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전 13기, 불굴의 도전정신이 ‘독선’과 ‘불통’으로

박경철 익산시장이 호남고속철도 부실시공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지난 4일 대전 철도시설공단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자료사진]
지난해 6․4지방선거에서 최고의 스타덤에 오른 이는 단연 박경철 시장이다. 줄곧 시민단체 활동에 전념해 온 박 시장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첫 출마한 이후 27년 간 국회의원과 익산시장 선거에 연거푸 출마했다. 결과는 모두 낙선. 그러다 무려 열 세 번 째 도전 끝에 자신의 뜻을 이뤄 내는 기적(?) 연출했다,
그에게는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12전 13기, 불굴의 도전정신’이란 수식어가 훈장처럼 붙어 다녔다. 시장 당선 1개월 뒤 ‘도전 한국인운동본부’로부터 대한민국 최고기록 인증서도 받았다.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승리한 26인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징표다. 이 가운데는 전국노래자랑 35년 최장수 국민MC인 송해씨도 포함됐다.
하지만 박 시장 취임 후 상황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꼬여 들었다. 정책 파트너인 의회와의 ‘상생’은 실종되고, 언론과의 ‘소통’도 단절됐다. 마지막 보루인 직원들로부터의 신뢰마지 얻지 못했다.
그 앞에는 애초 기대했던 꿈과 희망 대신 ‘독선’과 ‘불통’ ‘아집’이라는 악성 딱지가 덧씌워졌다. 익산시의회가 시정 질문을 거부하고 관계공무원까지 의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한 박 시장에 대해 감사원 감사 청구를 의결하는 초유의 사태도 빚어졌다.
익산시 사무관급 한 공무원은 "오랫동안 야인생활을 해온 박 시장이 아직도 시장인지 시민활동가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독불장군식' 행정만 펼치고 있다"고 쓴소리를 해댔다.
설상가상으로 박 시장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벌금 500만원을 선고 받았다. 결과야 두고 볼 일이지만 이제는 당장 자신의 신분 보전마저 장담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빠졌다.
◇인사 관련 경찰 압수수색으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우연의 일치라 할까. 같은 날 익산경찰서는 부시장실과 안전행정국장실, 행정지원과 등 인사관련 부서에 대한 전격 압수수색을 벌였다. 익산시가 상반기 정기인사를 단행하면서 승진 서열부를 조작했다는 이유에서다.
의혹에 대한 사실 확인 차원이라고 경찰은 밝혔지만 분위기는 결코 심상치 않아 보인다. 워낙 바람 잘 날 없는 익산시인지라 다음에 또 무슨 폭탄이 폭발할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인사가 만사’라 했는데, 인사문제로 시끄러웠던 것은 이번 뿐 아니다. 인사는 단체장 고유 권한이지만 인사에 대한 상식과 원칙이 무너지면 조직은 결국 통제 불능 상태로 빠지게 마련이다.
조직의 수장은 법정을 오가며 시정을 제대로 돌 볼 겨를이 없고, 조직 내부는 경찰 압수수색으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요지경 속이다. 게다가 난세에 절대적인 우군이 돼야 할 공무원노조는 박 시장의 ‘불통 행정’을 규탄하며 등을 돌렸다. 한마디로 박 시장으로서는 마지막 퇴로(退路)로까지 차단된 셈이다.

김상수 익산시공무원노조위원장이 박경철 시장의 불통행정을 규탄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장면[자료사진]
박 시장에 대한 1심 선고가 내려진 당일 익산시공무원노조는 마치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공개 성명을 냈다. "무능력, 무책임, 무소통, 무소불위를 자행하는 박경철 시장은 자진 사퇴하라"며 강도 높게 압박하고 나섰다. “유죄가 확정된 이상 박 시장은 하루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까지 몰아세웠다.
지난 9일에는 김상수 노조위원장이 박 시장의 불통행정을 규탄하며 천막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여기에 전국기초단체공무원노조연맹까지 투쟁에 동참하겠다고 나서면서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안 방에서 일어난 은밀한 일들이 바깥 세상에 민낯으로 공개된 셈이다. 단식투쟁에 들어간 김 위원장은 단식 5일 만인 지난 13일 탈진해 병원으로 후송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자칫 ‘하극상’으로까지 비춰질 법할 내부 공무원들의 이같은 극단적인 행위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태들을 통해 익산시 행정이 얼마나 중증(重症)에 처해 있는 가를 쉬이 가늠해 볼 수 있다.
산적한 현안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하루 24시간도 모자랄 판에 선장도, 선원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허둥대고만 있다. 답답하고 짜증나는 건 그들을 믿고 맏긴 시민들일 뿐이다.
박 시장은 지난 1심 공판이 끝난 뒤 "여러 가지 기득권층의 집요한 공격에 힘들다"고 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취임 후 선거법 피소, 언론문제 등 크고 작은 어려움이 많았지만 가장 큰 장벽은 의회와의 갈등이었다”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그러나 망망대해,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데 선장 혼자의 힘만으로는 어림없다. 마냥 거친 바다만을 탓하기 전에 파도에 순응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도 지혜이자 순리다. 선장과 선원들의 관용과 절제, 결자해지의 자세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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