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종 보통면허로 덤프트럭을?
한국의 미술박물관이나 고고, 역사, 미술사 박물관에는 큐레이터가 있다. 학예연구원 즉 큐레이터 제도는 1960년대 국립박물관에 도입되어, 1984년 박물관법이 제정되면서, 학예 전문 직원을 두도록 했다. 이후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 이전과 함께 학예연구실이 신설되고, 국·공립 기관을 중심으로 ‘학예연구사(관)’이라는 직제가 출발했다. 2000년 국가 자격증 제도가 시행되어 문화체육관광부가 발급하는 공식 정학예사와 준학예사라는 학예사 자격 제도가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전문학예사 시험에 합격하고, 명함에 학예연구사·학예연구관이라는 직함을 새기고, 전시 도록에 기획자로 이름을 올리는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필자가 묻는 것은 큐레이터의 존재가 아니라 한국에 큐레이터십(curatorship)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큐레이터가 직함이라면, 큐레이터십은 하나의 통합적 실천 능력이다. 해석을 세우고, 그 해석을 공간, 조명, 동선, 텍스트라는 물리적 언어로 번역하고, 예산과 일정 안에서 그것을 실현하고, 관람객에게 하나의 완결된 경험으로 도달시키는 전 과정을 관장하는 능력이 바로 큐레이터십이다. 이런 정의에 비춰 보면, 한국의 제도와 조직 구조는 오직 ‘해석을 세우는’ 부분만을 큐레이터의 몫으로 인정해 왔다. 전시를 실제로 완성하는 보험, 운송, 설치, 조명, 공간디자인, 예산 협상은 큐레이터의 손을 떠나 외주업체, 행정직, 하급 연구인력에게 흩어져 있다. 그 결과 한국에는 직함과 직책상 큐레이터는 있지만, 실천으로서의 큐레이터 십은 온전히 성립하지 않는 역설적 상태가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
따라서 현장에서는 종종 기이한 장면이 목격된다. 작품의 재질이 요구하는 최소 조도(lux)조차 알지하지 못하고, 유물이나 전시품 통관에 필수적인 까르네(ATA Carnet)라는 서류조차 모르는 이가 미술관장이나 국제 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이나 대규모 기획전의 총괄 큐레이터로 위촉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즉 큐레이터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소양인 보존과학의 기초, 전시 환경의 물리적 조건, 통관과 운송의 실무 지식 등이 부족한 채로도 경력과 학위, 대외적 명성만으로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은, 2종 운전면허 소지자에게 운전면허가 있으니 덤프트럭 운전을 허락하는 것처럼 한국의 큐레이터 검증 체계가 실질적 역량이 아닌 형식적 이력을 기준으로 작동해 왔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는 개인의 역량부족이 아니라 한국의 학예직 제도가 지난 60여 년간 전시 운영과 작품 수집이라는 미술관의 고유 업무를 조사·연구라는 협소한 영역으로 축소해 인정해 온 역사 때문이다. 즉 ‘큐레이터십 없는 큐레이터’는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라, 제도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재생산해 온 구조적인 결과물이다. 이 구조 속에서 큐레이터는 기획의 언어는 갖되 그것을 실현할 권한과 경험은 갖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자신을 ‘연구하는 사람’으로만 정체화하고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내려놓게 되면서 발생한 문제다
큐레이터 십 없는 큐레이팅의 양산
큐레이터의 임무를 연구에 국한한 나머지 큐레이터 십을 구성하는 해석, 번역, 실현, 관리 등의 업무 중 오직 해석과 조사·연구만 온전히 큐레이터의 몫이고, 나머지는 다른 주체에게 위임되거나 애초에 큐레이터의 권한 밖에 놓여 있었던 것은 공무원 인사 제도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공무원 직제에는 학예연구 직렬이 일반행정 직렬과 명확히 구분되어 별도로 존재한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에 학예연구실이 신설된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이 두 직렬 사이의 업무 분담은 전시 운영과 작품 수집이라는 미술관의 고유하고 핵심적인 업무까지 일반행정직 공무원이 담당하고, 학예연구직은 오직 조사와 연구만을 고유 업무로 주어졌다. 즉 일반행정직들이 전시를 기획하고자 외부 인사로 자문위원회 또는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전시의 얼개를 꾸린 다음 인력, 예산을 집행하고 시공업체와 계약을 체결하고 운송과 보험을 처리하는 실질적 결정권은 애초부터 학예연구직이 아닌 전시과라는 행정직 소관 업무였다.
