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칼럼] 우버 막았던 한국, 로보택시 시대는 어떻게 맞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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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필자는 지금 미국 출장 중이다. 이른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호텔 로비로 내려와 스마트폰에서 우버(Uber)를 호출했다. 목적지를 공항으로 입력하자 곧 차량이 배정됐고, 스마트폰 화면에는 우버 차량이 호텔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때 호텔 앞에 있던 한 택시 기사가 필자에게 공항으로 가는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자신의 택시를 타라고 했다. 필자가 우버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자기 택시도 요금이 비슷하다고 했다. 이미 우버를 호출했다고 대답하자 그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저 양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는 미국인 특유의 제스처인 ‘shrug’를 하고 돌아섰다. 별것 아닌 몇 초의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과거 한국에서 우버와 택시업계에서 플랫폼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치열한 갈등이 떠올랐다. 2013년 한국에 진출한 우버는 곧 기존 운송법 체계와 충돌했다. 특히 2014년 일반 자가용 운전자와 승객을 연결하는 ‘우버X’가 등장하면서 자가용 유상운송 금지 논란과 택시업계의 강력한 반발이 이어졌고, 핵심 서비스는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미국의 호텔 앞에서는 택시와 우버가 같은 손님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플랫폼 이동 서비스는 이미 일상이다. 베트남에서는 ‘그랩(Grab)’으로 자동차는 물론 오토바이까지 부른다. 스마트폰 하나로 차량을 부르고 목적지를 지정하고 요금을 확인하고 결제까지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물론 택시 기사의 생계는 중요하다. 국가가 만든 면허제도를 믿고 투자해 온 법인택시나 개인택시의 재산적 이해관계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을 보호하는 것과 기존 산업구조를 보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미국 경제가 끊임없이 새로운 기업과 산업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대한 내수시장, 풍부한 벤처자본,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인재, 대학과 기업의 연구개발 역량 등 여러 이유를 들 수 있다. 특히 새로운 것이 기존의 것을 밀어낼 가능성을 비교적 폭넓게 허용한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미국을 이끄는 진정한 힘의 원천이다.
 
경제학자인 슘페터는 자본주의 발전의 중요한 동력을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새로운 기술과 기업이 기존 산업과 사업모델을 흔들고 때로는 사라지게 하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시장과 생산방식, 새로운 일자리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카메라를 탑재할 때 기존 사진관의 생계를 이유로 이를 가로막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스마트폰과 영상산업이 가능했을까. 필름 현상소와 전통적인 사진관은 크게 줄었지만 사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마트폰 사진, 동영상 콘텐츠, 유튜브, 이미지 편집, 드론 촬영 등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시장이 생겨났다. 은행의 현금지급기(ATM)가 은행원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막았다면 인터넷뱅킹과 모바일 금융은 가능했을까. 공장의 로봇팔이 제조 인력을 대신한다고 해서 로봇을 모두 걷어냈다면 한국 제조업은 지금의 국제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기술은 어떤 직업과 업무를 줄이지만 동시에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기술의 등장을 막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기술 속에서 사람이 어디로 이동할 것인가이다.
 
미국은 이제 우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놀라운 것은 운전자가 없는 택시가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 일부 도시에서는 이미 운전석에 사람이 없는 로보택시가 일반 도로를 돌아다니며 승객을 태우고 있다.
 
미국 애틀랜타 시내에서 필자는 차 지붕과 차체 곳곳에 각종 센서를 장착한 채 운전자 없이 도로를 달리는 자율주행 차량을 자주 목격했다. 운전석에 사람이 없는 자동차가 일반 차량 사이를 달리는 광경이 이제 더 이상 공상과학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율주행 기술은 여기서 더 나아가고 있다. 아마존 자회사인 자율주행 기업 ‘죽스(Zoox)’는 인간 운전자를 전제로 하지 않는 로보택시를 개발해 실제 공공도로에서 운행하고 있다. 기존 자동차에서 운전자를 배제하는 수준을 넘어 처음부터 운전대와 페달을 전제로 하지 않는 새로운 이동수단을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운전석에 아무도 없는 자동차가 사람을 태우고 도시의 도로를 달리는 모습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미국의 길거리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먼저 상상하고 그다음 현실을 만들어왔다. 19세기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서 네모 선장이 이끄는 노틸러스호는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운 상상의 산물이었다. 오늘날 잠수함은 현실이다. 인간은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로 무인탐사선도 날려 보낸다. 지구 반대편 사람과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세상을 상상하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만들었다.
 
