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경쟁력은 숫자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기술과 같은 자본을 가진 국가라도 결과가 다른 이유는 제도, 그중에서도 규제에 있다. 규제는 산업의 속도를 결정하고 시장의 방향을 바꾼다. 지금 세계는 보이지 않는 이 규제의 설계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규제합리화위원회를 주재하며 네거티브 규제 전환을 선언한 것은 이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겠다는 의미다. 규제를 줄이겠다는 접근이 아니라 규제를 통해 경쟁력을 설계하겠다는 선택이다.
네거티브 규제의 핵심은 단순하다. 금지된 것만 막고 나머지는 허용한다는 원칙이다. 기업이 먼저 움직이고 정부는 사후에 개입한다. 이 방식은 혁신의 속도를 높이고 시장의 실험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한 완화가 아니라 정교한 설계라는 점이다.
이 원리는 이미 글로벌 주요 국가에서 다양한 형태로 구현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이다. 미국은 플랫폼과 인공지능을 포함한 첨단 산업에서 사전 규제를 최소화해 왔다. 그 결과 구글, 아마존, 오픈AI 같은 기업들이 시장에서 먼저 실험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 기업은 정부의 허가를 기다리기보다 시장에서 검증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글로벌 표준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접근은 명확하다. 혁신의 속도를 막지 않는다. 대신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강력하게 개입한다. 반독점 규제, 개인정보 보호, 플랫폼 책임 강화 등은 사후 규제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네거티브 규제가 ‘무규제’가 아니라 ‘사후 책임 강화’라는 점을 보여준다.
유럽연합은 다른 길을 택했다. GDPR(개인정보보호 규정)과 디지털시장법(DMA), 디지털서비스법(DSA)을 통해 플랫폼과 데이터 활용을 강하게 통제했다. 이는 소비자 보호와 공정성을 강화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글로벌 플랫폼 기업의 탄생은 제한적이었다. 유럽은 안정성을 선택했고, 그만큼 속도에서는 제약을 받았다.
최근 유럽연합은 이 균형을 다시 조정하고 있다. 인공지능법(AI Act)을 통해 규제를 도입하면서도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규제의 범위와 강도를 차등화하고 있다. 위험도가 높은 분야는 사전 규제를 유지하고, 나머지 영역은 유연하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는 사실상 네거티브 규제 원리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영국은 보다 실용적인 접근을 택했다. 금융 분야에서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해 새로운 서비스가 실제 시장에서 시험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는 사전 규제를 완전히 없앤 것이 아니라, 일정 조건 하에서 규제를 유예하는 방식이다. 이 제도를 통해 런던은 글로벌 핀테크 혁신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싱가포르는 규제를 국가 전략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디지털 금융, 블록체인, 바이오 산업에서 규제를 유연하게 적용하며 글로벌 기업과 자본을 유치했다. 금융당국이 직접 혁신 기업과 협력하며 규제를 설계하는 방식은 속도와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시도다.
중국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기에는 인터넷과 플랫폼 산업에서 규제를 느슨하게 적용하며 알리바바, 텐센트 같은 기업의 성장을 허용했다. 이후 시장 지배력이 커지자 강력한 규제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는 사전 완화와 사후 통제라는 이중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 국가의 사례는 공통된 결론으로 이어진다. 규제의 핵심은 양이 아니라 구조다. 사전 통제와 사후 관리의 균형, 자율과 책임의 결합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균형은 산업의 성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네거티브 규제가 도입되면 가장 먼저 변화하는 것은 산업의 진입 구조다. 스타트업은 규제에 막히지 않고 시장에서 바로 실험할 수 있다. 이는 혁신의 속도를 높이고 경쟁을 촉진한다.
다음으로 기업의 전략이 달라진다. 규제가 유연하고 예측 가능할수록 기업은 공격적으로 투자한다. 반대로 규제가 불확실하면 기업은 보수적으로 움직인다. 규제는 기업의 행동 방식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다.
자본의 흐름 역시 바뀐다. 글로벌 자본은 규제 리스크가 낮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시장을 선택한다. 규제가 유연한 국가는 자본을 끌어들이고, 자본이 모이는 곳에 산업과 인재가 함께 모인다.
정부의 역할도 달라진다. 사전 허가 중심의 정부는 판단의 속도에서 한계를 가진다. 반면 사후 관리 중심의 정부는 시장의 속도를 인정하면서 위험을 통제하는 역할에 집중한다. 이는 규제의 중심을 ‘허용 여부 판단’에서 ‘리스크 관리’로 이동시키는 변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중요한 전제가 있다. 사후 규제는 결코 느슨한 규제가 아니다. 오히려 더 강한 책임 구조를 요구한다.
핵심은 명확하다. 혁신의 속도를 허용하는 대신 실패의 비용을 높이는 구조다. 기업이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도록 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책임을 묻는다.
또한 규제 전환이 곧바로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규제 완화는 출발점일 뿐이다. 실제 성장은 투자, 인재, 인프라가 결합될 때 만들어진다.
기업이 투자로 응답하려면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돼야 한다. 데이터와 기술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하고, 글로벌 인재가 유입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규제 개혁은 단독 정책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 전반과 연결된 구조다.
결국 네거티브 규제는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하나의 설계다. 국가가 시장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제시한 방향은 분명하다. 규제를 통해 산업을 통제하던 시대에서 규제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는 시대로의 전환이다.
이제 남은 것은 실행이다. 규제의 문을 여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 문을 통해 자본과 기술, 인재가 실제로 움직일 때 비로소 변화는 완성된다.
규제를 바꾸는 순간 경쟁의 룰이 바뀐다. 그리고 그 룰 위에서 국가의 미래가 다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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