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주에 벌어진 세 가지 풍경
7월 23일, 청년 고용 통계가 나왔다. 5월 기준 청년 고용률 43.8%. 1년 사이 2.4%포인트 떨어졌고 취업자는 25만 5천 명 줄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1년 넘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이 48.6%, 2009년 이후 가장 높다.
7월 24일, 이재명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AI 선언'을 발표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제조 역량으로 대한민국을 “대체불가의 글로벌 AI 협력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그 자리에 앉았고, 엔비디아 젠슨 황은 지금이야말로 한국의 황금 시기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이 사건들은 우리에게 두 개의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반도체의 성공은 왜 청년의 삶과 희망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그리고 그 성공은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잠실광역환승센터를 가보라
저녁 무렵 잠실환승센터에는 남양주로 가는 빨간 광역버스를 타려고 청년들이 수십 미터씩 줄을 선다. 어깨가 지쳐 보인다. 출퇴근 왕복에 세 시간이 기본이 되고 있다. 이들은 열심히 공부했고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월급을 아껴 모으는 속도는 거북이고, 서울 집값은 토끼다.
그 토끼는 잠들지도 않는다.
서울 아파트 중위 매매가격은 12억 원을 넘었다. 평균 전셋값은 6억 원을 넘었고, 월세 상승률은 역대 최고다. 몇 해 전 '영끌'과 '패닉바잉'이라 불리던 것을 지금 30대는 '생존 매수'라고 부른다. 올해 1~5월 서울 아파트를 사들인 사람의 열에 넷이 30대다. 더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올라타지 않으면 영영 밀려난다는 공포 때문에 산다는 뜻이다.
성장의 속도보다 기회 배분이 문제다. 노동 소득은 월급만큼만 쌓이지만, 이미 자산을 쥔 쪽은 자산이 자산을 낳으며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 출발선마저 대물림된다. 부모의 자산이 자녀의 첫 집을 좌우할 때, 계층의 사다리는 접힌다. 성실하게 땀 흘리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노력의 의미를 의심하게 된다. 수출과 주가와 투자 유치의 숫자가 아무리 화려해도 내 삶이 그대로라면, 그 지표는 '남의 잔치'가 된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안에서 온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권위주의 세력만이 아니다. 시민이 느끼는 불평등과 박탈감은 더 큰 내부의 위협이 된다.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자유를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로 나눈다. 지금 우리 청년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 그러나 살 곳을 선택할 자유와 미래를 예측할 자유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세계에 증명한 나라다. 독재를 시민의 힘으로 이겨냈고, 2024년 겨울의 불법 계엄과 내란을 시민과 국회와 헌법으로 막아냈다. 제도가 우리를 구한 것이 아니라, 그 제도에 생명을 불어넣은 시민이 구했다. 그 회복력의 연료는 신뢰다. 광장에 나온 시민은 이 나라가 내 나라라고 믿었기 때문에 나왔다. 청년이 '이 사회의 약속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짓는 순간, 그 힘의 원천이 마르기 시작한다.
영원한 호황은 없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챔피언은 지난 40년 사이에 이미 두 번 바뀌었다. 1980년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것은 일본이었고, 그 아성은 기술이 아니라 미국의 통상 압박과 후발 주자의 추격이 겹쳐 무너졌다. 지금 중국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메모리뿐 아니라 장비까지 국산화하며 추격 속도를 높이고 있다.
최근 중국 최대 D램 기업 CXMT(창신메모리)는 상장으로 12조 원을 조달했고, 시가총액은 단숨에 중국 본토 1위에 올랐다. 그 자금은 생산능력 확대와 차세대 D램·HBM에 투입된다. 이미 범용 DDR4를 시장가의 절반에 뿌리며 시장 점유 경쟁에 나섰다. 상하이의 한 국영기업은 자체 개발한 DUV 노광장비 양산에 들어간다. ASML이 독점해 온 노광장비 시장에 대한 도전이다. 중국의 첨단 반도체를 가로막은 봉쇄는 자립의 동기를 키웠다. 중국의 목표는 자립이 아니라 세계 시장의 주도권이다. 한국이 그 첫 번째 상대다.
나는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선언을 지지한다. 다만 그것은 목표이자 방향이어야 한다. '대체 불가'를 자랑할 일은 아니다. 호황과 초격차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정부는 판을 짜야 한다. 첨단산업은 국가의 성장동력이지만, 그 성과가 일부 거대기업과 자산시장에만 머물면 사회적 신뢰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 호황의 과실을 청년의 미래와 사회적 신뢰로 바꿔 놓는 정책이 함께 가야 한다.
청년에게 기회를
반도체 호황은 하늘이 준 기회다. 문제는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리느냐다. 주가는 하루에 10% 급등락하지만, 청년의 하루는 달라지지 않았다. 수백조 원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는 결단을내릴 수 있는 정부라면, 청년의 주거와 통근 문제에도 같은 크기의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반도체에는 속도전을 말하면서 청년의 삶에는 속도가 붙지 않는다면, 청년은 그 차이를 곧바로 읽어낼 것이다.
서울을 벗어나도 기회에서 멀어지지 않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한다. 서울 중심의 일극 체제를 벗어나, 각 지역이 자족적인 기능을 갖추고 촘촘한 교통망으로 연결되는 '다핵화된 도시 네트워크' 구축이 필요하다. 그동안 정치는 집값 앞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격차를 줄이지도 못했다. 정치에 몸담아온 나도 그 책임에서 비켜설 수 없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제도와 법을 만들어야 한다. 신뢰는 반복된 실천에서만 쌓일 수 있다.
반도체가 아무리 세계 최고가 되어도 청년이 내일을 믿지 못한다면 사회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결국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은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필자 주요 이력
△한미의회교류재단 이사장(Korea Inter-Parliamentary Exchange Center, Washington DC) △전 국회의원 (재선, 경기 남양주을, 민주당) △2006~2007 코넬대학교 동아시아센터 방문연구원(New York, USA) △전 대통령(김대중)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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