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재 논설고문]
이재명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긍정평가가 3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6·3 지방선거 직전인 5월 64%였던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9월 37%로 급락했다. 이달엔 부정평가가 5%포인트 줄어 내림세가 일단 멈춘 모습이지만 긍정평가는 여전히 37%에 머물렀다.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대통령과 주요 정당의 지지율 진폭이 크다고는 하지만 대형 돌발 악재가 없는 상황에서 넉 달 만에 27%포인트나 빠지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집권 1년이 갓 지난 정권 초반기로 국민들의 기대감이 남아 있어야 할 시기다.
이 대통령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지지율 하락 국면에서 부쩍 분주해졌다. 이 대통령이 SNS에 올린 게시글은 8월 37건에서 지난달 116건으로 늘었다. 대통령의 SNS 활동이 과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국민과 오해를 풀고 1년 4개월간의 정책 성과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것”이라는 청와대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국민과 직접 소통하려는 노력을 폄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대통령의 X(옛 트위터)에 올라온 글 중에서 유독 전통적 지지층 대상의 메시지가 주목을 끌고, 특정 집단의 은어(隱語)성 언어가 등장하는 것에 이질감을 느끼는 국민이 많다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정책과 관련된 SNS 글은 개별 정책에 대한 홍보와 추진 의지를 담고 있다. 부동산 개혁의 당위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각 부처에도 SNS를 활용한 정책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이 실제로 접하는 것은 주요 정책의 수정이나 포기, 방향 전환이다. 정책을 내놓았다가 반발에 부닥치면 보류하거나 축소하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신청을 연내에 하지 않기로 한 것은 정부의 지지율 민감도가 높아진 것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8월 말 대외경제장관회의를 거쳐 공론화 작업에 착수한 지 두 달도 안 돼 원점으로 되돌렸다.
농지 전수조사에 나섰다가 농촌의 민심 이반을 겪은 정부로서는 농업계를 추가로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농어민과의 충분한 대화와 신뢰 회복을 강조했지만 세계무역기구(WTO)의 기능이 약화되고 미국의 통상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수출 시장을 넓히기 위한 산업 전반의 통상 전략은 큰 부담을 갖게 됐다.
노인빈곤 문제를 해결한다는 취지로 추진한 기초연금 개편이 흐지부지된 것도 이해당사자들의 반발에 밀려 후퇴한 사례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고소득 수급자를 줄이고 저소득층을 두텁게 지원하는 하후상박(下厚上薄)식 개편에 대해 노년층 반발이 예상되자 지급 기준을 그대로 둔 채 소득 하위 30%에 월 3만원씩 더 주는 어정쩡한 조정으로 끝냈다.
현실과 실리에 입각한 실용주의는 이재명 정부가 보유한 대표적인 신뢰 자산이다. 지지율을 의식한 정책 후퇴와 땜질 처방이 되풀이되면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 공소취소 논란 같은 정치 사법적 이슈와 범여권 내부의 분열 등 정치적 악재가 지지율 하락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지율 하락이 전통적인 지지 세대로 여겨진 40·50대를 포함해 거의 모든 연령대에서 나타난 것은 경제 문제, 구체적으로는 일상의 민생에서 나아진 것이 없다는 실망감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일 하나는 확실히 잘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연이은 정책 실패로 인해 실망으로 바뀌면서 지지를 거둬들인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성과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실용에서 나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확장재정 우려에도 출범 직후 31조 8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경기의 바닥을 받쳤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내건 자본시장 개혁은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맞물려 코스피 상승을 이끌었다.
친노동 기조에 대한 걱정이 컸지만 노동계 반발에도 최저임금을 적정선에서 조정하는 ‘실용적 시장주의’로 균형을 잡았다. 한·미 관세협상을 무난한 선에서 타결했고 에너지 위기 때는 공급처 다변화로 충격을 최소화했다. 이념보다 국익을 앞세운 실용외교가 경제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반도체 수출 호조에 힘입어 경상수지 흑자가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하고 올해 성장률은 3%대 달성이 확실해지고 있다. 반도체 특수(特需)의 효과가 크지만 실용주의 경제가 마중물 역할을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재명 정부의 고전(苦戰)은 실용주의 초심을 지켜내지 못하면서 시작됐다. 실용의 원칙에 충실했을 때 성과가 났고, 실용이 즉흥과 과욕으로 변질된 순간 실패가 늘고 신뢰를 잃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정평가 이유 1위로 등장하는 것은 어김없이 부동산 문제다. 정부가 외부 변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경제 영역에서 민심이 등을 돌렸다는 뜻이다.
