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미국에서 거대한 정치적 파도가 일었다. 11월 3일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하원을 모두 탈환하는 '블루 쓰나미'가 현실이 됐다. 민주당은 공화당 의석을 대거 빼앗으며 상원 과반을 확보했고, 그중에는 텍사스·캔자스·사우스캐롤라이나처럼 공화당이 수십 년간 지켜온 아성도 포함됐다. 집권당이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동시에 내준 것은 2차 대전 이후 손꼽을 만큼 드문 일이다. 높은 생활비와 인플레이션, 이란 전쟁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표로 분출된 결과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2년을 야당이 장악한 의회와 함께 보내게 됐다. 단순한 의석수의 변화가 아니라 워싱턴 권력구조 자체가 바뀌는 사건이다.
파장은 미국 국경을 넘는다. 유럽은 관세와 안보 부담을, 중국은 미·중 전략경쟁의 향방을, 아세안과 인도는 공급망 재편의 속도를 계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과 일본의 처지는 각별하다. 두 나라는 관세 협상과 대규모 대미 투자, 반도체·AI 협력, 방위비 분담에 이르기까지 트럼프 행정부와 긴밀히 보조를 맞춰왔다. 워싱턴의 권력 지형 변화가 곧바로 경제와 안보의 충격으로 전달되는 구조다. 특히 정상 간 합의에 기대어 맺은 약속들은 의회라는 새로운 변수 앞에서 그 지속성을 다시 시험받게 된다.
문제는 시간이다. 수정헌법 제20조에 따라 제120대 의회의 임기는 2027년 1월 3일 정오에 시작된다. 11월 4일 현재 꼭 60일이 남았다. 첫 본회의 일정은 조정될 수 있어도 새 의회의 출범 시점은 분명하다. 통상적인 ‘100일 계획'을 짤 여유는 없다. 새 의회 출범을 시한으로 정한 국가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먼저 선거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의회를 잃었다고 대통령의 권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은 외교·안보와 행정명령, 그리고 법률이 위임한 범위 안의 관세·통상 권한을 여전히 쥐고 있다. 달라지는 것은 의회의 역할이다. 민주당 의회는 입법과 예산, 청문회와 조사권으로 행정부를 견제하고, 상원은 주요 인사 인준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관세 권한의 범위, 동맹국과 맺은 투자 합의의 투명성, 이란 전쟁의 전쟁권한 문제가 의회의 도마에 오를 공산이 크다. 미국의 정책결정이 백악관 독주에서 백악관과 의회의 견제·협상 구조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률적으로 부드러워질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세 갈래의 흐름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의회의 견제로 일부 정책은 속도가 늦춰지고, 대통령은 행정권한을 동원해 기존 노선을 고수하려 할 것이며, 대중국 기술통제와 제조업 리쇼어링처럼 양당의 이해가 일치하는 분야는 오히려 강화될 수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트럼프 개인의 정책이 아니다. 제조업 일자리 회복과 첨단산업의 미국 내 생산, 대중 기술우위 확보는 양당이 공유하는 목표다. 민주당이 이겼으니 관세가 풀리고 투자 압박이 사라지리라는 기대는 위험하다. 집권 세력은 바뀌어도 '미국 우선'이라는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외관계를 재설계하는 거시전략과 산업·기업 차원의 미시전략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
첫째, 대미 외교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한·미 관계는 정상회담과 백악관 합의가 방향을 정하는 방식이었다. 앞으로는 상·하원과 주요 상임위원회, 주정부까지 아우르는 다층외교가 필요하다. 한국 관련 통상·산업 법안을 다룰 의원이 누구인지, 한국 기업 투자로 일자리가 늘어나는 지역구가 어디인지 정밀한 지도를 그려야 한다. 대미 투자의 성과를 고용·생산·세수·기술협력이라는 구체적 숫자로 제시해야 의회를 설득할 수 있다. 조지아의 배터리·자동차 공장, 텍사스와 애리조나의 반도체 공장이 만들어낸 일자리는 해당 지역 의원에게 가장 강력한 논거다. 미국 정치의 변화에 대응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정권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지속 가능한 관계를 쌓는 것이다.
둘째, 대미 투자계획을 경제성의 관점에서 재점검해야 한다. 한국은 통상 합의에 따라 3500억 달러, 일본은 5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직접투자와 금융 지원, 산업 협력이 섞인 약속이어서 전액이 현금으로 즉시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양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작지 않다. 한국의 경우 현금 투자 2000억 달러는 연간 200억 달러 한도로 나눠 집행하고 1500억 달러는 조선 협력에 배정하는 구조다. 그래도 외환보유액 4000억 달러대의 경제에 연 200억 달러의 달러 유출은 결코 가벼운 부담이 아니다. 사업의 수익성은 충분한가, 관세와 보조금 정책이 바뀌어도 지속 가능한가, 국내 산업과 고용에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달러 조달과 환율 위험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정부와 기업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기존 합의를 뒤집자는 것이 아니다. 법률과 계약으로 확정된 의무는 지키되 사업성과 집행조건이 정해지지 않은 프로젝트는 상업적 합리성과 위험 분담 원칙에 따라 검증하자는 것이다. 알래스카 LNG 같은 대형 사업은 정치적 상징성이 아니라 수요와 가격, 운송비, 수익률, 에너지안보 효과로 판단해야 한다. 마침 민주당 의회도 행정부가 맺은 투자 합의를 들여다볼 것이다. 검증은 동맹을 흔드는 일이 아니라 합의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
셋째, 안보에서는 동맹의 안정과 자강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중국의 군비 증강, 대만해협의 긴장, 북·러 군사협력이 겹친 동북아에서 한·미 동맹은 여전히 핵심 축이다. 다만 방위비 분담과 무기 공동 개발, 방산 공급망을 따로 협상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안보협력 패키지로 다뤄야 한다. 특히 조선과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방산 제조는 한국이 미국과 실질적 상호이익을 만들 수 있는 분야이며 미 의회 안에서도 초당적 지지가 두텁다. 미국 조선업 재건은 어느 당이 의회를 쥐든 포기하기 어려운 과제다. 한국이 단순한 하청이 아니라 공동 생산과 기술 협력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기회다.
