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배상희 기자 = 세계은행(WB)이 최근 발간한 중국 경제 연례 보고서에서 '중국 정부의 규제·간섭'을 의미하는 민감한 표현을 돌연 삭제해 의구심이 일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 정부의 압력이 반영된 조치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세계은행이 지난 1일 공개한 중국 경제 연례보고서에는 '중국 정부의 불필요한 규제·간섭을 줄여야한다'는 표현이 들어있었으나, 이틀 뒤 세계은행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온 같은 보고서에는 관련 문구가 삭제돼 있었다고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세계은행은 관련 문구 삭제 이유와 관련해 홈페이지에 '통상적인 내부 검토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의견이어서 삭제한다'는 주석을 달았다고 WSJ는 전했다.
당초 세계은행은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정부의 역할을 줄이는 것부터 개혁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며 중국내 주요 은행에 대한 정부의 지분율을 낮추고, 금융 현안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간섭과 규제를 줄이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각종 금융자산을 배분·배치하는 일에 중국 정부가 직접적이고 포괄적으로 간섭하는 것은 시장경제 원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을 방해하고 중국경제의 장기적 성장을 좀먹는 지방부채만을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WSJ는 현재 중국 정부가 예상보다 빠른 중국 경제성장 둔화와 중국 증시 급락세를 방어하기 위해 간섭을 강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세계은행이 이같은 표현을 삭제했다는 데 주목했다.
금융 전문가들도 세계은행의 이번 조치에 이례적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전문가는 세계은행이 밝힌 데로 내부 검토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보고서가 작성됐다면 세계은행의 내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반대로 설명이 거짓이라면 중국 정부의 압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어떠한 이유에서건 이같은 조치는 세계 경제 연구 및 분석에 관한 독립적 역할을 담당해온 세계은행의 입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평했다.
세계은행 베이징 지사의 한 관계자 또한 "어떤 내용이 포함됐다가 삭제됐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면서 "특히 중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관련 내용이 삭제됐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일에 대해 중국 금융·외교 당국은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은 상태다.
중국 정부가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관에까지 개입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0년 국제통화기금(IMF)은 위안화 평가절하 문제가 논의된 중국 경제에 관한 전체보고서 대신 요약본을 발행했다. 요약본에는 앞서 IMF 관계 분석가가 언급했던 위안화가 '상당히 저평가돼 있다(substantially undervalued)'라는 말 대신 '저평가돼 있다'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IMF 규정에 따르면 IMF 회원국은 전체 보고서 발행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중국 정부는 과거에도 다른 보고서의 발행을 차단해왔다고 WSJ는 전했다. 당시 IMF 측은 중국 정부의 압력 가능성에 대해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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