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의 골프史] 유럽 신인상에 이름 붙인 英 프로골퍼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동훈 기자
입력 2024-12-11 06: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사진헨리 코튼 누리집
젊은 시절 잉글랜드의 헨리 코튼이 미소를 지으며 사진 촬영 중이다. [사진=헨리 코튼 누리집]
유러피언(현 DP 월드) 투어의 신인상에 한 선수의 이름이 붙어 있다. 바로 잉글랜드의 헨리 코튼. 상의 이름은 헨리 코튼 경 올해의 신인(Sir Henry Cotton Rookie of the Year) 상이다.

1907년 1월 28일 영국 체셔에서 태어난 코튼은 이스트 덜리치에서 자랐다.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크리켓 선수로 뛸 만큼 운동신경이 좋았다.

프로팀(서리 클럽 앤드 그라운드)과의 경기에서 3번 타자로 나서 학교를 대표할 정도였다.

코튼이 자신의 형(레슬리)과 함께 골프를 접한 것은 1920년 아쿠아리우스 골프클럽에서다.

프로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23년 학교를 그만두면서다. 그때부터 스코틀랜드로 가서 디 오픈 챔피언십 문을 두들겼다. 1925년과 1926년은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렇게 도전을 거듭하다가 1934년, 1937년, 1948년 디 오픈에서 3회 우승했다. 1934년 디 오픈 한 라운드에서는 65타를 기록했다. 당시 코튼이 사용하던 공은 던롭이다. '던롭 65'가 탄생하게 된 계기다.

1930년대에 코튼은 유럽에서 거푸 우승컵을 들었다. 1954년까지 39승을 쌓았다.

남자골프 4대 메이저 대회 중 마스터스 토너먼트에는 3회, US 오픈은 1회 출전했다. 마스터스 최고 순위는 공동 13위, US 오픈은 한 번 나가서 17위를 기록했다. 다른 메이저인 PGA 챔피언십은 단 한 번도 출전하지 않았다.

코튼은 고급스러운 삶을 좋아했다. 롤스로이스를 타고, 집 대신 5성 호텔에서 살았다. 쉴 때면 고급 샴페인을 마셨다.

반대로 골프 꿈나무가 꿈을 꿀 수 있도록 자신이 펴낸 서적 수익금으로 골프 재단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수천명이 골퍼가 되는 꿈을 이뤘다.

코튼은 1980년 세계골프명예의전당에 헌액됐다. 

코튼은 1987년 12월 80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세상과 이별하기 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권유 받았다. 승낙 후 받기를 고대했지만, 눈을 감으며 직접 받지 못했다. 

코튼은 선수 생활 중에 "모든 샷이 중요하다. 3피트(약 90㎝) 퍼팅은 300야드(274m) 비거리의 드라이버만큼이다 중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