 사건을 이뤄내는 데에는 물밑에서 숨가쁘게 움직이며 치열한 외교전을 펼친 인물들이 있었다.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이해 수교 당시 비화 및 에피소드와 함께 한중 양국 발전에 공헌한 양국의 ‘일등공신’을 소개해보기로 한다.


**********한중 수교 주요 연혁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관계 단절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대규모 중국 선수단 파견
1988년 서올 올림픽에 대규모 중국 선수단 파견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대규모 한국 선수단 파견
1990년 서울, 베이징 민간 무역대표사무소 개설
1991년 11월 노태우 대통령, 방한한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 면담.
1992년 4월 이상옥 외무장관 방중.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
1992년 5월 14~15일 베이징서 한중수교 제1차 예비회담 개최
1992년 6월2~3일 베이징서 한중수교 제2차 예비회담 개최
1992년 6월20~21일 서울서 한중수교 제3차 예비회담 개최
1992년 7월29일 베이징에서 한중수교 본회담 개최
1992년 8월22일 대만, 한국과의 단교 선언
1992년 8월24일 베이징서 한중 양국 외상 한중수교 공동성명에 서명




◇이상옥 전 외무부 장관 --- 한중수교 총 지휘자

이상옥 전 외무부 장관은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가히 ‘007작전’을 방불케 했던 외교 첩보전을 총 지휘하며 한중수교를 성공적으로 이끈 주역이다.

그는 지난 1957년 외무부에 입부해 공보관, 주미 참사관, 미주 국장, 싱가포르 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등 요직을 거치며 84년 외무부 차관에 오른 전문 외교통으로 1990년 외무부 장관에 올라 약 2년 반 재임했다. 외무부 장관 재임 기간 유엔가입, 구소련 수교, 한중 수교라는 3대 외교과제를 실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외무부 장관 재임 시절인 1992년 4월 13일 제48차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ESCAP) 총회 참석차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이상옥 전 한국 외무부 장관에게 당시 중국 리펑(李鵬) 총리는 “물이 흐르면 자연히 도랑이 생긴다(수도거성)”는 말을 인용해 한중 수교가 머지않았음을 암시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중 양국 수료를 위한 본격적인 예비 회담이 개시된 것. 그로부터 4개월 여 만인 8월 24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그는 첸치천(錢其琛) 당시 중국 외무부 부장과 함께 한중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을 하고 한중 수교를 공식 선포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은 한중 수교 다음 날인 8월 25일이다. 아마 태어날 때부터 한중 수교의 특별임무를 부여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한중 수교가 이뤄진 8월 24일 저녁 이상옥 전 장관의 생일이 8월25일(한중 수교일 다음 날)임을 미리 여권을 통해 파악하고 있던 첸치천 외교부 부장은 만찬장에 대형 케이크를 준비해 그를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 이에 이상옥 전 외무장관은 “내 생일은 대외비밀인데 어떻게 알았냐”고 응수해 만찬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사건은 꽤 유명한 일화다.

◇권병현 전 한중수교 예비교섭 수석대표 –한중 수교 실무 외교관

1992년 8월 24일 한중 양국 외교장관이 공동 서명을 마치고 악수를 하던 당시 뒤에서 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 본 이가 있으니 바로 권병현 전 한중 수교 예비교섭 수석대표다. 당시 권병현 대사는 이상옥 전 외무부 장관으로부터 한중수교 협상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밀명을 받고 한중 수교의 실무를 이끈 ‘막후’ 일등공신이었다.

한중 수교 협정 후 첸치천 중국 외교부 부장이
“Embassador Kwon, you did a good job.(권 대사, 큰 일을 해냈습니다.)”
“No, not me. You two minister did it.(아닙니다. 두 장관님께서 해내신 것입니다.)”
“Yes, we did it all together.(그래요. 우리 모두가 함께 해냈습니다.)”
라고 말하며 권병현 대사를 향해 활짝 웃는 모습은 그가 실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한중 수교를 지난 20년 간의 중국을 향한 일방적인 짝사랑의 결실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직업 외교관으로 인생 최대 목표가 한중 수교였던 그는 지난 1973년 외무부에 동북아2과(중국과)가 갓 신설돼 별볼일 없을 당시 다른 좋은 부서 과장직도 제의하고 동북아2과에 차석으로 들어가 ‘죽의 장막’ 중국의 문호를 두드렸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2년 이러한 성과가 드디어 결실을 맺은 셈이다.

