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경기침체의 격랑에 휩싸여 있습니다. 가뜩이나 고뿔에 잘 걸리는 국내 경기도 ‘IMF이후 최악’이라는 사슬에 얽매어 있습니다.
당시 장롱 속의 금붙이가 서슴없이 흘러 나왔듯 지하창고나 베란다에 쌓아 두었던 난로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문득 연탄차 달동네 언덕배기 쇳소리 요란하게 오르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가 오버랩 됩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싶은 것이다... 중략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 보고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사직공원으로 넘어가는 향촌동 고개 길, 새끼줄에 연탄 낱장을 끼워 들고 쉬엄쉬엄 올라 사과궤짝 옆에 몇장 쌓아 놓으면 마음은 부자였습니다.
신문지 불쏘시개로 어렵게 불을 붙인뒤 공기 구멍을 잘 못 조절, 불이 꺼져 냉방에서 오들오들 떨기를 몇 번, 연탄이 홀랑 다 타버려 방바닥 펄펄 끓기를 몇 번. 이렇게 연탄의 추억은 시작되었습니다.
만리동 반장댁 문간방에선 김장했다고 겉절이와 팥떡을 챙겨 싸 들고 찾아 온 친구와 미적지근한 윗목에 나란히 앉아 자취생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다 향토장학금이라도 올라오면 친구들과 연탄 불 드럼통에 둘러앉아 양곱창. 뚝배기를 앞에 놓고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행정적 민주주의. 교도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논하기에 통행금지 임박해서 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연행될 시절, 감히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며 열변을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신혼초 연탄 불을 챙기지 못해 이불 뒤짚어 쓴 채 아내와 손을 맞잡고 웅크리고 앉아 희망과 꿈을 설계하노라면 어느새 방바닥은 의뭉스럽게 슬금슬금 달아올라 깊은 잠에 빠져 들곤 하였습니다.
언젠가는 온 정열을 쏟아 활활 타오르고 싶고 끝닿는 데 까지 한 번 밀어붙여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지, 완전히 타버린 연탄재가 되었고 넘겨 받은 바통을 무난히 다음 주자에 넘겨 주었는지 느껴 보고 싶었습니다.
연탄재는 후회없이 실천한 이상의 부산물이요, 희생적인 사랑과 남을 위하는 삶.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뜻하기도 합니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난 한덩이 재가 골목마다 쌓이고 미끄러운 눈길처럼 침체된 경제의 바닥에 으깨어 깔려있다면 마음놓고 걸어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추위에 마음 조일 이웃도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이토록 소중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세요. 공연히 세상 탓하며 잘 못하여 반쯤 탄 연탄을 발로 차면 남은 불길에 구두가 망가집니다.
앞으로 일주일이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구원사업을 위하여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탄생한 날입니다. 자기 몸까지 내어주는 사랑과 희생정신은 끝까지 타버린 연탄재의 상징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향해 훈훈한 손길을 뻗을 때 ‘최악의 사슬’이 끊기고 경제는 활성화 될 것을 확신합니다. 추위에 떠는 이웃을 보고도 지나칠 것인가 머물러 정성스런 도움을 줄 것인가 머릿속으로 꼼지락거리며 그냥 스치지 마세요. 연말을 맞아 닫힌 마음을 십자 열쇠로 열고 소중한 연탄재가 한번 되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