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눈앞의 이익을 좇다 사회를 잃을 것인가

  • 김현철 서울교육자치시민회의 대표

김현철 서울교육자치시민회의 대표
김현철 서울교육자치시민회의 대표
최근 프랑스의 학생시위를 보면 과연 학교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에 프랑스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온몸으로 답했다. 교사 충원과 열악한 학교 환경 개혁을 촉구하며 거리로 나선 이들의 행진에는, 그랑제콜 등 명문 고등교육기관 학생들까지 동참했다. 내 학교만 무사하면 된다는 이기적 계산을 넘어, 교육을 개인의 성공 수단이 아닌 공동의 권리로 지켜내겠다는 뜨거운 연대의 선언이었다.

반면 한국의 교육 논쟁은 풍경이 사뭇 다르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두고 정부와 교육계, 그리고 각자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학부모들의 시선이 팽팽히 맞선다. 프랑스의 이번 시위가 함께 살아갈 교육의 조건을 묻는다면, 우리의 교부금 논쟁은 재정의 배분과 확보에 치우쳐 있다. 정부도 교육계도 그 돈으로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부터 답해야 한다. 주체의 차이는 곧 시야의 차이를 낳는다. 프랑스가 국가의 책무성과 사회 정의를 물을 때, 우리는 얼마를 깎고 지킬 것인가라는 지엽적 숫자에만 매몰되어 있다.

이것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이자 전형적인 본말전도(本末顚倒)다. ‘소탐’은 예산을 줄이거나 지키는 일 자체를 성과로 여기는 데 있다. ‘대실’은 사람이 사람답게 자라고 서로를 믿으며 살아갈 ‘사회성’과 ‘공공성’의 상실이다. 눈앞의 장부에 갇혀 예산이라는 수단을 교육의 목적보다 앞세우니, 무엇이 중하고 무엇이 가벼운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우리가 지키려는 사회란 무엇인가. 단순히 사람이 모여 군집을 이룬다고 사회가 되는가. 같은 이익을 좇아 뭉친 집단은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진정한 사회란 타인의 삶이 곧 내 삶의 조건임을 깨닫고, 함께 살아갈 책무를 나누는 상호관계성 위에서만 성립한다. 타인을 내 성공의 수단이나 넘어야 할 장애물로만 대한다면, 인구수는 존재할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출발은 인간의 ‘자연성’이다. 인간은 먹고 자고 쉬어야 하며, 타인의 돌봄 없이는 자라날 수 없는 유기적 존재다. 저마다의 성장 속도와 한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인간성의 바탕이며, 내가 받은 돌봄을 타인에게 되돌려주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사회성이 자란다. 이 돌봄과 관계성을 가정과 개인에게만 떠맡기지 않고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바로 교육의 공공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가로채 무한 경쟁의 속도전에 몰아넣었다. 잠을 줄여 성적을 올리고 친구를 짓밟아 몸값을 높이는 것을 출세라 부르며 강요해왔다. 2023년 서이초 사건 당시, 필자는 교사들의 집단행동이 우리 사회를 바꿀 거대한 불씨가 될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이 왜곡된 구조를 방치하면 교육관계 전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경고였다.

현실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참혹하게 전개되고 있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초·중·고교생은 2023년 214명, 2024년 221명, 2025년 244명으로 해마다 계속 늘었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그렇다고 이 증가를 아이들 개인의 문제로 돌릴 수는 없다. 이 비극적인 지표 앞에서 교육 경쟁을 계속 강요하는 것이 과연 어른들의 책임 있는 자세인가. 사람과 관계를 소모하며 추진하는 ‘지속가능한 성장’은 그 자체로 거대한 모순이다. 자기 몫만 챙기는 사이 밀려난 이들의 불안과 절망은 사회적 균열을 깊게 만들고, 결국 혐오와 차별의 정치적 자양분이 된다.

교육개혁은 이 미련한 셈법을 통째로 뒤집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교부금을 지킨다면 그 재정으로 교사의 시간을 아이들에게 온전히 돌려주고, 위기 학생을 품을 수 있는 단단한 관계망을 만들어야 한다. 예산을 재정비한다면 교육관계를 어떻게 회복할지부터 답해야 한다. 지금 줄여야 할 것은 교육 예산이 아니라, 아이들의 숨통을 조이는 무분별한 경쟁과 소모적인 행정 만능주의다.

내 욕망에 세상을 맞추는 ‘에고(Ego)’의 삶에서, 세상 속 자신의 책임을 깊이 발견하는 ‘셀프(Self)’의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프랑스 학생·노동자들의 연대와 한국의 좁은 교부금 논쟁은 우리에게 준엄하게 묻고 있다. 경쟁의 이익을 과연 어디까지 내려놓아야 사람과 사회를 지킬 수 있는가. 당장의 이익 때문에 사회를 잃는다면 그것은 결코 남는 장사가 아니다. 함께 살아갈 사회를 다시 세우는 것, 그것이 교육의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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