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부리자마자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쌓인 만큼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이 계단이라 믿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쌓인 곳으로 소리도 사라졌다
길이 길이었던 곳으로
계단이 계단이었던 곳으로
우리는 내려갔다
멀리서 벼랑을 때려대는 파도는
몇천 년이고 그래왔다는 듯이
파도였다
우리는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우리는
우리가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별 시답잖은 생각을 다
해보기도 하였다―「죄책감-천부에서」전문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시인 임경섭이 첫 시집 '죄책감'을 출간했다. 총 마흔다섯 편의 시들은 삶 속에서 제 부재를 말하는 것들의 공간을 촘촘히 구축해내고 있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진정한 애도의 가능성에 대해 묻게 만든다.108쪽,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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