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칼럼] 대러 외교에는 실용과 국익이 적용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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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이재명 정부가 출범 이래 ‘실용’과 ‘국익’을 강조하면서 전개한 외교 분야는 대체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새로운 정부가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국들과의 관계를 무난히 설정하였다고 본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한구석이 비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러시아 관계에 있어서는 직전 정부 때와 비교하여 이 대통령이 올해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를 뿐이고 바뀐 것이 없다. 무엇보다도 대러 제재가 유지되고 있다. 외교부는 제재 해제에 대해 우선 전쟁이 끝나고 미국 및 유럽연합이 제재를 해제한 뒤에나 검토하겠다고 하고 있고, 최근 대통령에 대한 업무 보고에서는 ‘우리 국민·기업 보호를 위한 한·러 간 소통 지속’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이후 한·러 관계는 파탄이라는 평가를 겨우 면할 정도의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양국이 상대국 수도에 대사관을 유지하고 있고, 대사대리 체제로까지 가지는 않았으며, 비자 면제 협정이 효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외교 채널 외에 분야별 정부 간 협의체는 모두 작동하지 않고 있다. 교역 규모를 보면 전쟁 발발 직전인 2021년에 비해 2024년에는 절반 이하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현재 대러 수출 통제 품목은 1402개나 되며 통제 품목이 아니어도 대금 결제의 어려움 때문에 거래가 성사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때문에 지난 약 4년 동안 우리 기업들이 입은 경제적 손실이 상당하다. 또한 우리 사회에 대러 교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어 학술, 문화, 예술 등 비경제 분야의 교류도 눈에 띄게 줄었는데 이는 직항 운항 중단의 결과인 면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에서 신북방정책을 천명하면서 제안하였던 ‘9개 다리 행동계획(가스, 전력, 조선, 북극 항로, 철도, 항만, 일자리, 농업, 수산)’은 거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해서 양국 관계가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대러 제재는 우리 정부가 자발적으로 발동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러 캠페인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접 당사자도 아닌데 러시아를 불필요하게 자극하였다. 게다가 국내 매체들이 서방의 반러 프로파간다를 아무 생각 없이 추종하여 우리 사회 내 대러 교류 자체를 회피하는 분위기가 퍼짐에 따라 관료들은 추진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어도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이러한 태도는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조장하는 악순환이 이루어졌다. 대러 수출은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것 같으면 불허하였고 제3국을 통한 우회 수출까지 찾아내서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였다. 문화 교류에 있어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세계적인 발레리나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내한 공연이 2024년 4월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공연을 앞두고 취소되었다.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비난 성명에 이어 일부 매체의 비판적인 보도가 있자 예술의전당 측이 공연을 취소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발레 공연은 제재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여 중심을 잡아야 했다.
 
문제는 지난 정부 시절 공무원 사회의 분위기가 정부가 바뀌었음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월 예정되었던 ‘한·러 북극 협력 포럼’ 행사가 취소되었는데 이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러시아 측 고위 인사의 해수부 장관 면담이 성사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관계 부처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행사 자체가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를 왕래하는 많은 국민이 직항 운항 중단에 따른 불편을 호소하고 있어도 여전히 관계 부처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유엔 안보리나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민간항공사의 러시아 노선 운항에 대해 제재한 적이 없으며 일부 국가가 개별적으로 취한 제재가 있을 뿐이다. 2023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 내 생산설비를 2년 이내 환매조건부로 헐값에 매각하고 철수하였고 올 12월로 그 기간이 도래하여 원래 조건대로 회수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에 대해 관계 부처가 대책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지난 9월 뉴욕에서 외교부 장관이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 ‘한국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우호적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한국 정부가 대러 제재를 유지하고 있고 사실상 러시아와의 교류 협력을 억제하면서 러시아 측에 대해 우리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우호적 여건을 조성해 달라고 요청하면 러시아 측의 성의 있는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실용과 국익의 관점에서 러시아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선 수출 측면에서 러시아는 전혀 작지 않은, 유라시아 전체로 통하는 시장이다. 최근 한국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저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큰 이유는 미국에 대한 수출의존도가 상당하다는 점일 것이다. 수출을 위해서라면 어느 한 나라도 무시할 수 없으며 시장 다변화는 단순히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달성해야 할 과제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대러 수출이 반 토막 나버렸는데 이런 상태를 계속 방치할 것인가? 제재가 해제되어도 이미 중국 기업들에 내준 시장을 되찾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에너지 수입 측면에서 러시아는 코앞에 있는 매력적인 공급처이다. 정부가 제재하지 않았음에도 우리 기업들은 무슨 리스크가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러시아에서 수입은 대폭 줄이면서 중동과 미국에서 도입을 늘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이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제조업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경제의 쇠퇴가 여실히 보여 준다. 유럽 국가들이 저렴한 러시아산 에너지를 거부하면서 특히 독일 기업들이 줄도산하였다. 