게다가 이런 권한 분리의 역사는 2000년 자격제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과 그 시행령에 근거한 학예사 자격 체계는 학위, 시험, 재직 경력이라는 학술적 기준을 중심으로 큐레이터 등급을 결정한다. 또 미술사, 고고학, 박물관학 등 인접 학문의 연구 방법론이 큐레이터 양성 과정의 중심을 차지하는 반면, 프로젝트 관리, 공간디자인, 협업, 예산 및 계약 실무는 자격 요건에도 대학원 교육과정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학예연구직은 연구만 한다’는 관행이 자격제도를 통해 ‘학예사는 연구자여야 한다’는 규범으로 다시 한번 제도화하며 대못을 박아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자격증이 사실상 유일한 공식 검증 장치라는 점이다. 서구의 여러 기관이 채용·승진 과정에서 포트폴리오 심사, 모의 전시개요서 작성, 협상 시뮬레이션 등 실무 역량을 직접 평가하는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학예사 자격증과 대외적 경력, 학위가 사실상 전부다. 그 결과 실무 경험이 전혀 없어도, 박사학위와 학예사 자격증 또는 몇 가지 경력만 있으면 비엔날레급 프로젝트를 총괄할 구조가 만들어진다. 자격증이 실력의 증명이 아니라 실력의 부재를 가리는 방패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역사는 단순한 업무 분장의 문제가 아니라 권한 배분의 문제다. 조사·연구만이 학예연구직의 고유 업무로 인정된다는 것은, 전시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예산 승인권·업체 선정· 계약 체결 등 업무는 처음부터 학예 연구직의 업무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학예연구직은 무엇을 전시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제안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고 실천할지를 결정하는 실질적 업무는 행정직의 승인과 절차를 거쳐야 하는 종속적 위치에 30년 가까이 놓여 있었다.
이런 왜곡된 상황은 학예연구직 스스로가 전시의 실행 영역을 ‘자신의 업무가 아닌 것’으로 체화하게 되었다. 예산과 계약이 원천적으로 자신의 권한 밖에 있으니, 그 영역에 대한 지식과 감각을 쌓을 기회도,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온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오랜 관행은 국공립 기관에 그치지 않고 사립박물관에까지 하나의 직업적 규범으로 확산하며 자리 잡았다. ‘큐레이터는 연구하는 사람’이란 정체성이 큐레이터들에게 전반적인 상식이 되면서 애초에 행정적 분리 체제가 없었던 사립 기관조차 큐레이터가 실행 전반을 직접 관장하기보다 외주에 의존하는 관행을 자연스럽게 답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불합리한 구조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 국공립 미술관 관장 선발 시 요구되는 핵심 역량으로 학예와 행정,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조직 통합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학예와 행정이라는 두 계통의 분리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관장급에서 조정을 필요로 하는 상시적 긴장으로 남아 있음을 증명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큐레이터 십을 실행할 관련 전문 직군으로 분화 발전하지 못했다. 해외 주요 기관은 기획·해석을 담당하는 큐레이터 외에 공간구성과 시각적 경험은 전시 디자이너가, 작품의 등록과 이동, 대여, 보험, 운송 등은 레지스트라가, 그리고 예산과 일정관리 등은 프로덕션 매니저 또는 행정에서 맡는 뚜렷이 분화된 별도의 직군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역할 분화가 거의 모든 기관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해외 작가가 국내 전시를 위해 방한할 때, 코디네이터 한 사람이 항공·숙박 예약이라는 여행사 업무부터 작품 가격 리스트 파악, 컨디션 체크, 운송·보험 처리라는 레지스트라 업무까지 한꺼번에 떠맡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특히 레지스트라라는 직업명은 존재하되 정부조직법상 직종이나 직렬은 아예 없고, 이를 양성하는 교육과정도, 정식 자격 요건도 없이 대부분 큐레이터가 겸하는 부수 업무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미분화는 국립현대미술박물관과 같은 극소수 대형 국·공립관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중소 공사립박물관의 경우 학예사(Curator) 한 사람이 기획·연구·디자인·실행·행정을 모두 떠안는 구조가 고착되었다.
게다가 학예연구직의 처우는 연구는 물론 실무 능력까지 갖출 기회도 없지만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지방공립박물관의 학예연구사의 경우 무기계약직 또는 1~2년 단위 계약직 신분이 대부분이고, 정규 학예연구직 정원 자체가 1~2명에 불과한 관이 대다수여서 소수 인원이 조사·연구·전시기획·소장품 관리·행정·교육·홍보를 모두 떠안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사립의 경우 사정은 더 열악해, 계약직·인턴·프리랜서 고용이 흔하고 4대 보험조차 보장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고용 불안정 속에서 하나의 전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경험을 축적할 기회는 구조적으로 없을 수밖에 없고, 실무 경험의 축적은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한 예외적 성취로 남는다.