한중 수교 당시 당시 중국과의 인연을 계기로 그는 98년부터 2년 4개월 간 주중 대사를 지내며 한국 내 진정한 중국통으로 자리매김 했다. 퇴임 후인 2002년부터는 ‘한중 미래숲’이라는 한중청소년 봉사단체를 만들어 중국 공청단과 협력해 중국 사막화 방지 사업에 나서는 등 한중 양국 간 우호 증진에 활발하게 기여하고 있다.

◇황병태 전 주중대사-장쩌민도 인정한 ‘영원한 주중 대사’

노재원 대사의 뒤를 이어 제2대 주중대사로 부임한 황병태 대사는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을 역임하고 한국외대 총장과 통일민주당 부총재를 지내는 등 관계, 학계, 정계를 두루 거친 재선의원이다. 사실 지난 93년 6월 2대 주중 대사 취임 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별다른 인연이 없는 인물로 취임 초기 주변의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취임 이후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중국을 연구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양국 간 산적한 문제들을 직접 부딪혀 해결해 중국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취임 당시 중국어를 잘 하지 못했는데 나중에는 상당한 수준의 중국어 실력까지 갖추게 된 것. 그는 또 재임 시절 중국 정부의 장관들을 수시로 만날 수 있는 베이징 주재 각국 대사 중 몇 안 되는 인사 중 하나였다.

또한 장쩌민 전 주석은 황병태 주중 대사가 중국에 새마을 운동 등 한국 경제개발 노하우를 전수해 주길 원했고 각 성장과 인민대표들에게 특별강연을 열기를 청하기도 했다. 그가 1993년 6월부터 약 2년 6개월 간의 임기를 마치고 주중대사를 퇴임해 한국으로 귀국할 당시 장쩌민 전 주석이 직접 환송연까지 열어주며 평생 중국에 방문할 수 있는 명예적 지위까지 부여했다고 전해진다.

최근 황 전 대사는 “지난 2011년 봄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는데 중국 측에서 내가 좋아하는 중국음식을 준비하고 한글로 무려 12가지 메뉴를 적은 메뉴판까지 배치할 정도로 환대를 받았다”며 “(내가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중국 측 인사 등을 너무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오히려 중국을 방문하기가 두려울 정도”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 했을 정도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 -한국의 ‘중국통 1세대’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은 중국 실력자들과의 두터운 교분으로 한국 내 중국통 넘버원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지난 80년대 중반 체육부와 통일부 장관을 지내고 4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중국 측 인사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 5월엔 중국 명문대인 베이징대 연구교수로 초청받아 1년 간 중국에 머물며 연구활동을 하는 한편 중국 고위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중국의 동향을 익혔다. 지난 1994년 한중 양국 간 민간 외교채널인 한중친선협회를 설립해 이끌며 한중 양국 간 인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지금도 중국 정계 고위직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이세기 회장과의 만남을 빠뜨리지 않을 정도다. 천안함 사건 등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격의 없이 중국에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중국의 진정한 친구로 여겨지고 있다.

심지어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 2007년 8월 16일자 신문에서 “이세기, 한국 ‘최고의 중국통’”이라는 제목으로 특집기사를 실으며 한중 우호 증진에 기여한 이세기 회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초대 주한 중국 대사를 지낸 장팅옌(張庭延) 대사와는 1936년 1월생 동갑으로 서로 동갑내기 친구로 지내고 있다. 특히 한중 수교 직후 양국 간 예기치 않은 돌발 변수가 발생했을 당시 이세기 회장은 장 전 대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달라이 라마의 방한 무마 사건이다. 이세기 회장은 “한중수교 직후 동국대 학교 법인이 동아일보의 후원 아래 달라이 라마를 한국에 초청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바로 장팅옌 대사에게 연락했다”며 “이에 장 전 대사가 크게 긴장하며 ‘절대 안된다’고 강조했고, 결국 한국 정부가 동국대와 동아일보를 잘 설득해 달라이라마 방한을 취소하는 것으로 잘 마무리 됐다”고 과거의 긴박함을 회상하기도 했다.

