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 공공기관 인사 구조는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공공기관 342곳을 분석한 결과, 윤석열 정부 시절 임명된 기관장 208명 가운데 약 60%가 현 정부 출범 이후에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임기가 2027년까지인 인사는 101명, 2028년까지인 경우도 49명에 달한다.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정책 집행 라인의 다수는 바뀌지 않은 상태다.
문제는 합법성이 아니라 정당성이다.
공공기관장은 단순한 관리자나 기술 관료가 아니다. 이들은 에너지, 수자원, 공항, 금융, 노동 정책을 현장에서 집행하는 실질 권력이다. 정책은 청와대에서 결정되지만, 결과는 공공기관에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이 자리는 정치와 무관해야 하는가. 오히려 반대다. 가장 정치적인 자리다. 국민의 삶과 직결된 정책이 구현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구조는 기형적이다.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정책을 실행하는 핵심 인력은 그대로다. 책임은 대통령이 지지만 실행은 다른 철학을 가진 인사들이 맡는다. 이 구조에서는 정책 실패의 책임도, 성공의 공도 흐려진다. 그래서 “전임 인사 때문”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이건 정치 공방이 아니라 시스템의 결함이다.
물론 반론은 존재한다. 공공기관장 임기 보장은 정권의 입김으로부터 기관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라는 주장이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 이 제도는 그런 취지로 도입됐다. 그러나 현실은 그 취지를 훼손하고 있다. 정치권 출신 인사가 다수를 차지하는 구조에서 임기 보장은 중립성의 장치가 아니라 사실상 정치적 보호막으로 작동하고 있다.
제도를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미 현실에서 무너진 제도를 재설계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단순히 “대통령 임기와 맞추자”는 식의 획일적 접근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정권 교체 때마다 수백 명의 기관장이 동시에 교체될 경우, 기관 운영의 불안정성과 장기 국책사업의 연속성 훼손이라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원전, 철도, 수자원 같은 사업은 정권보다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이 점을 외면한 개편은 또 다른 실패를 낳는다.
따라서 해법은 ‘일괄 교체’가 아니라 ‘구조적 분류’다.
첫째, 정책 집행형 기관은 대통령 임기와 연동해야 한다. 에너지, 인프라, 노동, 산업 정책을 직접 수행하는 기관은 정부 철학과 일치해야 정책 효과가 나온다. 한국전력, 수자원공사, 도로공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규제·감독형 기관은 임기를 독립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금융 감독, 공정 경쟁, 인권, 감사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은 정권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대신 중간 평가와 해임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
셋째, 연구·기술형 기관은 혼합형 모델이 필요하다. 장기 프로젝트의 연속성을 유지하되, 핵심 경영진 일부는 정부 정책 방향과 연동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기능에 따라 임기 구조를 다르게 설계해야 한다. 그래야 독립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기준도 명확해야 한다. 임기 보장 여부는 ‘정치적 중립성 필요성’과 ‘정책 집행 직접성’이라는 두 축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 기준은 법률로 명문화하고, 임기 중 평가와 교체 절차 역시 제도화해야 한다. 그래야 정권의 자의적 판단을 막을 수 있다.
미국은 대통령 교체 시 수천 개 직위가 함께 교체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권한과 책임이 일치하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정권 초기 행정 공백과 비효율이라는 비용도 존재한다. 한국은 이 모델을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교훈은 있다. 권한과 책임은 일치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은 정반대다. 책임은 대통령에게 집중되지만, 실행 권한은 분산돼 있다. 변수는 많다. 예산, 글로벌 경제, 산업 구조, 정치 환경이 정책 성과를 좌우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책임 구조는 명확해야 한다. 변수가 많다는 이유로 책임까지 흐려져서는 안 된다.
민영삼 사장의 사의는 그 모순 위에서 나온 선택이다. 어떤 이는 버티고, 어떤 이는 물러난다. 기준은 없다. 이건 제도가 아니라 관행이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누가 남고 누가 나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가 국가를 작동시키는가를 물어야 한다.
공공기관장은 권리가 아니라 책무다. 그 책무는 국민을 향해야 한다. 그렇다면 임기 역시 국민의 관점에서 설계돼야 한다. 정치적 중립성도, 정책 실행력도 모두 중요하다. 문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60%는 숫자가 아니다. 시스템의 경고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다음 정부에서도 같은 논쟁이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일신상의 사유”로 물러날 것이다.
그 반복을 끊을 것인가. 아니면 방치할 것인가.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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