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바이오 혁신을 가로막는 낡은 프레임을 넘어

황주리 한국바이오협회 대외협력본부장사진한국바이오협회
황주리 한국바이오협회 대외협력본부장[사진=한국바이오협회]

대한민국 바이오산업은 지금 대전환의 길목에 서 있다. 언론은 연일 '기술수출 00조원 달성'이나 '명문대 교수 출신 창업자'를 조명하며 바이오를 국가 미래 성장동력으로 내세우지만, 세계 무대에서 바라보는 K-바이오는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찾지 못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 형국이다. 차세대 성장산업에 걸맞은 성과를 내려면 지금까지 생태계를 떠받쳐 온 성장 공식과 제조업 중심의 평가 기준을 냉정하게 재점검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가 정책과 금융당국, 자본시장, 일반 대중이 바이오산업을 바라보는 평가 기준을 재정립하는 일이다. 

여전히 "기술수출은 무조건적 성과", "단기 매출 실적이 우수해야 좋은 기업" 같은 인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바이오는 제조업과 생태적 본질이 다르다. 신약 하나를 상용화하는 데는 평균 10년 이상의 호흡과 막대한 연구개발(R&D) 비용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R&D가 필수인 기업에 단기 실적을 요구하는 것은 산업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평가다.

산업 내부의 '세부 분류 체계'가 정밀하지 못하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바이오의약품, 합성의약품, 제형 및 전달체 중심의 기반 기술, 의료기기, 바이오 위탁개발생산(CDMO) 등은 사업 구조와 특성이 다르지만 여전히 하나의 '바이오기업'으로 묶여 동일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일률적 제조업 기준을 적용하면서 평가와 제도 운용의 불일치가 반복되고 있다.

필자가 최근 세계 최대 바이오 행사(BIO USA) 무대에서 인용한 맥킨지 2026년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신약 파이프라인은 약 3000개에 달한다. 이는 미국(1만1000여개), 중국(7000여개)에 이어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집적도다.

파이프라인 증가는 산업 역동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자본과 전문 인력의 분산이라는 과제를 낳았다. 정책 자금과 민간 투자가 수천 개 기업으로 분산되며 개별 기업이 글로벌 임상 2b, 3상 등 후기 단계까지 자체 완주할 수 있는 대규모 자금을 집중 지원받기가 어려워졌다.

동시에 전문 인력 역시 여러 기업으로 파편화됐다. 이제는 양적 창업 장려 정책에서 벗어나 선택과 집중, 통합을 통한 질적 고도화로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초기 신약 개발 기업에게 조기 기술수출이나 특정 수준의 매출을 요구하면 기업은 상장을 위해 핵심 파이프라인을 이른 시점에 이전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기업가치가 가장 커질 유망 자산을 초기에 넘기면서 상장 시점에 성장 잠재력이 희석되는 아쉬운 상황이 발생한다. 

투자 회수 구조가 상장(IPO)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점도 한계다. 상장 기준 충족에 초점이 맞춰지며 지분 구조가 복잡해지고, 이후 글로벌 제약사나 해외 투자자가 인수를 검토해도 핵심 자산 부재와 지분 분산으로 인수합병(M&A)이 쉽지 않다. 기술수출 중심의 단기 성과 지향이 역설적으로 기업의 거대 성장을 제약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해외 자본의 유기적인 유입이 필수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가치 평가 시스템뿐 아니라 지배구조와 소통 문화의 선진화가 병행돼야 한다. 글로벌 벤처캐피털(VC)은 기술력 못지않게 '이사회 중심의 수평적 소통과 전문 경영 체계'를 중요하게 평가한다. 그들은 자금 제공자를 넘어 이사회 구성원으로 전략 수립과 리스크 관리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반면 국내 바이오벤처는 연구자 중심의 의사결정이나 폐쇄적 지배구조가 적지 않다. 전문경영인(CEO) 도입에 소극적이거나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수평적 소통과 유연한 지배구조라는 '소프트웨어적 글로벌 표준'을 갖추는 것이 해외 거대 자금을 유인하는 확실한 열쇠다.

정부와 지자체가 바이오 펀드를 조성하는 것은 의미 있는 정책이다. 다만 자금 집행 방식은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신약 개발에는 수천억원에서 조 단위 자금이 투입된다. 정책 자금을 수십 개 기업에 소액 분배하는 방식만으로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이끌어내기에 한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정책 자금과 민간 자금의 역할 분담이다. 정책 자금은 민간 자본이 접근하기 어려운 극초기 기술 검증 단계에서 위험을 분담하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초기 위험을 정부가 분산해야 민간 투자도 뒤따를 수 있다. 반대로 정책 자금이 후기 단계나 대형 기업에 집중되면 정작 초기 혁신기업은 성장 기회를 잃게 된다. 공공 자금은 고위험 혁신 분야에 집중하고, 성숙 단계 기업은 민간과 해외 자본이 연결되도록 유도하는 역할 정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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