여기에 예산 부족은 이중의 왜곡을 낳는다. 소장품 수집이 정체되어 자기 기관 컬렉션 기반의 심화 연구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큐레이터들이 2000년대 이후 문화부 박물관 평가 인증 지표에서 ‘교육 프로그램 운영 실적’을 핵심 항목으로 편입하면서 에듀케이터라는 전담 직군 없이 교육 업무 전체가 학예연구사에게 떠넘겨졌다. 조사·연구를 본업으로 훈련받은 이가 하루아침에 체험 프로그램의 기획과 실행, 학교 연계 교육, 강사 섭외까지 떠안게 되면서,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가 아닌 '나는 모든 것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가장 구조적인 문제는 정부가 직제상 에듀케이터·레지스트라·컨서베이터라는 전문 직군의 부재와 이를 방치하는 점이다. 개발도상국의 박물관도 이러한 전문 직군을 각각 별도의 채용 경로와 교육과정, 자격 요건을 가진 병렬적 전문직으로 인정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의 절대다수 기관에서는 각각의 역할이 분화되지 못한 채 이들을 모두 학예연구원이라 규정한다.
더 심각한 것은 정부 직제 자체가 이 혼선을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국공립 기관의 직제는 보존과학이나 소장품 등록 업무를 수행하는 학예사를 ‘전문 큐레이터’로, 조사·연구와 전시 기획을 수행하는 학예사를 ‘일반큐레이터’로 구분한다. 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직군 구분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해외에서 컨서베이터와 레지스트라는 큐레이터와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별개의 전문 직종이지, 큐레이터의 하위 범주로서 ‘전문’과 ‘일반’으로 위계화할 대상이 아니다.
특히 레지스트라·컨서베이터와 같은 직군은 ‘전문’이란 수식어로 포장하면서 정작 그 업무는 별도의 독립 직군으로 승격시켜 주지 않고, 조사·연구·기획을 담당하는 큐레이터는 ‘일반’이란 상대적으로 격하된 이름을 붙여 왔다. 이렇게 명칭의 위계와 실제 업무의 전문성이 서로 어긋난 직제는 채용 공고의 직무 기술서를 모호하게 만들고, 그 모호함은 다시 한 사람이 모든 역할을 겸임하는 관행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순환되며 왜곡이 왜곡을 낳아왔다.
그리고 이런 왜곡과 제도의 모든 문제가 응축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큐레이터 개인의 성장 경로 단절이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전문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고시를 통과해 일반의 자격을 취득하고, 인턴과 레지던트라는 수년간의 임상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선배 전문의의 지도로 실제로 환자를 진단하고 처치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축적한 후에야 비로소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다. 의사의 수련 과정에서 핵심은 이론이 아니라, 위계화된 실전 경험의 누적이다. 인턴은 레지던트의 지도를, 레지던트는 전문의의 지도를 받으며 점진적으로 판단의 권한과 책임을 넘겨받는 것이다.
한국의 큐레이터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수련 체계가 없다. 대학원에서 미술사나 박물관학 학위를 취득하고 학예사 자격증 취득 후 박물관에 채용되면, 곧바로 실무의 최전선에 투입된다. 그러나 소장품도 예산도 부족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조사·연구와 전시 기획의 기회 자체가 드물고, 설혹 있다고 해도 선배 큐레이터의 밀착 지도와 함께 단계적으로 권한과 책임을 넘겨받는 구조가 없다.
대형 국·공립관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신진 학예사(Assistant Curator)가 소규모 기획전을 단독으로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 보는 경험보다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파편화된 업무, 즉 자료 조사, 캡션 초안 작성, 도록 교정만 반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큐레토리얼 어시스턴트(Curatorial Assistant)로 시작해서 어시스턴트 큐레이터(Assistant Curator)로 입직한 인물이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Associate Curator) 또는 큐레이터 (Curator)를 거쳐 시니어 큐레이터 (Senior Curator), 나아가 학예연구실장 (Chief Curator)으로 성장해 나가는 위계화된 도제식 경로 자체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 결과 한국에는 여러 개의 학위와 자격증을 지닌 인물은 많지만, 대규모 전시를 실제로 진두지휘할 수 있는 시니어급 큐레이터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전시 환경과 조건, 조명 계획, 통관 절차, 해충과 미생물에 대한 예방 조치까지 총괄해야 할 책임자가, 실제로는 그 실무의 대부분을 운송업체·전시대행사·시공업체라는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일이 관행이 되었다.
큐레이터가 기획서를 작성해 행정 부서에 넘기면 조달청의 입찰을 거쳐 대행사가 결정되고 다음은 대행사가 알아서 처리하는 구조가 굳어지면서, 큐레이터는 실행의 세부적인 일에서 점점 멀어지고, 그 거리는 다시 다음 세대 큐레이터의 수련 기회를 박탈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지도해 줄 시니어를 찾아보기 힘드니, 다음 세대도 시니어로 성장하지 못하는 단절 현상은 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를 거듭할수록 심화하는 구조적 재생산의 문제다.
