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의 승리로 5일(한국 기준) 미국의 44대 대통령 선거가 마무리되면서 한동안 미뤄졌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한미 경제관계의 최대 화두로 부상했다.
"재협상은 없다"는 정부의 거듭된 원칙 천명에도 불구하고 그간 한미 FTA에 비판적 견해를 견지해온 오바마와 민주당이 새 행정부를 꾸리게 되면서 한국으로서는 한미 FTA 재협상 가능성을 좀 더 무게있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맞게 됐다.
◇ 오바마 "한미 FTA는 불공정"
이번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민주당은 지난해 한미 FTA가 타결됐을 무렵부터 전반적인 FTA, 특히 한미 FTA에 대해 호의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자동차나 쇠고기 등을 이유로 한미 FTA에 문제를 제기해온 찰스 랭글 하원 세입위원장, 샌더 레빈 하원 무역소위원회 위원장, '비프벨트'의 이해를 대변하는 맥스 보커스 상원의원 등이 모두 민주당 인사들이었다.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오바마 당선자가 선거과정에서 보여준 언행들이다. 경선 본격화 전인 지난해부터 한미 FTA에 문제를 제기해온 그는 올해 초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한미 FTA가 자동차와 쇠고기 등 무역 핵심산업 보호와 환경, 노동 등 신통상정책의 기준들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때만해도 그의 발언을 민주당 지지층인 노조 등을 겨냥한 '정치적 수사'로 평가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이후에도 한미 FTA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지난 5월 부시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한미 FTA는 아주 결함 있는(badly flawed) 협정"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대(對)아시아 정책보좌관인 프랭크 자누지는 "오바마는 FTA 찬성론자이지만 자동차 문제만큼은 협상이 잘못된 것"이라며 "비준할 것이지만 '추가적 안전장치'가 담보돼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민주당과 오바마의 그간 행적뿐 아니라 미국이 처한 경제상황도 변수다.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던 자동차 빅3는 판매격감과 자금부족으로 끊임없는 파산위기에 시달리며 연방정부의 구제를 기다리고 있다.
'한미 FTA 폐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일부 수정 요구를 전망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경우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미국산 자동차의 국내 판매확대 보장조치다.
미국에서는 한국산 자동차가 연간 70만대 이상 미국에서 팔리는데 미국산은 한국에서 5천대밖에 팔리지 않으므로 '수의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제기된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도 지난달 31일 한미 재계회의에서 "협상 당시 미 의회 일각에서 제기한 관심사항 중 한 가지 반영이 안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에서 미국산 차가 팔리는 만큼 한국차에 미국 시장을 개방하자는 소위 수량적 접근에 대한 주장"이라고 말해 이 부분에 대해 미국내에서 적지 않은 압력이 있음을 시사했다.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경제학)는 "미국은 과거 (미국 제품의 일정 시장점유율을 요구했던) 미.일 반도체 협상과 유사한 요구를 해올 것"으로 예상하면서 "그 형식은 한미 FTA 재협상에 한정하지 않고 통상현안 연례협의 등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현대경제연구원도 4일 미국 대선결과에 따른 경제적 영향을 진단하면서 "미국은 자동차를 중심으로 FTA 전반에 대해 전면 개정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고 미 의회의 비준은 난항을 겪을 것"으로 내다봤다.
◇ 先비준으로 재협상 차단 가능한가
지난해 6월 한미 FTA가 서명된 이래 정부와 재계는 한미 FTA의 조속한 비준동의를 국회에 촉구해왔고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달 제출된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정기 국회내에 처리하겠다는 방침이다.
그 명분은 "우리가 먼저 비준해야 미국이 비준하도록 압박할 수 있고 재협상 요구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혜민 외교통상부 FTA교섭대표는 "우리가 먼저 비준동의를 하는 것이 재협상 차단에 있어 최선의 해법"이라며 "국제적으로 서명까지 이뤄진 협정을 뒤엎는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국제정치 현실에서 우리 측의 선 비준동의가 미국의 요구를 완전히 차단하는 보호막이 되기는 힘들다. 전통적으로 미국 의회가 자국의 이해가 달린 외교협정을 논의할 때 상대방의 처지를 주요 고려요소로 보지 않는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실제 미국과 FTA 협상을 타결한 콜롬비아는 자국 의회의 통과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미.콜롬비아 FTA 이행처리법안 전격 제출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제동으로 미국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만약 선 비준동의 뒤 미국이 이에 아랑곳없이 재협상 요구를 해온다면 어렵게 처리된 한미 FTA의 내용을 거쳐 재비준을 해야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정부에 엄청난 부담이 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쇠고기 협상 때처럼 겉으로는 "FTA와 무관한 것"이라면서 연례 통상협의과 같은 다른 경로를 통해 유사한 요구를 해온다해도 마찬가지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오바마 진영의 한미 FTA 개정요구에 대해 "매케인과의 차별화 등 전략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집권후 입장 변화 가능성을 점치면서도 "미국이 자동차를 중심으로 재협상을 요구해온다면 FTA에 비판적이었던 진보진영은 물론 보수진영으로서도 수용하기 힘들어 또다른 '촛불'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이와 관련, 지난 3일 "한미 FTA는 쇠고기 문제보다 더 중요한 사안으로 시기적으로 적절한지 봐야한다"며 정부의 신중 대응을 주문했다. 우리 측의 선 비준동의가 진정한 재협상 차단 해법인지 여권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미 FTA에 대한 미 의회의 본격 논의시기도 점치기 힘들다. 다만 미 의회가 내년 3월6일까지 적용될 잠정 예산법안을 통과시킨 데다 새 정부 출범초기에는 금융위기 후속 대응조치와 고위 공직자 선임 및 인사청문회가 의회의 주관심이기 때문에 최소한 내년 2분기는 돼야 본격 논의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정태인 교수는 "오바마 정부는 우선 금융위기 수습과 포스트 브레튼우즈 협정 등에 대응하는 것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고 예상하면서 "한미 FTA와 같은 사안은 이런 문제에 대한 오바마 정부의 밑그림이 어느 정도 마련된 뒤에 논의될 것"으로 전망했다. /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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