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에서 2대에 걸쳐 모아온 귀한 문화재 예술품이 국민에게 돌아왔다. 아니 돌아왔다기보다는 선물로 받았다. 한편으로 이건희 회장이 생을 마감하면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성실한 관리자로 자처했던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우리에게 동시에 준 셈이다. 성실한 부모로서 입양 받은 기증품의 보존과 관리 그리고 활용과 계승발전이라는 바통을 넘겨받아 나머지 계주를 전력 질주할 책임도 함께 받았다.
이제 모두의 역량을 모아 최고의 기증품을 받은 것에 만족하고, 들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그 실천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보내준 이들 문화재와 예술품을 어떻게 관리·보존하고 조사·연구해서 문화의 꽃을 피워낼 것인가를 고민할 때이다. 그간 삼성가의 리움과 호암에서 금지옥엽처럼 자란 이들을 입양 받아 우리가 잘 키워내야 하는 숙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실 광복 이후 지지리 못살았던 우리가 10위권 경제 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 모두의 “잘 살아보세”라는 뜨거운 열망과 노력 그리고 삼성 등 기업보국을 실천에 옮긴 이들이 있어 가능했다. 하지만 경제발전에 매달려 간과한 것이 문화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문화’에 눈 돌린 선각자가 있어 오늘의 기증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런 귀한 아이들을 입양 받을 부모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 1945년 광복과 함께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학의 태두인 김재원 박사(1909~1990)가 주도해 개관한 후 약 25년간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토대를 닦아놓아 예산은 몰라도 체계(시스템)상 크게 부족한 점은 없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여전히 임시직에 지나지 않는 3년 임기의 관장과 2년짜리 학예실장에, 작품을 진단하고 치료할 의사인 소장품 보존처리전문가(컨서베이터)들이 일반행정직인 기획운영단장 산하에 배속되어있고, 미술관에 필수적인 소장품 보존처리전문가(컨서베이터)와 교육사(에듀케이터) 등의 인력을 일반학예직으로 퉁쳐 임용되는 개발도상국가 수준의 형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미술관은 ‘일반학예직’과 ‘미술학예직’이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약과다. 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그 설립근거를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두고 있다. 그런데 같은 법에 근거한 두 기관이 중앙박물관은 지역문화정책관실에, 국립현대미술관은 예술정책관실에 따로 배속되어있다. 이는 미술관을 당대미술(temporary)의 진흥과 발전을 담당하는 역할에 한정하는 것으로 본래의 ‘미술박물관(art museum)’의 기능을 아예 무시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미술관에 대한 인식 부족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럴진대 지방공립미술관은 살펴 무엇할까만 지금껏 지방공립미술관의 경우 소장품 보존처리전문가나 수복보존을 위한 직제와 시설을 구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이번에 기증대상이 된 미술관 중에는 개관 20년이 넘었지만 여태 전문직 관장을 임명한 적이 없는 곳도 있다. 또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겠다고 발 빠르게 나선 지방의 공립미술관은 비가 새도 몇 년째 예산을 확보 못해 비오는 날이면 양동이가 설치 작품처럼 전시장에 놓이는 형편이다. 현재 설립 운영 중인 미술관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방치하면서, 작품 수증 사실을 자신의 공적인 양 기자회견을 여는 기관장들의 낯두꺼움에 독자들의 얼굴도 화끈거렸을 것이다.
이제라도 근본을 새겨 박물관과 미술관을 바로 세워 보다 많은 이들이 즐겁고 기꺼이, 기증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면 기증이 문전성시를 이루지 않을까. 사실 이런 풍토조성을 위해서 중앙정부도 물납제 도입과 문화기부에 따른 소득세와 재산세 등을 감면해주는 문화기증제도(CGS·Cultural Gifts Scheme)를 도입해 조세제도를 징세의 목적뿐만 아니라 문화발전의 도구로 사용하는 전향적인 정책변화도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삼성가의 기증 문화재·예술품의 시대적 범위(스펙트럼)는 청동기시대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또 재료상으로도 너무나 다양하다. 따라서 삼성가의 기증 문화재·예술품으로 하나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설립할 경우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기능을 합한 방대한 규모로 각각의 시대와 장르에 따른 전문연구직을 확보하고 수장고도 다양하게 마련해야 해서 비능률적이고 비효율적이다. 따라서 고미술품의 경우 대부분인 9000여 건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것은 바람직했다. 산하 13개 지방 분관에 어린이 박물관까지 고려한다면 보존·관리·연구와 활용에 모자람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지금까지 장르 상으로 유화·수묵채색화·조소·판화·건축·공예·디자인·사진·미디어 아트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모든 것을 다뤄왔다. 시대도 근대(modern)와 현대(contemporary) 그리고 당대(temporary)에 이르기까지 혼재된 미술관으로 기능해왔다. 그것도 한 사람의 관장이 이 모든 것을 관장했다. 그간 “할 줄 모르는 것은 없지만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비평을 받아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역대 관장들은 무얼 해도 편파적이라고 지적받을 수밖에 없는 억울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이제 기능을 세분화해서 전문성을 기르고, 각관 별로 관장을 보임해 특징을 부여하고 서로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구조로 이번 삼성가 기증을 통해서 밀린 숙제하듯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의 최우선책은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이다. 잡화점처럼 다양하고 시대적으로 광범위한 국립현대미술관의 각각의 관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차별화하고, 국립근대미술관이 한국미술의 뿌리를 잇고 한국근대사의 토대를 튼실하게 세워 비어있는 한국근대사를 복원해야 한다.
“가슴 아픈 근현대사도 역사”라며 일제강점기 건축물은 보존하면서 우리 근대사의 족적이자 성과인 근대미술을 현대미술관에 묻어 둘 이유는 없다. 우리 손주들이 살 보편적인 문화국가 대한민국을 상상해보자. 70여년 만에 경제 강국을 이룩한 저력으로 앞으로 70여년 동안 공들여 문화선진국을 만들어보자. 그리고 그 계기가 이번 삼성가의 기증으로 비롯되었다면 기증은 더욱 빛을 발하고 우리도 기증받을 자격이 충분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보편적 문화복지국가를 향해.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1회 광주비엔날레 대변인, 전문위원, 전시부 부장(1995)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 실장(1996~2005)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 관장(2005~2006)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 총감독(2011)
대한민국 문화포장(1996) 자랑스런 박물관인상 수상(2005)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