“세금으로 집값을 잡지 않겠다”는 약속은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기억하는 중도층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집값이 들썩이자 정부가 꺼낸 것은 결국 세금이었다. 양도세 장기보유 특별공제를 흔들었고 비거주 1주택자 종부세 기본공제를 12억원에서 9억원으로 깎겠다고 했다. 반발이 커지자 슬그머니 원상 복귀했고, 세 부담 상한을 높이려던 계획도 현행 유지로 되돌렸다.
이 대통령은 “입장을 바꾸면 부정의인가”라고 반문했지만 정책의 신뢰는 큰 타격을 입었다. 개혁을 바란 쪽은 후퇴에 실망했고, 대상자들은 위협으로 받아들이며 분노했다. 양쪽을 다 잃는 데 석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코스피 호조에 고무된 정부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를 서둘러 도입했다. 주가가 떨어지자 개인투자자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뒤늦게 예탁금 기준을 올렸지만 해외에서는 “한국이 투자 부적합 국가가 되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국내 자산에만 투자하도록 묶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개편안은 투자자의 선택권을 좁힌다는 비판을 받고 논란 끝에 백지화됐다. 시장을 존중하겠다던 정부가 시장을 특정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한 셈이다. ‘실용적 시장주의’가 ‘관치형 성과주의’로 변질됐다는 질책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농지 전수조사는 이 대통령이 2월 국무회의에서 “농지 관리가 너무 엉망이다. 농지까지 투기 대상이 돼 버렸다”고 지적하면서 본격화됐다. 실제 조사에 착수한 뒤 농촌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과 농민들의 반발이 커지자 정부는 투기와 무관한 농지는 강제 처분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물러섰다. 평화로운 농촌 공동체를 반년 넘게 흔들어 놓은 뒤 나온 결말은 허탈감만을 남겼다.
실용의 원칙에 입각해 농지 이용 현실과 농민들의 편익을 사전에 면밀히 헤아렸으면 불필요한 오해와 혼선은 없었을 것이다. ‘경자유전(耕者有田)’ 이념이 실용을 압도한 결과다.
경제지표의 호조에도 서민과 자영업자의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는 K자형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작업이 제때 이뤄지지 않은 것도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 수치로 나타나는 실적에 집중하다가 경제 체질을 튼튼히 하는 구조개혁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중도실용은 전통적 지지층의 요구와 충돌할 소지가 많다. 지지층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실용을 표방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실용주의가 아니다.
정부가 실용주의로 무장하고 정책 자체의 핵심에 집중했을 때 다수의 국민은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율로 응답했다. 지지율 하락이 신경 쓰일수록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실용의 기조를 꿋꿋하게 지켜가야 하는 이유다.
정권 초기와 달리 최근 들어 실용주의 경제에 대한 언급을 찾기 힘들어졌다. 8월 말 여당 지도부 만찬에서 “(내가) 왼쪽을 너무 안 챙겼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은 실용주의의 후퇴를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지지율 하락이 중도 보수를 아우르는 실용주의 탓은 아니다. 실용주의에 충실했을 때 지지율이 높았다는 것은 집권 1년의 통계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실용주의는 상황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입장을 바꾸고 방향을 트는 기술이 아니다. 실태와 효과를 철저히 따져 치밀하게 설계하고, 한번 정한 원칙은 끝까지 관철해 성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수출이 세계 4강 반열에 들어서고 성장률이 오르고 있으며 나라 곳간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다. 그런데도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은 국민들이 숫자보다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 신뢰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국민들이 이재명 정부에 기대한 것은 이념을 넘어 문제를 푸는 실력, 각론에 강한 실용의 면모였다. 지지율 하락은 그 기대를 되새기라는 경고다.
집권 초반의 득점을 까먹고 전열을 다시 정비하는 지금이야말로 실용주의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갈 때다.
박원재 필자 주요 이력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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