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신성일은 왜 '바람으로 그린 그림'영화에 애착을 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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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8-11-0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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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섬 이상국의 '편집의눈']아주경제가 함께했던 영화 '소확행'과 김홍신 원작 영화의 비밀

 

[영화 '맨발의 청춘'에 출연한 신성일과 엄앵란.]



# '바람으로 그린 그림' 내년엔 들고 오겠습니다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도 걸린다."

'인간시장' 작가 김홍신(71)이 자신의 경험담에 상상과 감성의 살을 붙여 썼다는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위의 저 말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바라보았다 합니다.

배우 신성일(81세로 2018년11월4일 타계)은 내년에 자신이 제작한 영화를 들고 나타나겠다고 말했습니다. 올 10월 부산국제영화제(23회)에서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년이 없었습니다. 사경을 헤매던 그의 뇌리에 그토록 의욕을 보였던 영화 '바람으로 그린 그림'이 스쳐 지나갔을까요.

지난 6월 폐암3기 판정을 받은 뒤 신성일은 강한 투병의지를 보였습니다. 말기암 치료를 위해 국내에선 허가가 나지 않은 약품을 치료에 쓰고 있는 태국의 병원으로 갈 준비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생존율 40%라는 진단 앞에서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할 일이 있기에, 살아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배우 신성일이 폐암 확진을 받기 전인 지난해 4월 20일 한 영화시사회에서 곽영길 아주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을 만나 차기작인 '소확행'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 안타깝게도 2개월 후 폐암 3기 확정을 받았으나 신성일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확행' 제작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마지막 유작을 준비하던 신철승 미디어파크 PD는 "마지막 눈 감는 그 순간까지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며 안타까워했다.[신철승 미디어파크 PD]



아주경제와 함께 작업했던 영화 '소확행'에 출연하고 싶었고, 또 자신이 기획한 영화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크랭크인 해야했기 때문이죠.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500여편을 찍었지만 그의 '영화인생'은 여전히 미완이었을까요.

# 신성일은 전후 대한민국의 '청춘' 그 자체였다

신성일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요. 1937년생. 식민지 암흑기의 어둠이 짙어지던 무렵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겪은 뒤 막 산업사회의 걸음마를 시작하던 시절에 그는 20대를 시작했습니다. 2011년 출간되자마자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그의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는, 묻어둬도 될 일을 굳이 꺼내 '팩트폭격'을 한 셈이 되었죠. 이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청춘에 대한 그의 집요한 자의식같은 것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저 자서전 제목은, 그를 전후 대한민국의 '청춘 상징'으로 만들었던 1964년 김기덕 감독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선 ‘제임스 딘’이라는 반항적 청춘의 표상이 있었지만, 1960년대 한국에선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극도의 궁핍을 이겨낼 ‘삶의 당의정(糖衣錠)’같은 씩씩한 사랑꾼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때 별처럼 나타난 배우가 신성일이었죠. 이 이름은 데뷔 때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것입니다. 최고의 신성(新星)을 갈망하는 시대에, 당시로선 훤칠한 184cm의 키에 전쟁이라고는 겪은 것 같지 않은 귀공자풍의 시원스런 외모에 강렬한 반항적 눈빛까지 갖춘 23세(데뷔연도, 1960년)의 얼굴이 스크린에 등장했죠. 그리고 열광이 시작됐습니다.

 


#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그의 외모 카리스마?

이 외모 카리스마는 모든 것을 다 양해해줬을 겁니다. 그는 배우로서 멋진 발성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고 사투리 억양도 심해서 대부분 영화에서 성우가 더빙을 했죠. 자신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출연영화 500여편 중에서 신성일 목소리가 나오는 건 최근작 ‘야관문’을 포함해 8편 정도에 불과합니다. 연기력에 있어서도 발군의 무엇을 칭찬하는 목소리를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죠.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인기가 가능했던 까닭은, 그 ‘비주얼’이 대한민국 남성의 로망을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의 출연은 곧 흥행의 보증이었습니다.