자율주행을 단순히 택시 기사의 일자리를 없애는 기술이라고 바라보면 그 기술이 가져올 더 큰 사회적 변화를 놓치게 된다. 한국은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고령 운전자의 사고가 사회문제가 되면서 운전면허 반납을 권유하지만 자동차 없이는 병원이나 시장에 가기 어려운 지역의 노인에게 자동차는 단순한 편의수단이 아니다. 이동의 자유, 그 자체일 수 있다. 완전자율주행이 보편화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목적지만 말하면 자동차가 병원으로, 시장으로, 자녀의 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 장애인의 이동권도 넓어지고 심야나 벽지의 교통 문제도 달라질 수 있다. 기술이 없애는 일자리만 볼 것이 아니라 기술이 새롭게 해결하는 사회문제도 함께 봐야 한다.
 
변화는 자동차에서 끝나지 않는다. 최근 산업계가 주목하는 것이 ‘피지컬 AI(Physical AI)’이다. 쉽게 말하면 사람처럼 주변을 보고, 생각하고, 실제로 움직이는 인공지능이다. 피지컬 AI는 카메라와 각종 센서로 주변을 살펴보고, AI가 상황을 판단한 뒤 로봇의 팔과 다리, 바퀴 등을 움직여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 자율주행차도 크게 보면 피지컬 AI의 일종이다. 더구나 저출산과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는 한국에서 피지컬 AI는 인간의 경쟁자만은 아니다. 머지않아 사람이 부족해서 기계가 필요한 시대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장의 위험하고 힘든 작업, 물류창고의 반복 작업, 농촌의 노동력 부족, 고령자의 생활 보조처럼 사람이 충분히 공급되기 어려운 분야에서는 AI 로봇이 오히려 한국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노동력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인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AI와 로봇을 인간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기술은 한 나라가 막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개발 장소만 바뀐다. 한국에서 만들기 어렵다면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그들이 먼저 기술과 데이터, 시장과 표준을 장악하면 우리는 나중에 그 기술을 돈을 주고 사용하는 소비자로 전락한다. 정부의 고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인해 기존 산업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에게 재교육과 전직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운전기사는 자율주행차의 안전관리, 원격관제, 고객지원과 같은 새로운 직무로 이동할 수 있다. 용접공이라면 로봇 용접기의 운영자나 정비기술자, 품질관리자로 이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즉 기술에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고, 사람에게는 다음 직업으로 건너갈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바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물론 새로운 기술이라고 해서 무조건 허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자율주행차의 사고 책임, 보험, 개인정보 보호, 안전기준처럼 새로운 기술에 맞는 규칙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규칙을 만드는 것과 기술 자체의 등장을 막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전 석유장관이었던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Ahmed Zaki Yamani)가 “석기시대는 돌이 부족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The Stone Age came to an end, not because we had a lack of stones)”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석기시대가 돌이 부족해서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인류가 다음 시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마차가 사라진 것도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기술의 전환은 기존의 것이 완전히 소진된 뒤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가능성이 등장할 때 시작된다.
 
우버를 막는다고 플랫폼 이동서비스가 사라지지 않았듯이 로보택시를 막는다고 자율주행 기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피지컬 AI를 두려워해 그 발전을 늦춘다고 세계의 기술혁신이 우리를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문제는 변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그 변화의 주도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선택은 분명하다. 기술에는 도전할 자유를 주고, 사람에게는 변화에 적응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새로운 기술 때문에 밀려나는 사람에게는 다음 직업으로 건너갈 다리를 놓아주되 새로운 기술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된다. 석기시대를 지키는 것이 사람을 보호하는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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