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 한 사내가 거울을 보며 탄식했다. "나는 이미 시들어버린 걸까."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겸 사장은 이듬해 8월 11일 환갑을 맞아 은퇴할 계획이었다. 구글 출신 니케시 아로라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부사장으로 불러들였을 만큼 의지가 확고했다. 은퇴 시기가 임박하자 4년 전 후회가 밀려왔다. "사업가로 이름을 올렸다면 세계 제일을 목표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입버릇처럼 해온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손 회장은 결국 은퇴 계획을 접었다. 아로라와도 결별했다. 4년 전의 선택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2012년 휴대폰이냐, 그 다음이냐를 두고 고민한 손 회장은 휴대폰을 택했다. 이듬해 미국 3위 이동통신사 스프린트넥스텔을 216억 달러(약 25조원)에 인수했다. 4위 업체 T모바일까지 담으려 했지만, 미국 정부의 반발로 실패했다. 스프린트와 T모바일은 최근에야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의 합병 승인을 받았다. 그 사이 두 회사는 순위가 뒤집혔고, 손 회장은 합병 조건으로 통합회사 운영권을 양보해야 했다. 막대한 손실도 뒤따랐다.
은퇴 계획을 번복한 손 회장은 2016년 7월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을 인수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320억 달러(약 37조원) 전액 현금 거래였다. 주당 43%의 웃돈(프리미엄)을 부담하면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오히려 10년 후 가격의 10분의1에 산 것이라며 흐뭇해했다. 그러면서 "50수 앞을 내다보고 돌을 던졌다"며 "앞으로 20년 안에 ARM이 설계한 반도체가 1조개 이상 지구상에 뿌려지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 세계 스마트폰의 90% 이상이 이 회사가 설계한 반도체를 쓴다.
손 회장이 '50수를 내다본 포석'이라고 말한 건 과장이 아니다. 그는 모든 물건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시장의 잠재력에 오래전부터 주목해왔다. IoT의 두뇌인 반도체를 설계하는 ARM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게 이미 10년 전이었다고 한다. 회사에는 ARM을 인수하기 위해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해두라는 극비 지령까지 내려뒀던 것으로 전해진다. 손 회장은 ARM 인수를 시작으로 새로운 도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아로라와 헤어졌다. 그는 "욕심이 생겼다. 엄청난 '패러다임 시프트'의 새로운 비전을 보았다. 내 소임이 아직 덜 끝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손 회장은 ARM을 손에 넣은 뒤 패러다임 시프트라는 '빅픽처'의 포석들을 정조준해 사들이고 투자하기 시작했다. ARM이 모바일 인터넷시대 플랫폼을 장악할 것이라는 자신감과 2017년 출범한 기술투자기금 '비전펀드'가 밑천이 됐다. 차량·공간공유·자율주행·반도체·전자상거래·통신·IoT·로봇 등 투자 분야는 달랐지만, 모두 미래 인공지능(AI) 사회 구축을 위한 플랫폼이라는 공통분모로 수렴한다.
손 회장은 지난주 2분기(7~9월) 실적을 발표한 뒤 "너덜너덜한 실적을 내 참담하다"며 실수를 인정했다. 소프트뱅크는 사무실공유업체 위워크, 차량공유업체 우버 등 투자한 회사들의 부진 탓에 역대 최대 규모의 분기 손실을 냈다. 시장에서는 "손정의도 한물 갔다"는 혹평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손 회장은 69살 은퇴 계획마저 번복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아직도 펀드를 만들어 AI 혁명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고 했다. ARM을 인수할 때와 같은 빅픽처가 눈에 들어온 건지, 한물 간 손 회장이 만용에 빠진 건지 두고 볼 일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인 스기모토 다카시는 지난해 낸(한국어판)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이라는 책에서 '손정의에게 크레이지 맨(미친 사람)은 최고의 찬사"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손 회장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전 결코 세상을 바꿀 대단한 발명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보다 나은 특별한 능력이 단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패러다임 시프트의 방향성과 그 시기를 읽는 능력입니다. 눈앞의 2~3년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10년 후나 20년 후에 꽃피울 사업을 씨앗단계에서 구별해내는 능력이 제게는 있습니다. 또한 그에 대한 리스크를 감수할 능력도 다른 사람보다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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