일본은 G7 국가로서 대러 제재에 앞장서고 있음에도 ‘사할린 가스 프로젝트’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미국이 주도한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상한가 적용의 예외를 관철하였으며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에너지를 전쟁 전보다 늘렸다. 전후 복구 사업은 유럽연합이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불법으로 인출하여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려던 계획이 무산됨에 따라 아무런 재원이 없는 우크라이나보다는 러시아 쪽에서 사업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극 항로 개척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투자하고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수천 ㎞에 달하는 항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북극해에 인접한 러시아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우주항공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다른 선진국들과는 달리 후발 주자인 한국과의 협력에 열린 자세를 보이는 러시아는 유용한 파트너이다. 극동 시베리아 지역 개발은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에 이바지할 수 있는 동시에 한·러 간 전략적 협력의 한 축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장기 프로젝트임에도 민간 기업들이 장기 투자에 따르는 위험 때문에 주저하여 지난 30여 년 동안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이제 정부가 마중물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보 측면에서 푸틴의 2024년 6월 평양 방문 계기에 러시아가 북한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체결한 것을 한국은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협정은 1953년 한·미 상호 방위조약과 유사한 바 ,적어도 러시아가 북한의 대남 선제공격을 지원할 가능성은 없으므로 엄밀히 말해 북한의 실질적 위협이 증대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 협정의 체결은 한국의 비우호적 행위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이라기보다는 북한의 무기 지원과 병력 파견에 대한 보상으로 보는 것이 객관적이다.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남북한 양자 모두와 관계를 발전시킨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러·북 밀착이 반드시 한·러 관계의 약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한국이 하기에 달려 있다고 본다. 즉 러·북 관계와 한·러 관계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으로서는 러·북 밀착을 견제하는 것이 절실할수록 한·러 관계를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현명하며 더욱이 현재 러시아는 한·러 관계 회복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가 북한에 고도 정밀 무기 기술을 이전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한다면 러시아에 대해 타협이나 거래를 시도해야지 러·북 군사협력이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비난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전략적 측면에서 러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북한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통일은 ‘받아놓은 밥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015년 8월 국내 매체 보도에 따르면 북한 급변 사태 시 중국은 북한을 장악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미국 측에 ‘북한 분할 통제 방안’을 논의하자고 제시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중국군은 압록강 하구 단둥 지역에서 도하 작전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북한 유사시 중국군의 북한 진입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미국이 외교적으로 압력을 행사하겠지만 구두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제대로 한다면 러시아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는 북한 정권의 산파 역할을 한 나라이고 북한을 중국과의 공동 영향권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중국이 러시아의 묵인 아래 북한을 장악하게 되면 한국은 중국과의 전쟁을 불사할 것인가? 따라서 러시아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주한미군은 물론이고 한국군을 한반도에 묶어 두기 위해 중국은 북한의 대남 도발을 부추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중국은 전략상 남북 충돌을 유도하겠지만 러시아의 입장은 다르다. 만일 제2의 남침 전쟁이 일어난다면 러시아가 기대할 수 있는 전략적 이익은 이렇다 할 것이 없다. 반면에 30여 년째 숙원사업인 3대 메가 프로젝트(철도, 가스관, 전력망 연결)의 실현은 더욱 요원해질 것은 물론이고 러시아 정부의 중점 국정과제인 극동시베리아 개발도 심각하게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한국을 극동시베리아 개발 추진을 위한 최적의 파트너로 보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의 도발을 지지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정부는 현재 미국과 유럽연합의 눈치를 보면서 러시아에 대해 안이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한국의 제재는 대세에 영향을 미칠 만한 것이 못 되며 제재를 해제했을 때 예상되는 기회비용도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을 빼기로 작정하고 종전 협상에서 러시아의 입장을 두둔하는 듯한 태도마저 보이고 있다. 더욱이 지난 8월 알래스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종전 논의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대해 제재 해제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경제협력을 제의하였고 미국의 중국 견제 정책에 러시아의 협조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연합은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통일된 입장을 취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현재 미·러 관계 동향을 보면 한국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미국과 러시아의 제휴를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우리의 전략적 이익을 확보한다는 외교적 상상력을 발휘할 때이다. 러·북 밀착을 우려하면서도 대러 관계를 정상화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북핵 문제 해결의 진전과 남북 대화의 성사를 위해 러시아의 측면 지원만을 기대한다고 하면 러시아와 대화가 제대로 되겠는가?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대 법학과 ▷영국 옥스퍼드대 외교관 연수과정 수료 ▷주우즈베키스탄 공사 ▷ 주이르쿠츠크 총영사 ▷주러시아 공사 ▷상명대 글로벌지역학부 초빙교수 ▷현 유라시아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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