큐레이터가 ‘전시 기획’ 외에 갖추어야 할 소양
큐레이터가 알고 점검하고 의논하고 협업해야 하는 분야는 보존과학·전시 환경·통관 운송 등 기초적 사안 말고도, 실제로는 훨씬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우선 법률과 윤리의 영역에서 갖추어야 하는 저작권법과 초상권, 상표권 등 전시물과 도록·홍보물에 얽힌 지식재산권 실무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모를 경우, 사진·영상 작품이나 생존 작가의 작품, 브랜드와 캐릭터가 포함된 작품을 다룰 때 법적 분쟁의 소지를 미리 예방할 수 없다. 소장품, 특히 근현대사와 얽힌 유물이나 해외에서 유입된 문화유산을 다룰 때는 도난이나 약탈 이력, 불법 반출 여부를 검증하는 출처 조사를 위한 최소한의 과정과 절차를 알고 있어야 한다.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에 따른 국외 반출 허가 절차와 유네스코 1970년 협약(UNESCO 1970 Convention), 유니드로와 협약(UNIDROIT Convention)과 같은 국제 규범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필요하다. 나아가 소장품을 처분하는 등록미술품 삭제를 위한 디어세션(Deaccession) 과정에서 어떤 명분과 절차 없이는 소장품을 폐기·매각·이관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윤리적 감각 또한 큐레이터가 알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에 속한다.
유물이나 미술품의 위험과 보험의 영역 역시 큐레이터의 실무 역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역이다. 작품대여계약서에 명시되는 ‘못 박이 조건(Nail to Nail)’과 같이 작품이 이동하는 전 구간의 책임 소재를 읽고 협상할 수 있어야 하며, 손해사정과 배상책임보험의 기본 구조, 전쟁·테러·자연재해에 대한 면책 조항 같은 특약 조건을 이해하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다. 화재나 침수, 지진 등 비상 상황에서 소장품과 대여 작품을 어떤 순서로 대피시킬 것인지를 사전에 규정하는 재해 대응 계획을 세우는 것도 큐레이터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책임이다.
시설과 안전에 관해서도 모르면 안 된다. 전시 구조물이나 가설벽이 소방 법규와 피난 동선 규정에 저촉되는지를 판단할 최소한의 지식이 없다면, 전시시공업체의 판단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좌대나 벽면 설치물이 작품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구조 하중 계산의 기초, 목재·종이·직물류 작품에 치명적인 해충과 미생물을 예방·관리하는 해충종합관리의 절차, 장애인과 고령자, 어린이 등 다양한 관람객이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동선과 높이를 설계하는 접근성 기준에 대한 이해 또한 갖추어야 한다.
박물관의 기술과 데이터의 영역에서 조명 스펙을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도 필요하다. 조도(Lux)뿐만 아니라 루멘값(lm), 연색지수(CRI, Ra), 자외선(UV)과 적외선(IR)의 차단 여부, 색온도(CCT) 같은 수치가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해야 조명 계획을 시공업체에 맡기지 않고 필요한 것을 의논할 수 있다.
소장품관리 시스템과 메타데이터 표준에 대한 이해는 디지털 아카이빙과 데이터베이스 관리의 기초가 되며, 온라인 전시와 소셜미디어 홍보, 도록의 디지털 배포 과정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저작권 라이선싱에 관한 지식 또한 오늘날의 큐레이터에게 새롭게 요구되는 소양이다.
프로젝트 운영 능력도 중요하다. 시공·운송·보험 업체가 제출하는 견적서를 읽고 항목별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산 편성과 회계 감각, 설치와 철수, 홍보와 개막이 서로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파악하는 일정 관리 능력, 그리고 업체가 제시하는 ‘불가능’이라는 판단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검증하며 대안을 요구할 수 있는 협상력이 포함된다.
물론 이상의 영역에서 큐레이터에게 요구되는 것은 컨서베이터나 레지스트라, 시설관리 전문가에 준하는 완벽한 전문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전문가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고, 그들이 내리는 판단을 검증하고, 필요한 순간 합리적 대안을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양 즉 서로가 말은 통할 정도의 상식 수준의 지식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큐레이터 양성 과정은 이러한 실무적 리터러시 전체를 사실상 비워둔 채, 미술사와 박물관학 이론 교육에만 편중되어 있다. 바로 이 공백이야말로, 최소한의 실행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인물이 대형 프로젝트의 책임자 자리에 오르는 것을 걸러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리고 전시 실행 능력이 없어도, 박물관 관장도, 비엔날레 감독도, 예술제의 대표이사나 예술감독도 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이다.
박물관 등에서 전시를 준비하면서 전시 전반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전시를 총괄하는 큐레이터가 작성한 문서를 전시개요서라 한다. 전시를 ‘주관하는 큐레이터(Lead Curator)’라면 자신이 기획하고, 생각한 전시의 철학적·해석적 의도를, 디자이너와 시공팀이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 지시 사항으로 옮기는 공식 문서로 큐레이터로서 이론과 실무와 겸비한 큐레이터만 작성이 가능한 문서이기도 하다. 많은 박물관은 직위나 직책에 상관없이 전시를 주관하는 리드 큐레이터는 프로젝트 큐레이터와 함께 디자이너들을 위한 개요서를 작성하며, 이 문서에는 공간·조명·시청각 등 각 영역의 정보가 명문화되어 담긴다.
