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사들이 초기 바이오텍을 직접 발굴하고 육성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단순히 유망 기술을 사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 공간과 전문 인력, 멘토링, 투자자 연결까지 제공하며 차세대 신약 후보를 키우는 방식이다.
11일 리서치업체 비전라이프사이언스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바이오파마 라이선싱 시장은 516건의 거래를 통해 2500억 달러(약 350조원) 이상이 오가며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특히 오픈 이노베이션은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초기 바이오텍의 연구·개발과 투자, 사업화를 함께 지원하는 산업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글로벌 빅파마 중에서는 일라이 릴리의 '릴리 게이트웨이 랩스(Lilly Gateway Labs)'가 주목받고 있다. 릴리는 초기 바이오텍에 연구 공간과 실험 장비를 지원하고 자사 연구진의 멘토링, 연구개발 협력, 외부 투자 유치 지원 등을 함께 제공한다.
게이트웨이 랩스에는 2019년 출범 이후 지난 6년간 약 400개 바이오텍이 입주했다. 입주사들이 유치한 누적 투자금은 3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들 기업은 150개 이상의 신약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릴리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협력해 한국에도 게이트웨이 랩스 거점을 마련할 계획이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공동연구와 기술실증, 투자 연계 등을 앞세워 유망 스타트업 선점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바이오에피스가 서울바이오허브와 손잡고 차세대 신약 플랫폼 발굴에 나섰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올해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의 참여 기업으로 표적단백질분해(TPD) 플랫폼 기술을 보유한 '프레이저테라퓨틱스'와 인공지능(AI) 기반 화학단백질체학 플랫폼을 보유한 '바이온사이트'를 선정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두 기업에 1년간 기술 고도화와 멘토링, 사업화 컨설팅 등을 제공한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는 공동연구와 기술이전, 공동 사업화, 전략적 투자 등 실질적인 협업 가능성도 검토할 예정이다.
대원제약은 약물전달기술 분야에서 협력 대상을 찾았다. 서울바이오허브와 함께 진행하는 올해 프로그램에는 옴니아메드와 큐리오사바이오사이언스가 선정됐다. 옴니아메드는 염증 및 암 조직에서 높은 농도로 나타나는 일산화질소(NO)에 반응해 약물을 표적 방출하는 약물전달시스템(DDS)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큐리오사바이오사이언스는 'SNAP' 플랫폼을 기반으로 장기지속형 주사제와 펩타이드 경구 전달 제제를 개발 중이다.
아울러 셀트리온은 신규 항체 기술 개발 등을 위해 에이인비, 엔바이오셀, 이미타사이언스, 포도테라퓨틱스 등과 협업 중이다. SK바이오팜은 노보렉스, 쓰리브룩스테라퓨틱스와 손잡고 CNS, 노화 등 혁신 신약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 바이오허브 관계자는 "기술 분야와 개발 단계, 협업 수요를 바탕으로 적합한 기업을 발굴하고 후속 논의가 실제 공동연구와 기술검증, 사업개발로 이어지도록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한미약품은 투자자 연결을 오픈 이노베이션의 전면에 내세웠다. 한미약품은 키움증권과 함께 지난달 '한미×키움 바이오 이노베이션 데이'를 열고 바이오벤처 10곳의 기업설명회(IR)와 투자자 간 일대일 미팅을 진행했다. 바이오벤처에는 자금 조달과 전략적 파트너 확보의 기회가 되고, 한미약품은 향후 공동연구나 투자로 이어질 수 있는 기술을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시장에선 "'기술을 찾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본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빅파마들은 임상 단계에 진입한 후보물질이나 이미 검증된 플랫폼을 중심으로 기술 도입과 인수합병을 검토했으나, 신약 개발 기술이 빠르게 세분화되고 AI, TPD, DDS 등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초기 단계부터 유망 기업과 관계를 맺는 전략이 중요해졌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