◇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 – 중국을 사랑한 역대 최장수 대사

국내 최고의 중국 전문가로 불리는 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1992년 한중 수교 교섭 당시부터 주중 무역 대표부 공사로 활약하며 한중 양국 간 단절된 관계를 다시 잇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인물이다.

1973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그는 동북아2과(중국과) 과장, 주중 무역대표부 공사, 아태국장, 청와대 의전비서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비서관을 지냈다. 특히 그는 주중 무역대표부 공사 시절 한중 수교 협상 당시 실무진으로 참여하는 등 대중국 업무를 도맡아왔다.

서울대 중문과 출신으로 중국어가 능통한 그는 2001년 10월 주중 한국 대사로 발령받아 7년 2개월을 재임하며 우리나라 직업 외교관 중 역대 ‘최장수 대사’기록을 수립한 대표적인 중국통이다.

그가 역대 최장수 대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중국에 대한 전문성 때문이다. 그는 중국인에게도 뒤지지 않는 중국어 구사 능력은 물론 중국 정부나 외교부에 막강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그는 중국 차기 지도자로 유력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부주석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 부주석을 잘 아는 한국 내 인사는 그리 많지 않은데 시 부주석과 가장 두터운 인연을 맺은 인사가 바로 그다. 시 부주석보다 7세 위인 김 전 장관은 중국대사 재직시절 시 부주석이 지방 성장과 당 서기로 재직하던 때부터 호형호제하며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중 양국을 ‘네 안에 나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다’는 말로 비유하며 양국 우호 증진에 앞장 서 온 그는 지난 2002년 중국과 2003년 한국에서 ‘떠오르는 용, 중국(騰飛的龍)’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첸치천 중국 전 외교부장 –中 외교 사령탑

첸치천(錢其琛) 전 중국 외교부 부장은 지난 1988년부터 2003년까지 10년 여간 중국 외교부 부장과 외교담당 부총리를 역임하며 중국 외교사령탑으로 활약, 중국의 국제외교를 진두 지휘한 외교의 달인이다.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4개월 전인 1992년 3월, 중국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식에서 첸치천 부장은 한중 관계 변화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중수교의 구체적인 시간표는 없다”고 답했다. 비록 짧은 답변이었지만 이는 그 동안 “중국의 입장엔 변화가 없다”고 했던 기존의 답변에서 미세한 변화를 보인 것으로 중국이 한중수교의 의향이 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첸 외교부부장은 같은 해 4월 이상옥 장관이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 측에 한중 수교를 제의해왔고 이 때부터 한중 수교 협상은 급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국이 한국과 수교를 맺기까지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바로 혈맹국인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중수교를 한 달 여 앞둔 7월 15일, 첸치천 부장 일행은 총대를 메고 한중수교 사실을 통보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첸 부장은 김일성 주석이 묵고 있다는 묘향산 연풍호 별장을 찾아 한중 수교를 추진하고 있다는 장쩌민 주석의 구두 메시지를 전했다. 이미 앞서 양상쿤 주석으로부터 한중수교와 관련해 어느 정도 암시를 받은 터라 김 주석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우리는 자주노선을 걷겠다. 중국이 하는 일은 중국이,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면담은 그걸로 끝이었다. 기존에 관행처럼 북한이 열어줬던 중국 대표단 환영만찬 등은 없었다. 첸 부장은 당시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을 “역대 중국 대표단이 김 주석을 만난 시간 중 가장 짧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쉬둔신 중국 전 외교부부부장 – 한중일 관계 밝은 ‘中 엘리트 외교관’

쉬둔신(徐敦信) 전 외교부 부부장(현 외교부 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은 한중 수교 협상 당시 중국 측 수석대표를 맡으며 중국 측 실무교섭을 총 지휘한 인물이다.