전시개요서에 포함되어야 할 가장 우선되는 항목은 전시의 개념과 서사 구조를 명시하는 데 있다. 전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와 논지를 밝히고, 전시를 구성하는 각 장 혹은 섹션이나 장의 구분과 각각의 장이 서사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규정하며, 관람객이 전시장에 들어서서 나갈 때까지 경험해야 할 감정적·지적 궤적을 서술해야 한다. 이때 “위계 없는 동선”이나 “작품 사이를 유영하듯 걷는 경험”과 같은 감성적, 추상적, 철학적 언어는 사용하지만 이어지는 항목에서 반드시 구체적인 물리적 언어로 재번역되어야 한다.
다음은 출품작품의 목록과 개별 작품의 정보를 구체적으로 담아야 한다. 최종 확정된 오브제 리스트와 각 작품의 제작 년, 재료, 크기, 무게 등을 명시하고, 각 작품이 서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순서, 즉 어떤 작품이 어떤 작품과 나란히 혹은 어떤 순서로 배치되어야 서사가 성립하는지를 밝힌다. 아울러 수복 보존 전문가의 리포트를 인용해 작품별 보존 조건, 즉 허용 조도와 온습도 범위, 진동 민감도 등을 명시해야 한다.
다음은 공간 구성과 동선에 관한 계획에 관한 서술이다. 전시장 전체의 공간 분할 계획에 따라 어느 구역이 도입부이고 어느 구역이 클라이맥스인지를 결정해 전시를 함께 제작해 나가는 동료들과 공유하고, 관람객 동선의 방향성이 선형인지 자유형인지 순환형인지, 그리고 그 동선이 서사와 어떻게 조응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가설벽과 좌대, 진열장의 배치와 그 구조물이 요구하는 최소 치수, 휠체어 동선이나 저시력자를 위한 여유 폭과 같은 접근성 기준 또한 이 단계에서 명문화되어야 한다.
그래픽과 텍스트에 관한 지침도 필수적이다. 섹션의 타이틀과 서문, 개별 캡션의 위치와 위계를 정하고, 색상과 서체, 이미지와 텍스트의 비중이라는 그래픽의 톤앤매너를 규정하며, 다국어 표기나 텍스트 크기와 대비 기준 같은 접근성 요건 또한 함께 명시해야 한다.
조명 계획은 매우 상세하게 작성해야 한다. 작품별로 요구되는 조도와 연색지수, 자외선과 적외선의 차단 기준을 밝히고, 전시장 전체의 명암 대비 계획을 통해 어느 구역을 밝게 어느 구역을 어둡게 연출하여 서사의 리듬을 만들 것인지를 규정하며, 특정 작품을 강조하기 위한 스포트라이트의 지점 또한 구체적으로 지시해야 한다.
시청각 요소에 관한 사항은 영상과 사운드 작품의 재생 방식, 헤드폰 사용 여부, 인접 공간과의 음향 간섭을 막기 위한 소리의 확산 범위를 규정하고, 인터랙티브 요소나 디지털 스크린이 있다면 그 위치와 콘텐츠 사양 또한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예산과 일정의 제약 조건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디자인과 시공에 배정된 예산의 상한을 밝히고, 설치와 철수가 가능한 일정, 전시장의 작품 설치와 전시 그리고 반출 기간의 제약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안전과 법규에 관한 제약을 공유해야 한다. 소방법상 허용되는 구조물의 형태와 재질을 규정하고, 대여계약서에 명시된 특수 요구사항, 이를테면 특정 작품 주변에 진동 차단 장치가 필요하다는 조건 등을 문서에 반영해야 한다.
큐레토리얼 브리프의 핵심적 가치는 이상 여덟 가지 항목이 하나의 문서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통합된 브리프는 '이런 분위기를 원한다'는 구두 협의를 대체하는 공식 문서로서, 이후 디자이너의 도면 작성과 시공업체와의 계약,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책임 소재 판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행 과정의 근거가 된다.
철학적이고 감성적이며 추상적인 언어가 구체적인 치수와 스펙으로 옮겨지지 않아 도록의 서문과 실제 전시장 사이에 뚜렷한 괴리가 발생하는 번역 실패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브리프 작성의 관행이 한국의 전시 현장에 제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는 여전히 이렇게 전시 전반에 걸친 이해와 실천을 위한 최소한의 큐레토리얼 브리프 즉 전시개요서를 작성할 큐레이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전시개요서를 한꺼번에 도입하기보다는, 최소한 개념과 서사, 작품 정보, 공간 동선, 예산 상한 등의 항목만이라도 표준 양식으로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해 점차 확대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시작해서 시간이 흐르면 그 많은 ‘전시기획자’들이 ‘리드 큐레이터’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외국의 큐레이터 양성과 리더십 육성
많은 나라의 큐레이터 양성 체계는 학위 취득을 실무 능력의 완성으로 간주하지 않고, 별도의 검증 절차와 실무 훈련 단계를 의무 혹은 준 의무적으로 두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영국은 미술사·박물관학 석사학위 자체를 최종 자격으로 인정하지 않고, 졸업 후 견습 과정인 트레이니십(Traineeship)과 펠로십(Fellowship)을 거치는 것이 관행이다. 특히 영국의 큐레토리얼 펠로들에게는 클로어 리더십의 전문성 개발 프로그램이 제공되며, 이들이 경력 전환점에서 시니어 직위에 지원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지원한다.
