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50년 6·25 남침이 있기 이전의 상반기는 대일무역(對日貿易)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어 2월엔 일본 및 동남아 시찰단의 파견을 보는 등 우리나라 대외무역이 날개를 펴고 있었다. 2월에 조선해태조합(朝鮮海苔組合)이 무역협회에 대해 해태 수출 대행을 위탁해 와 회원 상사들이 모두 이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정부에서는 1949년 11월 10일 일본 도쿄 주일대표부에(駐日代表部)에 의뢰하여 미곡보상용(米穀補償用)의 일본산 면포(綿布) 20만 필(800만 마)의 수입을 결정하고 추진케 했는데, 일본 업자들이 담합하여 보이콧하는 한편 스캡에서는 소위 체크 프라이스(수출 기준값. 수출 상품의 일부에 적용하는 최저 수출 가격)를 적용하여 마당 16센트 6리 이하로 낙찰한 업자가 2개사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 수출을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스캡과 일본업자들의 보이콧 정책에 대항하여 재일교포 생산업자가 12월 30일 면포 발주 전량을 마당 16센트 5리로 정부에 납품키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사태는 일본 업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값을 올리기 위해 인도지나(인도차이나)와 파키스탄·태국 등지로부터의 주문에 응하여 면포값은 마당 17센트로 뛰고 있는 실정이었다.
교포 면방업자는 도쿄(東京)·나고야(名古屋)에 공장을 갖고 있는 이천공업(利川工業)이었는데 월생산능력은 8000 마로서 800만 마를 납품기일인 2월 말까지 이것을 이행하기 위해선 종전의 재고량을 모두 출고해야만 되었으므로 업자로서는 큰 희생이었던 것이다. 국내 업자들은 물론 재외 교포업자들까지도 초기 무역기(初期 貿易期엔)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일면이 있었다.
조선해태조합의 위탁으로 수출을 대행하게 된 협회는 회원 상사의 수출입 실적 기준에 따라 최고 25만 속에서 최저 5만 속을 배정하였는데 적은 양을 배정받은 업자들의 기권(棄權_이 속출하였다. 이리하여 기권 상사분을 인수받은 상사들이 동아상사(東亞商事), 대한물산(大韓物産), 대성산업(大星産業), 남창실업(南昌實業) 등이었다.
대일 수출가격은 속당(束當) 3달러 80센트로, 값도 좋았지만 곧 일어난 6·25 남침으로 그 수출 재원(財源)의 몇 배의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천공업의 면포 납품, 협회의 해태 수출 대행 등으로 신용장에 의한 대일 수출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구상거래(求償去來)로서 백 투 백 신용장에 의하거나 에스크로 크레디트(에스크로신용장. 수출과 수입을 직접 연결하는 구상무역거래에 사용되는 특수형태의 신용장) 방식에 의함으로써 제약이 없지 않았다.
이와 같은 대일 수출의 활기로 3월에 ECA의 후원을 얻어 최초의 일본 및 동남아 무역사절단이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시장조사(市場調査)의 필요성을 느낀 회원 상사들은 다투어 참여를 희망했지만 비행기 전세 관계로 인원은 20명으로 제한되었다.
이들 일행은 일본·태국·버마(현 미얀마)·인도·세일론(현 스리랑카)·인도네시아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까지 순방하였다. 6·25 남침으로 실질적인 상거래의 실적은 올리지 못했지만 피난지 부산에서 수입무역이 활발해지자 당시의 경험이 많이 주효했던 게 사실이다. 당시에 참여하였던 회원 상사는 다음과 같다.
일본 및 동남아 시찰단
단 장 오정수(吳楨洙, 이화상회(二和商會))
부단장 김인형(金仁炯, 동아상사(東亞商事))
단 원 한승인(韓昇寅, 상공부 상무국장)
최인규(崔人圭, 대한교역(大韓交易) 상무)
전택보(全澤珤, 천우사(天友社))
김정중(金正中, 상신무역(相信貿易))
박형준(朴亨俊, 고려흥업(高麗興業))
김생기(金生起, 삼성상회(三星商會))
이한상(李漢相, 동흥(東興))
이상백(자동차협회)
김형남(金瀅楠, 전남방직(全南紡織))
김선필(金善珌, 동화실업(同和實業))
이것이 말하자면 6·25 남침 전야의 무역 실태였다. 대일무역의 새 국면이 열리고 회원상사들이 대외 시장을 열어 자못 활기를 띠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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