1964년 ‘맨발의 청춘’이 나온 뒤로, 그는 수많은 ‘청춘’이 들어가는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그가 이 나라의 ‘청춘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1964년 ‘맨발로 뛰어라’ ‘빗나간 청춘’ ‘청춘은 목마르다’가 나왔고, 그 이후 ‘불타는 청춘’ ‘아빠의 청춘’ ‘흑발의 청춘’ ‘청춘을 맨발로’ ‘제3의 청춘’ ‘청춘극장’ ‘청춘고백’ ‘상처뿐인 청춘’등이 줄줄이 등장했습니다. ‘맨발의 청춘’은 1987년에 속편도 등장했죠.

# 맨발의 청춘 신드롬과, 신성일의 청춘 자의식

신성일의 나이로 보자면 첫 ‘맨발의 청춘’은 27세 시절이었고, 속편 ‘맨발의 청춘(1987)’은 49세 때였습니다. 그는 맨발에서 맨발까지, 한국 청춘의 거의 모든 매력과 사랑과 슬픔을 발산하고 품었던, 사랑과 이별의 아이콘이었던 셈입니다. 어렵고 숨찼던 시절에, ‘신성일 영화’는 사랑을 돋우고 슬픔을 어루만지며 끝없이 영사기를 돌렸습니다. 이런 시간들의 축적은, 영화 소비자인 대중들에게도 깊이 각인되었지만, 청춘을 공적인 무대에서 발산해온 인간 신성일의 무의식 속에도 두텁게 내장될 수 밖에 없었겠죠.
 

지난 9월 17일 배우 신성일이 요양중이던 병원에서 이장호 영화감독과 만나 차기작인 '소확행'을 준비하는 모습. [신철승 미디어파크 PD 제공]



자서전 이후에 신성일의 ‘사랑 행각’에 대한 비판 여론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랜 별거를 하면서도 결혼관계를 유지해왔던 엄앵란은 방송에 출연해 누가 부부문제를 물어올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이 있었음을 시인하면서도, “부부란 참고 살아야할 부분이 있지 않느냐”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2016년 엄앵란은 유방암 수술을 하게 되는데, 이 무렵 신성일이 아내의 간병과 뒷바라지를 해주는 장면이 다큐에서 공개되었습니다. 작년인 2017년 신성일의 폐암 사실이 밝혀진 뒤, 엄앵란은 마치 그 전 해의 남편이 해준 일을 갚듯 큰 돈을 기꺼이 써가며 신성일을 살리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이 부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겠지만, 엄앵란의 순애(純愛)와 그것에 대한 신성일의 고마움과 미안함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듯 합니다.

# 이제 소소한 행복과 사랑과 용서가 목말랐던 그 사람

신성일이 출연하기로 했던 영화 ‘소확행’은, 일본에서 나온 최근의 유행어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를 타이틀로 삼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때리고 죽이고 잔인하게 복수하는 내용이 아닌, 따뜻한 애정이 넘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죠.

거의 60년을 돌아온 영화인생과, 온갖 종류의 청춘을 살아낸 80대의 깨달음이 저 영화를 자아와 동일시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더 이상의 사랑의 헛꿈으로 내달리는 대신, 내면으로 돌아와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을 살피고 즐기는 눈을 갖추고 싶지 않았을까요.

또, ‘바람으로 그린 그림’은, 바람의 평생 파이터였던 신성일에게도 의미있는 기억의 결산이었을지 모릅니다. 작가 김홍신은 진짜 바람과 희망의 바람, 유행의 바람과 허파에 드는 연애바람까지가 모두 ‘바람’이라고 말했지만, 그 네 가지의 바람은, 바람 잘 날 없었던 이 땅의 ‘신성일 바람’으로 귀결되는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그는 눈감았지만,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대중기억의 허공에 남기고 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도 걸린다’는 김홍신의 표어는, 마치 그간 마음고생 많았던 엄앵란에게 바치는, 신성일의 마지막 연서처럼 느껴지는 건 저 뿐일까요.

아주경제와, '신성일 바람'의 잔잔한 해피엔딩을 찍었으면 좋았을텐데 몹시 아쉽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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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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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성일키는 184cm 아니고 174cm 입니다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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