내셔널갤러리와 아트펀드가 공동 운영하는 큐레토리얼 트레이니 프로그램은 6개월간 집중 훈련을 받은 후 지역 미술관에 배치되어 소장품 연구와 전시 기획에 참여하는 22개월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이 훈련을 마치면 이후 다른 기관의 큐레이터(Assistant Curator)나 유러피언 아트 큐레이터(European Art Curator)로 성장하는 발판이 된다.
V&A 역시 근현대 조각 분야의 큐레토리얼 전문성을 개발하는 16개월간 V&A에 근무하며 실무를 익히는 'Art Fund Vivmar Curatorial Trainee'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훈련생은 소장품관리시스템, 작품 취급과 이동, 수집·대여 실무를 직접 경험한다. 이들은 수료 후 파트너 기관에 6개월간 파견을 가 실무를 익힌다. 또한 V&A는 큐레이터와 박물관 전문가를 위해 쿠리어(Courier)훈련, 작품 취급, 해석, 관람객 개발 등을 주제로 한 온·오프라인 전문가 개발 과정을 상시 운영한다. 이렇게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출발하면 이후 경력과 전문 네트워크를 통해 큐레이터로 성장하며, 승진할수록 예산 편성과 재무 관리, 수익 창출 능력이 중요해지면서 관리자, 경영자로의 경로로 이어진다.
프랑스는 큐레이터를 콩세르바퇴르(Conservateur)라고 하며 국가공무원으로 규정해, 국립문화유산연구소(INP, Institut national du patrimoine)가 주관하는 국가시험을 통과한 사람만 직위에 오를 수 있는 강한 국가주의적 모델을 취한다. 문화유산연구소는 프랑스 문화부 산하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문화유산 전문가인 큐레이터와 보존·복원 전문가를 양성하는 프랑스 유일의 국립 특수대학원이다. 콩세르바퇴르 뒤 파트리무안의 신규 채용을 위한 국가시험은 국립문화재연구원이 국가와 파리시를 대신해 조직하며, 합격자는 시험 다음 해 1월부터 18개월간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유급실무 연수를 받는다. 시험은 매년 30~50인만 선발해 프랑스 공직 중 가장 어려운 시험 중 하나로, 박물관·미술관, 고고학, 역사적 기념물, 아카이브, 과학·기술·자연유산 등 5개 전문 분야로 나뉘어 있다.
기간 중 연수생은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로서 과학적 전문성과 공적 책임, 대중에 대한 헌신을 훈련받으며, 선출직 공무원·역사학자·고고학자·건축가·복원가 등 다학제적 환경에서 협업하는 법을 익힌다. 이는 연구뿐 아니라 문화유산의 연구·보존·확충·보호·가치화를 아우르는 실무 전반에 대한 국가 차원의 체계적 훈련이라는 점에서, 학위와 시험만으로 자격이 완성되는 한국의 모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프랑스 국공립 문화 예술계를 지탱하는 관료 조직 중 최상위급인 ‘콩세르바퇴르’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현장을 책임지는 중추적 직군이 있다. 이는 일반 학예연구사로 조직 내 중간 관리자 역할을 하는 ‘아타셰’로 프랑스 공직 분류상 고급 관리자급인 A등급에 속하는 지방정부 문화 부문 공무원이다. 이들은 화려한 조명을 받는 정책 수립보다 미술관과 박물관의 일상적인 숨결을 조율하고 대중과 문화유산을 매개하는 실무형 핵심 인재들이다. 아타셰의 직무 권한과 지휘 계통은 조직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유연하다. 루브르나 오르세 같은 대형 국립기관에서 이들은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콩세르바퇴르의 지휘를 받으며 전시팀, 교육팀, 소장품 관리팀 등 특정 분과를 이끄는 팀장이나 부관장의 지위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예산과 인력이 한정된 중소 규모 지방자치단체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옮기면, 아타셰가 직접 관장(Directeur)으로 임명되어 행정과 학예 전반을 총괄하기도 한다. 즉, 상위 직군을 보좌하는 2인 자의 역할부터 지역 문화 거점을 책임지는 수장의 역할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소화하는 셈이다. 이들의 채용과 교육 제도는 철저히 현장 중심적이며 국가 주도의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소(INP)라는 폐쇄적인 그랑제콜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콩세르바퇴르와 달리, 아타셰는 지방자치단체나 정부 부처의 일반 문화직 공무원 경쟁 시험을 통해 선발된다. 대학원에서 미술사, 역사학, 고고학 등의 전문 학위를 취득한 인재들이 시험을 거쳐 임용되며, 별도의 장기 연수 기관을 거치지 않고 현장에 즉시 투입된다. 이는 상아탑의 학문적 성과를 거창한 담론이 아닌, 당장 실행 가능한 문화 서비스로 전환할 수 있는 ‘준비된 실무자’를 요구하는 제도의 취지가 반영된 결과다.
