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으로 국가핵심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 수위가 강화됐지만,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의 핵심 기술 유출을 차단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기술 유출이 기업 경쟁력은 물론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로 떠오르면서 처벌 수위를 높이거나 간첩죄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등 법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4일 국회의원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7월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이 시행된 이후 기술 유출 범죄의 처벌 수위를 강화하는 골자의 개정법안이 2건 발의돼 있다.
지난 2월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은 국가핵심기술과 산업기술 유출·침해 범죄 전반에 대해 징역형과 벌금형을 모두 상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술 유출 범죄의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해 처벌 강도를 한층 높여야 한다는 취지다.
지난 6월 김남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기술 유출이 인정될 경우 실손해액의 최대 5배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5배를 손해배상액으로 산정하도록 해 기업 피해에 대한 실질적인 구제와 예방 효과를 높이겠다는 내용이다.
이는 현행 법정형만으로는 급증하는 첨단 기술 유출 문제를 막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현재 개정안은 기술 유출 벌금 상한을 기존의 10배인 65억원으로 상향됐지만, 실제 평균 형량은 낮고 법안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첨단 기술 하나가 수십조원 규모의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수년 수준의 실형만으로는 급증하는 기술 유출의 유인을 차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국내 핵심기술 해외유출 적발 건수는 2021년 9건에서 2025년 33건으로 급증했다. 2020년 이후 이로 인한 국가경제 피해 추산액은 23조원에 달했다.
특히 중국 메모리 업체들이 삼성·SK하이닉스 등 국내 인력을 적극 영입하며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어 산업계의 위기감이 더욱 커졌다. 최근 중국판 나스낙 '커촹반' 상장을 통해 중국 시가총액 1위에 등극한 창신메모리(CXMT)가 대표적이다. CXMT는 삼성전자 출신 핵심 기술 인력을 영입하고, 개발 과정에서 SK하이닉스 기술까지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론 역시 처벌 강화에 무게를 싣고 있다. 최근 경총이 실시한 기술 유출 인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0.7%는 해외로 핵심 기술을 유출한 사범에 대한 처벌을 현재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 92.5%는 핵심기술 해외유출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한국이 주요 기술 보유국과 비교해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처벌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해외와 비교하면 처벌 강도 차이가 크다. 지난 4월 국내 법원은 반도체 핵심 기술을 중국 CXMT에 유출한 혐의로 기소된 삼성전자 전직 직원에게 징역 6년 4개월을 선고했다. 반면 대만에서는 TSMC의 영업비밀과 핵심 도면을 해외로 유출한 사건에서 최대 징역 10년형이 선고됐다.
산업기술보호법 개정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국가핵심기술 유출을 경제안보 차원의 범죄로 다루는 별도의 법체계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특히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첨단 기술 유출에 대해서는 간첩죄 적용 범위를 확대하거나 경제안보 범죄를 별도로 규율하는 법률을 신설하는 등 보다 강력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하상우 경총 이사는 "국민 다수가 핵심기술 해외유출을 단순 기업 차원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쟁력과 경제안보를 위협하는 사안으로 보고 있는 만큼 제도적 보완이 신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며 "핵심기술 해외유출에 대한 강력한 처벌법제 도입과 같은 경제안보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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