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인 26대 서울대 총장]
뿌리는 한국인이지만 국적은 외국인인 사람을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 자금이 턱없이 부족하자 해외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로서는 기댈 언덕이 재일동포밖에 없었다. 굴욕적인 협상이라는 비판 속에서 1965년 일본과 수교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대학에도 재일동포 2세뿐만 아니라 일본인 유학생이 특별전형으로 입학하였다. 그때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친구가 ‘한솥도시락’ 이영덕 회장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한국에서 사업을 펼치면서 몇 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마침내 성공하여 모교에 거액의 장학금을 희사한 바 있다.
정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간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성공한 기업가들의 국내 투자를 장려하였다. 이때 대표적으로 국내에 투자한 이들이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과 판본(방림)방적 서갑호 회장이다. 지금 롯데 호텔과 백화점이 자리 잡고 있는 을지로 입구는 원래 국립중앙도서관·한국산업은행·반도호텔 자리였다. 롯데그룹은 현재 재계 서열 6위의 재벌로 성장하였다. 방림방적은 섬유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서 회장은 한때 일본에서 개인 소득 순위 5위, 소득세 납부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롯데와 방림은 ‘악질적인 매판자본’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 당시 대표 언론이던 동아일보는 ‘롯데와 사카모토(阪本)’ ‘야누스의 얼굴’이라고 힐난하였다. 즉 ‘검은 머리 일본인’은 외국인이 누릴 수 있는 온갖 특혜만 누리면서 한국인으로서 모국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은 없고 오로지 이권에만 천착한다는 비판이었다. 쿠팡 사태 김범석 의장이 오버랩된다.
롯데가 승승장구한 반면에 방림방적은 부도가 나고 서 회장도 요절하면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창업자인 서갑호 회장은 영원히 애국자로 기려진다. 서 회장은 대한민국이 일본에서 번듯해야 한다며 도쿄 시내 한복판에 2400평에 이르는 대지를 기증하였다. 이 땅에는 현재 주일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들어서 있다. 대사관 건물은 서 회장 아호를 따 ‘동명재’라 칭하고 ‘동명관’이라는 작은 건물에는 서 회장의 인생역정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도 대사관 방문 때 동명관에서 서 회장 영상물을 시청하면서 학창 시절 방림방적 비난에 부화뇌동했던 기억과 서 회장의 뼛속까지 애국자 모습이 교차하면서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판본방적은 사라졌어도 서 회장이 기부한 시가 1조원 넘는 땅에 주일대사관은 건재하다. 정부는 국민훈장을 추서하고, 대사관에서는 매년 11월 1일을 ‘서갑호의 날’로 기린다. 2025년 10월에는 정부에서 ‘이달의 재외동포’로 현창되었다. 반세기 전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검은 머리 일본인’으로 비난받던 서갑호 회장은 사후에 애국자로 부활한다.
롯데·방림과 달리 이번에는 ‘검은 머리 외국인’이 일본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쿠팡 창업자 김범석 의장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국적을 가진 ‘검은 머리 미국인’이다. 한국에서 사업을 영위한다는 점에서 쿠팡은 롯데·방림과 비슷하다. 그러나 투자 동기나 투자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혈혈단신으로 건너간 일본에서 성공한 기업인 신격호·서갑호는 여력을 애국심에 입각하여 금의환향한 것이다. 그러나 쿠팡은 그 출발에서부터 애국심과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미국인이 창업한 미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한 것이다. 쿠팡은 90% 이상의 사업을 한국에서 수행할 뿐 미국에 본사를 둔 미국 기업이다.
글로벌 산업사회에서 가장 첨단적인 기업 유형인 주식회사의 자본이나 국적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1000조원을 넘어서고, 전 세계 기업 중에서 시가총액 15위에 위치해 있고, 코스피 시가총액의 22%이고 우선주까지 포함하면 37%에 이른다. 정작 삼성전자 주식의 외국인 보유율은 51%에 이른다.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대부분 기업에는 외국인이 주주로 참여한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인데 주식 가액만으로 따진다면 삼성전자 주인은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다. 따라서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요구한다면 미국 뉴욕으로 본사를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삼성그룹과 그 가족은 매국노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애국심만으로 삼성전자를 국내에 붙들어 둘 수는 없다. 삼성전자가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면 한국 본사를 고수하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쿠팡 사태를 전적으로 쿠팡이나 김범석 탓으로만 돌릴 수 있는가? 쿠팡이 보여준 개인정보 유출 이후의 행태는 국민적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쿠팡이 미국에서 엄청난 자금을 뿌리면서 로비를 진행하지만 정작 피해 발생지이자 이익 창출지인 한국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에 대하여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 쿠팡은 입법로비를 위해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을 가장 많이 거느리고 있다. 이 와중에 쿠팡 임원과 여당 원내대표의 호텔 식사가 논란이다. 첨단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라 개인정보 유출은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최대 쟁점으로 부상한다. 국내에서도 전 국민을 상대하는 STK·KT·LG 등 3대 통신사는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를 입은 가입자에 대하여 상응한 보상과 배상을 행한 바 있다. 다른 국내 기업들도 개인정보 유출의 책임을 인정한다.