넷째, 반도체와 AI 전략이다. 미국의 기술패권 전략은 이미 정당을 넘어선 국가전략이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췄지만 AI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첨단 컴퓨팅 생태계는 미국 의존도가 높다. 첨단 GPU와 장비의 수출통제가 강화되면 중국에 공장과 고객을 둔 한국 반도체 기업은 미국 시장의 기회와 중국 사업의 제약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AI 전략은 미국과 협력 강화, 국내 기반 확충이라는 이중구조여야 한다. GPU 확보만으로는 부족하다.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전력,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인재를 하나의 생태계로 엮어야 한다. 미국의 기술을 활용하는 능력과 미국의 정책이 바뀌어도 작동하는 독자 역량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민주당 의회가 AI 안전과 데이터 규제, 데이터센터 전력 문제를 새 의제로 올릴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미시전략은 산업별로 구체화돼야 한다. 반도체는 수출통제와 보조금 조건을, 자동차·배터리는 관세와 현지 생산비용을, 조선·방산은 장기 공동생산 가능성을, 데이터센터는 컴퓨팅 접근성과 전력 확보를, 금융기관은 대미 투자에 따른 달러 유동성과 환율 위험을 다시 계산해야 한다. 정부는 협상하고 기업은 투자한다는 기존 분업만으로는 복합위험에 대응하기 어렵다. 정부·기업·금융·연구기관이 함께하는 산업별 정책협의체가 필요하다.
시야를 넓혀야 할 대목도 있다. 한·일 협력이다. 한국의 메모리·첨단제조와 일본의 소재·장비·정밀기계·로봇은 상호보완적이다. 피지컬 AI, 반도체 공급망, 첨단소재, 에너지 기술은 공동 프로젝트를 검토할 만하다. 자동차·배터리처럼 경쟁하는 분야도 많으므로 거창한 구호보다 이익이 분명한 사업 단위로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유럽·아세안·인도로 협력의 폭을 넓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과 거리를 두자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정책 변화가 경제 전체를 흔들지 않도록 선택지를 늘리자는 것이다. 경제안보의 요체는 의존을 무조건 줄이는 데 있지 않다. 위험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선택지를 확보하는 데 있다.
이제 실행이다. 60일을 세 단계로 나눠 써야 한다. 첫 20일에는 투자·관세·안보·기술협력에 관한 기존 합의를 전수조사해야 한다. 법적으로 확정된 사항과 재협상 여지가 있는 사항을 가려내고, 새 의회의 권력구조를 분석하는 단계다. 아직 임기가 남은 제119대 의회의 연말 입법과 예산 처리도 놓쳐서는 안 된다. 다음 20일에는 관세 유지와 변경, 투자조건 강화, 기술통제 확대 등 시나리오별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새로 선출된 의원과 보좌진에게 한국 산업 협력의 실익을 설명할 논리도 이때 갖춰야 한다. 마지막 20일에는 외교·통상·안보·산업·과학기술·재정 당국의 계획을 하나의 국가전략으로 통합해야 한다. 새 의회 출범 이후에는 법안과 예산, 행정조치를 상시 점검하는 조기경보 체계를 가동해야 한다. 컨트롤타워가 분명하지 않으면 60일은 부처별 보고서만 쌓이다 끝날 것이다.
이번 선거를 미국 정치의 일시적 출렁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세계경제는 이미 지정학과 기술패권, 에너지 안보와 공급망 경쟁이 맞물리는 새 질서로 들어섰다. 대외 의존도가 높고 첨단 제조업 비중이 큰 한국은 그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다. 그러나 위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세계적 제조 기반과 반도체 기술, 조선·방산 역량은 한국이 협력의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자산이다.
미국 정치가 바뀔 때마다 한국의 국가전략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어느 정당이 워싱턴을 장악하든 작동하는 외교와 산업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국가전략이다. 동맹은 지키되 의존은 관리하고, 투자는 늘리되 경제성은 검증하며, 기술협력은 강화하되 독자 역량을 쌓아야 한다. 블루 쓰나미는 미국이 일으킨 파도지만 그 파고를 넘는 방법은 한국이 정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미국의 변화를 기다리는 외교가 아니라 미국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국가전략이다.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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