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유일한 개방적 정치행사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다음 주 3월 5일 베이징(北京)에서 개막한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사무국은 이달 초에 일찌감치 “개방적이고 투명한 정신으로 내외신 기자들의 전인대 취재를 돕기 위한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인대 상임위 사무국은 “외국 기자들은 해당 국가 주재 중국 공관에 전인대 취재 비자를 신청하기 바란다”고 관영 신화(新華)통신을 통해 공지했고, 신청 기간은 지난 18일로 마감됐다. 베이징 서쪽 푸싱(復興)로에 미디어센터도 개설하고, 27일부터 업무를 개시한다.
내외신 기자들은 전인대 개막 첫날 리창(李强) 총리가 2시간에 걸쳐 읽어 내려가는 ‘정부 공작 보고’도 현장에서 들을 수 있고, 국무원 각부 장관도 인터뷰할 수 있으며, 총리와 외교부장이 주재하는 뉴스브리핑에도 참석할 수 있다. 해마다 전인대 개막일인 3월 5일은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 무렵이다. 중국 정부는 1978년에 시작된 ‘개혁·개방(改革開放)’ 시대를 이끈 덩샤오핑(鄧小平) 시대 때부터 전인대를 외국 기자들에게 개방해 왔다. 이때쯤이면 대체로 칙칙하고 어두운 색깔의 옷을 즐겨 입는 베이징 시민들도 전인대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모여든 3000명에 가까운 인민대표들과 함께 옷차림을 밝은색으로 바꿔 입어 베이징의 인상을 화려하게 변화시킨다.
그러나 올해 전인대 개막을 앞둔 중국 인민들은 물론 중국공산당과 정부 지도자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리오프닝 노력에도 4%대에 머물러 있는 경제성장률과 성장 부진에 따른 취업률 저하, 중국 GDP의 25%를 차지하는 중국 부동산 업계의 대표 주자 헝다(恒達·Evergrande)가 지난달 29일 홍콩법원에서 청산 명령을 받은 사실 등 중국 사람들이 가장 중시하는 ‘밥그릇 문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법원이란 중국이 1978년부터 45년 넘게 건설해 오려던 경제적인 법치(法治·Rule of Law)의 기준을 제공해 온 기관이다. 굳이 헝다 청산 문제가 아니더라도 전국 중소 도시들에 짓다가 만 아파트와 공공기관 건물들이 빚어내는 을씨년스러운 고스트 시티(Ghost City·鬼城)의 어두움이 중국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국 사람들과 당정(黨政) 지도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수치는 근년에 들어 급격한 감소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 FDI(Foreign Direct Investment·外商直接投資·外國人直接投資)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과 함께 시작돼 중국인들에게 가난과 죽음을 가져다준 마오쩌둥(毛澤東) 시대는 37년 만인 1976년 9월 마오의 사망으로 끝났다. 이후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3차 중앙위 전체 회의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사상해방(思想解放)’을 제시해서 대권을 잡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 시대가 2012년 11월 시진핑(習近平)이 당 총서기에 올라 ‘프티 마오쩌둥(Petite Mao Zedong·작은 마오쩌둥)’을 향해 달려가는 국가전략 노선의 전환을 시도하기 전까지 추구한 가장 중요한 수치가 FDI였다.
덩샤오핑이 1977년 미국을 방문해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미국 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진 이유도, 자오쯔양(趙紫陽) 총리가 1984년 1월 중국공산당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중산복(中山服·일명 인민복) 대신 양복을 입고 미국을 방문해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 이유도 미국의 중국에 대한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덩샤오핑은 1980년 상하이(上海)시 지도자들에게 중국 대륙 한가운데를 관통해서 동쪽 상하이로 흐르는 장강(長江)의 끝머리에 ‘룽터우(龍頭·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푸둥(浦東) 지역에 현대식 고층 빌딩으로 이루어진 쇼룸을 건설하도록 한 것도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경제 최고 전문가인 미국 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ago)의 배리 노튼(Barry Naughton) 교수에 따르면 FDI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대의 중국에 제조업과 수출 주도 산업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했다. 노튼은 명저 ‘The Chinese Economy, Transition and Growth(중국 경제의 전환과 성장)’에서 “중국의 FDI 유치는 홍콩과 대만을 창구로 해서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에 홍수를 이루어 홍콩 인근에 선전(深圳) 경제특구가 건설된 주동력도 FDI였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2011년 11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당선되어 대권을 장악하고, 2020년 10월 덩샤오핑이 건설한 개혁·개방 시대의 정치 관례를 깨고 3연임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에 오른 시진핑이 덩샤오핑 시대의 선부론 대신 공동부유론(共同富裕論)을 제시하고, ‘쌍순환(雙循環)’ 이론에 따른 내수경제의 건설로 중국 경제의 기조를 바꾸었다. 이후 시진핑은 알리바바의 마윈(馬云)에게 정치적 공격을 가해 마윈이 이끌어 온 인터넷 플랫폼 기업들을 위축시키고, 부동산 업계 1·2위인 헝다와 비구이위안(碧桂園·Country Garden)을 채무불이행 사태로 몰아가도록 하자 FDI는 2021년에서 2022년 사이에 2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한 뒤, 2022년에서 지난해 사이에는 5분의 1 이하로 급감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은 중국의 FDI 급감에 대해 “중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강조하면서 반(反) 간첩법을 제정해서 외국 기업 직원들을 감시·억류하고, 중국 시장에 대한 조사 자체를 범죄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큰 이유를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여론조사 기업인 갤럽도 지난해 중국 사무소를 폐쇄했다.
덩샤오핑 시대가 40여 년간 건설해 놓은 개혁·개방과 시장경제 시대는 시진핑의 공동부유론과 마오쩌둥 딜레당트(Delettante·애호가)적 국정 운영으로 이대로 종언(終焉)을 고하는 것일까. 시진핑은 전국 각지에 마오쩌둥 동상을 세우고, 초상화를 거는 한편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강조하고는 있으나 덩샤오핑 개혁·개방 시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완전 해체하려는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자신의 시대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신시대’로 규정해서 덩샤오핑 시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근본적으로 폐기할 의도는 아닌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홍콩 시사주간 아주주간(亞洲週刊) 최신 호에 따르면 중국 남부 후난(湖南)성 당 기관지 후난일보는 지난 18일 “덩샤오핑 사망 27주년을 기념하는 사상해방 대토론회를 개최한다”는 사고(社告)를 1면 머리기사로 게재했다. 마오쩌둥 출생지인 후난성 당 기관지 후난일보는 이 기사에서 선샤오밍(沈曉明) 후난성 당서기가 “덩샤오핑이 주도한 1978년의 진리표준 대토론회에서 교훈을 얻어 당원 간부들이 속박을 벗어나 시야를 넓히는 토론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언급을 했다고 전했다. 선샤오밍 당서기는 “드러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탕핑(躺平)과 같은 사고도 토론의 대상”이라고 적시했다. 그런가 하면 “개혁·개방은 그냥 읽기 쉽게 쓴 한 편의 소설이 아니다(改革開放不是爽文)”는 글귀가 요즘 중국 관영매체에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닌 듯도 하다. 3월 5일 개막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올까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본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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