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AI 민주정부’ 구축에 속도를 내면서 지방정부가 인공지능 전환(AX)의 핵심 무대로 부상하고 있다. 주민과 직접 맞닿아 있는 복지·교통·안전·민원 분야에서 AI 활용 효과를 빠르게 검증할 수 있어서다. 전문가들은 중앙정부가 기술과 기반을 제공하고 지방정부가 지역 문제에 맞는 서비스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AI 정부의 추진 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AI가 행정의 판단 과정에 깊숙이 들어오는 데 따른 제도 정비도 과제로 떠올랐다. AI가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판단에 관여했다면 어떤 데이터와 기준이 사용됐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국민에게 설명을 요구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정보시스템을 전제로 만들어진 전자정부법을 AI 시대에 맞게 손질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하는 배경이다.
한국디지털정부학회(회장 송석현)는 지난 28일 경북 안동 국립경국대에서 하계공동학술대회 및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AI 민주정부와 지방정부 AX, 전자정부법 개편 방향 등을 논의했다. 행정안전부·경상북도와 국회, 학계, 한국지역정보개발원(KLID)·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등 공공기관, 관련 업계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지방정부가 AI 실험실…지역 맞춤형 AX 확산
배일권 행정안전부 인공지능정보기반국장은 지방정부가 명확한 행정 수요를 갖고 있다는 점을 AX의 강점으로 꼽았다. 광주시의 모바일 여비정산처럼 반복 업무에 투입되던 시간을 줄여 다른 행정서비스에 활용하거나 AI 상담, 다국어 서비스, 재난정보 분석 등에 기술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성시경 한국행정학회장은 중앙정부의 전국 단위 정책만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문제를 지방정부가 먼저 실험하고 검증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봤다. 정준화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단순히 서울이나 광역단체의 사업을 축소해 다른 지역에 적용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역별 행정 수요와 인구·산업 구조에 맞는 모델을 설계하고 성과를 평가한 뒤 다른 지방정부로 확산하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황명석 경북도 행정부지사는 구미의 교통·물류와 포항 철강산업 분야의 AI 실증을 소개하며 지역이 처한 문제를 중심으로 AX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인구 감소로 공무원 정주마저 쉽지 않은 울릉군과 같은 지역을 새로운 행정 AX 실증 무대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중앙정부가 구축한 AI 공통기반의 현장 활용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경북도는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내년부터 직원들이 상용 AI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 예산 편성을 추진하고 있다.
지방정부 내부의 변화도 요구됐다. 강동석 한국디지털정부협회장은 공무원이 직접 개발한 프로그램이나 AI 도구가 담당자의 인사이동과 함께 사라지지 않도록 조직의 자산으로 등록·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김유석 한국지역정보개발원 본부장은 AI가 제시한 결과가 오히려 공무원의 사고 범위를 제한할 가능성을 경계하며 자동화와 함께 인간의 판단 역량을 유지하는 설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방정부가 보유한 데이터도 핵심 자산으로 꼽혔다. 김동운 한국문화정보원 부장은 저작권이 확보된 공공저작물의 AI 학습 활용이 확대되고 있다며 지자체가 가진 방대한 행정·지역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송석현 한국디지털정부학회장은 지방정부 AX를 개별 지자체만의 과제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송 회장은 “지방정부 AX는 아직 완성이 아니다”며 “중앙정부가 돕고 지자체가 노력하고 주민이 만족하는, 모두가 함께하는 정책이 돼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AI 행정결정 늘자…설명·이의제기권 법제화
현장의 AX가 빨라질수록 법적 통제장치도 함께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행 전자정부법은 전통적인 정보시스템 구축과 운영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지속적으로 학습·변경되는 AI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특히 AI가 복지 대상 선정이나 행정조사, 각종 심사처럼 국민의 권리·의무에 영향을 미치는 업무에 활용될 경우 문제가 복잡해진다. AI가 어떤 자료를 근거로 결과를 제시했는지, 담당 공무원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또는 별도로 검토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책임 소재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 조사관은 이에 따라 AI가 관여한 행정결정에 대해 국민의 설명 요구와 이의제기 권리를 법적으로 명확히 하고 공공부문 알고리즘 영향평가와 AI 시스템의 점검·관리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당장 필요한 부분부터 개정하고 이후 법 체계 전체를 재설계하는 단계적 접근도 대안으로 제시했다.
김미진 NIA 선임은 AI 행정의 과정 자체를 남기는 장치에 주목했다. 어떤 AI와 데이터가 사용됐고 공무원이 어떤 검토를 거쳤는지를 추적할 수 있어야 사후 검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행정기관이 보유한 정보를 AI 학습이나 검색에 활용할 수 있는 범위 역시 보다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세영 행정안전부 인공지능정부정책국장은 AI와 공무원이 역할을 나누는 ‘하이브리드 행정’이 현실화하고 있는 만큼 기존 정보시스템과 다른 법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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