업무의 영역 면에서 아타셰는 문화유산의 가치 확산(Valorisation)과 대중 소통의 최전선에 서 있다. 콩세르바퇴르가 소장품의 법적 보호나 고도의 학술적 고증 같은 내향적 연구에 몰두한다면, 아타셰는 전시의 물리적 실행, 소장품의 실무적 전산화,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 프로그램 개발, 대외 홍보 등 외향적 실무를 주도한다. 박물관이 단순히 유물을 보존하는 창고를 넘어 대중과 호흡하는 문화 공간으로 기능하게 만드는 모든 기획과 집행이 바로 이들의 손끝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급여 및 승진 체계는 이들이 짊어진 실무적 무게에 비해 다소 엄격한 한계를 지닌다. 일반공무원 호봉을 따르기 때문에, 최상위 등급(A+)인 콩세르바퇴르와 비교했을 때 시작부터 급여 차이가 나며 경력이 쌓일수록 그 격차의 자꾸 커진다. 현장에서는 경력을 쌓아 ‘수석 아타셰(Attaché principal)’로 승진하며 조직 내 영향력을 키워가지만, 구조적인 한계로 인해 퇴직 시점까지 처우의 격차를 완전히 좁히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프랑스 문화 예술계 내부에서는 동일 선상의 실무를 수행하는 아타셰의 기여도를 더 정당하게 평가하고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미국은 국가 주도의 단일한 자격제도 없이, 큐레이터의 성장과 승진은 대학원 학위와 민간재단의 연구장학금, 기관 내부의 직급 사다리가 결합한 시장 중심적 경로를 취한다. 대개 큐레이터가 되려면 인턴십, 게티·스미소니언·크레스 재단의 연구장학금, 그리고 박물관·미술관 자체의 치열한 공개 전형을 통한 인턴 격인 큐레토리얼 어시스턴트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립기관의 큐레이터 채용 공고에는 박사학위와 저서 등을 출판한 실적을 갖춘 지원자들이 몰려드는데 그 경쟁률은 매우 높다.
승진은 대개 큐레토리얼 어시스턴트에서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를 거쳐 마지막으로 시니어 큐레이터나 치프 큐레이터에 이르는 전형적인 경로를 밟으며, 승진할 때마다 수집·전시·부서 관리에 대한 책임이 확대된다. 직급상 단계별로 5년 차 정도가 되면 최소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 과정을 병행하며, 다수의 큐레토리얼 어시스턴트가 확대된 책임과 근무시간을 갖는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학업과 실무 경험이 병행되는 구조이다. 국립기관의 경우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가 되려면 박사학위와 약 5년의 현장 경험이 요구된다.
독일은 철저하게 국가가 큐레이터의 양성을 책임지는 구조이다. 독일에서 큐레이터가 되려면 석사 이후 별도의 2년간 유급 실습 훈련 과정인 ‘볼론타리아트(Volontariat)’를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가장 체계적인 도제식 모델을 운영한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등 독일어권 박물관에서 시행 중인 ‘학술적 볼론타리아트(Wissenschaftliches Volontariat)’는 신진 미술사학자와 연구자가 전문 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독특하고 필수적인 관문이다.
이 제도는 단순한 인턴십이나 무급 자원봉사와는 본질적으로 궤를 달라 대학원이라는 상아탑을 벗어난 고급 학술 인력이 국공립 문화 기관과 정식 계약을 통해 실무 역량을 배양하는, 체계적이고 유급제인 2년제 전문 연수 프로그램이다.
이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교육과 노동의 경계에서 신진 인력의 전문성을 존중한다는 점이다. 지원자는 미술사학, 역사학, 고고학 등에서 최소 석사 또는 박사학위를 소지해야 할 정도로 진입 장벽이 아주 높다. 선발된 연수생은 정식 직원이 아니라 ‘양성 과정(Ausbildungsverhältnis)’으로 분류해, 정식 학예연구원의 50~75% 수준의 급여를 받으며, 4대 사회보험 등 법적 처우를 보장받는다. 이는 기관이 이들을 단순 보조 인력이 아닌, 미래의 문화 자산을 이끌어갈 동료 연구자로 대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년의 연수 기간 중 볼론테어(Volontär)들은 박물관 운영 전 과정에 깊숙이 투입된다. 소장품의 학술적 연구와 아카이브 구축은 물론, 전시 기획, 작품 대여, 도록 집필, 공간 연출에 이르기까지 전시의 시작과 끝을 온몸으로 실습한다. 이에 더해 언론 홍보, 대중 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 오늘날 박물관이 요구하는 다각적인 소통 역량까지 함께 연마한다. 기관 역시 이들에게 박물관 행정 전반을 교육해야 할 의무를 지니므로, 프로그램은 철저히 도제식 훈련과 현대적 시스템의 조화 속에서 운영된다.