외교부 처장, 주일대사관 참사관, 아주국장, 외교부 부장조리, 외교부부장 등 외교관 엘리트 코스를 차례차례 거쳐 지난 한중 수교를 맺은 이후인 1993년부터는 5년 여간 주일대사를 역임하고 현재 외교부 외교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한중일 관계에 정통한 외교 전문가다.

그는 한중 수교 15년 만인 지난 2007년 6월 중순경 한중수교 예비교섭 당시 인연을 맺은 권병현 전 주중대사를 한중수교 비밀교섭이 이뤄졌던 역사의 현장 중국 국빈관 ‘댜오위타이 14호루’ 기념 만찬에 초청해 뜻 깊은 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댜오위타이 14호루는 댜오위타이 내에서도 아주 구석진 곳이라 가장 눈에 덜 띄는 곳이라 한중 수교 예비회담을 하기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특히 댜오위타이 14호루와 관련된 각종 에피소드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곳에 투숙했던 한국 측 대표단들은 한중수교 협상 기밀 유지를 위해 회의 때에도 문을 한치도 열지 않았고, 회의가 끝난 뒤에도 건물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또한 중국 측도 한국 측 대표단에 이곳에 북한 대표단도 와있다며 한국 측 대표단에 ‘겁’을 줬다는 후문이다.

권병현 대사는 2007년 6월 쉬 부부장과의 댜오위타이 14호루 만찬 자리에서 “한중 수교가 한중 양국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면 댜오위타이 14호루의 공도 매우 크다”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댜오위타이 14호루는 한중수교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곳이다.

쉬 부부장은 지난 6월 초 방한한 자리에서도“중한 수교는 북한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뤄낸 양국 간 성공적 외교성과” 라며 “지난 20년 간 양국 관계는 세계에서 유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성과 이뤄냈다”고 감회를 전하기도 했다.

◇장팅옌 초대 주한 중국대사 – 中 한반도 전문가

장팅옌(張庭延) 당시 중국 외교부 아주국 부국장은 지난 1991년 11월 APEC 총회 때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한 그는 비록 중국 교섭 대표단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한중 수교 교섭 당시 중국측 실무자로 깊이 관여했다..

그는 베이징대 조선어과를 졸업한 엘리트로 외교부에서 한평생 한반도 문제를 연구하는 중국 대표 한반도통으로 불린다. 63년부터 89년까지 3차례에 걸쳐 15년간 북한에서 근무한 데다가 92년 9월부터 98년 8월까지 6년 간 초대 중국 대사 지냈다. 남북한 합쳐 모두 21년간 한반도에서 근무한 남북문제 전문가다.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중한우호협회 부회장으로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그의 한국어는 수준급으로 그 어느 남북한 사람보다 표준어에 가까운 한국어를 구사한다. 외교가에서는 그가 겸손하고 말수가 적지만 사리판단이 예리해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당정 고위층 두터운 신뢰 받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국교 수립 후 초대 주한 중국 대사로 부임해 6년 간 활동하며 양국 간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특히 그는 당시 이세기 회장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그는 최근 이세기 회장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안사람끼리 더 가깝게 지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격의 없이 소통했다”며 이 회장과의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의 부인인 탄징(譚靜)은 한중 수교 협상 당시 중국 외교부 아주국 조선처 1등 서기관이었다. 한중 수교 예비협상에 직접 참석했을 정도로 장 대사 부부 모두 한반도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지난 6월 3일 저녁 서울 중구 명동 한 중식당에서 한중친선협회(회장 이세기) 초청으로 20년 전 당시 한·중 수교 주역들이 한 자리에 모여 뜻깊은 만찬 간담회를 가졌다. 장팅옌 초대 주한 중국 대사, 이상옥 전 외무부 장관, 쉬둔신 중국 외교부 외교정책자문위원,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왼쪽부터)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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