그런데 쿠팡은 개인정보 유출 그 자체를 객관적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첫째, 정부 발표에 의하면 3367만건 이상이라고 하는데 쿠팡은 정작 3000건 정도라고 한다. 더 나아가 배송번호·비밀번호는 1억4000만회 털렸다고 한다. 쿠팡의 정보 왜곡이 명백하다. 둘째, 제대로 된 보상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 사탕발림과 같은 5만원 쿠폰 제공이 전부다. 이에 한국과 미국에서 집단소송이 제기되면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예고한다. 셋째, 미국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한 로비를 진행한다. 미국 정부의 최고위 인사들이 한국 정부 최고위 인사를 상대로 미국 기업 쿠팡을 차별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한국은행 총재에 해당하는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차기 의장 지명자가 현직 쿠팡 사외이사라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넷째, 한국에서 창출한 수익보다 더 많은 과실을 미국으로 송금한다. 다섯째, 최고책임자인 김범석 의장이 책임지는 자세를 전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과도 하지 않는다. 유사사건에서 SK 최태원 회장 등이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과 전혀 다른 양상이다. 그런데 사과는 한국 특유의 법감정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헌법재판소에서도 사죄(광고)는 위헌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김범석 의장이 사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은 너무나 한국적이다.
이제 쿠팡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쿠팡을 국내 매출 41조원이 넘는 최대 공룡 유통업자로 성장하는 데 한국의 잘못은 없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쿠팡 성장의 밑거름은 유통산업발전법이 제공했다. 쿠팡의 독점체제는 2013년 여야 합의로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을 개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유통법은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형마트에 월 2회 의무 휴업, 자정부터 오전 10시(새벽배송)까지 영업금지를 도입하였다. 쿠팡이 새벽배송을 전면에 내세워 365일·24시간 영업을 할 때 경쟁업체인 기존 대형마트들, 예컨대 홈플러스·롯데마트·이마트 등은 손발이 묶였다. 정작 시대 흐름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커머스(전자상거래)로 변화하는 시점에 법률은 거꾸로 오프라인 기업의 온라인 영업을 제한 내지 사실상 금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오프라인에서 압도적으로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대형마트들은 새벽배송을 할 수 있는 인적·물적 시설을 다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통법의 새벽배송금지라는 족쇄에 묶이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커머스 시장은 오프라인 시장을 넘어서서 54%에 이른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24년 쿠팡 연 매출(41조3000억원)이 국내 대형마트 전체 소매 판매액(37조1000억원)을 추월했다. 반면에 선두 주자였던 홈플러스는 MBK가 인수한 후 존폐 기로에 섰다. 그런데도 2025년 국회는 시대 역행적인 유통법 규제를 2029년까지 연장하는 입법을 단행되었다. 정작 대형마트 규제가 의도한 전통시장 활성화는 효과가 제대로 증명되지도 못한다.
소상공인을 위한 골목상권과 전통시장 보호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이념이 현실세계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 실제로 쿠팡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골목상권뿐만 아니라 기존 유통산업까지 붕괴로 몰고 가는데 정부와 국회는 알면서도 수수방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전 세계는 일일생활권으로 작동한다. 쿠팡 사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통법의 규제가 골목상권 보호보다는 오히려 제3의 외국 공룡기업을 탄생시킨 오류를 범했다. 유통법 규제를 입법화했던 인사들은 지금이라도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석고대죄하고 변화된 현실에 부응하는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
쿠팡이 한국민의 정서에도 부합하는 상행위를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상도덕보다는 영리적 상행위에만 충실한다는 점에서 한국민의 심성에 부합하지 못한다. 쿠팡의 대응은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어도 법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빈틈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국회에서 청문회라고 열어 놓고 정작 로저스 쿠팡 한국 대표를 마치 범죄인 대하듯 윽박지르는 고압적인 모습은 오히려 미국 정부나 관계자들에게 한국이 미국 기업에 대해 차별적 대우를 한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결과적으로 청문회는 안 하느니만 못하고, 오히려 쿠팡 측 작전에 말려든 꼴이 되었다.
쿠팡 사태의 본질은 시대착오적인 유통법이다. 쿠팡은 유통법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성공한 기업이다. 이제라도 모든 유통업체에 동등한 경쟁 기회를 부여하여야 한다. 유통법은 정치논리가 아니라 시장논리에 충실해야 한다. 실제로 필자는 과거 유통법 개정 시점에 대형마트 관계자들의 한탄을 직접 들은 바 있다. 즉 지방 도시에 대형마트를 설립하려 하는데 지역 출신 유력 정치인이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국경 없는 경쟁시대 글로벌 스탠더드 추구해야
유통법 규제 폐기와 더불어 숙고가 필요하다. 첫째, 골목상권이나 소상공인 보호라는 가치는 유통법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입법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산업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소벤처기업부를 설치한 취지에 따라 중기부에서 적극적으로 대안을 마련하여야 한다. 둘째, 새벽배송·로켓배송으로 드러난 근로자들의 근로조건 개선과 관련된 건강권 문제는 노동부가 새로운 논의의 장을 마련하여야 한다. 새벽배송의 전면적 허용 여부는 모든 기업에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셋째, 미국 법인 쿠팡에 오너가 ‘검은 머리’라는 이유로 한국인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보다 냉정하게 쿠팡사태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역설적으로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차별적 대우를 받으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기 마련이다. 2025년 LG 미국 현지 법인에 근무하던 한국인들이 강제구금 당하던 때에 국민적 분노가 일지 않았던가.
역설적으로 로켓배송·새벽배송이라는 유통 신화를 창출한 쿠팡의 행태가 오히려 노동유연성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의 기회를 제공한다. 주 52시간 근로제와 쿠팡식 근로조건이 병행할 수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오히려 노동 현장에서는 투 잡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근로조건은 노동현장에 호응하여야 한다. 늦다고 판단할 때 오히려 이를 수 있다. 쿠팡사태는 예고된 참사다. 지금부터 참사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은 정부와 국회 몫이다. 이제 법과 제도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해야만 한다. 이럴 때일수록 언론과 국민들도 좀 더 냉정할 필요가 있다.
▷파리2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한국공법학회 회장(2005~2007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2009년 1월~2012년 12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2010~2013년)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 의장 ▷제26대 서울대 총장(2014년 7월~2018년 7월)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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