궁극적으로 독일어권 문화 예술계에서 볼론타리아트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국공립 미술관의 정식 ‘큐레이터(Kustode)’로 임용되려면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암묵적이며 실질적인 전제이다. 신진 연구자들은 2년간의 치열한 현장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실무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박물관계 내의 학술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비로소 상아탑의 연구자에서 현장의 전문 학예 인력으로 거듭나게 된다.
일본은 관료국가답게 별도의 국가 연수나 펠로십 체계보다, 채용된 기관 내부의 연공서열형 승진 구조를 통해 성장하는 경로가 일반적이다. 현립미술관의 경우 기본적으로 근속연수에 따라 직위가 올라가는데, 학예원들을 통솔하는 계의 리더인 ‘학예계장’, 다음으로는 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학예과장’, ‘주임학예원’, ‘학예부장’ 등이 있으며, 나아가 ‘관장보좌’나 ‘부관장’, 때에 따라 ‘관장’이 되기도 한다. 다만 일반 기업의 관리직과 마찬가지로 파리미드형 구조로 직위가 올라갈수록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인원은 점점 줄어든다.
기관 내부 승진 외의 경로로는 사회교육행정에 종사하며 행정직원으로 승진하는 방법, 독립하여 프리랜서, 인디펜던트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경우, 이직하여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등의 직업 경로가 있으며, 연구 실적이나 전시 실적을 바탕으로 외부 비엔날레나 예술제의 예술감독을 맡거나 전문지 집필자로 활약하며 원하는 직장을 목표로 하는 커리어 플랜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역량과 실적에 따른 예외적 성취이며, 프랑스나 독일처럼 국가나 협회 차원에서 표준화된 실무 훈련 커리큘럼이 제도화되어 있지는 않은 것은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다.
큐레이터 십의 정립을 위한 제언
한국의 큐레이터 제도가 마주한 총체적 부실을 타개하고 온전한 큐레이터 십을 정립하려면, 자격, 처우, 예산, 직제, 훈련이라는 다섯 층위의 동시 병행적 개혁이 시급하다. 자격증은 넘쳐나되 실무 훈련 기회는 없고, 직함은 있으되 경력 성장의 사다리가 끊어진 현 구조에서는 한국의 학예연구직이 결코 어시스턴트 수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우선 자격제도는 학술 이력 위주의 등급 산정에서 탈피해 전시 환경 관리, 컨디션 리포트 작성, 통관 절차 등 실무 역량을 검증하는 단계적 평가를 정학예사 승급 요건에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 이와 함께 지방 공립·사립박물관 학예직의 고용 안정성과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 정규직 정원을 기관 평가 인증과 연동하여 확충하고, 급여 체계를 동급 행정직 수준으로 재설계하는 물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장기근속을 통한 전문성 축적이 가능하다.
예산 운용 측면에서도 소장품 수집과 전시 개발에 쓰일 예산의 최소 비율을 제도화하는 동시에 전담 에듀케이터 채용을 의무화해야 한다. 인력난을 겪는 소규모 기관을 위해서는 권역별 문화재단이 에듀케이터, 레지스트라, 컨서베이터를 공동 고용하는 공유 인력 풀을 운영함으로써 큐레이터가 본연의 연구와 기획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
나아가 정부 직제 내의 혼란스러운 명칭 구분을 폐지하고, 각 직군을 국제 기준에 맞게 병렬적인 독립 전문직으로 재편하여 업무 독점과 과부하의 관행을 끊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학 분야를 참조한 단계적 수련 체계의 도입이 절실하다. 국공립 대형박물관을 중심으로 시니어 큐레이터가 어시스턴트를 밀착 지도하는 공식 멘토링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도입해 중소 기관으로의 순환 연수를 병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어시스턴트가 치프 큐레이터로 성장하는 경력 사다리가 복원될 때, 비로소 실무를 하청업체에 전적으로 위탁하던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별 큐레이터에게 각자도생의 자기 계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처우·예산·직제·훈련의 다섯 축을 동시에 혁신하는 제도적 결단만이 큐레이터를 기획서만 던지는 전시대행사 관리자에서 전시의 전 과정을 실제로 장악하고 책임지는 온전한 큐레이터 십의 주체로 바로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 전시기획자가 아닌 큐레이터의 양성과 큐레이터 십의 실현을 통한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한국미술생태계를 건강하게 이끌어 갈 단 하나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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